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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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작가인 '나'는 불우한 이웃들의 사연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해 방송에 소개하고 실시간 ARS로 후원금을 모집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몇 년째 만들고 있다. 최근에 '나'는 이 방송 프로그램에서 부모를 여의고 반지하방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와중에 얼굴에 큰 혹이 생기는 병까지 얻은 윤주의 사연을 소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후원금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방영 날짜를 미루는 과정에서 윤주의 병이 더 깊어진 사실을 알게 되고, '나'는 자신이 선의로 한 행동이 윤주에게 안좋은 결과를 야기한 것 같아서 죄책감에 시달린다.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는 연민의 양면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방송 작가로서 나름 사명을 가지고 양심적으로 일해 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출연자에게 더 큰 도움을 주려고 한 선택이 더 나쁜 결과를 낳자 자책하며 일을 그만둔다.

그때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이 3년 전 한 시사 주간지에서 보고 관심을 가졌던 탈북자 로기완의 사연이다. 어머니와 단둘이 북한 국경을 넘은 후 중국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벨기에를 거쳐서 영국으로 간 로기완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나'는 무작정 벨기에로 향한다. 


벨기에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로기완이라는 타인의 삶에 관해 조사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 절대적으로 불우한 그의 삶을 함부로 연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로기완이 묵었던 숙소에 묵고, 그가 먹었던 음식을 먹고,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회피하려고 했던 과거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불우하게만 여겼던 그의 삶이 그저 불우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쩌면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서 꿈이라도 꾸고 은인이라도 만날 수 있었던 그의 처지가 꿈도 없고 은인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보다 나았던 건 아닐까.


그러나 누구의 처지가 누구의 처지보다 더 낫다는 생각은 온전한 공감이나 이해라고 보기 어렵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식의 비교는 애초에 타인의 처지와 나의 처지가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오만함, 타인의 처지보다 나의 처지가 더 나아야 한다는 이기심, 타인의 처지에 빗대어야만 나의 처지를 판단할 수 있는 무지함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로기완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괴롭다. 자신이 방송 작가로서 선의를 가지고 불우한 사람을 돕기 위해 한 일의 기저에 그러한 오만함, 이기심, 무지함이 깔려 있었음을 점점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민이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떻게 진보하다가 어떤 방식으로 소멸되는 것인가.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58-9쪽) 작가는 이 소설에서 로기완에게 다가가는 '나'의 기록과 로기완 자신의 기록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다가감의 시도 또는 노력이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끝내 실패하고 뼈아픈 자기 반성과 비판이라는 결과로 이어질지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을 보여주는 결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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