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평점 :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끝없이 반복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사건으로 인해 결코 전과 같은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무수히 봐왔다. 일본 작가 유즈키 유코의 소설 <지지 않는 벚꽃>의 주인공 '모리구치 이즈미'의 경우도 그렇다. 인구 200만이 조금 못 되는 요네자키현 출신인 이즈미는 도쿄에 있는 의류 회사에 다니다 현재는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현경(경찰) 홍보과 직원으로 재직 중이다. 자신이 원해서 한 결정이었지만 도쿄에 비하면 자극은 부족하고 사생활 보장은 안 되는 생활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지던 차에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경찰의 부실 대응으로 한 여대생이 목숨을 잃으면서 요네자키 현경이 전국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된 것이다.
쇄도하는 민원 때문에 밥 먹을 시간도 없는 것도 문제지만 이즈미에게는 더 큰 고민이 있다. 아무래도 경찰의 비밀을 언론에 흘린 범인이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보도가 나기 전에 이즈미는 지역 신문사 기자인 친구 '쓰무라 지카'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기도 모르게 얼마 전 경찰이 워크숍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말해버렸다. 실수를 깨닫고 지카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절대 기사로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얼마 후 기사가 나왔고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다. 지카는 자신이 쓴 기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즈미는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얼마 후 지카가 시체로 발견되고, 이즈미는 지카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진범을 알아내기 위해 신문사까지 쉬면서 단독으로 취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카를 믿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지카가 목숨과 바꾼 진실을 알아내야 할 책임감으로, 이즈미는 경찰 학교 동기인 형사 '이소카와 슌이치'(워크숍 이야기를 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와 함께 경찰 조직과 별개로 수사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에서 젊은 여자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잇달아 죽다니 너무 무서웠고, 이렇게 좀처럼 있기 힘든 상황이 일어났는데도 이상함을 인식하지 못한(않은?) 경찰 조직의 무능함(게으름?) 또한 끔찍했다. 경찰이 이렇게 시민들의 안전에 무감하고 무능할 수 있었던 이유가 후반에 밝혀지는데, 이 또한 남의 나라 일같지 않아서 섬뜩했다.
이 소설은 경찰이 배경인 소설에서는 드물게 여성이 주인공인 데다가, 여성인 주인공이 여성(들)을 위해 수사하고 다른 여성들이 그 여성을 도와주는 - '여적여'가 아닌 '여돕여'를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소설에 그려진 경찰 조직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 같은 직원인데 차 내오기나 사무실 정리, 설거지 같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져 왔던 잡무는 전부 여성 직원들의 몫이다. 남성인 상사가 여성인 부하 직원에게 성차별, 성희롱에 가까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일도 왕왕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 속 여성들은 대놓고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본 것, 들은 것, 아는 것들을 공유하고 활용해 궁극적으로 서로를 돕는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건 이즈미와 지카의 우정이다. 이즈미에게 결백함을 증명하려다 목숨까지 잃은 지카와, 지카의 결백함을 믿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위험한 수사에 발벗고 나선 이즈미.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다른 소설에선 본 적이 없다(그에 비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 사이의 충직함과 의리란...). 오랫동안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져 왔던 충직함과 의리가 여성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걸(어쩌면 더 낫다는 걸) 보여줘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