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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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르센 뤼팽이 조국 프랑스에 얼마나 많은 걸작 진품을 기부해왔는지 깨닫게 될 것이네. 하긴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자행한 것과 하나 다를 것도 없지." 

얼마 전 읽은 『속이 빈 바늘(기암성)』에서, 아르센 뤼팽이 전 세계에서 훔친 진귀한 보물을 그의 비밀 근거지인 에귀유 크뢰즈에 모아 둔 것을 보트를레에게 자랑하면서 한 말이다. 단순히 자신을 나폴레옹과 비교한, 엄청난 자신감으로만 비춰졌던 이 말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이 책 『벌거벗은 미술관』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작가의 연작인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와는 비슷한 듯 다르다. 역사적 인문학적 맥락에서 미술을 다루는 것은 같지만, 평소 저자가 미술에 대해 품어왔던 의문을 풀어나간 점이라든가, 그것을 현대미술 그리고 한국미술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점에서 다른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E.H. 카의 유명한 말을 '과거와 현재가 대등하게 마주하고 있다'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소화하여 미술사에 적용하고 있다.

책은 4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고전은 없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희랍 조각들이 사실은 로마에서 재현된 짝퉁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물론 이 책, 그리고 작가가 미알못인 나에게 알려주는 놀라운 사실은 이 뿐이 아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점, 로마의 신들이 희랍 신들을 표절한 점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여튼, 희랍이 올림픽의 나라였던 것을 상기하면 이때의 미술(인체 동상)은 당연히 남성의 육체미를 추구했다. 작가는 이러한 고대 희랍의 미술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나아가 해방전 우리나라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2장 '문명의 표정' 고대 조각상의 미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미술사에 미소와 엄숙한 표정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는데, 표정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서술한다. 이는 현대의 사진이나 현대미술까지 이어진다. 저자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동기가 이 챕터에 있는 것 같으며, 동시에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가설이 소개된다.

3장 '반전의 박물관'에서 드디어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박물관들은 제국들의 약탈의 전리품들이며, 이 시기에 박물관이 크게 성장했다. 그 약탈은 아프리카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마티스와 피카소는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조각상에 영감을 받아 전혀 새로운 미술을 창조해 낸다. 제국주의로 성장한 박물관이 현대인들의 미감을 뒤집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덧붙여, 루브르 미술관 앞에 피라미드가 건축된 맥락을 설명해준 점도 흥미로웠다. 유럽을 가보지 못해 그 피라미드는 영화 「다빈치 코드」를 보고 처음 알았는데, 그때도 왜 루브르 박물관 앞에 피라미드가 있는지 알지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4장 '미술과 팬데믹'은 흑사병이 서양미술에 끼친 영향을 다루고 있다. 초반은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에 등장한, 전염병 방지를 위한 독특한 의사 마스크를 그린 판화에서 출발하여, 흑사병 문학인 『데카메론』을 다룬 보티첼리의 그림을 소개하고, 전염병이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내세의 구원을 바라는 이들의 소액기부에 기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이어졌음을 서술하고 있다. 물론 현대와의 비교도 잊지 않는다. 20세기 대표적 팬데믹인 스페인 독감이 미술사에 어떤 작품을 남기게 했는지 보여준다. 

책이 마무리될 무렵, '벌써 끝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에 '미술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어 구입이 망설여졌으나, 생각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분량에 비해 가격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볍게 읽을 목적으로 샀으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동네서점에서 구입한 책인데 사인이 있다. 수량한정 친필인지, 전권 인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자 서명이 있는 책은 처음 가져봐서 기분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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