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2~2013년 경 김연경본으로 읽었으니, 거의 8년 만이다. 도스또예프스끼 탄생 200주년이라 하는데, 비싼 열린책들 기념본 뇌동매매는 자제하고(인테리어로만 기능할 확률 99.9%), 책장에 덩그러니 홀로 놓여 있던 김희숙본 1권을 시작으로 한 권씩 구매하면서 차근차근 읽어 나가기로.


앞뒤로 뒤적이고, 밑줄 긋고, 인상적인 부분은 통째로 타자를 쳐가며 꼼꼼히 읽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의 장광설에 막혀, 전체적인 내용은 알겠지만, 디테일에서는 놓친 게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대심문관의 말이나 스메르쟈코프의 궤변스런 논증,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 등은 너무 길기 때문에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무진 애를 먹었다.


반면,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은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데, 부분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지점이 많다. 섬망증에 걸린 이반 표도로비치의가 자신의 내면과 대화할 때에는 프로이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언젠가 더 옛날에 한번은 "어째서 당신은 그 아무개를 그토록 증오하는 거요?"라는 질문을 받았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그는 어릿광대 같은 파렴치한 감정이 폭발해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왜냐하면 이렇소. 그 사람은 사실 나한테 아무 짓도 안했지만, 대신 나는 그 사람한테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나 했소. 그런데 그 짓을 하자마자 바로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증오하게 되더란 말이오."


너도 그녀를 본 적이 있지? 정말 미인이잖냐. 그런데 그때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런 게 아니었어. 그 순간 그녀가 아름다웠던 건, 그녀는 고결하고 나는 야비한 놈이라는 것, 그녀가 관대하고도 숭고하게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나선 데 반해, 나는 빈대에 불과하다는 것 때문이었어


그렇게 자기 가슴 속을 모두 털어놓자마자, 나한테 그렇게 자기 가슴속을 다 보여줬다는 게 갑자기 부끄러워진 겁니다. 그래서 나를 이제 증오하게 된 거죠. 그는 끔찍이도 부끄러움을 잘 타는 가난한 사람에 속합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나를 너무 빨리 자기 친구로 받아들이고 너무 빨리 자신을 내줬다는 데 스스로 모욕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 일화는 너무 독특한 것이어서, 내가 그걸 어디서 따왔을 리는 없어. 그걸 까맣게 잊다시피 했는데…… 지금 무의식중에 머리에 떠올랐어 ― 바로 내 머리에 저절로 떠오른 거지, 네가 얘기한 게 아니야! 인간은 이따금 수천 가지 일을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떠올리거든, 심지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말이야…… 그 일화는 내 꿈속에서 떠올랐어. 그러니까 너도 이 꿈인 거야! 너는 꿈일 뿐, 실재하지 않아!


오, 우리는 사람들에 에워싸며 살면서 무엇이든, 심지어 가장 악마 같고 위험한 생각조차 그들에게 즉시 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기 좋아하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당장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곧바로 전적인 동감을 표해주고,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함께하며 우리에게 맞장구 쳐주고 우리의 성정을 거스르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8년 전『죄와 벌』(홍대화 역)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김연경 역)을 처음 읽었을 때, (살해도구가 도끼라서 그런지) 강렬하고 메시지가 뚜렷한 『죄와 벌』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도, 많은 도끼 팬들이 『까라마조프 형제들』를 최고로 여기는 게 이상했고, 내 이해력이 문제라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두번째 읽은 지금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두 최고의 심리소설이긴 하지만, 『까라마조프』에는 민중의 구원과 기독교적 인간애가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초반 조시마 장로의 설교, 조시마 장로의 회고, 에필로그에서 일류사를 떠나내는 알료샤와 소년들의 맹세는, '친부 살해'라는 잔인한 소재와 대비되어 깊은 감동을 준다. 거기에 거장의 미완성 유작(2부작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아쉬움까지 더해진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게 아닐런지. 나에게는 아직까지 6대 4 정도 『죄와 벌』이 판정승이지만, 나이가 더 들어 ― 아마도 저자의 나이가 되어 ― 읽으면 『까라마조프 형제들』이 인생 최고의 문학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식 이름에 익숙해 진 점은 이번 독서의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부칭과 수많은 애칭에 굴하지 않았다. 또 역자는 집요하게 러시아식 표현들을 살리려 애쓴 것 같은데, 그게 우리말로는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네들의 정서를 담아내는 것 같아, 되도록 저항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 '존대법'이 그런 경우인데, 알료샤와 열네살 소년들이 맞존대 한다든가, 약간 정신이 이상한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에게 굽실대며 존대를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역자는 일일이 주석을 달아 읽는 이들의 심리적 불편함을 최소화 시키려 했다.


주석 뿐 아니라 번역도 매우 훌륭하다고 평하고 싶다. 매우 긴 문장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으며, 다른 도끼 선생의 번역서들에 비해 힘을 많이 뺀 느낌이었다. 여성적인 도스또예프스끼라고나 할까. 게다가 주석도 간략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렵지만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다만, '縣'이나 'O등 대위' 같은, 일제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역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 아쉬운데, 이는 우리나라 러시아 문학계가 함께 고민하기를 바란다(러시아 문학 출판의 대장주인 열린책들이 나서야 하는 건 아닌지).


마지막으로, 나는 성경은 단 한 번 정독했을 뿐이지만, 이 작품의 題辭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 본문에서도 두어번 정도 언급되는 이 말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두번째 읽은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요한복음」12장 24절


나의 주인공인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전기를 시작하며 나는 어떤 당혹감에 빠져 있다.
- P13

무엇보다 거짓을, 모든 종류의 거짓을, 특히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하십시오. 자신의 거짓을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그것을 들여다보십시오.
- P118

그들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머무르는 한, 어떤 학문도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할 것이고,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우리의 발아래 갖다 바치면서, ‘차라리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제발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 P512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사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설령 주위가 온통 빵으로 넘친다 해도 인간은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머무르느니 서둘러 자신을 없애버릴 것이다. - P515

인간은 기적을 부정하는 그 순간 곧바로 신까지 부정하게 되고 마니, 이는 인간이 신보다는 오히려 기적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P517

끈적이는 어린 새잎들을 내가 정말 사랑할 수 있다면, 오직 너를 떠올림으로써만 그것들을 사랑하게 될 거다. 네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고, 삶에 싫증을 내지 않을 거야. - P534

영리한 사람과는 잠깐 얘기해도 흥미롭다더니, 그럼 그 말이 맞군요. - P565

내가 너를 그에게 보낸 건, 알렉세이, 같은 형제인 너의 얼굴이 그를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에게 달렸고, 우리의 모든 운명도 마찬가지란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명심하거라. - P13

"몇 달, 몇 년을 더 살 겁니다." "아니, 몇 달, 몇 년이 왜 필요합니까!" 형이 소리치지요. "뭣하러 날수를 셉니까, 인간이 모든 행복을 알게되는 데는 단 하루로 충분해요." - P22

작은 씨앗, 아주 작은 씨앗 한 알만 있으면 됩니다. 순박한 평민의 영혼 속에 그것을 떨어뜨리면, 그것은 죽지 않고 그의 영혼 속에서 한평생 살게 될 것이며, 밝게 빛나는 점과도 같이, 위대한 암시와도 같이, 암흑 속에서도, 그의 죄악의 악취 속에서도 몸을 숨긴 채 살아 있을 것입니다. - P31

민중을 소중히 아끼고 민중의 마음을 잘 지켜주십시오. 정적 속에서 민중을 교육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여러분 수도사들이 수행해야 할 위대한 일이니, 이 민중이야말로 ― 하느님의 체득자이기 때문입니다. - P74

그대는 그 누구의 심판자도 될 수 없음을 특별히 기억해두라. 그것은 이 심판자가 자신이 자기도 그의 앞에 서 있는 자와 똑같은 죄인이며,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의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책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는, 이 지상에 범죄자의 심판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 P88

그대는 그 누구의 심판자도 될 수 없음을 특별히 기억해두라. 그것은 이 심판자가 자신이 자기도 그의 앞에 서 있는 자와 똑같은 죄인이며,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의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책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는, 이 지상에 범죄자의 심판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 P90

아픈 사람을 하나 거기다 두고 와서. 그 사람이 낫는다면, 나을 거라는 걸 안다면 당장 내 인생에서 십 년이라도 내놓을 텐데! - P312

내가 화나는 건, 그이가 나 같은 여자를 두고 질투했대서가 아냐, 전혀 질투를 안 한다면 오히려 화가 났겠지. 나는 그런 여자야. 질투를 한대서 화를 내지는 않아, 나 자신도 성미가 사나워서 질투를 잘 하니까. 다만 내가 화나는 건, 그이가 나를 전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지금 일부러 질투하는 척했다는 거야, 바로 그거야. - P113

거기엔 그런 사람들이 많아, 수백 명은 되겠지, 땅 밑에서 손에 망치를 들고 사는 사람들이. 오, 그래, 우리는 쇠사슬에 묶이고 자유를 잃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 우리의 위대한 고난 속에서 우리는 새로이 기쁨으로 부활할 거야, 기쁨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도 없고, 하느님도 존재할 수 없어, 왜냐하면 하느님은 기쁨을 주는 존재니까, 그건 하느님의 특권이야, 위대한 특권……주여, 기도 속에 인간이 녹아 스러질지어다! 거기 땅 밑에서 하느님 없이 내가 어찌 살겠어? - P163

어떤 사람은 치구가 되느니 차라리 적으로 있는 게 더 유리하지. 이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 P167

"꿈을 꿀 때, 특히 뭐 저기 위장장애나 다른 무슨 이유로 악몽을 꿀 때, 이따금 인간은 지극히 예술적인 꿈을, 지극히 복잡하고도 실제적인 현실을, 그런 사건들을, 또는 그런 사건들이 아주 교묘한 구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세계 전체를, 그것도 자네들 세계의 가장 숭고한 현상들로부터 셔츠 가슴판에 달린 마지막 단추 하나에 이르기까지, 예쌍도 못할 만큼 아주 세세하게 보게 되지, 맹세코 레프 톨스토이라도 이런 것은 절대로 지어내지 못할 테지만, 때로는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ㅇ이 절대 무슨 작가들이 아니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관리들, 잡글쟁이들, 평신도 사제들이란 말일세……" - P258

물론 고통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대신 살고 있잖은가,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누리고 있지, 왜냐하면 고통은 곧 삶이니까. 고통이 없다면 삶에 무슨 낙이 있겠나 ― 모든 것이 그저 끝없는 기도로 변하고 말 텐데. - P264

그 일화는 너무 독특한 것이어서, 내가 그걸 어디서 따왔을 리는 없어. 그걸 까맣게 잊다시피 했는데…… 지금 무의식중에 머리에 떠올랐어 ― 바로 내 머리에 저절로 떠오른 거지, 네가 얘기한 게 아니야! 인간은 이따금 수천 가지 일을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떠올리거든, 심지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말이야…… 그 일화는 내 꿈속에서 떠올랐어. 그러니까 너도 이 꿈인 거야! 너는 꿈일 뿐, 실재하지 않아! - P269

"이토록 암울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거의 더이상 공포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는 데 우리의 공포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공포를 느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 같은 습성이지, 이런저런 개인의 개별적이 악행이 아닙니다." - P363

"오, 우리는 사람들에 에워싸며 살면서 무엇이든, 심지어 가장 악마 같고 위험한 생각조차 그들에게 즉시 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기 좋아하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당장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곧바로 전적인 동감을 표해주고,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함께하며 우리에게 맞장구 쳐주고 우리의 성정을 거스르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 P383

자신의 제한된 존재 속에 갇힌 채 세상 전체를 비난하는 그런 영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혼을 자비로써 압도해주십시오, 이 영혼에 사랑을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면 이 영혼은 자신이 한 일을 저주하게 될 터인즉, 이 영혼 속에는 선량한 싹들이 너무도 많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 P472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많은 얘길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이처럼 아름답고 신성한 어떤 추억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좋은 교육일 겁니다. 그런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이랍니다. - P5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지금 지리학인가 - 수퍼바이러스의 확산, 거대 유럽의 위기, IS의 출현까지 혼돈의 세계정세를 꿰뚫는 공간적 사유의 힘
하름 데 블레이 지음, 유나영 옮김 / 사회평론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년엔가 처음 읽었으니, 5년만이다. 올해에는 지정학과 에너지 관련 책을 여러 권 읽어 관련 지식이 더 풍부해져 이해도가 더해질 수 있었다. 관련 서적 중 가장 교과서적이라 할 만하다. 각 나라의 지리적 기초는 물론, 테러리즘, 기후변화, 인구론의 기원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과학서적이지만 인류애에 대한 따뜻함도 놓치지 않는다. 이슬람에 대한 저자의 약간의 편견이 아쉽긴 한데, 책이 갖는 가치를 훼손할 만큼은 아니다. 지리학과 지정학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읽을 것을 권한다. 정말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스또예프스끼에 관한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열린책들에서, 200주년 기념 선집이 나왔나보다. 그런데 두가지가 아쉬운데, 1) 전집이 아니라는 것, 2) 열린책들이 자체 운영하는 표기법 대신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까라마조프'를 앞으로는 볼 수 없다. 열린책들이 열린책들다움을 버리면 굳이 찾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전집을 포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아르센 뤼팽이 조국 프랑스에 얼마나 많은 걸작 진품을 기부해왔는지 깨닫게 될 것이네. 하긴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자행한 것과 하나 다를 것도 없지." 

얼마 전 읽은 『속이 빈 바늘(기암성)』에서, 아르센 뤼팽이 전 세계에서 훔친 진귀한 보물을 그의 비밀 근거지인 에귀유 크뢰즈에 모아 둔 것을 보트를레에게 자랑하면서 한 말이다. 단순히 자신을 나폴레옹과 비교한, 엄청난 자신감으로만 비춰졌던 이 말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이 책 『벌거벗은 미술관』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작가의 연작인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와는 비슷한 듯 다르다. 역사적 인문학적 맥락에서 미술을 다루는 것은 같지만, 평소 저자가 미술에 대해 품어왔던 의문을 풀어나간 점이라든가, 그것을 현대미술 그리고 한국미술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점에서 다른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E.H. 카의 유명한 말을 '과거와 현재가 대등하게 마주하고 있다'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소화하여 미술사에 적용하고 있다.

책은 4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고전은 없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희랍 조각들이 사실은 로마에서 재현된 짝퉁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물론 이 책, 그리고 작가가 미알못인 나에게 알려주는 놀라운 사실은 이 뿐이 아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점, 로마의 신들이 희랍 신들을 표절한 점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여튼, 희랍이 올림픽의 나라였던 것을 상기하면 이때의 미술(인체 동상)은 당연히 남성의 육체미를 추구했다. 작가는 이러한 고대 희랍의 미술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나아가 해방전 우리나라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2장 '문명의 표정' 고대 조각상의 미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미술사에 미소와 엄숙한 표정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는데, 표정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서술한다. 이는 현대의 사진이나 현대미술까지 이어진다. 저자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동기가 이 챕터에 있는 것 같으며, 동시에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가설이 소개된다.

3장 '반전의 박물관'에서 드디어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박물관들은 제국들의 약탈의 전리품들이며, 이 시기에 박물관이 크게 성장했다. 그 약탈은 아프리카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마티스와 피카소는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조각상에 영감을 받아 전혀 새로운 미술을 창조해 낸다. 제국주의로 성장한 박물관이 현대인들의 미감을 뒤집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덧붙여, 루브르 미술관 앞에 피라미드가 건축된 맥락을 설명해준 점도 흥미로웠다. 유럽을 가보지 못해 그 피라미드는 영화 「다빈치 코드」를 보고 처음 알았는데, 그때도 왜 루브르 박물관 앞에 피라미드가 있는지 알지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4장 '미술과 팬데믹'은 흑사병이 서양미술에 끼친 영향을 다루고 있다. 초반은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에 등장한, 전염병 방지를 위한 독특한 의사 마스크를 그린 판화에서 출발하여, 흑사병 문학인 『데카메론』을 다룬 보티첼리의 그림을 소개하고, 전염병이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내세의 구원을 바라는 이들의 소액기부에 기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이어졌음을 서술하고 있다. 물론 현대와의 비교도 잊지 않는다. 20세기 대표적 팬데믹인 스페인 독감이 미술사에 어떤 작품을 남기게 했는지 보여준다. 

책이 마무리될 무렵, '벌써 끝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에 '미술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어 구입이 망설여졌으나, 생각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분량에 비해 가격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볍게 읽을 목적으로 샀으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동네서점에서 구입한 책인데 사인이 있다. 수량한정 친필인지, 전권 인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자 서명이 있는 책은 처음 가져봐서 기분은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래는 영국문학을 좋아했더랬다. 찰스 디킨스의 시를 연상케 하는 문장들은 원문으로 읽고 싶은 욕구가 샘솟을만큼 어찌나 아름다웠던고.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문학이 내게로 다가왔다.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2012년 경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 개봉 전, 위고의 원작을 이형식 교수의 번역본으로 읽은 게 결정적이었으리라. 한마디로 굉장히 어려웠다. 영미문학과는 다르게 철학적인데다 작가 특유의 장광설이 따라가기 힘들었는데, 거기에 직역을 고집한 이형식 교수의 문장은 어려움을 한층 더해 주었다. 

그런 만큼 5권을 마쳤을 때 성취감은 비할 데가 없었다. 직역한 번역문이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빅또르 위고', '빠리', '떼나르디에' 같은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한 원어에 가까운 발음들은 진짜 프랑스어를 읽는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최근 민음사에서 소장용 리커버가 나왔지만, 나는 이 판본을 여전히 갖고 싶다.

초반, 미리엘 주교가 은촛대를 장발장에게 주면서 '내가 당신의 영혼을 사서 주님께 드렸소.'라고 말하는 장면이 마지막에 장발장이 '주교님이 지금 나를 보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까'하고 고백하는 장면과 묘하게 대구를 이뤘고, 이는 영화에서도 충실히 다뤄졌다. 원작과 영화 모두 사랑한다. OST마저도.


『파리의 노트르담』은 정기수 교수 역본으로 읽었다. "~올시다" 같은 어투가 상당히 옛스러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파리', '주피터' 등 번역어가 싫었기에, 이 역본은 그다지 사고 싶지 않다. 내용만은 최고였다. 2019년 불에 타버린 노트르담 성당의 운명을 예견했음인지, 그는 성당의 모습을 지루하리만치 세세하게 묘사했다. 콰지모도의 애절한 감정을 암시한 에필로그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를 소재로 한 프랑스 뮤지컬의 OST도 굉장히 좋아한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이형식 교수의 두 번역서는, 작품 자체는 독창성 면에서 한단계 아래라고 본다. 『웃는 남자』의 마지막 장면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작품을, 『93년』은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번역의 수준 만큼은 『레 미제라블』에 필적했다고 본다.








『바다의 노동자』는 독특한 작품이었던 것 같지만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판타지적 성격이 강했다.


『사형수 최후의 날』은 사형제를 반대하는 젊은 날 위고의 격정적인 목소리를 담았다. 설득력이 있는 글인지는 모르겠다.







거의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근래 읽은 위고의 작품은 희곡 『왕은 즐긴다』이다. 알다시피,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원작이었기에 선택했던 것. 놀라웠던 점은, 많은 부분을 각색했음에도 원작의 설정과 대사가 상당히 그대로 쓰여 있었다는 점이다. 위고의 말로 널리 회자되는 '인생은 꽃, 사랑은 그 꽃의 꿀'이라는 대사도 여기에서 나왔는데, 오페라에는 반영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희곡임에도 재미있게 읽었다.








읽어야 할 위고의 책들...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