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실의 기도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5
샬럿 우드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9월
평점 :

현재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것이지만, 가끔은 현재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호주의 작가 샬럿 우드의 장편 소설 <상실의 기도>의 주인공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환경운동가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중년 여성인 '나'는 언제부터인가 번아웃 비슷한 증상을 겪다가 부모님이 묻힌 묘지 근처의 수녀원에 들어간다. '나'가 잠깐 쉬어가는 장소로 다른 곳도 아닌 수녀원을 택한 건, '나'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가톨릭뿐 아니라 종교라는 개념 자체 대해 회의적인 입장인데, 자신의 기분과 다르게 명랑하고 유쾌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는 여행지나 휴양지보다는 공간 자체가 조용하고 엄숙하며 방문객에게도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하는 수녀원이 자신에게 잘 맞을 것 같아서 그곳을 택했다.
그리하여 들어간 수녀원에서 '나'는 초반에는 전부터 상상하고 기대한 대로 조용하고 엄숙한 생활을 한다.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를 하고 약간의 음식을 먹고 묵상하고 산책하고 또 약간의 음식을 먹고 기도하면서, 수녀는 아니지만 수녀처럼, 수도자는 아니지만 수도자처럼 지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생활에 적응되고 만나면 인사하고 대화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수녀원에서 보내는 일상에 조금씩 잡음이 끼어든다. 여기에 연달아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기억, 자신을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 오랫동안 열정을 바쳤던 환경운동에 대한 회의, 인류 전체를 사랑한다면서 인류의 절반인 여자는 억압하는 종교에 대한 반감 등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나'가 기대한 치유나 회복 등은 점점 먼 일이 된다. 결국 '나'는 아쉬운 마음을 품은 채로 수녀원을 떠난다. 그후에도 '나'는 힘들 때마다 수녀원을 찾는다.
소설은 총 3부에 걸쳐 세 번의 수녀원 방문을 그리는데, 매번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해 '나'의 기대를 배반한다. 특히 쥐 떼가 창궐해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심지어 수녀님들조차도)이 힘을 합쳐 쥐를 잡는 장면과, 태국에서 학대 당하는 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다 실종된 여성의 유해가 송환되는 일 때문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거의 호러 스릴러 소설, 아니 호러 스릴러 영화 같았다. 특히 후자의 사건에서 '나'는 우연히 자신이 학창 시절에 가담한 학교 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재회하게 되는데, 오랫동안 그 일을 후회해 왔다며 용서를 구하는 '나'에게 피해자가 보인 반응이 참 인상적이었다. 어떤 가해는 피해자가 먼저 잊을 수도 있고, 그래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