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조해진 작가의 소설 중에 가장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가 <빛의 호위>이다.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집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소녀. 그 집에는 부엌도 화장실도 없고, 소녀를 돌보는 어른의 흔적도 안 보인다.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소녀의 집을 찾아간 소년은 며칠 후 아버지의 카메라를 훔쳐서 소녀에게 선물한다. 이걸 팔아서 필요한 데 쓰라는 뜻이었지만, 소녀는 그 카메라를 팔지 않고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가 된다. 이 자체로 완벽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빛의 호위>를 장편으로 확장한 조해진 작가의 신작 소설 <빛과 멜로디>를 읽고 완벽함 너머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메라를 선물한 소년 승준과 카메라를 선물받은 소녀 권은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각각 기자와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가 되어 재회한다. 그 인터뷰로부터 7년 후, 권은은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 촬영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의 절반을 잃는다. 현재는 권은이 가장 존경하는 사진 작가인 게리 앤더슨의 여동생 애나의 집에 머물며 그들의 아버지 콜린의 생애를 영상으로 제작하고 있다. 민영과 결혼해 지유라는 딸을 얻은 승준은 선배로부터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여성 나스차를 인터뷰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내는 그가 육아에 집중하기를 원하지만, 승준은 권은이라면 두 말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빛의 호위>가 한 국가 또는 한 사회 내의 계급 차이를 연민과 호의로 초월하는 두 사람(아이)의 이야기를 그린다면, <빛과 멜로디>는 국적이나 언어, 문화의 차이를 연민과 호의로 초월하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승준에게 카메라를 선물받은 걸 계기로 사진 찍기가 취미가 되고 직업에 된 권은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상업 사진 작가의 길을 마다하고 위험한 분쟁 지역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분쟁 지역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사고로 다리까지 잃자, 권은은 호의로 누군가를 돕거나 살리는 일에 생각보다 큰 희생이 따른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권은에게 카메라를 선물했던 승준은 일견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승준 자신은 그의 삶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낀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와 내 가족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삶일까. 그런 사람이 부모로, 인간으로 대접 받아도 괜찮을까. 흔히 사람을 살리는 직업으로 의사나 소방관을 떠올리지만, 이 소설을 보면 그런 직업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작은 관심과 노력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