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네다섯살 때, 내가 하도 질문을 많이 해서 지친(또는 지겨웠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 퇴근길에 선물 하나를 사오셨다.   

 

 

 

 

 

 

  

 

  

그것은 바로 국어사전. 어린이용으로 나온 사전으로 이름이 '동아새국어사전'인가 그랬는데, 사전을 주시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지 말고 사전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얼마나 말을 잘 듣는 딸이었던지, 그 후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질문이라는 걸 한 적이 없다ㅎㅎ 

어린 딸이 질문을 하면 얼마나 많이 한다고 사전을 사주시면서까지 '절대 물어보지 말라'고 하셨는지 야속한 마음도 들기는 하지만, (사전인데도) 매일 정독하다가 나중엔 다 닳아 버렸을만큼 그 사전이 참 좋았고, 덕분에 혼자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살면서 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은 것이 손에 꼽을 정도다. (물론 지금까지도 다 큰 딸을 보살펴주시니 따로 선물을 바라면 욕심이 되겠지만...) 울 아버지가 재밌는 걸 봐도 앞에서 안 웃고 나중에 화장실 가서 웃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무뚝뚝한 '충청도 양반'이셔서 가족들한테 애정 표현을 잘 하시는 편은 아니다.  

국어사전 빼고 가장 기억나는 선물은 대학교 입학할 때 받은 영어 동영상강의 수강권이다.   

고3 겨울이 참 힘들었다. 그해 여름 수시에 연거푸 떨어진 뒤, 학교보다 전공을 봐서 나름 괜찮은 학교에 합격했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대학에 갔다고 선생님들은 반수나 재수를 권했고, 어머니도 많이 아쉬워하셨다. (어느 정도였냐면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축하한다고 말해준 사람은 절친한 친구 한명 뿐이었다. 2년 후 동생이 나와 같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겨우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하셨다.) 정시나 추합으로 나보다 등수가 낮았던 친구들이 더 좋은 학교에 합격하는 걸 보면서 내가 정말 잘못 선택했나 싶어 괴롭기도 했다.   

어쩔줄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그 때, 내가 주문하지도 않은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영어 동영상강의 수강권과 패키지로 포함된 mp3 player가 들어있었다. 동시통역사 태인영 씨가 진행하는 CNN 영어청취 동영상 강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꼭 꿈을 이루라는 아버지의 뜻이 담긴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도 같이 주셨다.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내(블랙라빗)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공부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니까 그냥 아무 직장에 들어가서 남들처럼 살았으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사실 아버지도 직장 다니면서 9년 동안 공부하신 끝에 국가고시에 합격한 분이라서 수험생활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딸은 그런 야망 없이 편하게 돈벌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누구보다 그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난 동생보다도 더 아버지를 닮은, 영락없는 아버지 딸. 질문의 답을 찾아 사전을 뒤적이고, 들리지 않는 단어를 들으려고 영어뉴스를 수십, 수백번 반복해서 들어야할지라도 해야 하는 건 꼭 해내고만다.    

(아버지 생각에도 정말 아니다 싶은 길은 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동생 대입 때 어머니 반대로 애니고에 못 갔으니 대학만큼은 꼭 만화 관련 학과로 가라고 - 여느 부모님들과는 다르게 - 주장하셨던 분이 울 아버지다. 결국 동생이 선택할 수 있는 학과 중에서 그나마 예술성을 살릴 수 있는 학과를 고르는 것으로 대안을 찾기는 했지만, 여전히 동생이 만화가가 되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남이 도와주지 않아도,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하고 싶은 것은 꼭 해내고야 마는 것.
이것이 아버지가 나에게 꼭 가르쳐주고 싶었던 인생의 교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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