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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연습
수잔 최 지음, 공경희 옮김 / 왼쪽주머니 / 2020년 11월
평점 :
'한국계 최초 전미도서상 수상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에 혹해 구입한 책이다. 내가 늘 그렇듯이 사놓고 몇 년을 안 읽다가 최근에 대대적으로 책장 정리를 하면서 이 책을 처분할까 말까 고민하다 50페이지만 읽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근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결국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약간 막장 드라마 같은 느낌이 없지 않은데, 소설의 형식이나 구성이 특이해서 읽는 동안에는 막장 드라마 같다는 생각은 안 들었고 오히려 실험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특히 연애의 과정을 연극 수업에 빗댄 대목들이 좋았다.
소설은 세 파트로 구성된다. 첫 번째 파트는 1980년대 미국 남부의 한 예술고등학교 연극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사는 세라는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연기의 재능을 인정 받아 어렵게 이 학교에 입학했다. 연극반을 지도하는 킹슬리 선생은 세라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신뢰 연습'이라는 수업을 진행하고, 이 수업에서 세라는 데이비드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10대 답게 학교와 서로의 집을 오가며 풋풋한 연애를 한다. 하지만 킹슬리 선생의 초청으로 영국의 연극단이 학교를 방문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두 번째 파트는 30대가 된 세라의 친구 캐런이 작가가 된 친구 세라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그린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세라는 작가가 되어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책으로 썼는데 아마도 그 책의 내용이 첫 번째 파트인 것 같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서로를 보고 반가워 하면서도 내심 불편함을 느끼는데 그건 서로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함께 잘못을 저지른 남자들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반면 여자들만 대가를 치른다는 것인데, 그에 대한 응징 내지는 처벌이 세 번째 파트에서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이 <신뢰 연습>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물론 소설 속에 신뢰 수업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연극 훈련 방법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연극뿐 아니라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는 신뢰가 필요하고 그것을 연습하는 과정이 곧 성장인데, 남성 중심 사회 내에서 여성은 어릴 때부터 (친족 포함) 남성을 신뢰하지 않도록 교육 받고, 신뢰에 대한 책임은 (남성이 원인 제공자인 경우에도) 여성이 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란다. 남성 또한 여성을 신뢰하지 않도록 교육 받지만(꽃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여성을 신뢰한 남성이 치르는 대가와 남성을 신뢰한 여성이 치르는 대가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차이가 크다.
이 소설을 읽고 생각이 난 작품이 있는데 일본 작가 츠지무라 미즈키가 2015년에 발표한 소설 <아침이 온다>이다. 이 소설에는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한 히카리라는 소녀가 나온다. 히카리는 아직 아이인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도 무서운데, 자식을 보호하기는커녕 네 잘못이니 네가 책임지라는 식으로 나오는 부모와 똑같이 관계를 가지고도 책임을 지지 않는(오히려 피해자처럼 구는) 남자친구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당한다. 이것이 여자가 남자를, 섹스와 임신을 선택했을 때 치를 수도 있는 대가라면 누가 그것을 할까. 요즘의 비연애 비섹스 비출산 트렌드는 결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