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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영어 속담 중에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가 있다. 일(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뜻으로, 학창 시절에는 이 속담의 방점이 'play'에 찍혀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이 문장의 방점이 'dull'에 찍혀 있다고 느낀다. dull의 사전적 의미는 '따분한, 재미없는'인데 '흐릿한, 칙칙한, 윤기 없는'이라는 뜻도 있다고 나온다. 윤기 없이 삐걱거리는 삶을 살고, 존재감이 흐릿해 남들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제대로 놀지 않고 일만 하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청예의 소설 <오렌지와 빵칼>의 주인공 오영아는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매사를 일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오래 사귄 친구가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친구가 좋아서 만나는 게 아니라 그 친구라도 없으면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이 될까봐 불안해서 의무적으로 만난다. 5년 가까이 사귄 애인이 있지만 애정은 예전에 식었고, 헤어지자고 말하면 나쁜 여자로 여겨질 게 두려워서 계속 사귀고 있을 뿐이다. 직업은 유치원 교사인데 아이들을 진심으로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근무 환경에 불만이 많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영아의 일상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일은 없고 만나기 싫은 사람, 하기 싫은 일뿐이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상대하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니 짜증, 분노, 우울,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계속 쌓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오영아 자신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배출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보통은 취미 생활이나 사교 활동, 여행, 운동 등으로 이런 감정을 분출하고 해소하며 새로운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데, 오영아는 돈이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법 찾기를 미룬다. 오히려 건전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나 영상을 인터넷에서 보면서 자신의 감정 또는 행위를 정당화, 합리화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영아는 어떤 계기로 인해 이제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이 될 기회를 얻고, 이 기회를 통해 전에는 해본 적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서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 그 감정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나쁜 면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움, 쾌감이다. 치팅 데이 없이 식단 조절을 하면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것처럼, 우리네 일상도 의무와 부담, 규율과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 필요하다. 몸만 아니라 머리도, 마음도, 의식도, 가치관도.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