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로 즐기는 세상
김민식 지음, 이우일 그림 / 행간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중고등학교 때 나의 꿈은 방송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 친구 따라 들어간 방송반에서 처음으로 PD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고, 고등학교 때에는 교지편집부 활동을 하면서 교양 PD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프로그램 중 하나가 MBC '!느낌표'의 '아시아 아시아'라는 코너였다. 그 때만 해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연예인들이 나와서 웃고 떠드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 코너를 보면서 어렵게 느껴지는 사회 이슈, 잊고 지내기 쉬운 역사 문제를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아예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꿈을 바꾸기는 했지만, 방송 프로듀서는 여전히 내게 매력적이고 좋은 직업으로 보인다.

 

 

PD라는 이름에 끌려 <낭만덕후 김민식 PD의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저자 김민식 님이 바로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아시아 아시아'를 만든 PD님이라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여 문과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의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이과에 진학했고, 1987년 한양대 자원공학과에 입학했다. 공대 수업에 재미를 못 느낀 저자는 책 읽기와 영어 공부에 몰두했고, 영업사원, 통번역대학원을 거쳐 1996년 MBC PD로 입사했다. 저자는 그 후 시트콤 <뉴논스톱>을 비롯하여, <!느낌표>, <일요일 일요일 밤에>, 드라마 <내조의 여왕> 등을 만들며 승승장구했다. <뉴논스톱>은 중학교 때 안 보면 간첩 취급 당했던 시트콤이다. <뉴논스톱> 끝나는 시간이 영어학원 시작하는 시간이라서 나는 사실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조인성의 왕팬인 친구가 영어학원을 지각하는 대신 끝까지 보고 와서 쉬는 시간마다 나한테 줄거리를 전부 말해주었고, 나는 다음날 학교에서 (마치 본방을 본 것처럼) 어제 줄거리를 아이들한테 들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했고, 대학에서는 학업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떠돌았던 저자는 겨우 들어간 회사도 금방 그만두었고, 통번역대학원에서는 재미삼아 번역을 하는 '고수'들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다가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을 만났다. "버스 요금 자동 정산기로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사라졌듯, 향후 30년 내에 자동 통역기가 나와 통역사 역시 사라질 것이다." 통번역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저자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해야한단 말인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직종은 창작자다. 지식의 2차 유통이나 재생산은 정보화 기기에 의해 대체될 수 있으나, 예술가나 미디어 창작자는 컴퓨터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이다." 그 때 마침 저자의 귀에 MBC 신입사원 모집 광고가 들렸고, 저자는 그렇게 PD가 되었다.

 

 

책에서 인생의 길을 찾은 저자는 그 후로도 책을 끼고 살았다. 점심시간이면 밥값 7천원과 커피값 5천원, 도합 만2천원으로 김밥 한 줄을 사먹고 남은 돈으로 책을 사 읽는다고 한다. 책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했을 만큼 영어 공부도 좋아하고, 애니메이션도 '덕후' 수준으로 좋아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남들이 어떻게 살든,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기. 이 정신은 의외로 잘 통했다. 면접을 봤다하면 무조건 통과. 연애도 잘했고 결혼도 잘했다. 회사 다니면서 일년에 한 번씩 여행도 했고, 이제는 소셜미디어에 푹 빠져 블로거로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라고,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못 이기고,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 못 이긴다. 그런데 저자는 알면서 좋아하고 즐기기까지 하니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고보면 저자와 내가 닮은 점이 꽤 있다. 일단 책 좋아하고 영어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미디어도 좋아하고 콘텐츠도 좋아한다. 무엇을 알게 되면 남한테 알려주고 싶어하고, 새로운 기술과 정보에 굉장히 민감하다. 겉보기엔 범생이고, 조직 생활도 잘 하지만, 사실 노는 것도 좋아하고, 튀는 것도 싫어하지 않고, 남들이 잘 모르고 희귀한 것일수록 빠져드는 - 일종의 '덕후심'도 있다. (책도 공부도 이제는 소수의 취향이고, 소셜 미디어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남들 다 마시는 술, 다 피우는 담배 안 하는 것도 어쩌면 '덕후심'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덕후라는 말, 안좋은 의미도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엔 이보다 더한 '존칭'이 없다. 살면서 팬도 아니고, 마니아도 아니고, 덕후로 불릴 만큼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한 일이 있는가? 게다가 그 대상이 남들이 모두 좋아하는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 소수 취향이고, 희귀하고, 때로는 금지된 것이라면? 남들은 욕을 하는데도 나는 미쳐버릴 만큼 좋아하는 마음. 그 마음을 잊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젊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님 연배가 되었을 때 내 모습이 이러했으면 좋겠다. 깨어있고, 즐겁고, 행복한 도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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