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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7

오늘의정진: 一月普現一切水/  일월보현일체수/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 100일 정진, 7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한 번 째와 일흔 두 번째 구절은

<雪山肥膩更無雜/  설산비니갱무잡 / 설산의 비니초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醐我常納 / 순출제호아상납 /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다.

一性圓通一切性/ 일성원통일체성/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一法徧含一切法 / 일법편함일체법/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였다.

  

제호관정(醍醐灌顶tí hú guàn dǐng) 이란 성어(成語)가 있다.

제호는 어제 언급했다시피 희말라야에서 자라는 비니초를 먹은 소()에서 나온 젖이 원료다.

즉 우유(牛乳)  말이다.  이 신성한 우유는 마치 성수(聖水)와도 같다.

관정은 본래 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密敎)계통에서 행해지는 의식으로 알려져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 귀의 하면 스승은 제자의 머리에 물을 뿌린다. 이러한 밀교의 입문식을 관정이라고 한다.

   관정을 하는 의미는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불성이 부처님과 스승의 가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나라'   염원이 담겨 있다. 제호관정은 관정의식에 사용하는 성수 대신 제호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제호관정이란 관정을 받는 사람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굳이 꼭 깨달음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이 관정을 받고 아주 빛나는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는 뜻도 된다.

   관정의식을 언급하니 기독교 의식중에 세례(洗禮)의식과 상당히 비슷하지 않나 싶다. 세례는 물을 통해 죄를 씻고 영혼의 정화를 상징한다. 관정은 내 안에 본래 있는 불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신성한 물로 인간의 영혼을 정화를 시키고 각성한다는 의미에서는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은 일흔 세 번 째와 일흔 네 번째 구절

一月普現一切水/  일월보현일체수/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一月攝 / 일체수월일월섭 /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諸佛法身入我性/ 제불법신입아성/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還共如來合 / 아성환공여래합/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하나의 달이 수 없이 많은 강물에 비춰진다.

강물에 비춘 달들은 모두 하늘에 떠있는 달이 본체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부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서 나왔고, 나의 성품이 바로 부처이다.

성품이 각각 다르다 하지만 본래 성품은 하나.

세상은 본래 화엄(華嚴)세상이다.

두두물물 부처 아님이 없다.


<일일 소견>

관정과 세례는 서로 다른 종교 의식이지만 그 본질을 구하는 점은 놀랍도록 같다.

그런데도 종교의 참 뜻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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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6

오늘의정진: 雪山肥膩更無雜/  설산비니갱무잡 / 설산의 비니초 다시 잡됨이 없어


- 100일 정진, 7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번 째 구절은

<龍象蹴踏潤無邊용상축답윤무변 / 용상이 차고 밝음에 윤택함이 그지없으니

三乘五性皆惺悟삼승오성개성오 /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 구나> 였다.


   깨달음에 이르는 수레가 작은 것이 소승, 큰 것을 대승이라고 부른다.

남방 불교를 대표하는 소승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고, 북방 불교를 대표하는 대승은 보살의 경지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소승은 대승 보다 못하다는 생각, 대승이 소승보다 우월하다는 차별적인 관념이 부지불식간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승, 소승, 그리고 삼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삼승(三乘)은 결국 일승(一乘)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오직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참 성품, 본래 마음자리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


오늘은 일흔 한 번 째와 두 번째 구절

雪山肥膩更無雜/  설산비니갱무잡 / 설산의 비니초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醐我常納 / 순출제호아상납 /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다.

一性圓通一切性/ 일성원통일체성/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一法徧含一切法 / 일법편함일체법/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만년설이 쌓인 설산은 희말라야 산을 뜻한다. 희말라야가 어떤 산인가? 신들이 사는 곳이라고 부를 만큼 신성한 산이다. 세속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눈덮인 산봉우리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 비니초라는 식물은 희말라야에서 자라는데 비니초가 자라는 지역은 다른 잡풀들은 자라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설산의 비니초는 순수하며 신비롭다. 그런 비니초를 먹은 소가 젖을 짜서 만들어 낸 유제품(乳製品)을 제호(醍醐)라고 한다. 제호는 쉽사리 얻어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희말라야 같은 높은 산과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는 비니초라는 식물, 또 그 풀을 먹는 젖소까지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젖소의 젖을 짜내야만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유제품이라 보통 사람이 얻기는 참으로 어렵다. 마치 깨달음을 얻기가 순수한 제호를 얻는 것만큼 어렵다는 비유라고 본다.

   그런데 증도가를 노래하는 영가현각(永嘉玄覺665~713) 스님은 항상 받는다고 했다. 스님이 받는다면 누구가 에게 공양(供養)을 받는 것 이리라. 스님은 얻기 어려운 순수한 제호를 늘 항상 공양 받는다고 했다. 도달키 어려웠던 깨달음의 경지를 이제는 마음대로 오고 간다는 뜻이다.

   하나의 성품이 뚜렷해지니 모든 성품에 두루하게 통한다. 그리고 하나의 법에 일체의 모든 법을 포함한다. 법성계에 나오는 <일중일체다중일,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一卽一切多卽一)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인 경지가 바로 이 아닌가?


<일일 소견>

이제 100일 정진도 70일을 넘겼다. 오늘부터 남은 30일은 4구절씩 의미를 살펴봐도 무방할 것 같다.

숙능생교(熟能生巧shú néng shēng qiǎo), 단련이 될 수록 익어지고, 기교가 생겨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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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5

오늘의정진: 龍象蹴踏潤無邊 용상축답윤무변 /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함이 그지없으니


- 100일 정진, 7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아홉 번 째 구절은

<震法雷擊法鼓 진법뢰격법고 /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布慈雲兮灑甘露 포자운혜쇄감로 / 자비의 구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도다.


가뭄에 단비는 생명수가 되듯이, 수행자에게 법비는 감로수가 된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이무기가 용이 되듯이, 고된 수행 끝의 구도자에게 깨달음은 부처를 이루게 한다. 수행의 결과가 눈 앞에 보이는 듯하다.


오늘은 일흔 번 째 구절

龍象蹴踏潤無邊/ (용 용,코끼리 상, 찰 축,밟을 답, 윤택할 윤, 없을 무, 가 변 )

용상축답윤무변 /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함이 그지없으니

三乘五性皆惺悟/ ( 석 삼, 탈 승, 다섯 오, 성품 성, 다 개, 영리할 성, 깨달을 오)

삼승오성개성오 /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 구나


승천하는 용은 하늘을 마음대로 날으면서 비와 바람으로 온갖 조화를 부린다.

성난 코끼리는 땅 위를 박차며 눈 앞의 장애물을 짓밟아 버린다.

진리의 품성은 천지에서 거침없는 용과 코끼리처럼 아무런 걸림이 없다.

삼승(三乘)에서 탈 승()’은 대승(大乘), 소승(小乘)에 나오는 '' 과 같은 의미 이다.

승이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레를 말한다.  대승이 큰 수레라면, 소승은 작은 수레를 일컫는다.

여기서 삼승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세가지 수레를 뜻한다.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삼승이라 부른다. 먼저 성문성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지칭한다. 혹은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물었다는 제자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연각승은 12 연기법에 의해 깨달음에 이른 것을 일컫는다. 혹은 스승없이 홀로 깨쳤다고 하여 독각승(獨覺乘) 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보살승은 보살의 6바라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의지하여 대승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오성(五性)이라 하면 보통 오성은 가지 성정(性情). 기쁨 희(), 노여움 노(), 욕심 욕(), 두려움 구(), 근심 수()를 말한다. 다만 불교에서 오성은 다섯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성품을 뜻한다. 성문정성(聲聞定性), 독각정성(獨覺定性), 보살정성(菩薩定性), 부정정성(不定定性), 무성유정(有情)을 일컫는데 성문, 독각, 보살은 방금 언급했던 삼승의 깨달음의 성품이고, 부정정성과 무유정성은 삼승에 속하지 않는 성품이다. 그중 부정정성은 선도 악도 아닌 성품으로 선악의 가능성을 지닌 성품을 말하고 무성유정(有情)은 아예 성품이 없어서 성불할 수 없는 성품을 뜻한다.

결국 삼성과 오성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뜻한다.  본래 마음 성품은 걸림이 없으니 삼승이든 오성이든 구애(拘碍) 받지 않는다. 용과 코끼리가 삼승과 오성을 전부 차고 짓 밟고 다니듯 그냥 다 깨진다는 것이다.

깨진다는 것은 깨달음이 확 열렸다는 뜻이다. 


<일일 소견>

마음 가는 대로, 걸림 없이용처럼 코끼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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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4

오늘의정진: 震法雷擊法鼓진법뢰격법고 /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 100일 정진, 6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여덟 번 째 구절은

<非但能摧外道心 비단능최외도심/다만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早曾落却天魔膽 조증락각천마담 /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려도다.


   보리수 아래 싯다르타가 정각을 이루기 전에 마왕파순(魔王波旬)의 끈질긴 방해가 시작 되었다.

마왕의 군대를 보내 싯다르타를 공격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딸들을 보내 유혹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결국 마왕의 온갖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등장하는 마왕파순을 다른 말로 마라(Mara) 또는 천마(天魔)라고도 부른다.

파왕파순은 정각을 이룬 붓다를 향해 깨달음을 증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붓다는 결가부좌 상태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오른손바닥을 오른무릎에 포개고 오른손가락 을 땅을 향하게 한다. 이러한 손동작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이라는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붓다가 항마촉지인을 행하자 땅속에서 과거 칠불, 즉 과거 생의 일곱 부처님이 나타나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증명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천마는 우리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헤메게 하고 정신 못 차리게 하며 마음을 괴롭히는 번뇌가 바로 마왕파순이자 천마이다.

넓게 보면 마음의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외도의 마음이든 천마의 마음도 내 본래 마음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니 본래 마음을 찾는 것, 번뇌를 녹이는 길이요, 천마에게 항복 받는 길이다.


오늘은 예순 아홉 번 째 구절

震法雷擊法鼓/ (진동할 진, 법 법, 우뢰 뢰, 칠 격, 법 법, 두드릴 고 )

진법뢰격법고 / 법의 우뢰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布慈雲兮灑甘露/ ( 베 포, 자비 자, 구름 운, 어조사 혜, 뿌릴 쇄, 달 감, 이슬 로)

포자운혜쇄감로 / 자비의 구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 도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자

하늘은 북이 되었다.

두들겨 울려 퍼지는 북 소리에

흩 뿌려지는 물방울들

감로수가 되어 대지의 생명들을 일깨운다.

떨어지자 솟아난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번쩍이자 울린다.

깨달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하고 그러하니 그리되어지다.

, 우르르 쾅 이다.


<일일 소견>

3월 봄 비는 언제 쯤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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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3

오늘의 정진: 非但能摧外道心 비단능최외도심 / 다만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 100일 정진, 6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일곱 번째 구절은

<大丈夫秉慧劍대장부병혜검/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般若鋒兮金剛焰반야봉혜금강염/반야의 칼날 이요, 금강의 불꽃 이로다.>


깨달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지혜를 기르고 자비를 키우는 것이야 말로 수행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지혜를 기르지 않고, 자비를 키우지 않는 수행으로는 도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가 없는 가르침은 모두 외도에 불과하다.  


오늘은 예순 여덟 번째 구절

非但能摧外道心/ (아닐 비, 다만 단, 능할 능, 꺽을 최, 바깥 외, 길 도, 마음 심 )

비단능최외도심 / 다만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早曾落却天魔膽/ ( 일찍 조, 거듭 증, 떨어질 락, 물리칠 각, 하늘 천, 마귀 마, 쓸개 담 )

조증락각천마담 /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려도다.


수행자가 지니는 검은 지혜와 자비의 쌍검이다.

진리의 길을 가다가 만나는 대상이 무엇이든 전부 베어 버린다.

지혜의 칼로 무명업식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정도(正道)를 벗어난 외도의 마음까지 썰어 버린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부처나 조사를 만나도 베어 죽이는 데 하물며 외도나 천마를 가만히 놔 두겠는가?

지혜의 칼과 자비의 칼은 그렇게 쓰는 것이다.


<일일 소견>

본래 외도(外道)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의 가르침을 일컫는다.

하지만 선지식들 께서는 외도에도 걸리지 않아야 한다고 전하신다.

세상에 불법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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