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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3

오늘의정진: 建法幢立宗旨/  건법당입종지/ 법의 깃발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 100일 정진, 7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세 번째와 여든 네 번째 구절은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순행천막측/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함이여

吾早曾經多劫修/ 오조증경다겁수/ 내 일찍이 많은 겁을 지나며 수행했나니

不是等閑相狂惑 /불시등한상광혹/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였다.


'혹시'가 한자어(漢子語)였음을 증도가를 보면서 알았다. '' 이란 명확하지 않고 확실한 상태가 아니다. 미혹(迷惑)이란 뜻도 어찌보면 확실하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 하는 것이다. 즉 혹()과 마음()이 합쳐졌다

달리 생각하면 '혹시'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 혹은 저것의 선택을 앞둔 방황이면서 동시에 선택에 대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즉, 방황과 가능성을 함께 포함했다. 우리 앞의 미래는 여전히 '' 한 상태이다. 이렇게 될 수도, 저렇게 될 수도, 나는 물론 하늘조차도 예측하지 못한다. 수 없는 생을 육도 윤회로 돌면서도 내가 다음 생에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미혹이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 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해진 운명이란 없는 것이다.


오늘은 여든 다섯 번째와 여든 여섯 번째 구절

建法幢立宗旨/  건법당입종지/ 법의 깃발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明明佛勅曹溪是/ 명명불칙조계시/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도다

第一迦葉首傳燈/ 제일가섭수전등/ 첫 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불법의 등불을 전하니

二十八代西天記/이십팔대서천기/ 이십 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 이후 40여년간 가르침을 펼치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열반에 드셨다. 붓다가 열반을 앞두고 자신의 가르침이 앞으로 3가지 시대를 맞이하게 되리라 예언하였다. 첫번째 시대는 정법시대(正法時代)로 붓다의 열반이후 약 500~1000년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붓다가 열반에 드신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로 붓다의 가르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시기라고 하였다

두번째 시대는 상법시대(像法時代)로 정법시대 이후 500~1000년 간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정법시대 만큼 불법이 남아 있지만 깨닫는 이가 적다고 하셨다. 마지막은 말법시대(末法時代)를 맞이 하게 되는데 붓다의 가르침은 그저 껍데기만 남았고 수행을 해서 깨닫는 자는 거의 없는 시대가 된다고 하였다.

붓다의 열반 이후 수제자 마하가섭이 붓다의 법을 받아 초조(初祖)가 되어 불법을 계승하였다

그 후 상법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불법은 인도에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28대조 달마대사에 이르러서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법의 계승(繼承) 혹은 전승(傳承)을 전등(傳燈)이라고 부른다

불법은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꼭 필요한 등불과 같다는 의미로 등불이 꺼지지 않게 대대로 전승되어졌다이렇게 불법은 초조 마하가섭 존자를 시작으로 달마대사를 거쳐 조계산의 육조혜능에게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인도에서 28대조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초조로 불리게 배경이다.


<일일 소견>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다가 문득 떠오르면서 이해가 되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이 오기 까지는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눈 뜬 장님이었고, 귀 있는 귀머거리였을 뿐이다.

이제야 비로소 보여지고, 들려져야 제대로 보는 것이고 제대로 듣는 것임을 알았다

미혹에서 분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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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4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가 한자어였군요. 혹에서 느껴지는 그 미묘한 떨림은 나침반의 바늘에서 느껴지는 떨림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방황과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한 그 떨림이 멈추지 않는 한 방향을 잃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힐 2025-03-14 22:56   좋아요 0 | URL
정말 듣고 보니 그렇네요. 미묘한 떨림과 같은 나침반의 바늘이 ‘혹‘ 이라는 비유 정말 좋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나침반이었군요. 언제나 떨림은 있지만 그 떨리는 바늘이 우리의 갈 방향을 알려주는 거였네요. 아니 떨림이 있어야 되는 거였네요. 깨우침 감사 합니다. 잉크냄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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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2

오늘의정진: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 100일 정진, 7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한 번째와 여든 두 번째 구절은

<默時說說時默/  묵시설설시묵/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무옹색 / 크게 베푸는 문을 열으니 옹색함(막고 또 막음)이 없다

有人問我解何宗/ 유인문아해하종/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이해하냐고 묻는 다면

報道摩訶般若力 /보도마하반야력/ 마하반야바라밀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였다.


마하반야밀이란 무엇인가? 바로  대지혜(大智慧) 와 대자비(大慈悲) 이다. 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이며 그 깨달음이란 바로 대지혜와 대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선불교가 부처님께서 전해주신 가르침이 아님에도 불교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궁극의 깨달음이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이 바로 지혜와 자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고의 지혜는 말이 없는 가운데 있고, 최고의 자비는 무차별(無差別)에 있다. 머무름이 없고 상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므로 무주무상(無住無相)이다.

이것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의 힘이다.


오늘은 여든 세 번째와 여든 네 번째 구절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순행천막측/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함이여

吾早曾經多劫修/ 오조증경다겁수/ 내 일찍이 많은 겁을 지나며 수행했나니

不是等閑相狂惑 /불시등한상광혹/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시비에 휘말리고, 분별에 미혹되는 것이 보통 중생들의 일상이다. 항상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과거 미래 현재, 삼세를 통털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생을 그렇게 돌고 돌며 또 돌아왔던 것일까

지옥에서 부터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을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했던 것일까? 모든 업은 분별에서 생겨난다. 미혹하기 때문이다. 미혹은 밝고 투명하지 않게 만든다. 수행은 밝고 투명해야 한다. 그래서 청정함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의 청정은 바다와 같아서 온갖 물을 받아들인다고 선지식들 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바닷물은 맑고 깨끗한 청수든, 하수구의 오염된 물이든, 정화조의 똥물까지도 받아들인다. 세상의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 간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받아들이고 온갖 생명이 잉태하는 곳이다. 생명의 기원이자 종착점이다

그렇게 보면 밝고 투명한 것 만이 청정이 아니라는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육도 윤회 또한 어쩌면 수행의 방편이지 않을까

육도 윤회 끝에 결국엔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란 뜻이다. 지옥고에 허덕이는 것도 수행이고, 짐승 같은 삶을 살아도 수행이 되고, 맨날 싸움만 일쌈는 아수라 같은 삶도 수행이 되고, 인간과 천상에서 삶 또한 수행이 되는 것이다

미혹은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이 수행인줄 모르고 사는 것이 아닐까?


<일일 소견>

수행이 힘든 것이 뜬 구름을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깨달음이란 실체를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잡으려 하지 말자. 그냥 지켜만 보자

지켜보기가 수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수행은 견()이고 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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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1

오늘의정진: 默時說說時默/  묵시설설시묵/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 100일 정진, 7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여든 아홉 번째와 여든 번째 구절은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즐기는)하니

覓卽知君不可見 / 멱즉지군불가견 / 찾은 즉 그대는 보지 못함을 알겠노라

取不得捨不得/ 취불득사불득/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不可得中只麽得 /불가득중지마득/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였다.


"수처작주,입처개진 (隨處作主,入處皆眞) 머무는 곳 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바로 진리다" 라고 선언했던 임제의현(義玄: ?~867) 선사가 떠오른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이요 끝이라' 고 하나님은 선언하셨다

나의 본래 면목을 마주한 순간 우주의 중심은 바로 내가 된다. 진리는 하나인데 하나님의 영성과 부처님의 불성이 서로 다른 것인가?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다.


오늘은 여든 한 번째와 여든 두 번째 구절

默時說說時默/  묵시설설시묵/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무옹색 / 크게 베푸는 문을 열으니 옹색함(막고 또 막음)이 없다

有人問我解何宗/ 유인문아해하종/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이해하냐고 묻는 다면

報道摩訶般若力 /보도마하반야력/ 마하반야바라밀의 힘이라고 대답하리라.


임제의현 스님이 깨닫기 전, 그의 스승인 황벽희운(黃壁希運 ?~850) ) 선사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임제는 스승의 법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임제는 스승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意) 인지요?" 그러자 황벽은 임제를 두들겨 팼다. 임제는 아팠지만 그 까닭을 몰랐다. 단지 어떤 이유가 있을 꺼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또 얻어 터졌다. 임제는 억울했지만 스승에게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악으로 깡으로 다음날 또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얻어 터졌다. 임제는 억하심정(抑何心情)에 스승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스승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황벽은 대우(大愚)선사를 찾아가라고 권유했다

대우선사를 찾은 임제는 자신은 황벽선사의 가르침을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대우선사는 웃으며 말하길 "그대의 스승이 그대를 위해 그렇게 노파심(老婆心)으로 간절히 말 해줬는데, 그대는 아직도 허물을 찾는가?

이 말 한마디에 임제는 전율을 느끼며 크게 깨닫게 되었다

임제가 말하길 "원래 황벽의 불법은 별거 없구나". 

이에 대우선사는 임제의 멱살을 잡으며 "뭐라 했는가? 조금 전까지 모르겠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별거 아니라니? 도대체 뭘 알았다는 건가?" 

임제는 그 자리에서 대우선사의 갈비뼈를 주먹으로 한방 갈겼다. 이에 대우는 크게 웃으며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와는 관계가 없다

임제는 곧 바로 대우선사를 떠나 다시 황벽에게로 돌아왔다. 이에 황벽은 "아니, 왜 다시 돌아왔느냐?"하고 물었다

이에 임제는 "스승의 노파심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황벽은 임제가 달라졌음을 눈치 챘다. "내 다음에 대우를 만나면 한방 먹여 주리라

그러자 임제는 "뭐 다음이 따로 있습니까? 지금 당장 먹여 주죠" 하며 스승 황벽에게 바로 한 방을 갈겨줬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것이 바로 선의 종취(宗趣) 이자 반야바라밀의 힘이 아니 겠는가?


<일일 소견>

무엇이 불법의 대의 입니까? , 무엇이 불법의 대의..., 무엇이 불법...,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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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0

오늘의정진: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즐기는)하니


- 100일 정진, 7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일곱 번째와 일흔 여덟 번째 구절은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 여어영각하오섭 /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不可毁不可讚/ 불가훼불가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니

體若虛空勿涯岸 /체약허공물애안/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였다.


강을 건넜다면 배는 더 이상 타지 않아도 된다.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했다면 그동안 도를 닦는데 필요했던 수구(數句)와 비수구(非數句) 같은 개념도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 또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여태껏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썼던 모든 수행법이 사실은 다 방편이었다. 방편이 좋았다 나빴다 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깨달은 이의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배가 없이 어찌 강을 건너고 수행 없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방편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법이며 도가 아닐까?


오늘은 일흔 아홉 번째와 여든 번째 구절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覓卽知君不可見 / 멱즉지군불가견 / 찾은 즉 그대는 보지 못함을 알겠노라

取不得捨不得/ 취불득사불득/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不可得中只麽得 /불가득중지마득/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담연(湛然)이란 맑고 청정하다는 뜻과 평안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리는 항상 나를 떠나서 있지 않는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진리의 자리이다. 그래서 선지식들 께서는 나 이외의 다른 곳 찾아 헤매지 말라고 경책하셨다.

이에 관련된 어느 선사의 탐춘(探春) 이란 시()가 있다.


<盡日尋春不見春 (진일심춘불견춘)-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어도 봄을 보지 못하고

芒鞋遍踏朧頭雲 (망혜편답롱두운)- 신발이 다 닳도록 언덕 위의 구름 따라다녔네.

歸來偶過梅花下 (귀래우과매화하)- 이제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春在枝頭已十分 (춘재지두이십분)-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구나.>


나는 늘 분별 망상에 가려져 있다. 분별과 망상심은 언제나 항상 나의 마음에 꽉 차 있어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으로는 내 본 뜻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소리를 뱉고 야 만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사실이 그렇다. 어리석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마음을 우선 쉬어야 한다.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분별심과 망상심에 끄달리지 말고, 밖으로 허덕이지 말며, 그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보지 못하는 가운데 볼 수 있고, 가질 수 없는 가운데 가지게 되고,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얻는 도리가 생긴다.


<일일 소견>

스스로가 어리석다는 것부터 아는 것, 담연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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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9

오늘의정진: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 100일 정진, 7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다섯 번째와 일흔 여섯 번째 구절은

<一地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나니

非色非心非行業 / 비색비심비행업 /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로다.

彈指圓成八萬門/ 탄지원성팔만문/ 손가락 튕기는 사이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刹那滅却三祗劫 / 찰나멸각삼지겁/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도다> 였다.


  부처의 지위는 높은 위치에 있으며 권위와 권세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차원이 낮은 미생물에서부터 차원이 높은 인간 그리고 천상계에 사는 천인 까지도 모두 평등하고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고 여긴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를 이루고 말 것이라는 서원을 담겨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즉 나와 남이 모두 일시에 부처의 도를 이루자는 뜻을 항상 서원(誓願)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 이야말로 수행자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탄지(彈指), 손가락 하나 튕기는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서도 자비를 담고 있으며 그 자비가 바로 팔만 사천 법문에서 설하고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비와 지혜가 한 찰나에 이루어지는 순간에 모든 시간의 존재는 무너져버린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일흔 일곱 번째와 일흔 여덟 번째 구절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 여어영각하오섭 /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不可毁不可讚/ 불가훼불가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니

體若虛空勿涯岸 /체약허공물애안/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불교에서 수()의 개념은 방대하다. 찰나라는 아주 짧은 시간부터 겁이라는 아주 긴 시간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불교는 숫자(數字)의 종교가 아닌 가 싶다. 경전을 보다 보면 수없이 많은 숫자와 연결된 불교 용어들을 보게 된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오계, 육바라밀, 육근, 육식, 육경, 33, 32 80종상, 8만 사천 법문, 삼천대천세계 등 대부분의 불교용어는 숫자들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숫자가 가진 의미를 모르고 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을 정도다그래서 불교는 우주의 일체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일체를 숫자로 표현하는 구절(數句)과 숫자가 아닌 구절(非數句)은 사라져 버린다.  숫자나 숫자가 아님은 깨달음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이건 무언가 가 훼방을 놓거나 칭찬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본성이 본래 비어져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를 자각하는 순간, 그 없음이 단순히 텅 비워 있음이 아닌 텅 빈 충만임 알게 된 것이다. 본체가 허공과 같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그리고 그 본래 마음자리는 확 트여 있어 원래 제한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한계가 없다고 표현했다.


<일일 소견>

한계가 없음은 무한(無限)이다

체가 없으니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니 자유롭다.

그러니 무한은 자유(自由)의 또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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