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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평점 :

콜센터 상담원인 미란은 매일같이 고객에게 불평과 항의를 듣는다. 그때마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지만, 사람인 이상 마음이 다치는 건 당연하다. 그런 미란에게 어느 날 영은이 나타난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책 낭독 봉사를 하는 미란은 복지관에서 만난 영은과 연인이 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쭉 혼자였던 미란은 영은과 함께 하는 매일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무엇보다 모두가 대체 가능한 사람, 무시하고 상처 줘도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미란을 세상에 유일한 사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여겨주는 영은이 고맙다.
<모린>은 <남겨진 이름들>을 쓴 안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좋다. 표제작 <모린> 다음에 실린 단편 <핀홀>도 좋다. 바느질 공방을 운영하는 보라는 동거 중인 애인 승원이 사실은 외동이 아니라 죽은 형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게다가 그 형은 중증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다 최근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보라는 승원에게 그런 형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런 사실을 쉬쉬하며 숨겨온 승원과 승원의 가족에게 불편한 마음이 든다.
이어지는 단편 <담담>은 11년 간의 연애를 끝낸 바이섹슈얼 여성 혜재와 사별한 이성애자 남성 은석의 연애를 그린다. 혜재는 바이섹슈얼이라는 사실만 털어놓아도 외면했던 다른 남자들과 달리 담담하게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해 주는 은석에게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은석과 결혼할 경우 임신, 출산, 육아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자신이 원한 바이섹슈얼 여성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이성애자 여성은 당연하고 레즈비언 여성에 비해서도 훨씬 적은 바이섹슈얼 여성의 서사라서 새롭고 흥미로웠다.
단편 <작은 눈덩이 하나>는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한 의선이 하우스메이트였던 대학생 친구 세진의 영화 동아리 선배 준수와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현재로서는) 되지 못한 준수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현재로서는) 되지 못한 의선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유의미한 무엇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존재하는 한 몇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좋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