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불온열전 - 미친 생각이 뱃속에서 나온다
정병욱 지음 / 역사비평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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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개인의 몸을 길들이는 여러 다양한 기법과 전술을 통틀어 '규율'이라 하는데, 규율에 주로 동원되는 세 가지 주요 수단이 관찰(감시), 제재, 시험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관찰이다. (중략) 학교는 학생의 마음과 방과 후 생활까지도 관찰하기 위해 일기를 쓰게 하고 제출토록 했다. 강상규는 두 종류의 일기를 썼다. 학교에 제출하는 '학생 일기'와 자신만 보는 '개인 일기'. 먼저 '개인 일기'를 쓰고, 그중 군데군데를 골라 일본어로 '학생 일기'를 적어 제출하는 식이었다. (중략) 이쯤이면 권력에 길들여져 '정상화'되는 개인과 다른, 자신을 스스로 주체화하는 개인을 상정해도 되지 않을까. 권력의 '규율화'에 맞서서 스스로를 '개체화'하는 개인. '개체화'도 관찰로부터 시작하며, 그 결과물이 '개인 일기'다." (pp.42-4)

 

"개인이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고 실현한다는 식으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근대사회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제반 조건을 만들고 이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노력을 경주한 것도 근대사회에 들어와서다. 근대 개인이 이러한 자아실현의 꿈을 키우고 그 실현 방법을 배우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위인전이다. 개항기나 일제 시기에 영웅전이나 위인전이 많이 읽혔던 것은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와도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p.30)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부교수로 재직 중인 정병욱이 쓴 <식민지 불온 열전>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에 의해 '불온'하다는 평가를 받은 여러 사람의 일생을 늘어 놓은 '열전'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을 다룬 책인 만큼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색채가 짙지만, 경성 유학생 강상규, 자소작농 김영배,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른 신설리(지금의 신설동) 패, 소학교 벽에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을 비난하는 낙서를 한 김창환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독립 운동'을 다룬 책이라서 새롭고 재미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상규에 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전라북도 옥구 출신인 그는 부농의 아버지를 두고 머리가 명석한 덕에 당시 최고 명문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학급에서는 부급장을 맡고 성적은 전교에서 5등에 드는 모범생이자 수재였다. 일제에 충성하는 관료나 기업가로 키워질 운명이었던 그는 사실 조선의 독립을 누구보다 열망하는 '불온' 청년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목적도 '적국 정찰'이었고, 친구를 사귈 때에도 독립 운동을 함께할 동지를 가르듯이 했다. 심지어는 급우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서 독립 운동을 함께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결국 그것이 발각되어 징역을 살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10대 후반의 소년이 어떻게 그토록 비밀스럽게 모범생과 불온 청년의 '이중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명문고 졸업생이자 엘리트로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체제에 반항하는 선택을 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강상규의 이중생활은 일기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일부러 두 개의 일기를 작성해서 스스로를 '공적인 자신'과 '사적인 자신'으로 구분했다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일제가 학생들의 생활과 생각까지 감시하려 했고, 그 수단이 일기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90년대에만 해도 일기 쓰기 숙제가 있었다. 저학년 때는 몰랐는데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내 글을 읽는다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고 숙제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학급 임원이자 모범생으로서 일기도 모범이 되게 써야한다는 '자기검열'이 그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그 후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어떤 글인지 보다 뚜렷하게 알게 되면서부터는 자기 검열을 덜 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인터넷에 올리는 글도 누군가에 의해 관찰되고 감시된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불편하다. 강상규는 진작에 일기의 의도를 알아채고 두 개의 일기를 썼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10대 후반의 소년 강상규로 하여금 일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이중생활을 이어가게 만든 동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가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동네 노인들로부터 유충렬전, 조웅전 같은 영웅전을 자주 들었다는 것을 든다. 영웅전 하면 보통 민족주의로 연결짓는데, 저자는 강상규의 경우 영웅전을 통해 민족주의뿐 아니라 개인주의도 키웠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개인주의 성향은 그로 하여금 독립운동에 바로 발을 들이지 않고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살아가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이러한 개인주의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이타주의로 나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강상규의 경우를 보면 회의적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해서 자기 이름을 날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판사가 왜 독립을 희망하는지 묻자 "훌륭한 정치가가 되고 싶고, 그러자면 조선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조선을 독립시켜야 된다고 생각한 주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도 "조선에서 내가 마음대로 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점을 하나의 이유로 댔다. 이때 민족은 입신출세와 자아실현의 장이다." (pp.80-1) 즉 독립 자체를 목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치가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독립운동을 택한 것인데, 이는 그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할 때에도 훌륭하게 일제에 전향한 모습을 보였고 출소 후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강상규라는 청년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것이라 새롭고, 저자의 분석에도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지만, 다 읽고나니 그 어떤 교훈이나 생각보다도 슬픔이라는 감정이 강하게 남는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기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이성에 눈을 뜨고, 밤새워 공부하고 놀기도 하면서 지내도 모자랄 그 시기에, 공적인 자신과 사적인 자신을 구분하며 비밀스럽게 살아간 그의 삶이 너무나 가엾고 불쌍하다. 또 한편으로는, 더 이상 어느 나라의 식민 치하가 아닌 지금도 모종의 권력이나 체제에 의해 길들여지고 억압되고 감시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국가 권력만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기업 권력, 학교 권력, 가정 권력, 사회 권력, 또래집단 권력 등 수없이 많은 권력의 지배에 노출되어 있다. '불온' 청년 강상규는 그것을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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