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ible Jesus Read (Paperback)
Yancey, Philip / Zondervan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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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힘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느낀다. 밤을 지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던 때가 언제인가? 도서관에 앉아 6시간 동안 독서 삼매경에 빠지거나, 공원벤치 조명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친구 삼아 책을 읽으며 여름 더위를 쫒던 적이 아득한 옛날같다. 이제는 한 권 끝내기가 쉽지 않다. 새벽예배를 작정하고 나서는 늦게 잠을 잘 수가 없고, 일이 쏟아지면 피곤함에 도저히 시간이 안난다. 그럼에도, 전혀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유투브에 시간을 빼앗기며 시간 낭비했던걸 생각하면 후회가 많이 된다. 올해는 다시 책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을 살찌우고 궁극적으로 정신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어 보자!!

사실 이 책은 직장 신우회에서 함께 읽기로 지정된 책이었으나, 다들 읽지 못해서 나눔은 하지 못했다. 나의 지론은 한 권의 책을 적어도 2주 안에, 빠르면 1주 안에 끝내야 제대로 감동을 느낄 수 있고 내용을 잘 파악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1달이상 띄엄 띄엄 이 책을 읽어서 리뷰 쓰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큰 울림이 있었고, 성경을 읽으며 궁금했던 것도 해갈을 얻은 듯하다. 알면 보인다고 했는데 성경 통독을 겨우 한 상태라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기에 앞으로 더욱 성경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난 구약이 엄청 어렵다고 생각지는 않았는데, 현대인들이 신약에 비해 구약을 잘 읽지 않고 필요성도 못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신약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구약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도 구약의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셨고, 구약에서 예수님이 오심을 여러 군데서 예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은 그저 수천 년 전의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구약을 읽기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의 러브 스토리처럼 읽으라고 충고한다. (read it like a love story)

구약 중에서, 욥기(Job), 신명기(Deuteronomy), 시편(Psalms), 전도서(Ecclesiastes), 선지서(Prophets)에 관한 작가의 해석이 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설교를 피하는 욥기에 대한 설명은 큰 도전이 아닐까 한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 전쟁, 슬픔 등을 잘 인내하면, 즉 연단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되어 나온다는 해석에 초점이 아니라 ‘욥의 믿음’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하는 조건부나 보상/징계라는 계약적 신앙을 넘어서는 욥의 신앙을 보고 싶어하신 듯하다. 욥의 고통은 아주 작은 재료에 불과한데 우리가 재료에 갇혀 큰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거나, 등장인물만 보다가 드라마의 주제를 놓치는 경우랄까? 욥기를 통해 단 한 명의 믿음, 반응도 하나님에게 매우 소중하다는걸 알게 되었다.(One person’s faith made a difference. How we respond matters.) 작가는 욥기를 통해 ‘믿음의 회의‘에서, ’의심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길 수 있었다고 했다. (with doubt in my faith - with faith in my doubt)

작곡가로 비유하면 신명기는 장엄한 확신으로 볼 때 바흐에 해당된다고 했다. 신명기는 기억하라 잊지말라를 강조한다. 어리석은 황소가 고집 때문에 고통에도 하루종일 멍에를 메고 있듯이 목이 곧은 백성들은 교만하여 평안시에 과거의 은혜를 잊기 쉽다는걸 모세는 너무 잘 알았다. 온유함이 온 지면에 가득했던 모세도 한 때는 살인자가 아니었던가? 그의 성정을 부드럽게 만드신 하나님이 백성들을 공급하고 또 공급하셨음을 잊지 말라는 경고(warning)의 메세지가 신명기이다. Choose life. For the Lord is your life.

시편은 수 많은 모순과 감정의 롤러코스터로 가득차 있다. 교회에서는 억제하려하는 분노를 사정없이 표출하다가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로 반전되기도 한다. 인간의 나약함, 극도의 슬픔과 아픔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감으로써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알려준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 자체가 치료 효과를 발휘한다. 미움과 증오가 어느새 물러가고 그 자리에 용서의 기적을 위한 씨앗이 자라나는 걸 볼 수가 있다. 만약 사람에게 복수의 저주를 쏟아내면 독화살이 되지만 하나님께 무기력한 모습으로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가 간청함으로 고침과 치유를 얻을 수 있다. 한편, 시편은 찬양이 부족한 문화에서 필요한 단어를 제공하며 찬양하고, 송축하고, 기도하는 법을 잘 알려준다.

무상함과 절망의 탄식을 노래하는 전도서와 지혜와 명철을 강조하는 잠언이 나란히 배치함은 어떤 의미일까? 모든 것을 다 누렸던 솔로몬은 지나친 풍요의 토양에서 실존적 절망감을 느낀 것일까? 원하고 바라는 것을 얻게 됨의 저주라고 했다. 전례없는 풍요와 사회적 진보의 시대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여 실존적 불안감을 느끼는 현대의 우리와 닮았다. 우리도 가끔 왜인지 모르나 이유도 없이 무상함과 낙담을 느끼지 않는가? 결국 신의 존재를 믿고, 창조주를 기억하고 경외하며 존재의 의미를 찾고 순종함으로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선지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며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잊고 지낼 때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등에 관한 하나님의 마음과 느낌을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작가는 마지막에 3가지 질문을 던진다. Do I matter? 나 한 명이 하나님에게 중요한가? 이사야 49:16절을 통해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임을 설명한다.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Behold, I have engraved you on the palms of my hands.)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의 막대기로 약한자 편에 서서 공생애 생활을 하셨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 얼마나 기뻐하셨는가? 두 번째 질문은 Does God care?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가? 왜 악의 세력이 형통한데 침묵하시는가? 신약에 예수님이 눈물 흘리시고 우리와 같이 아파하시는 장면이 많다. 우리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다르니, 결국 하나님이 골든 타이밍을 기다리신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질문은 Why doesn’t God act? 구약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모세와 대면하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 보인다. 그러나 창조주의 미완성의 프로젝트는 언젠가 완성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모든 신학적 궁금증이 해갈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 또한 전도서 작가 솔로몬과 같은 고민과 절망으로 허무감과 좌절을 느꼈던 때가 있다. 시편 기자의 기도를 하나님께 자주 올렸더라면 사람에게 상처내는 일이 줄었으리라. 신명기를 일찍 읽었더라면 평안의 시기에 은혜를 기억하며 교만을 멈추고 겸허하게 무릎을 꿇었으리라. 욥기를 잘 해석했더라면 작고 작은 나의 믿음 하나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음을 알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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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은 마치 우상을 찍어내는 공장같다’(Human heart is an idol factory.)고 했다. 사실 난 내 안에 나만의 많은 우상이 살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심지어, 난 예전 부흥회에서 반복되던 ’자기 의‘라는 단어에도 강한 반발심을 느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교만했었는지, 내 안에 얼마나 커다란 우상 덩어리가 나를 지배해 왔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히스기야 왕이 우상과 산당 철거를 위해 개혁 운동을 벌였듯이 나 또한 새로 태어나고 싶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우상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가 평생을 두고 원했던 아들을 25년을 기다려 마침내 100세에 얻었는데 그 아들을 포기하라고 하신다. 오랜 기다림과 지연의 시간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듬어 오신 그 하나님께서 다시 그 아들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될까하여 포기하라고 하신다. 이 책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 새삼 알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으로 모리아 산을 올라갔는지 표현되어 있지 않으나 하인들에게 이삭과 함께 다시 돌아올 것이라 말했다. (We will come back to you. - Genesis 22:5)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우상을 해결해 주신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사랑(love)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status)을 위해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야곱은 유례없는 사랑꾼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던 그는 어머니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Rachel의 사랑을 위해 20년의 시간을 보낸다. 언니 Leah는 또 얼마나 슬픈 운명인가? 평생 야곱의 사랑을 갈구하며 보내지 않았던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상실감에 빠진 Leah를 돌보시고 그녀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라. Leah의 넷째 아들 Judah의 계보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는가?

자녀, 사랑뿐 아니라 돈과 탐욕도 현대인의 큰 우상 중의 하나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 있는가?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동족 이스라엘인의 세금을 걷어 이방인인 로마에게 바치는 일을 했기에 죄인 취급을 당함으로 그는 권력과 재물은 있으나 영적 파산 상태였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재산의 절반을 이웃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한다. 삭개오의 정체성과 안전의 뿌리가 그의 우상이었던 재물에서 예수님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권력이란 것 또한 타작마당의 겨처럼 얼마나 가볍고 약한 것인가?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란 말도 권력의 유한성을 나타낸다. 아람의 군대 장관 Naaman이 나병에 걸렸을 때 이스라엘의 선지자 Elisha를 소개한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붙잡혀 와서 여종 노릇하던 소녀이다. 결국 그는 엘리사를 찾아가나 밖에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통해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전갈에 분노한다. 기세등등한 권력을 지닌 그가 그런 대접을 받게 되었던 것에 참을 수 없었으나 결국엔 요단강에 몸을 담그자 어린아이같은 피부를 얻는다.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우상의 예시로 요나(Jonah)이야기가 있다. 북이스라엘 선지자로서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투철했던 요나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다. 심지어 그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후 하나님이 재앙을 철회하시자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불평을 하고 차라리 죽기를 기다린다. 수고도 재배도 아니한 박넝쿨을 너가 아꼈거늘, 니느웨 120,000명의 사람과 가축을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나에게도 요나와 같은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 나와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이 혹시 ‘악한 다른 사람’, 혹은 ‘나를 괴롭힌 악한 다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자비가 머물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해(Let God be God) 우상을 잘 분별하고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혼자 있는 고독한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 둘째, 소비 패턴(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느니라), 셋째, 응답없는 기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로 자신의 우상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우상을 찾아 분별하게 되어도 제거하기까지는 오랜 영적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집착하며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기다려 왔던 ‘나의 이삭(Isaac)’은 Jacob이나 Leah처럼 사랑이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것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며 평생을 기다린 듯하다. 그 사랑이 나의 우상이었음을 깨달은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내려 놓았다 생각했는데도 며칠 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며 아직 자유함을 얻지 못한 나를 발견했다. 평안을 얻는 그 날까지, 자유함을 얻는 그 날까지 기도하고 기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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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문외한이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라는 문구를 조정래의 책에서 읽으며 수치심이 찾아 들었다. 그러나 작년에 엄청난 상심과 낙담을 겪은 후, 무기력감에 빠지며 관심을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내가 미국 정치의 양극화 현상에 대해 읽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적잖이 실망했으나 놀랍지 않다.

미국도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이고, 그는 다시 재선에 도전하는 것 같다. 민주당 클린턴도, 각 언론사도, 심지어 공화당도 예상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는가를 모티브로 하여 미국 정치 역사를 돌아보며 양극화된 이유와 과정 그리고 햐결책을 제시하며 예상을 깨고 희망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 역사보다 발전된 민주주의 형태를 언급하며 내일은 더 좋아질거라 끝을 맺음에 놀라기도 했다.

정치는 자기 정체성과 집단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집단의 위치와 결론을 방어하려는 본능과 정체성 보호 인지 기능을 발동시키며 사실적인 정보를 거부하기도 한다. 즉, 자신이 원하는 답만 찾으려고 스스로를 속이며 지적 심연에 빠지기도 한다. 정치라는 중독성 마약 앞에서 인간이 소유한 합리적이고 논리적 ‘이성’이란 이름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 우리는 자신의 이성을 신뢰할 수가 없다. 인간의 정체성이 가장 위협받을 때 인간의 이성이 가장 취약하다고 하지만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혼자서는 이성적일 수가 없고, 이성이란 본질적으로 집단의 이익에 기여하기 위해 집단 프로젝트라고 했다.

현재 미국 민주당(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등)은 진보적이고 공화당(주로 백인)은 보수적이다라는 양극화 체제로 굳혀졌다. Obamacare에 대해 단 한 명의 공화당표(상원, 하원 모두)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1965년도에는 많은 공화당원들도 의료체제에 열린 마음이었더. 심지어 링컨은 최초 공화당 대통령이었다. 1964년 시민권법 제정 즈음으로 양극화가 조짐을 보인듯하다. 미국이 위기의 시기에는 오히려 정치체제가 평온하고 덜 양극화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공화당은 백악관, 상원, 대법원을 장악하고 있고, 민주당은 하원뿐이며, 이는 인기가 아닌 지리적인 요인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공화당은 펜실베니아 상원을 40년간, 오하이오 상원을 35년간 장악하고 있다. 언론과 정치는 또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 민주당 의원들은 특정한 한 언론으로부터 정보를 취하지 않으며 다양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반면, 공화당 의원들은 Fox News가 47%(보수 언론)이었다. 양극화된 정치체제가 언론의 양극화를 부추긴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큰 목소리와 내용으로 미디어를 장악하여 득을 본 사람이 트럼프이다(media coverage 47%). 심지어 트위터에 철자가 틀렸다는 등의 기사로도 주목을 받으며, 다른 후보들의 모든 정책을 묻히게 만들었다.

미국 인구수를 볼 때 인구 다양화로 백인 인구수가 줄어들면서, 과거에는 백인들이 당연하게 누리던 특권이었으나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 기회를 트럼프가 교묘하게 이용했다. 백인 고졸자들이 느꼈던 위기의식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특권에 익숙해지면 평등이란 단어도 압박처럼 느껴진다는 문장이 슬프게 들린다. (When you are accustomed to privilege, equality feels like oppression.) 라틴계나 아시아인들의 인구수가 많아짐에 설자리가 좁아지게 된 백인들이 트럼프의 포플리즘 공약들을 지지했을 것이다.

양극화의 해결책이라기보다 수정 방안으로, 채무한계(debt ceiling) 폐지, 비례대표제(
proportional representation system) 실시로 양당체제가 아닌 제 3당 만들기, 필리버스터(filibuster) 폐지 등으로 경쟁이 있는 건강한 정치 체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국민들이 항상 의식이 깨어 있어야함을 강조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가지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대통령 선거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방 선거에 더 열정을 쏟음으로서 적극적으로 내가 사는 지역을 바꾸어 갈 수 있다고 했다. (national < state or local)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 역시 대통령 선거에는 관심이 높은데, 도, 시, 구역장 선거에는 덜 열정을 쏟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 나이키 회사 경영진이었던 사람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상처가 너무 커서 정치와의 단절을 선언한 사례가 나온다. 시골에 가서 살면서 마트도 사람이 적을 때 가고, 심지어 친적집 방문시에도 가족들이 민감한 정치 얘기를 하지 않도록 서로 조심시켰다고 했다. 그가 트럼프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좋아서가 아니라 클린턴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트럼프에게 투표했다고 했다. 기득권은 가진 것을 절대 빼았기면 안되고, 내가 가진 것이 위협받으면 이성적 사고가 마비된다. 내 상식으로는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선출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나, 정치는 내 소견을 월등히 넘어선다.

미국 정치 체제를 잘 몰라서 어려운 것도 있었고, 너무 오래 읽어서 전체 흐름을 잊은 것도 있어서 리뷰 쓰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럼에도, 읽은 것으로 끝내면 읽지 않은 것이 된다는 나만의 원칙으로 무리하게 리뷰를 쓰다보니 중언부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한국의 정치를 보는 듯했다. 미국처럼 Blue vs. Red로 나누어진 한국 정치의 위상은 어디 즈음에 있을까? 작가가 보는 바와 같이 여전히 한국 정치에도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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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독서 모임 때문에 이 책을 구매했고, 인지도가 높고 수상작인걸 알지만 책에 대한 스포일러 없이 백지 상태로 읽고 싶었다. 전반부에서는 31살 캐시가 헤일셤에서 보냈던 시절의 내용이 계속 되어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가 만난 친구들, 선생님들, 학교 생활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리 만큼 섬세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보낸 학교 생활은 나의 동심과,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림을 창의적으로 잘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통해 그들 내면 즉 영혼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고, 그들의 삶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가지러 오는 마담이 그들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걸 보며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악전 고투하는 루시는 ‘나의 근원자’를 찾기위해 친구들(5명)과 함께 노퍽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들의 우정과 사랑과 특별하지 않다. 최선을 다해 친절과 이해로 무장하고 그림을 보아주는 제럴딘 선생님에 대한 애정, 적어도 한 사람(루시 선생님)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로 위안을 받는 토미, 커플이 되면 당사자들은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 상대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조언을 루스에게 하는 캐시, 가장 친한 친구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당황하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계획한 자신을 자책하는 캐시 등. 평범하고 잔잔한 그들의 일상은 우리 삶과 꼭 닮았다.

그러나, 그들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 즉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난 클론들이다. 그걸 알고 나서부터 내 마음 속에 그늘이 찾아 들었다. 윤리적 딜레마에 갇혀 있는 복제 문제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모습으로 그려도 되는 것인가? 지나친 감정이입은 이성을 마비시켜 판단을 흐리게도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로봇도 우리 일상을 파고들어 삶의 편이를 도모하고 있는 시대에 사유하는 로봇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오래 전에 등장하지 않았는가? 나는 로봇과 공존 및 공생하는 시대가 올거라 생각했는데 클론의 생명의 존엄성도 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가?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의 유한함 때문이리라. 복제를 통해 기술 문명의 우월성을 과시하며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교만함이 오히려 디스토피아를 부르지 않을까? 한편으로 인간과 클론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음을 맞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클론은 시기가 조금 빠르며 수단으로 이용됨을 알고 있다는 것뿐. 인간인 우리도 죽음의 때가 반드시 노년이 아닌 경우도 많고,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수단으로 전락되기도 하는 슬픈 현실이다. 클론도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창의적인 활동에 매달리지만, 인간이 몸으로 살아 있으되 그 영혼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의 근원자’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클론의 모습도 인간과 많이 닮아 있다. 물질 만능주의, 외모 지상주의 시대에 살면서 과연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고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물질, 시간, 명예, 허영, 사치의 노예로 살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도 모르고, 공허감과 허무함을 끌어 안으며 기댈 수 있는 근원자도 알지 못한 채 사는 것은 아닐까?

삶이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면서 장래 희망 토론을 하며 달콤한 부유 상태에 머물며 일상적 제약에서 해방감을 얻으려는 클론의 삶에 대해 이질감이 아닌 동병상련의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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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하나님께 인문학을 하나님께 1
한재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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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ok must be axe for the frozen sea within us.”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이다.)는 Franz Kafka의 명언이다. 그 도끼가 나를 위로하고 안내하는 나침반이었다. 그 보다 세련되고, 지혜롭고, 변함없는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어 전공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이과 계열은 이해가 더딘지라 인문학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여 본질에 접근하게 하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그 인문학을 성경적으로 해석한 책이다.

작가는, 하나님이 일반 은총으로 주신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인문학에 성경의 옷을 입혔다. 이 책을 읽고, 성경을 돌아보니, ‘성경이 문학의 옷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에 진하게 공감한다. 비유, 은유, 반복, 직유 같은 수사학적 장치가 많아 이해가 어렵기도 하지만 얼마나 따뜻하고 감동적인 문구가 많은지 모른다. 나는 현재 영어로도 성경을 읽고 있는데 또 느낌과 감동이 다르다. 내가 예전에 읽은 책도 많이 있었는데, 거기에 작가가 성경적 해석을 입히고 나니, 내가 읽었던 그 책이 다르게 보인다.

나는 왜 그동안 책에 많은 집착을 보였는가?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지 않으면 불안했다. 나는 철학책 원서를 막힘없이 매일 읽는 그 날이 오면 내 안의 공백에 모두 채워지고,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잠들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난 심리학과 철학 및 자기계발서에서 많은 힘과 위로를 얻었다. 그러나 그 도끼들도 유통기간이 항상 있었고, 세상의 풍파는 모두 잠재우지 못했으며 난 늘 불안한 존재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인간은 절대자, 영원에 대한 근본적인 그리움이 있다는걸 작년에 알게 되었다.

책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었고 인문학이 주는 무한긍정은 부정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내가 책을 읽으며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그 책이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함께 비를 맞으시고, 함께 공감해 주시고, 우산까지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인문학이 그 동안 내게 큰 선물이고 친구였던 것은 확실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인문학은 명답이었고 정답까지는 주지 못했으며 오로지 성경만이 정답이었다.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시, “가지 않은 길(by Robert Frost)”은 나를 매우 우울하게도 했다. 가고 싶었으나 가지 않은 길이 있었기에, 그 때 현재가 아닌 다른 길로 갔었더라면 어땠을까를 항상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가지 못한 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가지 않은 길을 자랑스러워 하리라. 또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거두어들이지 않은 것(Unharvested by Robert Frost)” 이란 시도 매우 감동적이었다. 안 거두어들인 것이 늘 있어서 그 향내 맡는 일이 죄가 되지 않게 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와 비슷한 하나님의 말씀을 레위기에서 읽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룻과 보아스의 위대한 만남이자 최고의 로맨스가 보리 이삭을 다 줍지 않은 흘림의 밭에서 이루어졌음을 볼 때, 고아, 과부, 거류민을 위하시는 속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일부러라도 흘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동안 능력이 부족하다 생각하여 빈틈없이 노력하고 채우려고만 했다. 그런데, 부족함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고, 인생의 아름다움 중 하나인 그리움과 설레임은 부족하고 결핍될 때 나온다고 하니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이 책은 또 나에게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예배, 기도, 성경 통독을 넘어, 전도 선교, 구제로 이어져야 한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의미를 가지듯이,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어 택한 백성으로 삼아 주심에 나는 얼마나 감사한가? 고 신영복 교수님은 “담론”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블러 주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전의 복음 전도는 다섯 번 이상의 접촉이 필요했는데 요즘엔 12~20번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만남은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기적의 시작이라고 하셨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걸 아는데 그 섬에 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이 책은 또 많은 은혜를 받고 갚지 못한 빚진 자로서 살면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는지, 너무 쉽게 불평하는 교만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묻고 있다. 다음에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연습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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