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사랑을 대표하는 영화 Serendipity에 이 책이 소개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랑을 위한, 사랑에 의한’ 책이다. 내가 가요를 듣지 않는 이유는 영어를 공부하며 팝송에 몰두해서이기도 하지만 가요를 들으면 심하게 감정이 이입되어 취하기 때문이다. 가요의 대부분은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책은 고전이기에 찾은 것이지, 연애 소설을 고집한 것은 아닌데,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짖는 사랑때문에, 그간 나의 기억 저편에 있던 연애 감성이 소환되었다.
반 세기 동안, 정확히 51년 9개월 4일 동안 기다린 사랑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은 마치 나에게 다시는 사랑을 소재로 한 문학서를 읽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고 있는 것 같다. 가요를 듣지 않으려 하는 이유와 비슷한 개념이다. Prince Charming이라는 표현은 진부하고, Mr. Right이라고 하자. 누군가의 Miss Right이 되지 못한 탓인지, Mr. Right을 찾지 못한 채, 내게 영원한 불꽃 같은 사랑은 신포도로 남았다. 난 용기없는 여우가 되어 이 세상에 변치 않는 사랑은 없으며, 그저 순간과 상황에 충실한 일시적 사랑만 있다고 믿어 왔던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사랑을 호소하는 Florentino Ariza의 사랑은 진부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다.
책이 재미 없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했던 나는 콜롬비아의 20세기 사랑은 현실에 뿌리 내릴 수 없는 구시대적 유물이라 치부하고 싶었나 보다. 물론 강한 질투심이 순간 순간 불타올랐음은 어쩔 수 없었다. 22세에 만난 Fermina Daza(18세)를 향한 사랑은 집착이나 편집증 같은 면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질투나 복수심에 근거한 기다림이 아님이 입증된다. 그녀의 남편이 죽기만를 기다리며 평생을 혼자 살지만 그가 살아가는 온전한 이유는 오로지 그녀 때문이었다. 명예, 부, 외모 및 건강관리를 위해 노력하게 한 것도 그녀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평생을 위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사랑에의 헌신에 대한 보답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거절 당한 후, 그녀가 유명한 의사와 결혼한 후 그의 전부가 무너질 수 있었으나 그는 단 한 순간도 낙담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 물론 그의 마음은 주지 않은 채 수많은 여성편력을 보여준 것은 이해하기 힘들긴 하다. 삶을 살아내는 방편으로 많은 여성들과 육체적 사랑은 하지만 마음은 오로지 한 평생 첫사랑을 향해 있었기에 결혼은 할 수 없었다.
순간 순간 망각의 잔인함에 당황하다가 첫사랑에 거절당한 기억에 눈물흘리며 불면의 밤을 보내던 그 남자가 남편이 죽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72세인 그녀에게 다가가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니 그녀는 얼마나 더 당황스러웠을까? 그러나 반 세기를 기다린 남자는 절대 포기란 단어를 알지 못한다. 76세 남자의 두근거리며 설레는 마음에 대한 묘사도 신선하다. 사랑이란 단어는 여전히 젊음 및 청춘과 잘 어울린다. 왠지 노년의 사랑은 잘 공감하기 어렵고 마치 그들에게 사랑이란 감정이라기 보다 현실 기반일거라 치부하기 쉽다.
남편이 죽은 후 그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그녀로부터 분노의 편지를 받고 좌절한 후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과거를 불러내며 과거의 향수에 젖는 내용이 아니라 과거를 잊고 잘 나이드는 법으로 장문의 편지를 보내며 그녀의 마음이 열리기를 인내심있게 기다린다. 첫 장면에 나이들어감에 대하여 두려운 나머지 60세에 자살한 남자 이야기가 나오듯이, 이 책은 전반적으로 불멸의 사랑뿐 아니라, 결혼, 나이듦, 그리고 노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랑에 관한 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사랑의 주인공들은 꽃다운 나이이기에, 70대의 두 주인공이 긴장되고 떨려서 서로 당황했다는걸 알고 더 당황하고 있는 섬세한 묘사는 나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과연 사랑이 무엇일까? Fermina Daza는 열렬한 연애 편지를 주고 받고도, Florentino Ariza를 보며 Poor Man이라 부르고 사랑은 허상에 불과했다고 그를 거절한다. 그녀에게 그는 한낱 누군가의 그림자(shadow of someone she had never met)였다. 반면 Florentino Ariza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태어나기도 전에 꺼져버린 그만의 사랑의 지성소 안에서 평생을 살면서 한 사람만을 위해 산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보다 더 지고지순한 일편단심을 묘사한 문학서를 찾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그의 삶의 고통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동력이 되어 세상 기준에서 성공한 삶을 살았으니 반드시 실패한 삶은 아니라 할 수 있는 그에게 묻고 싶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그는 아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랑은 바로 그녀이고, 그녀가 그의 사랑의 전부이다.’라고 할 것 같다. 믿기지 않지만, 20세기 사랑을 21세기에 적용할 수 없으나, 책 속의 불멸의 사랑이지만, 그래서 더욱 이 책은 오늘날의 인스턴트 사랑대비 보석처럼 반짝 반짝 빛이나는 순애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