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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출간되자마자 사기는 했는데 읽을 엄두가 안 나서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주 전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듣는데 이 책을 다룰 것이라는 예고가 나왔다. 안 그래도 김중혁 작가님이 전부터 하루키 팬이라고 공언을 하셔서 이번 신작은 어떻게 읽으셨나 궁금했는데, 빨책에서 길게, 자세히 설명해주신다고 하니 하루키의 팬이자 중혁 작가님의 팬으로서 기대가 되었다. 반드시 책을 읽고나서 방송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읽었다. 그리고 오늘(8월 21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새로 업데이트된 방송을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동진 평론가님과 김중혁 작가님이 오랫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기는 했는데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2부로 미루시고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ㅠㅠ 빨책 1부는 낚시방송이라는 걸 잊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천천히 읽을 걸...... 만감이 교차했다. (2부 기대할게요!) 아무튼 여차저차하여 읽게 된 하루키의 신작이 이전 작품들에 비해 훨씬 쉽고 재미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줄거리도 제목에 제시된 정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절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영문도 모른채 내쳐진 경험이 있는 다자키 쓰쿠루라는 남자가 뒤늦게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순례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 소설의 전부다. 다자키 쓰쿠루는 왜 색채가 없을까? 색채가 뭘까? 왜 순례를 떠났을까? 등등 제목을 보고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의 답도 소설에 자세히 제시되어 있다. 하루키 소설, 많이 친절해졌다.
여느 소설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은 건 분명한데 왜 막상 서평을 쓰려고 하니 생각나는 점이 없는 걸까? 줄거리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의문이 드는 점이 없다. 단 하나 신경쓰이는 것은 '육손'이라는 개념이다. 소설에 여러번 등장하는 육손. 이것이 우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연도태 되었다는 점을 통해 작가는 어떤 개체가 아무리 뛰어난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시로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은 것처럼 말이다. 반면 시로와 달리 아카와 아오, 구로, 다자키 쓰쿠루는 어떤 식으로든 여섯번째 손가락을 잘라내고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그 손가락은 시로였을 수도 있고,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일 수도 있고, 친구들 그 자체일까?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성장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손가락처럼 귀한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라는 점은 알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육손을 택한 걸까? 그 점을 잘 모르겠다.
줄거리 외적인 부분에서는 신경쓰이는 부분이 참 많았다. 먼저 소설의 제목을 듣자마자 동생과 나는 라이트 노벨의 제목 같다는 얘기를 했다. 라이트 노벨이란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읽기 쉽게 쓴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일컫는 말인데, 9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상당히 높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도 라이트 노벨의 일종이다.) 라이트 노벨의 특징 중 하나는 제목이 '길어도 너무 길다'는 것이다. 아홉 자, 열 자만 되어도 긴데, 라이트 노벨 중에는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 됐다>, <문제아들이 이세계에서 온다는 모양인데요?> 등 스무 자에 가까운 제목을 가진 작품도 적지 않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역시 제목이 길어도 너무 길다. 게다가 소설에서 주인공이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을 보면 교복 차림의 소년, 소녀들이 풋풋한 우정과 사랑 비슷한 감정을 나누는 학원물, 청춘물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된다. 하루키가 라이트 노벨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그야말로 억측이겠지만, 독자로서는 정통파 소설가인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이런 장르문학적인 요소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소설의 주요 모티프가 색채라는 점 역시 신경쓰였다. 등장인물마다 빨강, 파랑 등 특정 색채가 부여되어 있다는 설정은 요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만화인 <쿠로코의 농구>를 연상시킨다. 이 만화는 등장인물마다 이름에 색채를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있고 심지어는 머리색까지 '깔맞춤'을 한 것으로 진작부터 유명했다. (인터넷에 많은 분들이 비슷한 글을 올리신 걸 보면 나만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닌 모양이다.) 사람마다 고유의 색채가 있다는 생각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몰라도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회자되어 왔다. 가령 에하라 히로유키라는 이름의 영능력자가 몇 년 전에 자신에게 사람의 고유한 색채, 즉 '오오라(aura의 일본식 표현)'를 보는 능력이 있다는 주장을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는 사람에게는 빨강, 파랑, 금색, 은색 등 다른 색깔의 오오라가 있는데, 이 오오라의 기운에 따라 개인의 능력이나 운명이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사람마다 고유의 색채가 있다는 설정을 보자마자 나는 에하라의 오오라 개념을 떠올렸다. 소설에서 이 개념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색채를 읽는다거나, 색채의 기운이 좋고 나쁨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바뀐다거나 하는 점은 영 관련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이밖에도 다자키 쓰쿠루를 전차 오타쿠로 설정한 점이라든가, 아카를 통해 자기계발 열풍에 대해 지적한 점 등 현대 일본사회의 대중문화와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킨 점이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재즈, 클래식 등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작가라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 소설에는 유난히 그런 흔적이 많았고, 그 중 대부분이 오타쿠라든가 (색깔로 대표되는) 영능력 같은 서브컬처라는 점은 주목해서 볼 만하지 않나 싶다. (그걸 다 알고 있는 나도 신기하고.) 그러고보니 이번 소설은 일본문화를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오랫동안 일본문화를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이 읽기에 참 좋은 소설인 것 같다. 그냥 줄거리만 보면 전체적으로 무난한 소설이지만, 일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방 도시 특유의 정서와 수도와의 정서 차이, 개인주의, 권태와 무관심 등 일본 사회의 특징적인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인공의 고향으로 설정된 나고야라는 도시는 오사카, 고베 같은 도시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 도시이며, '나고야죠'로 일컬어지는 나고야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수차례 나온다는 점도 의미심장했다. (신주쿠 역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90년대 미국이 일본 사회의 경직적인 문화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한 하루키의 해석 내지는 항변 같은 것도 신경쓰이는 부분이었다. 신경쓰이는 점은 많은데 나의 짧은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어렵고, 하루키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어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한다는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