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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평점 :
책제목: 사서(四書)
지은이: 옌롄커(阎莲科)/ 문현선 옮김
제 목: 인간 본성(本性)과 신성(神性)에 관한 이야기- 서랍 속에서 빛 나는 금서(禁書)
두보(杜甫:712~770)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는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로 시작 한다.
호우지시절이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라는 뜻이다.
요즘 나에게 좋은 비는 '좋은 책'이다..
호책지시절(好冊知時節), 때를 알고 읽게 되는 '좋은 책' 이라...
지금 내게 시의적절하게 꼽을 수 있는 좋은 책은 바로 옌롄커(阎莲科) 의 <사서(四書> 이다.
사실 옌롄커 작가의 <사서>는 좋은 책 이라기 보다는 '금서(禁書)' 로 알려진 책이다.
<나쁜 책 금서기행> (김유태)의 서평을 참조 하자면 <사서>의 작가 옌롄커는 '서랍문학'의 작가로 불려진다. (사실 이 부분 때문에 읽게 되었다. 금서라 하면 오히려 더 끌리게 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서평에 따르면 '옌롄커의 작품은 서랍 밖의 세계를 향하지만 금지된 책이 되어 버려 결국은 서랍 속에 갇혀 버리기 때문에 그의 문학 작품을 '서랍 문학'이라 일컫는다' 고 했다.
그의 작품들 중 <사서>를 포함하여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딩씨 마을의 꿈> 등 그가 써냈던 8개의 작품이 중국에서는 출판 금지가 되었다.
작가 입장에서 쓰는 작품마다 출판 금지가 되어 버리니 수입이 없어져 환장할 노릇이긴 할 텐데 다행히 <사서>는 세계 20개국에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옌롄커에 의하면 '금지된 책이라는 낙인이 찍힌 책이 위대하다고 보증 할 순 없지만 비참한 현실을 사는 작가의 작품이 한번도 금서가 되지 않았다면 작가의 진실성에 의심을 받게 된다' 고 했다.
그의 말처럼<사서>는 작가의 진실성을 담은 소설이다.
진실성이 담긴 소설이라면 나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좋은 책'이다.
이 '좋은 책' <사서>는 어째서 중국에서 '금서'가 되었을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의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 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 출간 된 (자음과 모음 출판사) 책의 작가 소개란에는 <2011년 출간된 사서(四書)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루어진 지식인 탄압을 다루는 비판적인 내용으로 인해 자국내 출간 금지를 당했다> 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문화대혁명 배경이 아니고 대약진 운동시기(1958~1962) 임을 알 수 있다.내가 보건대 이건 출판사 측의 명백한 오류다. (물론 내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수정해 주지는 않겠지만....)
문화대혁명은1966년부터1976년 까지 10년 동안에 진행 된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중국의 역사를 4000년이나 퇴보 시켰다고 평가되는 실패한 혁명운동이다.
그 보다 앞선 대약진 운동(1958~1962)이 실패로 끝난 4년 후 마오쩌뚱(毛澤東 1893~1976)을 신처럼 신봉(信奉)하는 어린 홍위병들에 의해 중국의 전통과 문화 유산 전부를 파괴되는 시기가 바로 문화대혁명인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두 개의 사건은 선후(先後) 관계가 명확하다.
다시 말해 대약진 운동이 먼저 발생했고, 4년 뒤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것 이다.
그렇다면 대약진 운동이 왜 먼저 발생 하였는지 알려면 우선 당시 중국의 상황을 이해 해야만 한다.
때는 50년대 중반, 소련의 스탈린(1848~1953) 사후(死後)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묘한 경쟁 의식이 싹텄다.
먼저 소련의 주석 후루쇼프(1894~1971)는 소련이 15년 안에 미국의 경제력을 능가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는 소련이 바로 사회주의 종주국의 면모를 보여 주겠다는 뜻이 된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 최고 권력자 '마오'(마오쩌둥)는 곧바로 "우리는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안에 미국을 따라 잡겠다(七年超英,十五年赶美)"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1958년에 대약진 운동이 시작 되었다. (1958년은 책의 저자 옌롄커가 태어난 해 이기도 하다)
서방의 선진국을 따라 잡겠다는 목표를 위해 중국 공산당은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을 요약하자면 1단계는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이고, 2단계는 철강 생산성을 압도적으로 높이는 순서로 진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목표 달성을 위해서 '크게(大) 도약(躍)하여 나아가자(進)' 는 뜻의 약진(躍進)을 붙여 '대약진 운동' 이라 이름을 내세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대약진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수치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2500만에서 5000만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 즉 너무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버렸다. 대약진 운동은 문명의 대퇴보(大退步)인 문화대혁명의 화려한 오프닝이었다.
농작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 보다는 공산당 간부들 끼리 경쟁적인 허위 보고와 조작이 우선이었다. 또한 공업국이 되기 위한 철강 생산도 다르지 않았다.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용광로는 강철이 아닌 형편없는 품질의 철을 생산했다. 더구나 용광로의 불을 때우기 위해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곧 홍수와 가뭄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대약진 운동은 결국 국가적 재앙으로 끝 나고야 말았다.
소설은 이러한 대약진 운동이 전개 되었던 흐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소설의 무대인 위신구(育新區: 새롭게 교육 시키는 지역) 는 교화가 필요한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을 모아 노동 갱생(更生)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창살 없는 감옥이다.
황허 강변에 위치한 위신구에는 모두 99개의 구(區)가 있고 그 중 99번째 구, 즉 99구에는 127명의 지식인들이 수용 되었다.
실제로 당시 마오는 공산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사회전반에 걸친 숙청 작업을 벌였었다. 그러한 과정 중에 당(黨)간부를 비롯한 사회의 지식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소설에서는 숙청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지식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죄인이 되어 위신구에 오게 된다. 특이한 점은 위신구에 온 죄인 지식인들의 구체적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그저 작가, 학자, 음악, 종교, 실험, 의사 등으로 자신이 대표하는 분야를 이름 삼아 서로를 부른다.
이 점은 작가가 정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 하겠다)
위신구 99구에 수용된 지식인들을 관리하는 이는 '아이' 이다.
아이 또한 이름이 뭔 지, 몇 살인지, 왜 위신구를 관리 하는지, 소설에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아이는 소설 속의 주인공에 가깝다. 소설은 대약진 운동속에서 99구에 속했던 아이와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모두 4권의 책에 나누어 써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제목이 <사서(四書)>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서 중 첫 번째 권인 <하늘의 아이> 는 아이를 중심으로 전개 된다.
아이가 등장하는 첫 부분은 마치 성경속의 창세기를 연상케 한다.
아이는 위신구에 오자마자 지켜야 할 십계명을 지식인들에게 선포했다.
아이가 지식인들 보다 분명히 어리고 사회적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모두 아이에게 복종한다. 가끔 지식인들이 아이의 요구를 거부 하거나 반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아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라고 명한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목숨을 거는 아이에게 지식인들은 결국엔 복종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다룬 것은 아니었다. 한번도 그들을 향해서 자신의 권력을 부당하게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아이가 가진 힘은 마치 신성불가침한 영역에서 나오는 듯 하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 졌다' , 아이가 바라는 모든 일들은 그렇게 이루어 내었다.
두 번째 권과 세 번째 권인 <옛길>과 <죄인록> 은 소설 속 '작가'가 쓴 책들이다.
작가는 아이가 상으로 주는 붉은 꽃 송이를 받기 위해 99구에 수용된 지식인들을 몰래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든지 붉은 꽃 송이를 모아서 다섯 개의 별 모양의 상을 받아야만 99구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동료 지식인들을 감시 고발하는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상부에서 정한 제목의 <죄인록>를 통해 작가는 아이에게 지식인들의 죄를 보고했다.
사실 죄라고 해야 별 다른 큰 죄도 아니다. 지식인들이 감춰둔 책이 있다는 정도 였다.
그러나 사실은 지식인들에게 책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소위 먹물로 불리는 지식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자부심은 물질적인 성취에 있질 않다.
먹물들의 세계에서 책은 그들이 살아가는 의미라고 말 할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의 저자 빅터 프랭클(1905~1997) 박사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자신의 원고를 빼았겼다는 것에 분노 했다. 수용소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보다 그는 자신이 쓴 논문에 대한 애착이 더 강했다. 결국 박사는 원고를 다시 쓰기로 마음을 먹게 되는데 이러한 점이 그가 최후까지 살아 남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식인들에게 책은 지식의 원천이며 자신들의 삶의 근원이다. 이들에게 책을 뺏는다는 것은 그들의 근원을 뺏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본다. 책은 지식인들의 정체성이였다.
지식인들은 결국 자신의 책을 모두 아이에게 내 놓게 된다.
하지만 각자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책들은 모두 몰래 꽁꽁 숨겨 놓는다.
<죄인록>을 쓰는 작가 조차도 자신만의 글 <옛길> 을 철저히 숨기며 몰래 쓴다.
그들은 정체성을 뺏앗긴 채 농작물을 재배하고, 용광로에서 철을 생산하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사서>는 지식인의 탄압을 비판한 것이다' 라고 하는 출판사의 소개는 맞는 듯 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이 책이 금서가 된 것은 아니라 본다.
대약진 운동 사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곧 자연 재해로 인한 대기근이 밀어 닥쳤다. 99구에서도 이러한 대기근을 피해갈 수 없었다. 식량은 바닥났고 들에 있는 풀까지 뜯어 먹어야 했다. 볶음 콩 한줌을 얻기 위해 종교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성모 마리아 그림을 발로 짓밟았 버렸다. 음악은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인 학자 몰래 자신의 몸을 팔아야 했다.
그 외에도 뭘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신었던 가죽 구두와 메었던 가죽 허리 띠 마져 앂어 먹으며 살아 남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어 죽게 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 갔다.
99구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까지 손대기에 이르렀다.
배에 구멍을 내고, 팔 과 다리를 뜯어내 삶아 먹는 처참한 인간의 본성(本性)을 여과없이 드러냈다.그렇다면 이러한 인육을 먹는 끔찍한 장면 때문에 이 책이 금서가 되었는가?
아니, 난 그것도 아니라고 본다.
지식인 탄압도 아니고, 인육을 먹는 충격적인 장면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책은 금서가 되었을까?
대기근이 닥친 후 상부에서 그것도 아이가 정말 가고 싶어했던 도성의 상부, 베이징에서 높은 사람이 99구에 찾아 왔다.
그 상부는 굶주림을 견디고 있는 99구 사람들을 보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번 조아리며 말한다.
"국가가 여러분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굶어 죽으면 국가도 굶어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써서든 살아 주십시요. "
그는 눈물을 흘리며 "국가가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 라고 연이어 말하며 떠난다.
소설에서 등장하여 '살아만 달라고, 국가가 죄송하다' 는 말한 사람은 아마도 내가 보건데 쩌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이거나 류사오치(柳少奇: 1898~1968) 일 것 같다.
쩌우언라이는 당시 중국의 총리였으며 누구보다도 마오의 실정(失政)을 수습하고자 노력했던 가장 대표적인 국가 지도자 였다.
류사오치는 대약진 운동 이후 마오의 뒤를 이어 제 2대 국가 주석이 된 사람이다.
그는 주석이 된 후 마오가 주도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통렬히 비판하며 마오를 뒷 방 노인네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댓가로 그는 그 뒤 찾아오는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의 사주를 받은 홍위병들에게 조림돌림을 당해야만 했다.
소설에 등장한 상부 인물의 의미는 무소불위와 같은 마오의 신성(神性)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게 국가 탓이다' 는 상부의 말은 진실이었다.
대기근 끝자락에 아이는 학자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북경의 상부에 갔다가 겨우 돌아 왔다. 그렇게 돌아온 다음날 아침 아이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종교에게 성모마리아 그림에 오줌을 누라고 조롱까지 했던 아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죽어 간 것일까? 그에 대한 이유는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의 가장 큰 메세지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이라고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은 예수님께서 죄를 지닌 인간을 대신하여 벌을 받는 것임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지었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류를 구원하기에 이르신다는 것이다.
아이는 예수님의 대속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살아 남은 44명의 지식인들을 99구 에서 떠나라고 말한다.
또한 아이가 받아 두었던 지식인들의 책을 도로 가지고 떠나라고 말한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책을 돌려 줌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되찾게 해주었다.
이로써 일이 그렇게 이루어지게 한 아이는 진정 ‘하늘의 아이’ 가 되었다.
결국 아이는 99구 사람들의 죄가 아닌 공산당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의미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해석 되어 진다. 이는 곧 아이가 마오의 신성(神性)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받아들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이의 거듭남이다.
따라서 <사서> 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체제에서 인간의 본성(本性)에 관한 문제는 용납이 가능하다.
더구나 4000만명이 굶어 죽어도 그들 체제 안에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한 신성은 불가침한 영역인 것이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는 공산당 입장에서 기독교의 신성과 공산당의 신성은 공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건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사상적 문제가 된다.
이는 곧 국가 지배 체제 근간을 뒤흔들어 놓는 내용인 셈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사서>는 중국내에서 출판이 금지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마지막 권에 해당 되는 <시시푸스 의 신화>는 짧게 언급된다.
끝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시시푸스의 형벌도 결국엔 순응하고 적응되면 더 이상 형벌이 아니게 된다. 어쩌면 중국의 인민들은 신화 속 시시푸스처럼 불합리한 체제에 쉽게 익숙해지고 그 부당한 체제에 순응 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지금 중국의 현실을 옌롄커는 신화를 들어 비판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이 과연 중국에게만 해당 되는 문제인 것인가?
이처럼 <사서>에는 많은 상징과 질문을 담고 있다.
서랍속에서 빛나는 금서 <사서> 는 내게는 '좋은 책'으로 남을 것이다.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멘부커 상을 받을 당시 최종적 결승 심사에 오른 작품이 바로 옌롄커의 <사서>라고 한다.
그 당시 어쩌면 한 끗 차이로 상의 주인이 달라 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아! 추야책희( 秋夜冊喜) 가을 밤 책 읽는 기쁨이여,
호책지시절(好冊知時節) 좋은 책은 시절을 아는 구나.
당신은 책을 쓸 수 있다. 생각과 바람이 현실이 될 수 있어. 상부에서 <죄인록>이라고 책 제목도 미리 정해 주었다. - P29
아버지가 없는데 그 어머니가 어떻게 예수를 임신 했는지 설명할 필요 없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 P234
총을 쏴라. 나를 쏴 죽이면 당신은 강철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냥 가슴을 관통시켜 내가 앞쪽으로 쓰러지게만 하면 된다. - P278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학자와 음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빌려 내 머리속의 가시를 뽑기 위해서 였음을 알았다. 감격스럽고 따스해지면서 그들이 나를 구한 것 같이 느껴졌다. - P478
그러다가 느릿느릿 일어나 나를 보고 한참을 아무 말 않다가 허공과 광야를 향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지식인아..... 지식인......"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아련하고 탁하게, 당시의 시절과 굶주림만큼 감당할 수 없게 흘러내렸다. - P479
내 숙사로 가서 필요한 책을 가지고 떠나라. 나를 떠나라. 다만 부탁이니 나를 십자가에서 내리지 마라. 오래도록 태양을 쬐도록 하라. 꼭, 꼭 기억해라. 햇볕에 두라는 내 말을 꼭 지켜라. - 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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