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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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처음 일본에 갔을 때 파친코가 편의점만큼 많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전까지 나는 일본 하면 사람들이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어딜 가나 파친코가 있고 업소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에 내가 모르는 이면이 있고, 그 이면으로 인해 이 나라의 미래가 어둡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 선생의 책을 따라 읽으면서 재일조선인 문제에 눈을 떴고, 일본 정부와 일본 사회가 어떤 식으로 재일조선인들을 이용하고 차별하는지를 알았고, 파친코가 재일조선인 문제를 상징하는 산업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이 아니기 때문에 자국민 대우를 받지 못하고, 남한 또는 북한의 국적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국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들은 진학과 취업을 비롯한 사회 활동에 있어서 제한과 차별을 받기 때문에, 과거에는 (일본인보다 우월한 신체를 활용해)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가 되지 않으면 대체로 자영업을 하거나 파친코, 야쿠자 같은 어두운 일에 종사했다. (소설 <파친코>의 모델로 알려진) 파친코의 왕으로 불리는 일본 기업 마루한의 회장 한창우 역시 재일조선인이었다(현재는 일본으로 귀화). 





소설 <파친코>는 재일조선인 가족 4대의 이야기를 그린다. 선자는 일제강점기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선자의 부모는 비록 장애가 있고 가난했지만 근면 성실했고 외동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가 운영하는 하숙집 일에만 매달려 있던 선자는 어느 날 시장에서 생선 중개상인 고한수를 만난다. 얼마 후 고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선자는 고한수에게 일본인 아내와 자식들이 있음을 알게 되고, 아들을 낳으면 집과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한다. 선자네 하숙집 손님인 목사 백이삭이 선자를 가엾게 여기고 함께 오사카로 가자고 제안하고 선자는 이에 응한다. 


백이삭을 따라 오사카로 건너간 선자는 아들 둘을 낳는다. 좌판에서 김치를 팔아 열심히 돈을 모아서(이 부분이 제일 재밌다) 아들 둘을 잘 키우고 백이삭의 형 부부까지 건사한다. 고한수의 아들 노아와 백이삭의 아들 모자수는 각각 다른 성정을 지녔고 다른 인생을 꿈꿨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진학과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결국 둘 다 파친코 일을 하게 된다. 미국 명문대 학위를 가진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나중에 아버지의 사업에 동참하는데, 마침 이때가 일본의 버블 붕괴-경기 침체 시작 시점이라서 이후 솔로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작가님 더 써주세요 ㅠㅠ). 





일제강점기가 배경이거나 재일조선인이 나오는 이야기에서 일본인은 대체로 (재일)조선인을 괴롭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마련이고 이 소설에도 그런 모습이 나오지만, 이 소설에는 모자수의 친구 하루키나 노아의 애인 아키코, 모자수의 애인 에쓰코, 에쓰코의 딸 하나처럼 (재일)조선인에게 우호적인 일본인의 모습도 나온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루키, 아키코, 에쓰코, 하나는 모두 일본 사회에서 약자로 분류되어 배척당하거나 일본 사회에 염증을 느끼는 인물들이다. 약자가 약자를 알아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어떤 약자는 다른 약자를 괴롭히고 어떤 약자는 다른 약자에게 관대한 이유는 뭘까. 


여러 인물이 나오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단연 선자다. 선자는 (여성 중심의 가족사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과 비슷한) <토지>의 서희나 <미망>의 태임 등과 비교해 형편도 훨씬 안 좋고, 신분 상승이나 재산 축적의 욕망도 적고, 남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다. 선자가 살면서 드물게 욕심을 내고 일탈을 한 일이 있다면 고한수와의 연애인데, 임신 사실을 안 후 선자의 삶은 (당시 사회 규범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연애와 임신을 한 죄를 씻기 위한 속죄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일을 제외하면 선자는 딸과 아내, 엄마로서 흠 잡힐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오히려 너무 고생만 하면서 살았는데,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말년에 오래 전 선자가 엄마 눈을 피해 (선자는 몰랐지만) 유부남인 고한수와 연애하고 아이를 가진 사실을 들먹이며 선자를 비난한다. 그 모든 속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 취급당하는 여자의 삶 뭘까. 선자 외에도 '몸을 함부로 굴리거나' '남자가 듣기 싫은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 당하는 여자들이 이 소설에 많이 나온다. 선자가 (남성인) 아들, 손자만 있고 (여성인) 딸, 손녀는 없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재일조선인이고 여자였다면 모자수나 솔로몬만큼 성공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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