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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과 불교공부 ㅣ 소리 시리즈 17
활성 지음, 김용호 옮김 / 고요한소리 / 201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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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일상생활과 불교공부
지은이: 활성 / 엮은이 김용호
제 목: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록 갇혀 있지만
우리는 지구라는 공간에 갇혀 살고 있다.
태양계 지구에 사는 인간종은 80억명에 달한다.
지구 공간에 갇혀있는 우리 인간종 80억명은 다시 각각의 육체에 갇혀 있다.
그리고 육체를 가진 우리는 각자의 세계관에 갇혀 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80억개의 세계관이 공존하는 갇혀있는 세상이다.
나의 세계관은 태어난 순간부터 살아온 지금까지 끊임없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어졌다. 그래서 '나'의 세계관과 '너'의 세계관은 같을 수가
없다.
즉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서로 다른 세계관의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더구나 내가 만들어 온 나의 세계관 조차도 내면의 갈등과 외부 세계의 영향으로 늘 흔들린다. 마치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의 원자가 충돌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는 충돌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늘 변화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항상 그대로 있질 않는다. 고정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 하는 우리는 늘 불안하다.
과거는 후회스럽고, 현재는 답답하고, 미래는 불안하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하다.
왜 내가 사는 세상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걸까?
그래서 2500년전의 붓다는 사는게 고(苦)'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를 건너려면 붓다의 지혜가 필요하다.
(사)고요한 소리에서 펴낸 <일상 생활과 불교공부>는 불자(佛子)로서 세상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불자: 부처의 제자 혹은 부처님의 자식 이라는 뜻도 있지만 불법을 믿는 자 모두를 통털어 일컫는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기독교인은 왜 기독자(基督子)라고 하지 않고 기독자(基督者) 라고 할까? )
책을 펴낸 활성 스님(1938~
)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처님 법과 떨어져 살고 있는게 아니라고 말씀 하신다.
현재 사회 불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경제, 사회적 문제들을 단순히 사회현상으로 만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현상에는 불법(佛法)의 인과법칙을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바른 견해(正見)를 배우는 공부로 여겨야 된다고 했다.
특히 스님은 우리의 정치와 사회를 고(苦)의 축약판으로 보았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는 대한민국에 전부 다 갖다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대립과 갈등, 분열 같은 정치와 사회적 문제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 모두 축약 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을 단지 괴로움으로만 여겨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마음 공부를 하는 사람, 즉 불자라면 작금의 이러한 사회현상을 불교공부 하는데 좋은 재료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 조사스님들과 큰스님들이 누누히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다.
삶은 고통이 아니며 오히려 깨달아 자유로워 지기 위한 또 다른 길임을 뜻한다.
그래서 불법에서는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니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활성 스님은 팔정도(八正道)를 언급하면서 그 중 정념(正念) 즉, 마음 챙김을 수행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 챙김이란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말 그대로 챙기는 것이다.
챙긴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알아채는 것이고 이는 곧 지켜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려운 표현이 아니다. '챙긴다, 인식한다, 알아 챈다, 지켜본다'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우리 인간은 육근(六根) 과 육경(六境)으로 세상을 인식한다고 했다.
육근은 여섯 가지 감각을 말한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즉, '눈.귀.코.혀.몸.뜻'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육근이다.
그리고 육경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여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접하는
경계 대상을 말한다.
눈(眼)은 형상(色)을, 귀(耳)는 소리(聲)를, 코(鼻)는 냄새(香)를, 혓바닥(舌)은 맛(味)을 몸(身)은 감촉(觸)을 대상으로 인식한다.
마지막으로 뜻(意)은 마음으로 앞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모두 종합하여 인식한다. 그래서 마음은 곧 법(法)을 대상으로 삼는다.
결국 우리 인간은 육근 육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육체(肉體)가 '나' 라고 인식한다.
육체라는 틀에 나 자신을 가둬두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으신 부처님과 큰스님들께서는 육근 육경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그것은 수행(修行)을 통해서만이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수행을 쌓아 '존재적 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혜와 자비를 닦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존재적 완성으로 가는 첩경이란 것이다.
형상있는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늙어가고, 병에 들게 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른다.
인간이라면 이러한 생노병사(生老病死)를 피할 수 없다.
인간 뿐만 아니라 물질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탄생과 죽음이 있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태양이나 우주의 별들에게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피할 수 없다.
형상을 가진 모든 물질들은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가 흩어진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은 우리 우주의 차원속에서 무한히 반복 되어진다.
이러한 유한함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진화하고 있다.
결국엔 우리의 삶과 죽음이라는 굴레도 어느 순간에 벗어날 것이다.
붓다는 2500년전에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위대한 여정도 사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출발한다.
또한 이 현실 생활이 바로 위대한 여정의 과정이며 앞으로 가야 할 여정이기도 하다.
현실을 떠나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갇힌 이 세상에는 화낼 일도 분노할 일도 우울할 일도 많다.
'화내지 말자. 분노하지 말자. 차단하지 말자' 고 되뇌이지 말자.
아니 화를 내도 되고, 분노를 해도 된다. 다만 화를 내는 나를 알아 채고, 분노하는 나를 알아 채야 한다.
진실하고 용기를 가지는 것이 수행자의 덕목이라면 나의 감정에도 솔직해져야 한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할 나의 세계관이다.
나의 닫힌 세계를 열고 다른 존재하는 모든 세계와 연결함은 '나'를 지켜 봄에서 시작 될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지켜 보는것 그것만이 나를 닫힌 세계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모든 인간 경험의 본질적 의미는 ‘존재의 완성‘ 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든 인생 경험을 통해 존재의 완성을 향하여 걸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뜻입니다. - P8
죽음 자체는 생이라는 한바탕 연극의 끝이 아닙니다. 그저 연극의 한 막이 내려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 P10
불교공부가 따로 있고 세속공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세속생활을 교과서 삼아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 P18
상대를 가르치려고 들면, 오히려 내 마음공부 길이 자꾸 막히게 됩니다. 그건 어설프게 공부하는 태도입니다. - P40
우리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인 저승길 노자,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와 자비심입니다... 중략..... 내가 죽을 때 어느 정도의 의식 수준에 도달하고, 다음 생에 어떤 의식 수준에서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과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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