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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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란 책을 통해 작가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통해 하루키라는 사람을 만나고, 김연수의 책을 통해 김연수라는 사람을 만나고 알게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단 한번도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다. 언젠가 꼭 만나뵙고 싶다.) 책을 읽으며 상상만 했던 작가의 실제 육성을 듣거나 모습을 보게 될 때는, 마치 펜팔 친구를 실제로 만나게 된 것처럼(그런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들뜨고 설렌다. 어제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김애란 작가의 육성을 처음으로 들었는데,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분위기나 이미지와 똑같아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오늘 아침에는 <EBS 북카페> '책과 사람' 코너에 게스트로 출연한 정유정 작가의 육성을 처음으로 들었다. 역시나, <7년의 밤>과 신작 <28>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시원시원하고 씩씩한 느낌 그대로였다. 어떤 질문에도 호탕하게 대답하고, 남성 작가, 여성 작가라는 불편한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을 쓰겠다는 의지도 좋았다. 정유정의 소설도 멋지지만, 정유정이라는 사람 자체도 매력적이었다.



정유정의 신작 <28>은 전작 <7년의 밤>에 비해 정유정이라는 '사람'의 모습이 더 많이 반영된 작품이다. 일단 저자의 살아온 이력 또는 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중심인물 중 하나인 간호사 '수진'은 실제로 간호사로 재직한 바 있는 작가의 경험이 투영된 인물로 볼 수 있고, 남편이 응급구조요원이었던 것, 지리산 고기리에서 집필한 경험 등도 반영이 되어있다. 저자가 전라도 광주 태생인 것 역시 반영이 된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불볕'이라는 뜻을 가진 '화양'이라는 가상 도시이고, 소설에서 그려지는 위기 상황 또한 '빨간 눈'이라고 불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인수공통전염병으로 인한 재난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역사 의식이라든지 정치색 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 상황이 벌어진 도시를 정부가 강제로 폐쇄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다든지, 정당한 주장을 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한다든지 하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저자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광주 태생으로서 체화된 경험들이 반영된 것 같다.


 

생명에 관한 소설이고, 궁극적으로는 선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도 저자의 관심사와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는 몇 년 전 구제역 발생 당시 가축들을 살처분하는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 동물의 권리라든가 생명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런 문제에 눈을 뜬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령 <7년의 밤>을 보면 아내와 자식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인격을 무시하며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 아버지의 모습은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소유물처럼 대하고 하대하며 심지어는 때리고 죽이는 인간들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인다. 생명을 가진 것들의 동등성이라든가, 악의 근원,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선의 힘에 대해서 논한다는 점 역시 저자의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주제들이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소설이지만, 다섯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개의 시선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각각의 시선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고, 서사 자체가 흥미진진하여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정유정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주제 의식이라든가 교훈성 같은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소설 역시 동물의 권리라든가, 선과 악, 인간성, 국민과 정부의 관계 등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주장한다든가 가르치려든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내가 소설보다는 비문학을 더 많이 읽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이러한 특징은 결국 소설의 본질 또는 역할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소설은 문장을 다루는 예술이고, 소설가의 역할은 이야기꾼인 바, 주제나 교훈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소설의 본질이고 소설가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정유정은 소설다운 소설을 쓰고, 소설가답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이 여름, 출판계의 위기와 책의 종말을 논하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유난히 많은 사랑을 받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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