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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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몇 년 전에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당시 내 머리로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잘 안 되었고, 결정적으로 표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알고보니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열대>라는 작품이더군요...) 다 읽지 않은 채로 팔아버렸다. 그러다가 몇 달 전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동진 평론가님과 김중혁 작가님이 닳을 정도로 이 책을 읽으셨다는 말을 듣고 다시 구입해서 읽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두 분으로부터 책에 대한 해설과 감상을 듣고난 뒤라서 그런지 전처럼 책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푹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의 배경은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사건 무렵이다. 학교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는데, 요즘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읽으면서 이 사건이 국제 정세 및 체코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새삼 깨닫고 있다. (요네하라 마리는 프라하의 소비에트계 초등학교에 다녔고 '프라하의 봄' 이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냉전 시대, 소련군은 민주화를 부르짖는 프라하의 청춘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꿈꿀 수 없는 시대. 일도, 사랑도 개인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시대. 시대적 배경의 무거움이 소설 속 인물들의 존재를 더욱 가볍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그저 시대를 탓하고 스스로를 무력하게만 여겼던 것은 아니다. 비록 개인의 대화가 비밀경찰에 의해 도청되고 당국의 명령을 거부하면 의사 자격증이 있어도 의사로 일할 수 없을만큼 '세상이 집단수용소로 바뀌었'지만(p.210),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인생을 개척하고 사랑을 한다.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p.275)이 판치는 세상에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p.382)만이 존재하고 '키치'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다른 길,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토마시다. 소설에서 토마시는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타고난 바람둥이로 그려지지만, 사실 그에게도 나름의 철학이 있고 지향하는 바가 있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p.308) 그렇다. 토마시가 여자를 만나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라는 공통분모를 지우면 남는, 그녀만의 고유한 자아를 찾기 위함이었다. 이 소설이 결국 전체주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을 기저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토마시라는 캐릭터는 더욱 빛이 난다. 이런 이해가 없었더라면 그저 그를 테레자를 괴롭게 만든 바람둥이로만 기억했겠지?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을 이 책을 읽을 때만큼 절실히 공감한 적이 없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들은 이야기와 요네하라 마리의 책에서 알게 된 정보가 없었더라면 이 책을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 것 같다. 앞으로 다양한 텍스트를 접하고 더 깊게 공부해서 이 소설을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마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 또한번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이 바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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