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Bias)은 매우 익숙한 단어이고 심리학 책을 읽을 때 마다 수많은 편향을 만나며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된다. 확증편향, 앵커링 효과, 편향의 편향(Bias bias)까지 셀수 없을만큼 많은 인지 편향을 통해 나는 항상 틀릴 수 있고, 내가 알고있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인정하게 된다.

편향(Bias)과 달리, Noise(생각의 잡음)는 백그라운드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판단의 다양성을 가리키며, 판단이 있는 곳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 이상으로 언제나 Noise가 존재한다. Noise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독특함과 다양함으로 일어나는 부산물이다. 일반적으로 다양성과 독특함은 창의성을 유발함으로 환영받을만한 선물이지만, 여기서는 같은 문제에 대하여 전문가가 내리는 판단과 결정의 다양성이라서, 피해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불공평을 유발하기도 한다.

Noise는 의학, 법, 경제 전망, 보험료 산정, 사원 선발 및 승진 문제까지 전반적인 분야에 다양하게 발생한다. 똑같은 범죄를 두고 내려지는 형량이 판사마다 판이하게 다른점, 같은 병명에 대해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다른점은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한다. 판사가 배가 고플 때, 혹은 점심 식사 후에, 지지하는 프로 야구나 농구팀 우승 직후냐에 따라, 즉 판사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피고인에게 판결하는 형량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다.

Noise는 시스템내에서 level noise, pattern noise, occasion noise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인과관계는 상관관계를 암시하지만,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인과관계를 말해주지 못한다. 이 둘의 관계를 혼동힘으로써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수십년간 억울한 상황에 놓여 고충을 겪은 사례도 많다. 대부분 범인뿐 아니라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도 합리적 근거를 넘어 과도한 자신감이나 확신을 가짐으로써 많은 Noise를 일으키며 실수를 저지르는 사례가 많다. Bias는 찾기 쉬운 반면, Noise는 보이지 않는 적이며, 보이지 않는 적과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단지 보이지 않는 승리일 뿐이지만, Noise 감소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줄이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판단의 목적은 개인의 표현이 아닌, 정확성이어야 한다. 둘째, 통계학적으로 사고하고 사례의 외부관점을 고려한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난받지 않으나, 불완전한 인간에게 예견되는 겸허함 부족은 비난받을 수 있다. 즉, 부족함의 한계를 외부 관점의 사례를 이용함으로써 중요한 통찰력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 팀간 대화를 최소화하고 독립성을 확보하여, 정보를 왜곡시키는 과도한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넷째, 초기단계에 직관력을 자제하고, 오히려 직관력은 충분히 정보를 제공받고, 잘 훈련받은 상태에서, 나중에 발휘해야 한다. 다섯째, 다양한 의사 결정자로부터 독립적 판단을 얻은 후, 그걸 모아서 종합적 판단을 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와 척도를 선호하라고 한다.

마치 손을 청결하게 하고 위생관리를 함으로써, 신체 건강을 유지하듯, 결정위생원칙(decision hygiene principles)을 통해 Noise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Noise 감소 전략은 많은 비용이 들 수 있고, 번거로울 수 있으며 단점도 안고 있다. 또 어떤 Noise는 오히려 다양성 유발로 인해 바람직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대안으로 알고리즘이 판단과 결정을 하게 할 수 있으나, 알고리즘 역시 인간이 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중요한 최종 선택에선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며, 그들의 얼굴 없음은 불신을 낳기도 하고, 잘못 관리하면 전문가들이 자율성이 침해받는다고 느끼게 되어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단점도 제기된다.

결국 모든 위험과 단점은 충분히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Noise 감소에 대한 반대 의견이 일리는 있으나, 손익계산을 하되, Noise를 없애기 위한 노력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Bias와 Noise는 실수와 불공평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판단과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 스스로 인식도 못하는 사이에 Noise가 생김으로써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걸 항상 염두에 두고, 우수한 의사 결정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언제나 의심의 그림자(a shadow of doubt)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증거를 열린 마음으로 고려할 수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업데이트(relentless updating) 하기를 권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명언이 떠오른다.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실패가 기본값인 인간은 판단과 결정에 있어 실패할 수 있다는걸 받아들이고, 실패하되 더 잘 실패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현재 어떤 존재이냐가 아니라 현재 무엇을 하느냐이다(What makes them so good is less what they are than what they do.)’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하루에도 크고 작은 결정과 판단을 해야할 때가 있다. 나의 직장에서 실수를 줄이고, 나의 판단으로 인해 피해자가 생기는걸 최소화하기 위해, 현재 내 모습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지적 결함(cognitive flaws)을 줄이고 객관적 무지(objective ignorance)를 항상 기억하며, 편향과 잡음(bias and noise)을 줄이기 위해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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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을 반복할 경우 편안함 보다 지루함을 먼저 느끼기에 새롭고 신선한 것을 원한다. 새로운 자극이 어떤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새로 접한 것이 기존의 틀을 벗은 경우, 자석처럼 끌리며 나도 모르게 따라갈 수가 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길을 잃을 경우 답은 과거의 지식과 경험에서 찾으려 한다. 이 소설이 딱 그랬다. 첫 장을 열었을 때 많이 달랐다. 보통 소설이 인과관계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반드시 뒤에 가면 이유와 결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계속 기다렸다. 여전히 말이 안되는 상황은 계속 되었으나 마지막 장에서는 속시원한 답을 줄거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부조리한 이 소설이 답이 없는 이 세상을 모델로 하는가?

글을 쓰지 않으면 죽어야 하고, 본인은 문학 외에 그 어떤 사람도 아니며,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힘이 글쓰기였던 Kafka가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법학박사까지 받았다. 정신적 폭력을 가했던 아버지를 향한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이 소설을 썼을까? 법학을 전공한 작가라서 사법부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아서 불공정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까? 무죄라고 소리쳐 봐도 모든 인간은 유죄 판결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며 결국 수치심만 남기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걸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너무 너무 어렵고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은행 고위 관리직원이던 주인공 Josef.K는 30번째 생일 날 기소당하고, 이유도 듣지 못하며, 그가 기소당함을 받아들이고 무죄임을 증명하기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그는 실패하고 채석장에서 죽임을 당한다. 기소당한 이상 이유 불문하고 유죄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판사를 만난 적도 없고 주위에 도와 주겠다는 사람들(uncle Karl, advocate Huld, manufacturer, painter, Block, Leni)은 많지만,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고, 누가 정직을 말하는지 알 수도 없다. 결국, 거짓말이 세상 질서에 기본이란 말인가.(It makes lie fundamental to world order. p. 177)

주인공은 이유없이 기소 당했는데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시키는대로 일요일 날 법원에 출석을 한다. 체포 영장없이 체포되었다고 해도 달리 손 쓸 방법이 없다. 이 체포는 도둑의 경우와 달리 ‘학구적인 어떤 것’(something scholarly. p. 16)이라고 하고 있다. 법을 위반한 경우가 아니어도 누구나 체포될 수 있고 기소 당할 수 있는 죄인이란 뜻인가? 지식인으로서 아무리 노력해도 무죄를 벗을 수가 없었다.

작가는 유대인으로서 무신론자로 되어 있다. 중간 즈음에서는 사법부의 비리와 부조리를 파헤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읽었지만 석연치 않다. 성당에서 만난 사제(prison chaplain)가 예시로 들었던 ‘법원 앞 문지기’(Before the law stands a door-keeper. p. 170)의 비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혹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과연 누가 속인 자인가? 뇌물을 받으며 법원을 끝까지 못 들어가게 하고 헛된 구원의
메세지(message of salvation, p.172)만 준 문지기가 기만자인지, 문지기의 옷에 묻은 벼륙에게까지 법원을 들어가게 해 달라고 도움을 간청하던 시골에서 온 그 사람이 기만자인가?

법원 안으로 들어가면 판사 즉 심판주가 기다린다. 아무도 이 책에서 심판주를 만나지 못했다. 주인공이 채석장에서 죽게 될 때 누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 친구인가? 선한 자인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논리는 흔들지지 않은 진리이지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가 만난 적이 없는 판사는 어디에 있고,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고등법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여기서 판사와 고등법원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있다’(everyone has his own cross. p. 107)는 표현이 있었다. 원치 않아도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일까? 부귀영화와 신분의 비천함 상관없이 모두 피고인으로서 결국 구원의 손길을 얻지 못한 채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함을 이야기 하고자 한걸까? 왜 작가는 희망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는지 답답하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친구, 선한 자, 논리(Logic)가 해결하지 못한 구원의 손길이 어디서 올지는 독자 스스로 찾게한다.

어렵고 난해했으나 원인과 결과를 찾기 위해 조바심을 내고 잘 따라 읽었는데, 미궁 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 야속하지만 ‘생각의 힘’을 기르게 해 주어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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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e Christianity (Paperback) - C.S.루이스의『순전한 기독교』원서
Lewis, C S / Collins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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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동일한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직장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이 선정되어 다시 읽었다. 처음 읽고 나서도 후기를 쓰지 않은걸 보니 내가 집중해서 읽지 않은 것 같다. 두 번째도 모두 잘 이해는 못한 것 같다. 여전히, 언제나 부족한 나는 의지할 목발, 어깨, 팔이 필요하다. 나는 포도나무 가지로서, 절대 포도나무를 떠나 열매를 맺을 생각을 꿈꿀 수 없다는걸 새삼 느낀다.

‘나니아 연대기’란 책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작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한 때 무신론자이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기독 서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기정 사실화하고 시작하지만, 이 책은 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가로 시작한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 즉, 이기적이면 안되고 공정해야 하며 악이 아닌 선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본성이 있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할까?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온 우주는 어떤 섭리와 법칙하에 운행되고 있다. 그 섭리의 주관자가 누구인가?

오늘 우연히 물리 전공자 지인을 만났다. 난 오랫동안 과학적인 논리 끝에서, 과학자들이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이성적 논리적 분석적 논리로 풀지 못하는 과학적 원리가 얼마나 많을까? 지인은 그걸 ‘우연’이라고 말했고, 배웠던 물리학 교수님들이 대부분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연’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다. (Coincidence is God‘s way of remaining anonymous.) 우연의 우연이 반복되면 과연 그것이 우연일까? 우연이 절대자의 섭리가 아니라면 우연을 어떤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인간 본성은 옳은 일을 행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해서는 안된다는걸 알고는 있으나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기독교인은 절대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회개로 인해 용서를 약속받으며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얻지만, 기독교는 위안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믿기지 않는 당황과 놀라움으로 시작한다. 진리를 찾으면 위안을 얻고, 위안을 찾으면 그 어떤 진리와 위안을 얻지 못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내가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3장 기독교인의 행동 중용서이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고(loving your neighbors as yourself),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hate the sin and not the sinner)는 구절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낙담할까? 어떻게 원수까지, 미운 이웃까지, 죄를 지은 사람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는지, 이해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걸 실천해 왔다는걸 알고 깜짝 놀랐다. 즉, 나 자신(myself)을 그렇게 쉬지 않고 사랑해 왔다는 문구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실 나 자신의 교만, 허영, 큰 실수, 욕심, 분노, 질투, 게으름 등등이 싫고 혐오스러웠던 적이 얼마나 얼마나 많은가? 왜 내가 그 때 그 사람에게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큰 죄를 지었는지 내가 너무 원망스럽고 부끄럽다. 그런데, 쉬지 않고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기 위해 운동, 독서, 읽기 등등으로 노력해 왔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아픔과 분노가 약해지길 기다려 주고, 회복되어 다시 새롭게 시작할거라 믿어 주었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대하라고 했다. 꼭 사랑이라고 해서 좋아할 필요는 없어도 용서하고 기다려 주고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사랑스러운 점이 하나도 없어도 오직 내가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 것처럼, 사랑해야할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영적인 암으로 정의되는 교만(Pride)은 기독교에서 가장 죄악시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교만은 타인과 경쟁하며 내가 아닌 나를 높이려하는 거짓된 자아의 모습이다. 추하고 어리석은 거짓 자아의 옷을 벗음으로써 기쁨으로 낮아지는 겸손과 참다운 나를 찾는 무한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내가 교만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도 교만이다(If you think you are not conceited, you are very conceited indeed.)라는 문구에서 엄청 충격을 받았다. 겸손의 옷을 입으며 믿음의 진보를 이루기가 이리 어려운가?

믿음이란 무엇일까? 상대가 누구이든 믿는 사람이나 물건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위안을 주지만 절대 절대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했다.(Never never pin your whole faith on any human being.) 조변석개로 변하는 나를 누군가가 믿고 있다면, 그는 나의 부족한 모습으로 반드시 실망할 것이다. 그 실망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 쉽지만 만족시켜 드리기는 어렵다고 했다.(God is easy to please, but hard to satisfy.)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new man)이 되어, 사랑받고 복받기를 넘어, 작은 예수(a little christ)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We must get over wanting be needed.) 불완전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프로젝트임을 알지만, 그런척하며 살기(pretence, behave as if)를 반복하다보면 실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만족하실 때까지 불가능 프로젝트에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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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3-08-04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리뷰네요 ^^

serendipity 2023-08-04 05:58   좋아요 0 | URL
❤️
 
How to be Perfect : The Correct Answer to Every Moral Question - by the creator of the Netflix hit THE GOOD PLACE (Paperback) -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원서
Mike Schur / QUERCUS PAPERBACKS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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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해 지는 법(모든 도덕적 질문에 대한 정답)’이 없다는걸 알면서 혹시나하고 미혹되었다. 사실 정답이 있었다면 이미 수 많은 현자에 의해 개발 되었을 것이다. 없는줄 알면서 책을 읽는 것은 남들도 나와 같음에 위안을 얻기 위함일까? 부제목에 답이 있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 다양한 시대에 정답(correct answer)이 한 개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실상, 정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다.

기본값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도록 설정되었다 하지만, 도덕적 담론은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고 다룰 가치가 있다. 누구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한 사람이 된다(A person is a person through other people. p. 93)고 했다. 우리가 있기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 I am because we are; and since we are therefore I am. p. 94). 우리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에게 빚진 자로서, 서로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필요을 넘어 의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옳은 생각과 행동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동네 마트 카트를 제자리에 둘 것인가, 얼마의 금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할 것인가, 친구의 새 옷에 대해 솔직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가 등등의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나면서 도덕적 딜레마와 피로감(ethical dilemma, ethical exhaustion)에 빠지게 된다. 삶의 목적이 부유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라 했던 Aristotle, 다수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Utilitarianism, 정언명령에 따라 의무감으로 행동하라는 Kant, 부조리한 세상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Existentalism 등등의 철학적 이론과 담론을 모두 살펴 보았으나 그들을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가 없음을 알게된다.

어떤 한 개의 철학이론을 적용하든, 노력하고 노력하여 모든 철학적 개념을 심사숙고하여 적용하듯 실패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억만장자가 엄청난 액수를 재난 기금으로 기부하였으나, 그의 총 자산에 비해 매우 적은 액수라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한다. 개인적인 선호도때문에 의도치 않게 나쁜 결정을 한 것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아이폰을 구매한 것도, 수백만명의 아시아인들이 굶어죽어감을 방치한 파렴치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

결국 작가는 우리가 선을 그을(draw the line) 필요가 있다고 한다. 도덕적 개념의 잣대를 모든 사람과 상황에 일괄적으로 획일적로 적용할 수가 없다. 선을 그어 일정 한계선을 정하고 모순이 발견되면 숙고하여 재설정하고 실패 속에서 진실값을 찾아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히는 것은 현재 누리는 수많은 축복은 노력과 의지에 의해 얻은(earned) 당연한 것이 아니라, 행운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A lot of life is just luck.) 나의 노력만이 아니라 상황과 시대에 따른 행운임을 기억할 때 겸허해지고, 서로에게 빚진자임을 알게된다. 마지막으로, 사과의 중요성이다. 도덕적으로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날마다 실패하기에 그럴 때마다 사과(apilogizing)를 해야한다. 사과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위해 우리가 반드시 올라야하는 최정상이다. (Apologizing is the final ascent on the mountain we have to climb in order to become better people. p.244) 돌봄과 노력이 윤리적 향상의 열쇠이고, 실패가 불가피한 결과라면, 사과는 실패를 위한 퇴직자 면접과 같다.

내가 원래 좋아했던 Samuel Beckette의 명언이 3번 이상 반복된다. 작가가 의도했던 정답이 아닐까?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완벽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도 완벽하지 않은 단순하고 아름다운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To demand perfection is to deny the simple and beautiful reality that nobody is perfect. p.252). 궁금했던 것에 대하여 마지막 장을 덮어도 답을 구하지 못함에 답답증이 있어야 하는데 위안을 얻는 것은 왜일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지속적 노력은 멈출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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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본의 되는 삶이 곧 자녀들의 믿음을 키우고 지켜주는 초석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과의 관계로 오히려 피폐해 질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전도단 프로그램에 참석하신 후 사람을 용서하신 아버지는 매 년 선교지를 다녀오시고 선교사 후원을 50가정 정도 하시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20년 동안 가족 수련회를 즐겁게 준비하셨다. 새벽 2시까지 선교사 편지를 읽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 제목 10가지 등을 나누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선교사를 초대하여 숙소를 마련해 주고 벽면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후원하는 선교사로 부터 받은 편지를 함께 붙여 놓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그런 믿음의 가정에서 올곧게 자란 작가는 대학생이 되어 과외를 하면서부터 선교사 후원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용돈기입장을 작성하며 성경적 재정관을 갖게 된 그는 화려한 것에 취해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 했고, 내 수준의 멋짐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이 훨씬 크고 아름다운 것을 아는 진정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하루 3개씩 감사거리 나누는 ‘감사 챌린지’도 배워보고 싶고, 미리 드리는 십일조, 십이조는 감동적이다. 신앙의 발목을 잡는 예민한 영역인 십일조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훈련해 온 작가는 하나님이 돈과 재능을 우리에게 맡겨주심을 항상 기억하며, 물질, 재능, 시간을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잘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스타 강사를 꿈꾸었던 그를 상상을 뛰어넘어 새 길로 놀랍고 독특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이, 역시 내 인생의 작은 점들을 절묘하게 이어서 사용하시길 기도한다.

내가 가진 재능과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나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얼마나 더 노력하고 훈련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사수하여, 바쁨 가운데 주님의 오아시스를 만나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 노력하자. 내 마음이, 나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올곧게 서 있는지 항상 점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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