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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2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월
평점 :

292쪽 짜리 책에 1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요즘 나오는 소설집에 비해 작품 수가 많고 그만큼 작품 당 길이가 짧은데, 한 편 한 편이 주는 인상이나 담고 있는 메시지는 훨씬 더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로맹 가리, 로맹 가리 하는구나 싶었다. 다른 책들도 찾아 읽을 예정이다.
대부분의 작품에 전쟁 중의 파괴와 공포, 전후의 불안과 혼돈이 나타나 있다.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전쟁을 피해 페루의 한 해변으로 도망쳐 온 남자 레니에가 자신처럼 해변으로 도망쳐 온 여자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온 여자는 이곳에서도 남자들의 강간 위협에 시달린다. 도망쳐온 곳에도 천국은 없다는 씁쓸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치를 피해 은신처에 숨은 유대인과 그를 도와주는 이야기를 그린 <어떤 휴머니스트>,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독일군과 손잡고 마을을 폭파시킬 계획을 세운 루마니아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고상함과 위대함>, 어떤 남자가 전쟁 중 남자들에게 강간 당한 여자를 차에 태워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지상의 주인들> 등도 그러하다.
전후의 세태를 담은 작품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자유의 몸이 된 쇼넨바움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볼리비아에서 우연히 옛 친구 글루크만과 재회한다. 쇼넨바움은 자신을 피하는 글루크만에게 의문을 품고 있다가 어느 날 글루크만의 뒤를 밟고 그의 비밀을 알게 된다. 수용소 시절 그들을 잔인하게 괴롭혔던 독일인 간수가 이곳에 와 있고, 글루크만은 매일 밤 그에게 밥을 가져다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를 묻는 쇼넨바움에게 글루크만은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끝났다 한들 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에 간수에게 잘해주는 거라고 답한다. 폭력이 어떤 식으로 사람의 영혼을 장악하고 그 영향이 오래 가는지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인간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지를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류트>는 외교관을 그만두고 예술가가 되고 싶은 남자와 그런 남편을 말리고 싶은 아내의 이야기를 그린다. <가짜>는 자신이 산 고흐 그림이 가짜라는 말을 듣던 남자가 아내의 코 성형 사실을 알고 이혼을 고민하는 이야기이다. 옆방에 사는 여자를 짝사랑하는 남자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자살을 결심하는 이야기인 <벽>,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세계 일주를 떠난 남자의 진실을 밝히는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실제로 겪은 일만 소설에 써야 한다는 말에 설득 당해 고래잡이를 떠난 소설가가 죽다 살아난 과정을 그린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등은 인간의 모순과 위선, 어리석음, 허세, 대책 없음 등을 풍적으로 보여준다.
비슷한 결의 작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이다. 이 소설에서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 자본주의에 지친 주인공은 인간의 순수함이 아직 많이 남아 있고 돈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여겨지는 작은 섬으로 떠난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고갱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으로 짐작되는 그림들을 보게 되고, 그러자 자연히 이 그림들을 가지고 도시로 돌아가서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망이 생겨 난다. 그의 욕망은 이 섬이 간직한 어떤 비밀이 드러나서 산산이 깨지는데, 정말이지 내 마음이 다 아팠다. 아니 통쾌했다고 해야 하나.
비현실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거나 미래를 상상한 작품들도 있다. 마차를 끄는 마부가 전부 비둘기인 세계를 그린 <비둘기 시인>, 방사선에 의한 인간 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신인류가 출현한 세계를 그린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등이 그렇다. 재미있는 점은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로 대체된 세계를 작가는 부정적,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 낙관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때 이미 작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회의 또는 환멸이 깊은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