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곧바로 재료를 넣은 스테인리스 볼을 얼음물 안에 넣고, 그 안에서 거품기를 있는 힘껏 재빨리 돌렸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크고 작은 별들이 잔뜩 떠서 말없이 반짝이고 있다.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메어오고, 금방이라도 호흡 곤란으로 죽어버릴 것 같을 만큼 행복했다. 이런 식으로 넓은 하늘 아래에서 누군가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자신의 모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다. 더욱이나 이렇게 빨리, 오랜 세월 품어왔던 꿈이 이루어질 줄이야...... 거품기를 움직이는 소리가 사각사각 음악처럼 어둠 속에 울렸다. 도중에 넣은 럼주의 좋은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p.93)

  

가쿠타 미쓰요의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읽은지 얼마 안 되어 연이어서 일본소설을 읽게 되었다. 일본소설이 요즘 나와 파장이 잘 맞나보다. 요리, 음식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생이 꼭 읽어보라고 '강추'한 책답게 음식 냄새가 폴폴 풍기는 귀엽고 상큼한 소설이었다. 딱 요즘처럼 봄바람 살살 부는 계절에 읽으면 좋겠다.

 

<달팽이 식당>에는 린코라는 이름의, 내 또래의 젊은 여자가 나온다. 인도인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유일하게 의지했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그 충격 때문인지 말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무엇하나 되는 일이 없으니 가출하고 십여년을 산 도쿄를 벗어나 잠깐 고향에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잠깐' 다녀올 예정이었던 고향에서 린코는 새로운 인생을 찾는다. 엄마의 집 창고를 빌리고,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고향 땅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를 요리하여 하루 단 한 팀을 위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달팽이 식당'을 열게 된 것이다. 게다가 린코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꿈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퍼져 식당은 대성황을 이룬다. 

 

 
린코에게는 아주 소중한 장점이 있다. 고향을 떠나 십 여년 동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배우고, 사랑하는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요리 실력과 열정, 그리고 자신의 음식을 먹은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린코가 메뉴를 구상하고 신나게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열정에 내 몸까지 들썩들썩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향에 돌아와 요리사의 꿈을 이뤘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린코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신은 얄궂게도 인간의 행복이 정점에 달했을 때 다른 곳에 불행을 예비하시는 것 같다. 린코에게도 신은 공평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린코는 달팽이처럼 천천히 슬픔을 꾸역꾸역 씹고 삼키고 소화했다. 그리고 다시 달팽이 식당을 오픈했다.

 


<달팽이 식당>은 일본에서 20대 여성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시바사키 코우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린코처럼 세상의 압력에 눌리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린코는 내성적인 인간의 전형과도 같다. 주변 사람은 가족과 연인, 이웃뿐이고, 생각은 많지만 표현은 잘 못한다. 실연을 당하자마자 말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 달팽이처럼 자기 만의 공간으로 칩거한 것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다. 괜히 린코가 식당 이름을 '달팽이'라고 지은 것이 아니다. 달팽이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못해 꾸물꾸물 움직이고, 여차하면 자기만의 집으로 숨는 녀석이 아닌가.

 

하지만 달팽이는 천천히, 여유롭게 세상을 즐기고, 고집스럽게 자기 목적을 달성해나가는 은근한 야심가다. 린코도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손수 만든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녀의 뜻대로 행복해졌다. (내성적인 사람을 조심하라!) 외향적인 사람들은 다른 이가 만든 행복을 취함으로써 행복해지지만, 내성적인 사람들은 직접 행복을 만든다. 나답게 사는 것, 부정하고 싶은 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 그것이 린코, 달팽이, 그리고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들의 좋은점이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인 린코가 만든 음식이니 맛있는게 당연하다. 석류 카레, 쥬뗌므 수프, 옥돔과 가리비 요리... 아, 군침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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