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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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집을 나와 백화점 남성 의류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다. 여자 나이가 이십 대 중반만 되어도 '올드미스' 소리를 들었던 (야만적인) 시대. '나' 역시 대학을 졸업했으니 어서 시집을 가라는 가족들의 성화를 견디다 가출을 택했다. 그러나 '나'의 친구들이나 사촌 여자 형제들이 하나둘 결혼을 택하고, '나'가 만나는 남자들도 '나'에게 결혼을 바라거나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나'를 떠난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는 배수아 작가가 등단 2년 만인 1995년에 발표한 첫 소설집이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에 발표된 소설들이라서 그런지 세월의 흔적이 많이 느껴졌지만, 문제 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느꼈다. 이제는 여자 나이가 이십 대 중반만 되어도 결혼 압박이 들어오는 시대는 아니지만, 남성보다 여성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결혼(+임신, 출산, 육아 등)해야 한다는 압박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고, '여성=언젠가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룰 존재'로 보아서 취업, 승진 등의 기회를 더 적게 주는 것도 사실이다.


표제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화자인 '나'는 언젠가 자신이 일하는 백화점으로 주방용 가위를 사러 왔던 친구가 결혼 후 바로 그 가위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말을 듣는다. 그 순간 '나'는 오래 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국도를 드라이브하다 허름한 행색의 여인으로부터 푸른 사과를 사먹었던 일을 떠올린다. 남자친구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맛없다 했지만, '나'는 맛없는 사과라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여인의 용기가, 당당함이 멋지고 자유롭게 보였다. 그러니 잊으면 그만인 사소한 사건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걸 테고.


90년대에 출간된 이십대 중반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이라는 점에서 양귀자의 <모순>과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고학력 중산층 계급 출신 여성이 느끼는 일상의 권태와 연애의 한계라는 주제는 에쿠니 가오리와 프랑수아즈 사강을 떠올리게 한다. 일상에 환상이 틈입하는 구성이나 푸른 사과, 늑대처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샤넬, 야마하, 고디바, 행켈 등 외국 브랜드명이 자주 등장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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