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책 - 금서기행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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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나쁜 책 / 금서기행

지은이: 김유태

 : 금기(禁忌) 를 넘어서 존재하는 진실을 찾는 여정



나는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책 제목이 <나쁜 책> 이다.

'금서기행' 이란 부제목을 달고 있는 '빨간 책' 이다.

나에게 '빨간 책' 하면 학창 시절의 은밀한 단상이 떠오른다. 

그 시절 학교에서 선생님 눈을 피해 친구들과  몰래 돌려가며 보던 19금 서적을 우리끼리 속어로 '빨간 책' 이라고 불렀다.

신성한 학교에서 겉이 하얀 교과서 뒤에 속이 야한 빨간 책을 숨겨놓고 메마른 침을 삼켜가며 숨죽여 보는 짜릿함은 당시의 우리에게 엄청난 일탈이자 모험이었다.

성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사춘기 소년들에게 풍만한 여신에 대한 환상을 생생히 상상하게 만드는 '빨간 책' 은 분명히 '금서(禁書)' 였다.

물론 금서를 몰래 보다가 들키게 된다면 마치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듯한 끔찍한 결과를 각오해야 했다.

지금 우리 애들도 나 몰래 비밀리에 야동을 보겠지만 그 시절 나와 같은 느낌으로 보는 지는 모르겠다.

이제 세상은 변했고 성()과 폭력(暴力)에 대한 수위의 경계는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오늘날 아직도 많은 국가에서는 정치, 종교, 사회, 문화적인 체제에 반()하여 불온(不穩) 하다는 이유로 작가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출판의 자유를 빼앗기도 한다.

그래서 금서(禁書)에 대한 호기심은 어쩌면 사춘기 소년의 욕망과도 비슷한 일탈성(逸脫性)을 갖고 있지 않을까?


이 책 <나쁜 책> 에는  한때 금서였거나 아직도 금서로  봉인(封印)된 작품과 작가 들을 만날수 있다.

이문열, 마광수 같은 우리나라 작가를 비롯하여 조지 오웰, 니코스 카잔차키스, 밀란 쿤데라 , 주제 사마라구, 엔렌커 같은 비교적 친숙한 이름의 작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넬리 아르캉, 사데크 헤다야트, 타슬리마 나스린, 이스마엘 카다레, 비톨트  곰브로비치 등 나에게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의 책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중에서 <난징의 강간>을 쓴 아이리스 장의 슬픈  개인사, 한때 실제로 창녀로 살았던 <창녀>의 작가 넬리 아르캉, 다 읽는 순간 자살하게 된다는 < 눈먼 부엉이> 의 사데크 헤다이트, 시선이 곧 권력이 된다는 <포르노그라피아> 의 작가 비톨트 곰로비치 등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다수의 작가와 작품은 생소했고  근친상간, 살인과 폭력,  소아성애, 신성모독,시체유기등 같은 상당히 높은 수위의 자극적인 소재가 난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금서의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불편한 소재안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이다. 



<참극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작가 본인과 난징 피해 여성간의 시간적 . 공간적 거리감이 사라졌고 이 때문에 아이리스 장의 고통으로 전염되었다는 설명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씨앗처럼 이식되어 그녀 내부의 고통으로 발아된 것이겠지요. 그 싹이 자라 맺은 결말의 이름은 작가 자신의 '죽음' 이었습니다.> (P.38 아이리스 장, 난징의 강간 중에서) 



<나는 정치적인 것이나 젠더의 문제나 무엇이든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려한다.  예술과 정치는 뼈와 피의 관계와 같아 분리할 수 없다. 픽션은 진실이며, 픽션은 더 깊은 진실이기도 하다.> (P.358 아룬타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중에서)


<시선의 문제는 권력의 발생과 등가를 이루는 일이며 시선을 확보한 자가 권력의 소유자가 됩니다. 인간이 지하 단칸방이 아닌 고층 건물 거주를 희망하거나 권력자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 보기를 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시선 확보의 문제 이기도 하지요. 시선의 우위에 서면 타자로부터의 개입('균열')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 있으니까요.> (P.366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중에서 )



이처럼 <나쁜 책>을  소개하는 저자 김유태의 통찰은 감탄할 만큼 아주 훌륭했다.

금서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금서속에 숨겨진 작가들의 내면을 발견하고 그 사색의 지점을 저자의 시선으로 독자와 함께 바라 보고자 했다. 

아마도 책의 소제목이 '금서기행' 이라 붙인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쁜 책>은 가장 좋은 책이었다. 

일명 '불온서적(不穩書籍)' 으로 불리는  '나쁜 책'을 통찰하는 아주 '좋은 책'인 셈이다.


<나쁜 책>의 저자 김유태는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자 매일경제신문 기자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발표 되기전에 이미 한강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때 한강작가의 수상을 예측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로 기자로서 통찰이 뛰어난 것 같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매주 100여권 정도의 신간이 여러 출판사로부터 저자 앞으로 배달이 된다고 한다. 한달이면 500여권, 일년이면 6000권이 넘는 신간이 우리나라에서 출간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 매주 10권 정도만 저자에 의해 선택  되어지고 나머지는 버려진다고 한다.

그 버려진 책들에 대하여  저자는 '안전한 책' 이라고 부른다.


독자를 충격하지 못하는 책은 출판과 동시에 죽기 때문에 살아서 팔딱거리는 책 골라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오직 살아서 펄떡거리는 책, 세상과 불화하고, 독자에게 싸움을 거는 책이라야 진정한 책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바램처럼 언제나 항상 살아 있는 책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독자의 신분으로 돌아가 자신이 성소(聖所)로 여기는 대학 도서관 책장의 책들을 끄집어 본다고 한다. 

그때 저자가 읽게 된 책이 바로 엔렌커(阎连科) <사서(四書)> 였다.

엔렌커는 현존하는 작가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금서로 지정 되어졌다.

그가 쓴 작품중 무려 8권이나 중국에서 출판 금지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세상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서랍속에 갇힌  '서랍문학(抽屉文学)' 이라 불린다.

저자는 서랍속에서 빛나는 금서(禁書) 사서(四書)를 언급하며 위험한 책인 금서가 가진 의의를 말한다.


<위험한 책에는 금서라는 딱지가 붙고, 금서중에서도 정말 위대한 책은 독자의 내면에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온다. 독서의 끝자락에서 어지러움증을 일으키는 책만이 불멸의 미래를 약속 받는다. 엔렌커의 대다수 책이 그러한 것 처럼 금서는 이중적 드라마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P.12)


<금서를 선택하여 읽는다는 것은 잊힐 뻔했던 인류의 가치와 미래 지향적인 진의를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독자(讀者)적 행위다. ... 중략... 위험한 책만이 위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안전한 책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우위에 서서 교훈 처럼 자신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P.15)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세상의 거의 모든 문학 작가들은 언어를 통해 진실을 찾는 탐색자(探索者)이자 구도자(求道者)들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감추어지고 가려진 진실을 찾고자 그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그들 중 아주 일부는 외부의 세상이 아닌 인간 정신과 사물의 내부로 시선을 돌려 펜을 마치 수술실의  메스처럼 사용하여 해부하기 시작한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과연  진실인가?


그러한 작가들의 진실 찾기의 첨예함은 결국 시대와의 불화를 불러 일으킨다.

안전한 책을 쓰질 못하고 시대와  타협하지 못한 그들이 써낸 책은 불온하고 위험한 '나쁜 책' 이라는 시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

정치, 종교, 이념, 문화등 사회 체제가 정한 '금서(禁書)' 는 사실은 어두운 인간본성과  불편한 진실을 은밀히 감추고 있다.

어쩌면 금서를 정한 사회 제체는 독자가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의 충격을 보호해 주려는 선한 의도도 분명 있을 것이다.  또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대중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진실을 왜곡, 조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 사회는 시대와 체제를 맹신하고 맹종하는 사람들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직 금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이 더 있다는 뜻 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세상의 모든 금서 작가들의 진실 찾기는 여전히 계속 될 것이다.

맹종(盲從)맹신(盲信)을 멈추고 깨어있는 지성과 영성을 위해 우리는 '나쁜 책'을 읽어야 한다

금기(禁忌)를 넘어서 존재하는 진실을  향한 나의 독서 여정은 계속해서 이어져 갈 것이다.



지금은 봉인해제가 되어 버린 사춘기 시절 '빨간 책' 속의 픽션은 성숙과 성장에 필요했던 또 다른 의미에선 '좋은 책' 이지 않았을까?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

근래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금서의 작가는 없다. 노벨문학상의 안전한 선택은 변질이며 이는 권위의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 P14

타인의 렌즈로 자아를 규정하려는 이중성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습니다. 특히 흑인에게 그것은 참혹했던 역사와 차별적인 문화가 억지로 눈알에 끼워넣은 무형의 콘텍트렌즈이고, 심장에 깊숙이 박은 미추의 안경일 것입니다.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눈> - P101

대중적으로, 또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는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회 내부의 기저심리, 일종의 무의식을 건드릴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 널리 입증됐습니다.
<카밀로 호세 셀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 P132

생각해보면 인간이 간절히 원하는 욕망은 언제나 파괴적입니다. 자아를 부수고 그의 주변 세계를 붕괴시킵니다. 거친 욕망일수록 그 욕망은 평범한 삶으로부터의 월경(越境)을 전제로 삼습니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윤리적 굴레를 무너뜨리고 금지된 땅으로 진입하는 시도일 때가 많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어둠 속의 웃음소리> - P148

다시말해 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비범한 운명을 계획했다는 의미였으며, 역경과 고난에 빠진 인류가 신을 찾음으로써 위안을 얻는게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이 도구화된다는 충격적인 전제였습니다.
<주제 사마라구, 예수복음> - P273

우리는 이처럼 자기 자신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내면과 대화 없이 삶은 완성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내면에 헤다야트의 부엉이 같은 ‘무엇‘이 있지 않던가요.
<사데크 헤다아트, 눈먼 부엉이>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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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예술이 된다 - 문학과 영화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방식
강유정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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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강유정 에세이/ 죽음은 예술이 된다.

지은이: 강유정

 : 문학과 영화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방식(죽음에 대한 사유여행 안내서)



파리 올림픽이 끝난 여름 끝자락, 국회에서는 대한 체육회와 축구 협회의 고위 인사들을 상대로  청문회가 진행되었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배드민턴 협회에서 벌어진 상식을 벗어난 많은 문제점과 대한축구 협회의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발생한 석연치 않는 의혹들에 대해서 추궁을 하였다.

이때 체육계의 철옹성 같은 카르텔과 특권 의식으로 무장한 증인들을 상대로 면리장침(綿裏藏針: 부드러운 솜안에 날카로운 바늘을 감춘 듯) 한 질의을 던지는 국회의원  한 명이 눈에 들어 왔다.

그 국회의원은 바로 방금 읽은 책<죽음은 예술이 된다> 의 저자 강유정 작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의원은 국회의원(비례대표) 이 되기전 까지만 해도 문학과 영화 평론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는 대학 교수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청문회에서 그의 질의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책 <죽음은 예술이 된다>는 강의원이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영화와 문학을 통해 사색한 죽음에 대한 에세이 집이다.

올 해들어 나는 의학과 사회, 역사 분야등의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그런데 문학과 예술 장르에서 만나는 죽음이라 하니 처음에는 약간 생소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문학과 예술이야말로 죽음을 이해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소재들로 가득차 있지 않는가 ?


<죽음과 삶은 뒤섞여  예술이 된다.  죽음이 예술과 몸을 섞어 다른 무엇으로 현현하는 그 작은 시간들, 스몰 아워Small Hour. 빛도 어둠도 아닌 밝은 밤, 그런 밤에 이 글을 쓴다. 황혼은 길고, 밤은 깊고, 아침이 오기 전까지의  깊은 새벽, 스몰 아워는 속삭인다. > (스몰 아워의 고백) 중에서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스몰 아워의 고백'  에서 작가는 '죽음은 삶과 뒤섞여  예술이 된다' 고 예술에 대해 정의했다.

우리의 생()은 영속성(永續性)을 지니고 있지 않다.  

생이 다하는 그 순간 이후를 우리는 '죽음' 이라고 이름 짓는다.

우리의 생은 우연(偶然)이지만 죽음은 필연(必然)이다.

필연의 마지막, 그 죽음의 순간은 영겁으로 향하는 찰나(刹那)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아마도 작가가 뜻하는 '스몰 아워' 란 빛과 어둠이 섞이며 함께 공존하는 찰나의 시간, 아주아주 작은 시간이란  뜻으로 정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스몰 아워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순간 즉, 죽음이 예술이 되는  다양한 순간을 작가는 문학 작품과 영화속에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상실을 견딜 수 있고, 사랑의 정서와 감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기다릴 수 있다>(삶에 새겨진 아프고  아름다운 경고)중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죽음과 얽히게 된다. 사랑은 순수함과 동시에 아주 복잡한 감정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처럼  순수한 사랑 끝의 죽음도 있지만  <데미지>,<페드라>,<욕망의 제국>등 같은 영화속에서 금지된 욕망의 결과가 파멸뿐인 죽음도 있다.

순수하고 순결한 그래서 나이브한 사랑에서 부터 불륜이나 치정과 같은 금지된 욕망의 사랑 조차도 죽음과  뒤섞이게 되면 그때 이 모든 사랑은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의 생을 구성하는 감정중에  하나인 사랑이  죽음과 만나 예술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 주었던 마음의 에너지, 리비도를 찾아오지 못할 때 ,남아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빠진다.> (죽음을 모르는 어른은 없다) 중에서


멜랑콜리는 우울함을 의미한다.  우울함은 '어둡다' 는 어원을 두고 있다.

인간이 가진 보편적 감정중 하나인 우울함은 필연적으로 어두운 죽음을 만나게 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프로이트의 상실의 슬픔에 대해 말한다.

우울한 감정과 만나는 어두운 죽음은 어쩌면 쉽게도 자살 충동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특히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10대 시절이 그러하겠지만 어른이라 해도 자살의 유혹을 뿌리쳐 내긴  쉽지 않다.

영화 <월플아워>, <죽은 시인의 사회>와 하루키 소설<상실의 시대>에서는 우울함과 결합된 죽음 즉, 자살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는 너무나 비극적이다.

슬픔을 동반하는 모든 행위들은 비극적 끝을 맞이한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의미를 남기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과 영화는 이러한 의미 있는 죽음을 살려내기에 가장 좋은 도구가 아닌가 싶다.  실제 삶에서 의미 없이 잊혀져야 했던 죽음은 문학과 영화라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나서야 다시금  생생하게 깨어난 죽음을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바로  죽음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저자는 수 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을 넘나들며 작품 속의 다양한 죽음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죽음을  접해야 하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신화속의 왕 미트리다테스는  독살을 두려워해 매일 조금씩 독을 먹었다고 한다. 문학과 예술도 그렇다. 우리가 문학과 예술에서 죽음을 접하는 것은 그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로부터 면역을 얻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린 자신을 죽이고 성장한 스스로와 만나야 한다.> (10대 그리고 죽음이라는 유혹) 중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저자의 '사유여행(思惟旅行)' 보고서이며 독자에게는  다양한 죽음에 대한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우리 생의 순간에 존재했던 다양한 감정들이 죽음과 섞이면 그 죽음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를 사유여행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예술로 승화된 죽음은 일종의 '메타포(metaphor :은유)'  가 되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이처럼 수 많은 죽음의 간접 체험으로 얻은 통찰로써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이 되길 소망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을 보여 준다는 것은 삶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다. 


이제 작가는 조용하고 안정된 평론가와 교수의 길을 벗어나 시끌벅적하고 불안한 정치인의 길로 뛰어 들었다.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공감할 수 있는 연민이란 덕목을 지녀야 한다.  

작가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게 아니라 내가 아파 봐야 타인의 아픔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작가가 지닌 이러한 소중한 가치관이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정치가로서의  행보에 마음속으로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죽음이 예술이 되듯이 삶도 예술이 되길 희망한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바꾸는 게 의지가 아니라, 미래를 앎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게 의지이다. - P54

그리고 보면, 결국 죽음이란 하나의 결말이자 하나의 메타포다. - P117

그는 결국 이 두 죽음을 목격하되 잠식되지 않고, 앓되 전염되지 않음으로써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 데 성공한다. - P107

아내의 성기는 한때 그의 욕망의 성소 였으며 이후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난 생명의 성소였다. 그러나 항암제에 고스란히 난타당한 아내의 성기는 이제 더 이상 욕망이나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의 통로였기에 더 빠르고 급하게 생명이 빠져나간다. - P163

이야기가 재앙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의미없는 재앙은 없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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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과 불교공부 소리 시리즈 17
활성 지음, 김용호 옮김 / 고요한소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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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일상생활과 불교공부

지은이활성 / 엮은이 김용호

  :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록 갇혀 있지만



우리는 지구라는 공간에 갇혀 살고 있다.

태양계 지구에 사는 인간종은 80억명에 달한다.

지구 공간에 갇혀있는 우리 인간종 80억명은 다시 각각의 육체에 갇혀 있다.

그리고 육체를 가진 우리는 각자의 세계관에 갇혀 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80억개의 세계관이 공존하는 갇혀있는 세상이다.

나의 세계관은 태어난 순간부터 살아온 지금까지 끊임없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어졌다.  그래서  ''의 세계관과 ''의 세계관은 같을 수가 없다.

즉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서로 다른 세계관의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더구나 내가 만들어 온 나의 세계관 조차도 내면의 갈등과 외부 세계의 영향으로 늘 흔들린다.  마치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의 원자가 충돌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는 충돌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늘 변화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항상 그대로 있질 않는다.  고정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 하는 우리는 늘 불안하다.

과거는 후회스럽고, 현재는 답답하고, 미래는 불안하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하다.

왜 내가 사는 세상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걸까?

그래서 2500년전의  붓다는 사는게 고()'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를 건너려면 붓다의 지혜가 필요하다.


()고요한 소리에서 펴낸 <일상 생활과 불교공부>는 불자(佛子)로서 세상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불자: 부처의 제자 혹은 부처님의  자식 이라는 뜻도 있지만 불법을 믿는 자 모두를 통털어 일컫는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기독교인은 왜 기독자(基督子)라고 하지 않고 기독자(基督者) 라고 할까? )

책을 펴낸 활성 스님(1938~ )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처님 법과 떨어져 살고 있는게 아니라고 말씀 하신다.

현재 사회 불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경제, 사회적 문제들을 단순히 사회현상으로 만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현상에는 불법(佛法)의 인과법칙을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바른 견해(正見)를 배우는 공부로 여겨야 된다고 했다.

특히 스님은 우리의 정치와 사회를 고()의 축약판으로 보았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는 대한민국에 전부 다 갖다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대립과 갈등, 분열 같은 정치와 사회적 문제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 모두 축약 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을 단지 괴로움으로만 여겨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마음 공부를 하는 사람,  즉 불자라면 작금의  이러한 사회현상을 불교공부 하는데 좋은 재료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 조사스님들과 큰스님들이 누누히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다.

삶은 고통이 아니며 오히려 깨달아 자유로워 지기 위한 또 다른 길임을 뜻한다.

그래서 불법에서는 불이(),  '둘이 아니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활성 스님은 팔정도(八正道)를 언급하면서 그 중 정념(正念) , 마음 챙김을 수행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 챙김이란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말 그대로 챙기는 것이다.

챙긴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알아채는 것이고 이는 곧 지켜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려운 표현이 아니다. '챙긴다, 인식한다, 알아 챈다, 지켜본다'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우리 인간은 육근(六根) 과 육경(六境)으로 세상을 인식한다고 했다.

육근은 여섯 가지 감각을 말한다.

.....(眼耳鼻舌身意) ,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육근이다

그리고 육경은  .....(色聲香味觸法) 여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접하는 경계 대상을 말한다. 

()은 형상(), ()는 소리(), ()는 냄새(), 혓바닥()은 맛()을 몸()은 감촉()을 대상으로 인식한다.

마지막으로 뜻()은 마음으로 앞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모두 종합하여 인식한다. 그래서 마음은 곧 법()을 대상으로 삼는다.

결국 우리 인간은 육근 육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육체(肉體)'' 라고 인식한다.

육체라는 틀에 나 자신을 가둬두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으신 부처님과 큰스님들께서는 육근 육경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그것은 수행(修行)을 통해서만이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수행을 쌓아 '존재적 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혜와 자비를 닦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존재적 완성으로 가는 첩경이란 것이다.



형상있는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늙어가고, 병에 들게 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른다.

인간이라면 이러한 생노병사(生老病死)를 피할 수 없다.

인간 뿐만 아니라 물질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탄생과 죽음이 있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태양이나 우주의 별들에게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피할 수 없다.

형상을 가진 모든 물질들은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가 흩어진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은 우리 우주의 차원속에서 무한히 반복 되어진다.

이러한 유한함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진화하고 있다.

결국엔  우리의 삶과 죽음이라는  굴레도 어느 순간에 벗어날 것이다.

붓다는 2500년전에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위대한 여정도 사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출발한다.

또한 이 현실 생활이 바로 위대한 여정의 과정이며 앞으로 가야 할 여정이기도 하다.

현실을 떠나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갇힌 이 세상에는 화낼 일도 분노할 일도 우울할 일도 많다.

'화내지 말자. 분노하지 말자. 차단하지 말자' 고 되뇌이지 말자.

아니 화를 내도 되고, 분노를 해도 된다. 다만 화를 내는 나를 알아 채고, 분노하는 나를 알아 채야 한다.

진실하고 용기를 가지는 것이 수행자의 덕목이라면 나의 감정에도 솔직해져야 한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할 나의 세계관이다.

나의 닫힌 세계를 열고 다른 존재하는 모든 세계와 연결함은  ''를 지켜 봄에서 시작 될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지켜 보는것 그것만이 나를 닫힌 세계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모든 인간 경험의 본질적 의미는 ‘존재의 완성‘ 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든 인생 경험을 통해 존재의 완성을 향하여 걸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뜻입니다. - P8

죽음 자체는 생이라는 한바탕 연극의 끝이 아닙니다. 그저 연극의 한 막이 내려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 P10

불교공부가 따로 있고 세속공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세속생활을 교과서 삼아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 P18

상대를 가르치려고 들면, 오히려 내 마음공부 길이 자꾸 막히게 됩니다. 그건 어설프게 공부하는 태도입니다. - P40

우리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인 저승길 노자,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와 자비심입니다... 중략.....
내가 죽을 때 어느 정도의 의식 수준에 도달하고, 다음 생에 어떤 의식 수준에서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과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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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의 기술 - 나이 들수록 재미, 가족, 관계, 행복, 품격, 지식이 높아지는
이호선 지음 / 카시오페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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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오십의 기술(五十技術)

지은이이호선

  인생 2막의 주인공이 되려면

 

논어 (위정 편에서 공자(孔子 : B.C 551~479)는 "오십이지천명 五十而知天命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안다" 라고 했다

유학의 시조이며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님이 한 말이니 틀림없는 말씀이겠지만 지천명이란  내가 감히 헤아려 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지천명은 고사하고 내 자신의 운명이나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오십을 맞이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야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오십의 기술>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나 같이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 이호선님이  말하는 오십은  엑티브 시니어 (Active Senior)가 되기 위한 나이이다

오늘날엔 오십이 지천명’ 이라는  공자의 말 보다는 활동적인 중년의 삶’ 을  살기 위한 시기라고  보는 저자의 견해에 훨씬 공감이 간다.

사실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50대는 치열하고 처절한 면이 있다

50즈음이 되면 육체적으로는 늙어가고,  삶에 대한 정신적인 압박감그리고  외부의 순탄치 않은 상황에 치여 내 삶의 의미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채 살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가운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추구해야 할 재미와 가족관계행복품격 그리고 지식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 구제적으로 제시한다.

 

한 예로 중년의 시기는 인생 2막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행동 강령으로 ....을 소개 했다.

먼저 ’, 나가라이 뜻은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쉽게 옹졸해 지는데 자기 안에 갇히지 말고 자신의 경계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다

’, 만나라누군가를 만나는 것누군가가 나에게 온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과거 현재 미래 즉 그의 일생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만남을 소중히 하라는 뜻이다.

’, 주인공처럼 웃어라인색하기 쉬운 내 표정을 밝게 표현 하라는 뜻이다.

’, 인사를 하라솔선수범으로 누구에게나 인사를 잘해야 된다는 뜻이다.

’, 공부 하라중년에도 끊임없이 쉬지 말고 공부를 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내 삶의 의미를 물어보는 시기가 오십이며 막춤을 추어도 내 춤을 출 수 있는 오십의 기쁨과 의미를 발견하라고 조언 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행복한 중년의 삶을 위한 설계와 지침은 참고 할 만하고 무척 공감이 갔다

특히 불행이 닥쳤을 때   대처하는 저자의 노하우는 새겨 들을만 하다. 

저자는 우선 자기 몸을 위로 하고,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힘든 자아를 위로할 수 있는  공간에서 쉬도록 하고, '기분 전환 속옷' 을 입어 보라는  저자의 제안은 신선했다.    

 

하지만 저자는 중년예찬’ 이라고 할 만큼 50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강한 긍정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 같지 않아서 중년이란 시기가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마치 공자가 말한 지천명이 누구에게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듯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참조하여 중년의 시기에 스스로 위안하고 행복해 지려고 노력하는 시도는 반드시 필요 할 것으로 보인다.

행복한 부부 생활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좋은 친구 사귐 그리고 서로 다른 세대 간의 관계속에서 중년의 내가 가져야 할 마음 가짐과 행동들에 대해서는 곱씹어 볼 만 하다.

 

()나 라 무제 (武帝B.C 141~87) 시절 '소무(蘇武: B.C 140~60)'  라는 사람이 흉노의 포로가 되어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19년간 양을 치며 살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소무는 충절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오랑캐 땅에서 변절하지 않고  19년간 자신의 절개를 지키다가 결국 자신의 나라인 한나라로 돌아 왔기 때문이다.

그 동시대에  소무와 더불어 이릉(李陵B.C ? ~74)   이란 사람도 있다

이릉 역시 흉노의 포로가 된 한나라 장수 였지만 그는 소무와는 달리 한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흉노의 땅에 살다가 죽었다

흉노에게 사로 잡힌 이릉을 변호하다가 사마천(司馬遷: B.C 145~86)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결국 궁형을 받게 되었다는 그의 일화는 사기에 남아있다

소무는 양을 돌보며 살아야 했고이릉은 흉노선우의 사위가 되어 살아야만 했었다.

 

내가 타지에서 25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보니 시대를 넘어선 그들에게서 막연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느껴진다.

물론 나를 그들과 비교 한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지만 이국 땅에서 머물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나 역시도 어쩌면 그들처럼 삶의 포로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운명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의 의지는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미래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 평균 기대 수명이 남성은 86세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 중  전반 25년은 한국에서 살았고후반 25년은 외국에서 살았다그렇다면 앞으로 내게 36년의 기대 수명이 남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물론 그 사이 사고사나 병이 없이 무탈하게 살게 됨을 바래야 겠다.)

남은 생애를 다시 반으로 나눠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50대와 60대를 보내고 싶다.

내면을 성찰하여 지혜로운 중년이 되고 싶고 슬기로운 노인으로 늙고 싶다.

나는 소무처럼 결국엔  내 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인가

아니면 이릉처럼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나도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어쨌든 50대는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을 주는 시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누구도 물어 보지 않고 불러주지 않았던 내 이름을 찾고 존재의 숨을 불어 넣기 딱 좋은 때를 맞았습니다. - P11

여행도 마음 떨릴 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는 못 갑니다. 아이들이 독립하는 그 시기가 정확하게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 딱 좋은 시기입니다.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독립은, 건강한 분리의 과정입니다. - P80

자녀가 부모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었습니다. "잘 커줘서 고맙다", "잘 살아 주어서 고맙다" 같은 말을 원했습니다. 더불어 ‘자랑스럽다‘는 말도 듣기를 원했습니다. - P84

나이 든 사람들이 가진 콘텐츠의 특징은 굉장히 다채롭다는 것입니다. 지식이든 연애든 건강이든 인생에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듯 나이 듦에도 다채롭고 다양한 영역이 필요합니다. - P143

중년이 되면 의무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영미 시인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 했지요. 하지만 저는 중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잔치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변화를 꿈꾸고 실행하면서 중년의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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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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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사서(四書)

지은이옌롄커(阎莲科)문현선 옮김

  인간 본성(本性)과 신성(神性)에 관한 이야기서랍 속에서 빛 나는 금서(禁書)

 

두보(杜甫:712~770)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로 시작 한다

호우지시절이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뜻이다

요즘 나에게 좋은 비는 '좋은 책'이다..  

호책지시절(好冊知時節), 때를 알고 읽게 되는 '좋은 책이라...

지금 내게 시의적절하게 꼽을 수 있는 좋은 책은 바로 옌롄커(阎莲科 <사서(四書이다.

사실  옌롄커 작가의 <사서>는 좋은 책 이라기 보다는  '금서(禁書)' 로 알려진 책이다.

<나쁜 책  금서기행> (김유태)의 서평을 참조 하자면  <사서>의 작가 옌롄커는 '서랍문학'의 작가로 불려진다. (사실 이 부분 때문에 읽게 되었다금서라 하면 오히려 더 끌리게 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서평에 따르면 '옌롄커의 작품은 서랍 밖의 세계를 향하지만 금지된 책이 되어 버려 결국은 서랍 속에 갇혀 버리기 때문에 그의 문학 작품을 '서랍 문학'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그의 작품들 중 <사서>를 포함하여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딩씨 마을의 꿈등 그가 써냈던  8개의 작품이 중국에서는 출판 금지가 되었다

작가 입장에서 쓰는 작품마다 출판 금지가 되어 버리니 수입이 없어져 환장할 노릇이긴 할 텐데 다행히 <사서>는 세계 20개국에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옌롄커에 의하면  '금지된 책이라는 낙인이 찍힌 책이 위대하다고 보증 할 순 없지만 비참한 현실을 사는 작가의 작품이 한번도 금서가 되지 않았다면 작가의 진실성에 의심을 받게 된다'  고 했다.

그의 말처럼<사서>는 작가의 진실성을 담은 소설이다

진실성이 담긴 소설이라면 나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좋은 책'이다

이 '좋은 책' <사서>는 어째서 중국에서 '금서'가 되었을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의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 출간 된 (자음과 모음 출판사)  책의  작가 소개란에는 <2011년 출간된 사서(四書)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루어진 지식인 탄압을 다루는 비판적인    내용으로 인해 자국내 출간 금지를 당했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문화대혁명 배경이 아니고 대약진 운동시기(1958~1962) 임을 알 수 있다.내가 보건대 이건  출판사 측의 명백한 오류다. (물론 내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수정해 주지는 않겠지만....)

 

문화대혁명은1966년부터1976년 까지  10년 동안에 진행 된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중국의 역사를 4000년이나 퇴보 시켰다고 평가되는 실패한 혁명운동이다

그 보다 앞선 대약진 운동(1958~1962)이  실패로 끝난 4년 후 마오쩌뚱(毛澤東 1893~1976)을  신처럼 신봉(信奉)하는 어린 홍위병들에 의해 중국의 전통과 문화 유산 전부를 파괴되는 시기가 바로 문화대혁명인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두 개의 사건은 선후(先後관계가 명확하다.

다시 말해 대약진 운동이 먼저 발생했고, 4년 뒤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것 이다.

그렇다면 대약진 운동이 왜 먼저 발생 하였는지 알려면 우선 당시 중국의 상황을 이해 해야만 한다.

때는 50년대 중반소련의 스탈린(1848~1953) 사후(死後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묘한 경쟁 의식이 싹텄다.  

먼저 소련의 주석 후루쇼프(1894~1971)  소련이 15년 안에 미국의 경제력을 능가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는 소련이 바로 사회주의 종주국의 면모를 보여 주겠다는 뜻이 된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 최고 권력자 '마오'(마오쩌둥)는 곧바로  "우리는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안에 미국을 따라 잡겠다(七年超英,十五年)"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1958년에 대약진 운동이 시작 되었다. (1958년은 책의 저자 옌롄커가 태어난 해 이기도 하다)

서방의 선진국을 따라 잡겠다는 목표를 위해 중국 공산당은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을 요약하자면 1단계는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이고, 2단계는 철강 생산성을 압도적으로 높이는 순서로 진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목표 달성을 위해서  '크게(도약()하여 나아가자(는 뜻의 약진(躍進)을 붙여 '대약진 운동이라 이름을 내세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대약진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수치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2500만에서 5000만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즉 너무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버렸다.  대약진 운동은 문명의 대퇴보(大退步)인 문화대혁명의 화려한 오프닝이었다.

 

농작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 보다는 공산당 간부들 끼리 경쟁적인 허위 보고와 조작이 우선이었다.  또한 공업국이 되기 위한 철강 생산도 다르지 않았다주먹구구식으로 만든 용광로는 강철이 아닌 형편없는 품질의 철을 생산했다더구나 용광로의 불을 때우기 위해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곧 홍수와 가뭄을 불러 일으켰다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대약진 운동은 결국 국가적 재앙으로 끝 나고야 말았다.

소설은 이러한 대약진 운동이 전개 되었던 흐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소설의  무대인 위신구(育新區새롭게 교육 시키는 지역는 교화가 필요한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을 모아 노동 갱생(更生)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창살 없는 감옥이다.

황허 강변에 위치한 위신구에는  모두 99개의 구()가 있고 그 중 99번째 구 99구에는 127명의 지식인들이 수용 되었다

실제로 당시 마오는 공산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사회전반에 걸친 숙청 작업을 벌였었다.  그러한 과정 중에 당()간부를 비롯한 사회의 지식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소설에서는 숙청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지식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죄인이 되어  위신구에 오게 된다.  특이한 점은 위신구에 온 죄인 지식인들의 구체적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그저 작가학자음악종교실험의사 등으로 자신이 대표하는 분야를 이름 삼아 서로를 부른다

이 점은 작가가 정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 하겠다

위신구 99구에 수용된 지식인들을 관리하는 이는  '아이이다

아이 또한 이름이 뭔 지몇 살인지왜 위신구를 관리 하는지소설에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아이는 소설 속의 주인공에 가깝다소설은 대약진 운동속에서 99구에 속했던 아이와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모두 4권의 책에 나누어  써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제목이 <사서(四書)>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서 중 첫 번째 권인 <하늘의 아이는 아이를 중심으로 전개 된다

아이가 등장하는 첫 부분은 마치 성경속의 창세기를 연상케 한다

아이는 위신구에 오자마자 지켜야 할 십계명을 지식인들에게 선포했다

아이가 지식인들 보다 분명히 어리고 사회적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모두 아이에게 복종한다가끔 지식인들이 아이의 요구를 거부 하거나 반감을 표하기도 했다그럴 때 마다 아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다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라고 명한 것이다온전히 자신의 목숨을 거는 아이에게 지식인들은 결국엔 복종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다룬 것은 아니었다한번도 그들을 향해서 자신의 권력을 부당하게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아이가 가진 힘은 마치 신성불가침한 영역에서 나오는 듯 하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 졌다' , 아이가 바라는 모든 일들은 그렇게 이루어 내었다

 

두 번째 권과  세 번째 권인 <옛길> <죄인록은 소설 속 '작가'가 쓴 책들이다

작가는 아이가 상으로 주는 붉은 꽃 송이를 받기 위해  99구에 수용된 지식인들을 몰래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든지 붉은 꽃 송이를 모아서 다섯 개의 별 모양의 상을 받아야만 99구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동료 지식인들을 감시 고발하는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상부에서 정한 제목의  <죄인록>를 통해 작가는 아이에게 지식인들의 죄를 보고했다

사실 죄라고 해야 별 다른 큰 죄도 아니다.  지식인들이 감춰둔 책이 있다는 정도 였다.

그러나 사실은 지식인들에게 책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소위 먹물로 불리는 지식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자부심은 물질적인 성취에 있질 않다

먹물들의 세계에서 책은 그들이 살아가는 의미라고 말 할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1905~1997) 박사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자신의 원고를 빼았겼다는  것에 분노 했다.  수용소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보다 그는 자신이 쓴 논문에 대한 애착이 더 강했다.  결국 박사는 원고를 다시 쓰기로 마음을 먹게 되는데 이러한 점이 그가  최후까지  살아 남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식인들에게 책은 지식의 원천이며 자신들의 삶의 근원이다이들에게 책을 뺏는다는  것은 그들의 근원을 뺏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본다.  책은 지식인들의 정체성이였다.

지식인들은 결국 자신의 책을 모두 아이에게 내 놓게 된다

하지만 각자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책들은 모두 몰래 꽁꽁 숨겨 놓는다

<죄인록>을 쓰는 작가 조차도 자신만의 글 <옛길을 철저히 숨기며 몰래 쓴다

그들은 정체성을 뺏앗긴 채  농작물을 재배하고용광로에서 철을 생산하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사서>는 지식인의 탄압을 비판한 것이다라고 하는 출판사의 소개는 맞는 듯 해 보인다하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이 책이 금서가 된 것은 아니라 본다

 

대약진 운동 사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곧 자연 재해로 인한 대기근이 밀어 닥쳤다. 99구에서도 이러한 대기근을 피해갈 수 없었다식량은 바닥났고 들에 있는 풀까지 뜯어 먹어야 했다볶음 콩 한줌을 얻기 위해 종교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성모 마리아 그림을 발로 짓밟았 버렸다.  음악은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인 학자 몰래 자신의 몸을 팔아야 했다

그 외에도  뭘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신었던 가죽 구두와 메었던 가죽 허리 띠 마져 앂어 먹으며 살아 남아야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어 죽게 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 갔다.  

99구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까지 손대기에 이르렀다.

배에 구멍을 내고팔 과 다리를 뜯어내 삶아 먹는 처참한  인간의 본성(本性)을 여과없이 드러냈다.그렇다면 이러한 인육을 먹는 끔찍한 장면 때문에 이 책이 금서가 되었는가?

아니난 그것도 아니라고 본다.

지식인 탄압도 아니고인육을 먹는 충격적인 장면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책은 금서가 되었을까

 

대기근이 닥친 후 상부에서 그것도 아이가 정말 가고 싶어했던 도성의 상부베이징에서 높은 사람이  99구에 찾아 왔다

그 상부는 굶주림을 견디고 있는 99구 사람들을 보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번 조아리며 말한다.

"국가가 여러분을 필요로 합니다여러분이 굶어 죽으면 국가도 굶어 죽어야 합니다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써서든 살아 주십시요. "

그는 눈물을 흘리며 "국가가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 라고 연이어 말하며 떠난다

소설에서 등장하여 '살아만 달라고국가가 죄송하다는 말한 사람은 아마도 내가 보건데 쩌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이거나 류사오치(柳少奇: 1898~1968) 일 것 같다.

쩌우언라이는 당시 중국의 총리였으며 누구보다도 마오의 실정(失政)을 수습하고자 노력했던 가장 대표적인 국가 지도자 였다

류사오치는 대약진 운동 이후 마오의 뒤를 이어 제 2대 국가 주석이 된 사람이다

그는  주석이 된 후 마오가 주도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통렬히 비판하며 마오를 뒷 방 노인네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댓가로  그는 그 뒤 찾아오는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의 사주를 받은 홍위병들에게 조림돌림을 당해야만 했다

소설에 등장한 상부 인물의 의미는 무소불위와 같은 마오의 신성(神性)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게 국가 탓이다는 상부의 말은 진실이었다

 

대기근 끝자락에 아이는 학자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북경의 상부에 갔다가 겨우 돌아 왔다.  그렇게  돌아온 다음날 아침 아이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종교에게 성모마리아 그림에 오줌을 누라고 조롱까지 했던 아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죽어 간 것일까?   그에 대한 이유는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의 가장 큰 메세지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이라고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은 예수님께서 죄를 지닌 인간을 대신하여 벌을 받는 것임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지었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류를 구원하기에 이르신다는 것이다.  

아이는 예수님의 대속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살아 남은 44명의 지식인들을 99구 에서 떠나라고 말한다

또한 아이가 받아 두었던  지식인들의 책을  도로 가지고 떠나라고 말한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책을 돌려 줌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되찾게 해주었다. 

이로써 일이 그렇게 이루어지게 한 아이는  진정 하늘의 아이’ 가 되었다.

결국 아이는 99구 사람들의 죄가 아닌 공산당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의미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해석 되어 진다. 이는 곧 아이가 마오의 신성(神性)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받아들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이의 거듭남이다.

따라서 <사서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체제에서 인간의 본성(本性)에 관한 문제는 용납이 가능하다

더구나  4000만명이 굶어 죽어도 그들 체제 안에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한 신성은 불가침한 영역인 것이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는 공산당 입장에서 기독교의 신성과 공산당의 신성은 공존 할 수 없는 것이다이건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사상적 문제가 된다.

이는 곧 국가 지배 체제 근간을 뒤흔들어 놓는 내용인 셈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사서>  중국내에서 출판이 금지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마지막 권에 해당 되는 <시시푸스 의 신화>는 짧게 언급된다

끝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시시푸스의 형벌도 결국엔 순응하고 적응되면 더 이상 형벌이 아니게 된다어쩌면 중국의 인민들은 신화 속 시시푸스처럼 불합리한 체제에 쉽게 익숙해지고 그 부당한 체제에 순응 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지금 중국의 현실을 옌롄커는 신화를 들어 비판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이 과연 중국에게만 해당 되는 문제인 것인가

 

이처럼  <사서>에는 많은 상징과 질문을 담고 있다

서랍속에서 빛나는 금서 <사서는 내게는 '좋은 책'으로 남을 것이다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멘부커 상을 받을 당시 최종적 결승 심사에 오른 작품이 바로 옌롄커의 <사서>라고 한다.

그 당시 어쩌면 한 끗 차이로 상의 주인이 달라 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 추야책희( 秋夜冊喜)   가을 밤 책 읽는 기쁨이여,

호책지시절(好冊知時節)  좋은 책은 시절을 아는 구나.


당신은 책을 쓸 수 있다. 생각과 바람이 현실이 될 수 있어.
상부에서 <죄인록>이라고 책 제목도 미리 정해 주었다. - P29

아버지가 없는데 그 어머니가 어떻게 예수를 임신 했는지 설명할 필요 없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 P234

총을 쏴라. 나를 쏴 죽이면 당신은 강철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냥 가슴을 관통시켜 내가 앞쪽으로 쓰러지게만 하면 된다. - P278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학자와 음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빌려 내 머리속의 가시를 뽑기 위해서 였음을 알았다.
감격스럽고 따스해지면서 그들이 나를 구한 것 같이 느껴졌다. - P478

그러다가 느릿느릿 일어나 나를 보고 한참을 아무 말 않다가 허공과 광야를 향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지식인아..... 지식인......"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아련하고 탁하게, 당시의 시절과 굶주림만큼 감당할 수 없게 흘러내렸다. - P479

내 숙사로 가서 필요한 책을 가지고 떠나라. 나를 떠나라. 다만 부탁이니 나를 십자가에서 내리지 마라. 오래도록 태양을 쬐도록 하라. 꼭, 꼭 기억해라. 햇볕에 두라는 내 말을 꼭 지켜라. - 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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