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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3월
평점 :
의사에게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나 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이 상황을,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미야노 마키코는 실제로 겪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실제로 사망했다.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일본의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가 주고 받은 스무 통의 편지를 엮은 책이다.
말기 암 환자였던 미야노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살 날이 많지 않다는 말을 들은 그는 혹시라도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주변에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속히 주변을 정리하고 약속한 일정들을 취소했다. 그 중 하나가 어떤 강연이었는데, 전화를 받은 강연의 주최자가 사연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바로 죽는 게 아니다. 암 환자인 당신보다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약속한 강연을 강행하라. 그 말을 들은 미야노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고, 주최자의 말대로 취소를 취소해 강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의 선택을 바꾼 주최자가 바로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이 시작된 계기다.
내가 이소노 마호라면, 자기 입으로 당신보다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는 했어도, 말기 암 환자와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두 사람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암이나 죽음 같은 주제가 워낙 무겁기도 하고 미야노의 병세가 급속도로 나빠져서, 이 편지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계속될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노가 편지 교환을 한 이유는, 아마도 의료인류학자로서 죽음을 앞둔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이 궁금한 것과, 마침 그 대상이 20년 넘게 철학을 공부한 철학자라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학문적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은 (당연하게도) 단순한 안부 전달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 편지에서 미야노는 하이데거의 문장 "죽음은 분명히 다가온다.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를 언급하면서, 모든 인간은 죽지만 죽는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미래가 현재를 지배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언제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같은 말도 현재(삶)가 아닌 미래(죽음)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며, 이는 현재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제한한다. 이런 식의 철학적 논의뿐 아니라, 실제 의료 현장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환자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환자를 대해야 하는지(이를테면 어떤 약이 좋다더라, 어느 병원 의사가 용하다더라 같은 정보 제공) 등 실용적인 조언도 나온다.
이 책은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최근에 일본의 영화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이 이 책을 원작으로 한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구입해 읽었다. 하마구치가 이 책의 어떤 점에 매료되어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우연과 필연, 만남과 헤어짐, 선택과 운명 등 그가 자신의 영화에서 이야기했던 주요 키워드들이 이 책에도 등장해 그가 책을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 책의 내용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었을지 기대가 커졌다. 얼른 공개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