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London Voice - 삶은 여행… 두 번째 이야기
이상은 지음, 신정아 사진 / 북노마드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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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상은이 좋다. 이 분 음악을 많이 들어본 것도 아니고, 88년 강변가요제 대상곡인 '담다디'는 그 때 고작 두 살이었던지라 잘 알지도 못한다. 맨처음 좋아하게 된 노래는 아마도 <비밀의 화원>. 스무살 무렵 교정하느라 한창 치과에 다녔는데, 치과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몇 번이나 이 노래가 나왔다. 우연치고는 너무 자주 나와서 '이 노래가 나랑 무슨 인연이 있나?' 싶었을 정도.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노래도 많이 나왔는데 내가 유독 이 노래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때부터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어 한동안 참 많이도 들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에서는 찾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 서정적인 가사가 좋았다.

 

이상은이라는 뮤지션을 좋아하게 된 건 그보다 후의 일이다. 집에 있다 보면 적적해서 배경음악처럼 라디오를 틀어 놓곤 하는데, 어느날 주파수를 돌리다가 <이상은의 골든디스크>라는 방송이 잡혔다. 그 때가 마침 새로운 음악 없나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 프로그램은 좋아하는 올드팝부터 최신 외국 음악, 세계음악 등 다양한 노래가 나와서 좋았다. 진행스타일도 좋았다. 말투는 털털하지만, 말하는 내용이나 느낌은 조심스럽고 차분했다. 나도 그녀 나이쯤 되면 이렇게 때묻지 않은 느낌으로 음악 얘기, 사는 얘기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London voice는 딱 이상은 같은 느낌의 여행기다. 작은 것 하나에 유난히 감동하기도 하고, 오노 요코처럼 그녀가 무진장 좋아하는 화두에는 열정적으로 달려든 여행의 기록들이다. 그래서 그녀의 팬으로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고, 읽고나니 그녀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런던은 이상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도시라고 한다. 8년 전 미술을 배우는 유학생 신분으로 왔다가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린 후 도망치듯 떠났던, 아픈 추억이 서려있는 땅. 그래서인지 첫부분부터 다시 런던땅을 밟는 설렘, 과거의 자신과 재회하는 두려움이 엿보였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찾은 런던은, 전처럼 춥고 싸늘하고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는 예술의 의미를 알고 싶어 번민하는 처지여서 도시마저도 스산하고 쓸쓸하게 보였지만, 이제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보헤미안 뮤지션이자 자유인이기 때문에 보는 느낌도 달라졌나보다. 만약 지금 내가 런던 땅을 밟는다면 어떤 느낌으로 보일까? 여행은 외부의 것이 아닌, 내 안의 것을 새롭게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녀의 경우를 보니 정말 맞는 것 같다.

 

 

8년 후 다시 런던을 찾아야 할지 꽤 많은 고민을 했다. 8년 전 아쉽게 떠나왔던 곳이기에 꼭 한번 다시 오고는 싶었지만 망설여졌다. 사랑에 다친 사람이 다음 사람을 겁내듯이, 또 같은 상처를 입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떠났다. 다행이다.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피곤하기만 했던 내가 편안하게 웃을 줄도 알고, 무엇보다 자주 웃고 있으니까. 내 모습이 어떻게 변했을지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변했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 확신을 믿었고, 난 지금 런던이다. (pp.102-3)


여행지뿐 아니라 그곳의 음악, 미술, 그리고 그녀 주변의 이야기 등등 많은 주제가 화제로 등장한다. 음악과 미술은 그녀의 전문분야니까 빼놓을 수 없는 주제. 하지만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을 비롯하여 그녀 주변사람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부분은 살짝 놀랐다. 하긴 나도 어떤 그림이나 어떤 장면을 보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그녀에게도 그런 추억들이 있을터. 그때만큼은 아티스트로서의 옷을 벗고, 주변인들에게 편안하게 이런저런 바람들을 늘어놓는 느낌이 편하고 재미있었다.

 

영국 미술과 음악의 좋은 점, 우리나라 인디씬에 대한 기대, 더욱 우호적이고 풍성한 문화적 토양이 형성되었으면 하는 소망 등등, 단순히 여행의 감상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녀만의 세심한 감성과 독특한 관점으로 보고 느낀 것들을 에세이처럼 쓴 부분도 좋았다. 다른 이가 하면 빈말 같고 듣기 좋은 말로만 들릴 것도, 이상은은 몸소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와닿았다. 왜 다 똑같은 노래를 듣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모습의 어른이 되는 걸까? 난 남들에 비해 얼마나 다르고 개성적으로 살고 있을까? 그녀를 보면 이런 내면의 소리(voice)들이 날 파고들고 반성하게 되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다. 밑줄 한 번 긋고 반성하고...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책 (일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영국의 풍부한 상식)에서 인상 깊었던 건, 영국에서 사람들을 나누는 기준이 '돈'이 아닌 성격과 취미, 취향, 흥미라는 것이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말을 전적으로 신봉할 수는 없겠지만, 나이와 직업을 뛰어 넘어 누구나 자신의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사회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참, 이런 대목도 있었다. (일본이나 우리처럼) "나는 어떤 회사에 다니는 누구입니다" 식으로 자신의 학력과 경제력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처럼 자신의 '계급'을 여전히 강조하는 사회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나는 남미에서 수입한 유기농으로 재배한 커피를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처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자기소개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예찬하는 부분이 참 끌렸던 게 생각난다.

어쩌면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도 똑같다. 내 이야기를 음악에 담고, 은근슬쩍 그렇게 나를 드러내고 싶었다. 직접적으로 내 이야기를 담은 노래는 아니지만, 가사 하나하나에서 내가 느껴지는 음악이 필요했다. 그런 음악이 좋았다. 내 작은 일부라도 음악에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음악을 하는 이유다. 세상이 정해 놓은 '영토'에서 아등바등하며 살기보다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우리네 삶도 한층 풍성해지리라. 그것이야말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pp.116-7)


나의 하찮은 재주로 어떤 글이야 쓰기가 쉽겠냐마는, 여행기는 감상을 글로 쓰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이 책도 읽은지 일주일 정도 되었는데, 감상문을 몇 번이나 썼다 지웠는지 모른다. 뭘 알리고 남을 설득하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감상을 남기는 건데도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상은을 보면 언제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음악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서 멋지다. 나도 나만의 삶, 내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녀를 보면, 그녀의 음악을 들으면, 그녀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이상은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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