다시 태어나다 -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
수전 손택 지음,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 이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일기를 쓰는 것. 일기를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생각들을 담는 용기 -속을 터놓을 수 있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 문맹인 친구처럼- 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나는 그저 일기에다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솔직하게 나 자신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한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아아,)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많은 경우 - 그 대안을 제시한다. (p.213)


<다시 태어나다>는 세계적인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인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를 모아서 엮은 책이다. 그녀는 평생 동안 백여 권이 넘는 일기를 썼는데,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도 철저히 비밀로 부치다가 2004년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아들 데이비드 리프에게 일기의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 리프는 그녀의 일기를 모조리 태워버릴 생각도 했지만, 그녀가 죽기 전에 이미 모교인 UCLA에 일기를 팔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편집자로 참여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내밀한 이야기를 아들인 자신이 직접 읽는 것도 모자라 책으로 정리해 세상에 알리는 입장에 서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된다.


수전 손택의 일기는 총 3부작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1부 격인 이 책에는 1933년생인 그녀가 14세가 되던 1947년부터 30세가 되던 1963년까지 쓴 일기와 노트가 실려 있다. 나(1986년생)보다 반세기도 전에 태어난 인물인데, 열네살 때부터 지금의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서른 살까지의 삶이 너무나도 스펙타클하여 읽는 내내 놀라웠다. 그녀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이인) 열여섯 살 때 대학에 입학했고, (내가 대학에 입학한 나이인) 열아홉 살 때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나이인)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이혼한 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파리에서 동성애적인 성정체성을 재확인한 다음(대학 시절에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서구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왔다. 인생에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는 뭐든 나보다 한 단계씩 먼저 한 셈인데, 웃자란 만큼 그녀가 자아와 타인, 내면과 사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남들보다 배는 고생하고 괴로워했던 걸 보면 그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수전 손택은 어머니에게 연민과 증오라는 양면된 감정을 가졌다. 이른 대학 진학으로 인해 남들보다 빨리 청소년기를 마친 그녀는 대학에서 두 여인 - H와 아이린- 을 만나 동성애에 눈을 떴다. H는 즐겁지만 거칠었고 아이린은 아름답지만 유약했다. 그녀들로부터 도피하듯 선택한 결혼생활은 악몽이었다. 남편 그리고 결혼생활 자체의 속박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역시 도피하듯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다시 H를 만나 사귀었으나 파국을 맞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아이린을 만났다. 놀라운 점은 드라마틱할 정도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그녀의 사생활이 후에 그녀가 학자이자 작가로서 맞이하는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와 두 동성 애인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페미니즘에 눈을 떴고, 문학과 철학 그리고 사회를 보는 눈도 보다 깊어지고 독립적으로 바뀌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 또한 마르지 않았다. 책에는 그녀가 다방면으로 대량의 독서를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독서 리스트가 실려 있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책은 벽이고 요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발포하는 화기로도 전환할 수 있다. 내가 말을 걸어야 하는 벽 저편의 사람들 말이다." 라는 그녀의 말은, 그녀에게 독서란 그저 읽어치우는 행위가 아니라 관계의 결핍 또는 정서적인 갈증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기 생활에 대한 성찰과 다짐도 자주 엿보인다. 

녀가 스물두 살이 되던 1957년 1월 15일의 일기는 이렇다.

24살의 규칙과 의무들
1. 자세를 더 곧게 하라.
2. 일주일에 세 번 엄마에게 편지하라.
3. 더 적게 먹어라.
4. 적어도 하루에 두 시간은 글을 써라.
5. 브랜다이스(남편 필립이 사회학을 가르치던 브랜다이스 대학)나 돈 문제로 공공연히 불평하지 마라.
6. 데이비드(아들)에게 읽기를 가르쳐라. (p.166)


스물여덟 살이 되던 1961년 9월의 일기에는 이런 다짐이 실려있다.

1. 했던 말 또 하지 않기.
2. 재미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기.
3. 미소를 덜 짓고, 말수도 줄일 것. 역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미소를 지을 때는 진심으로 할 것.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을 믿고 진심으로 믿는 말만 하기. (하략) (p.364)


일주일에 세 번 엄마에게 편지할 것을 다짐할 만큼 어머니 생각이 깊고, 남편과 아들 걱정을 달고 살던 그녀가, 몇 년 사이에(아마도 이혼과 유학을 계기로) 했던 말 또 하지 않고, 재미있는 사람이 되려고 억지부리지 않기를 바라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거듭난 것이 인상적이다. 서른까지의 변화가 이토록 극적일진대, 그 후의 삶은 또 얼마나 다이내믹할까. 2부와 3부의 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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