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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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끝없는 소멸과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일본 작가 오가와 요코가 1994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은밀한 결정>은 소멸과 상실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전제한다. 


어떤 섬이 있다. 이 섬에선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주기적으로 어떤 단어가 소멸된다. 그러면 얼마 후 사람들은 소멸된 단어는 물론 그 단어와 관련된 기억까지 잊게 된다. 잊지 않았다는 것을 비밀경찰에게 들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소설가인 '나'는 어머니를 그렇게 잃었고 연이어 아버지도 잃었다. 자신처럼 가족을 잃고 페리마저 잃은 할아버지와 의지하며 지내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나'가 살아가는 이유는 현재 작업 중인 소설을 마치는 것인데, 어느 날 자신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고 평가해 주는 편집자 R씨가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R씨마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집 안에 은신처를 만들고 R씨를 그곳에 살게 한다.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고 이동이 제한되는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언젠가 R씨가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지만 단어의 소멸은 계속되고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비밀경찰들의 추적과 탄압은 점점 더 심해진다. 하루라도 빨리 소설을 완성하고 싶지만 단어가 사라지고 그에 관한 기억도 사라지면서 완성은 점점 더 요원한 일이 된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단어와 기억이 사라진다는, SF 같기도 하고 판타지 소설 같기도 한 설정이지만, 실제로 외세에 의해 모국어 사용을 금지 당하고 역사라는 공적 기억을 제거 당한 이력이 있는 나라의 일원으로서 소설 속 상황이 허황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외세가 아니어도 요즘 보면 유행이나 기술의 변화 등의 이유로 원래 쓰던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거나 단어 자체가 사어(死語)가 되는 경우가 흔해서 '나'가 겪는 불안이나 혼란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를테면 두쫀쿠가 그렇다. 한동안 하루에도 몇십 번씩 그 이름을 들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안 한다. 사실상 소멸 아닌가...) 


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30년도 훨씬 전인 1994년에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2019년 영문판이 출간되면서 국제적으로 재조명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영문판 출간 이후 공교롭게도 전 지구적으로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그전에는 자유롭게 했던 활동들을 제한 또는 금지 당하는 상황을 겪으며 많은 독자들이 소설 속 상황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덕분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저자는 미래를 예상하고 쓴 소설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과거를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역시 미래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사건은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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