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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어느덧 마흔 가까운 나이가 되고 보니 인생은 뭐가 뭔지 모르고 정신없이 사는 시기와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며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기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요즘 나는 후자의 시기를 겪고 있는데, 십 대 때부터 지금까지 그야말로 내 정신을 쏙 빼놓고 동시에 내 정신을 성숙하게 했던 사람들,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나란 인간이 얼마나 가볍고 미숙하고 어리석고 혼란스러웠는지 절절하게 깨닫는 중이다.
<내 여자의 열매>는 2000년에 출간된 한강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첫 번째 소설집 <여수의 사랑>이 가족이나 집,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 절망감을 주로 그린다면, <내 여자의 열매>는 이른바 정상적, 보편적,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삶에서 이상함 또는 이질감을 느끼고, 그리하여 남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이고 특수하게 보이는 삶을 지향하게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린다. 대표적인 예가 표제작 <내 여자의 열매>이다.
소설 속 남편은 열심히 돈 벌어서 하루 빨리 서울에 집을 사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의 인간이다. 얼마 전 그는 도로변에 있어서 소음이 심하지만 시세 차익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이제까지 군말 없이 자신을 따라왔던 아내가 집이 마음에 안 든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아내는 점점 말수가 줄고 성격이 예민해지더니 몸에 원인 불명의 멍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급기야 자신이 식물이라며 하루 종일 창가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아내. 남편은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제25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 <아기 부처>의 내용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프리랜서 삽화가인 여자의 남편은 아홉 시 뉴스를 진행하는 인기 앵커다. 남들이 선망하는 남자와 부러워할 만한 결혼을 했지만, 사실 여자의 삶은 남들의 상상만큼 행복하지 않다. 결혼 전 남편이 보여준, 남편 몸에 크게 난 화상 자국 때문이다. 남편 몸에 난 화상 자국 때문에 여자가 직접적으로 불편을 겪는 일은 없다. 하지만 한때는 여자가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여겼던 화상 자국이, 언제부터인가 남편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편을 점점 멀리 하고, 남편 또한 여자를 멀리 한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너)는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는지에 관한 고민에 대해 작가 스스로 답을 찾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 <붉은 꽃 속에서>이다. 사남매 중 셋째인 선이는 어릴 때 남동생 윤이와 함께 연등제에 갔던 기억이 있다. 윤이에게는 처음이었던 연등제가 마지막이 되었고, 그 후로 선이는 윤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왜 하필 윤이에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 했다. 이후에도 선이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결국 선이는 속세를 등지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속세를 등진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사에 대한 고민을 포기한다는 뜻일까.
내가 보기에 선이가 속세를 등지고 불자의 삶을 걷기로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사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면으로 직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보기에는 정상적, 보편적,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삶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을 인정하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몸에 치료할 수 없는 멍이 생기면 억지로 가리는 대신 멍이 있어도 괜찮은 삶을 스스로 택하는 사람이다. 거짓으로 결혼 생활을 지키는 대신 마음이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쓰인 것으로, 그 때 한강 작가의 나이가 만으로 스물여섯 살부터 서른 사이다. 그 젊은 나이에 벌써 이런 성숙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고 대단하다. 표제작 <내 여자의 열매>는 한강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채식주의자>와 이어지는 내용이라서, <채식주의자>를 읽기 전에 <내 여자의 열매>를 읽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