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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재생-윤회의 가르침 ㅣ 법륜 25
아신 옷따마 지음, 홍윤선 옮김 / 고요한소리 / 2023년 12월
평점 :
책제목: 업-재생-윤회의 가르침
지은이: 아신 옷따마 / 홍윤선 옮김
제 목: 아비담바의 관점에서 본 업과 윤회의 통찰
<티벳트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8세기 초 ‘파드마삼바바’ 라는 티벳 밀교(密教)의 스님에 의해 저술된 사후세계 안내서로 알려져 있다.
책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49일 동안 ‘바르도’ 라는 이승과 저승 사이 공간에 머무르며 다음 생을 위한 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 망자(亡者)에게 <사자의 서>를 독경을 하면 망자는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解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티벳에만 이런 망자를 위한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망자를 위한 의식이 있다. 바로 49재다.
천도재라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에서 의식을 진행한다.
<티벳트 사자의 서> 처럼 절에서는 망자를 위한 <무상계>를 독송한다.
무상계는 망자에게 들려주는 부처님 설법이다.
우리가 어떠한 과정으로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죽고 나면 육신이 어떻게 사대(지, 수, 화, 풍)로 흩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죽은 망자(亡者), 즉 몸이 없는 영가를 위해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부처님이 계시는 법의 세계로 인도(引导)하는 목적이 있다.
<무상계> 또한 <티벳트 사자의 서>와 같은 맥락으로 돌아가신 영가들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주는 설법인 셈이다.
사람이 죽고 난 후 49일 동안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서 머무르다 간다는 세계관은 아마도 불교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진 것 같다.
다시 태어나는 환생을 바라거나 극락 세계로 가라고 명복을 빌어주는 풍토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윤회나 환생을 언급하면 신비주의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임종체험 혹은 사후 세계를 다녀 왔다 거나,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 같은 다소 오컬트적 인식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요즘은 그러한 소재를 다룬 영화나 웹툰 ,소설, 드라마 는 흔해 졌지만 단지 흥미나 재미 위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불교의 세계관에서 죽음과 윤회는 단순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깨달음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서 살다가 죽기를 무수히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영가라고 불리는 망자들은 생전의 의식 차원에 따라 다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것을 환생이라고 하는데, 사실 윤회(輪廻) 는 인간이 죽어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 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 윤회의 작용은 사실 방대하다.
이번에 읽게 된 <업-재생-윤회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내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윤회를 <아비담마> 라는 초기 불교의 경전의 통찰을 통해 좀 더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었다.
저자 ‘아신 옷따마’ 스님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미얀마에서 비구계를 받아 현재는 자신의 고국 체코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펴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아비담마>라는 경전은 그동안 구전되던 붓다의 가르침을 빠알리어로 기록한 경전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은 크게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 라는 두 가지 언어로 전승되어 져 왔다.
빠알리어는 본래 부처님 당시 평민들이 사용했던 언어였고 산스크리트어는 귀족계층이 쓰는 언어 였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왕족 출신이라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평민들에게는 빠알리어로 법을 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빠알리어 경전은 부처님의 원음(原音)에 가장 가깝다고 전해진다.
원래 부처님 초기 가르침은 전부 암송으로 구전되었다.
부처님 열반 후 제자들은 생전 부처님의 말씀을 전부 외워서 후대로 전승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붓다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동아시아로 전파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스리랑카에서 처음으로 빠알리어로 경전을 쓰기 시작하여 빠알리어는 주로 동남아시아 같은 남방 불교 경전에서 사용 되어졌다.
반면에 우리 나라, 중국, 일본 같은 동북아시아는 산스크리트 언어를 기본 베이스로 한 경전이 북방불교에서 사용되어 졌다.
한때 남방불교라 하면 소승불교라 하여 북방불교를 믿는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폄하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분별이었다.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나 또한 지리, 문화적인 영향으로 인해 선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면이 강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선불교이든 교학 불교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하나 였음을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책<업-재생- 윤회의 가르침>은 <아비담바>의 경전에서 통찰한 업의 작동 방식, 과보 그리고 윤회의 실상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쉽게 전부 이해를 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의미가 깊어 곁에 두고 앞으로도 자주 들쳐 보게 될 내용들이 무척 많다.
하지만 기본적인 맥락인 우리의 생과 사를 거듭케 하는 윤회의 원인은 바로 업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 전체적 이해는 충분하다.
업이란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종종 오르내리는 ‘업보’라는 단어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어떤 결과가 따른다는 것으로 팥 심은데 팥 나고, 콩 심은데 콩 난다는 식의 단순한 원인과 결과를 비유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업의 작동 원리는 앞의 비유처럼 단순하지 않다.
<아비담바> 에 따르면 업은 조건에 따라 24가지 종류로 나눠진다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인연’(因缘) 이라고 부르는 것도 업과 과보의 한 종류라고 한다.
업과 과보를 합쳐서 우리는 ‘업보’ 라고 부르는데 업이 원인이라면 과보는 결과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인생 살이는 과거의 업의 작용이 무척 크게 영향을 받는다.
업의 작용에 대해서는24가지 조건에 따라 업은 작동하므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은 대단히 작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업이 작동 되는 조건은 보통 사람은 이해 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복잡하다.
단순하게 예를 들어 어느 누군가는 착하지만 늘 불행하고, 어느 누군가는 무척 나쁜 사람이지만 항상 잘 사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착한 사람은 착한 과보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한 생의 업보만으로 놓고 둘을 비교하면 이해가 안되는 점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의 인생을 한 생(生)만을 놓고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닌 과거의 무수히 많은 생들의 인과(因果)로 따진다면 현생의 불합리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짓는 업은 분명 이 생에 과보를 받기도 하겠지만 그 중에 극히 일부만 이번 생에 반영 되며 대부분의 과보는 내생에서 받게 된다고 한다.
지금 내가 짓는 업의 과보가 다음 생에 라도 반드시 받게 되리라는 점과 현실에 처한 상황은 대부분 과거에서 왔다는 가르침은 새겨둬야 했다.
나는 이점이 무척 흥미로 왔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 예를 들어 나의 부모, 나의 자녀, 나의 처나 친척, 지인들은 모두 과거생의 인연과 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업력(业力), 즉 업의 힘은 매우 강력하며 전생에서 이어져 다음 생의 조건이 되는 의식으로 재생(再生)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윤회는 돌고 도는 재생이라고 라며 끊임없이 우리는 늘 육도를 헤메고 도는 것이다. (육도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 천상계를 일컫는다. )
이처럼 업의 작동 원리는 윤회하는 모든 존재가 따를 수 밖에 없는 우주의 실제 보편 법칙이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붓다는 수행을 한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수행도 단지 한 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수히 많은 전생을 통해 닦아 왔다는 것은 많은 불교 경전에서 언급 되어져 있다.
붓다 역시도 수 많은 생(生) 속에 수행을 하였고 마침내 윤회를 벗어나고 해탈에 이른 것이다.
<아비담마> 에서 우리에게 한 생이란 정신과 물질이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며 형성해 가는 흐름일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심찰나’라고 하는 마음의 연속 작용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아 차리게 되는 것 조차도 과거 업의 과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이 이성을 지배한다는 이론은 사실은 업이 우리의 이성을 지배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닌가 싶다.
즉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불교에서의 업력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보여진다.
불교에선 ‘무아’ 를 깨닫는 것을 불법의 요체로 삼는다.
본래 내가 없는데 윤회하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물음이 선문답 (禪問答) 의 화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철저한 무아의 깨달음이 없다면 업은 우리의 모든 생을 철저히 지배한다.
지금 쌓고 있는 업과 과거에 쌓아왔던 모든 업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나고 죽고, 다시 또 재생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윗빠사나 같은 수행은 나의 모든 의식과 행동을 관찰한다.
윗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나에게 일어나는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다.
즉 ‘관’ 수행이다. 선불교에서 자신의 본래 성품을 비춰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망상에 가리워진 나의 본성품을 관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이고 선불교의 참선이다.
과거로 부터 전해진 업과 현재 짓고 있는 내가 알게 모르게 짓는 업이 다시 또 재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라는 것이 실체가 아닌 그저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업의 덩어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는 것 만으로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빛나는 지성으로 한껏 고양된 존재, 가장 높고도 숭고한 존재계까지도
한낱 침 뱉는 타구(唾具)로 여기게 될 때, 그때 그대는 열반을 향할 준비가 된 것이다.>
p. 126 <미얀마 큰스님 시 중에서>
모든 사물을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보려면 반드시 먼저 대상과 거리두기를 해야만 한다. - P43
마음 챙김만이 우리가 자유의지를 행사 하는데 핵심이다. - P56
궁극적 실재 차원에서는 물질은 물질적 성질을 띈 무리가 모인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라고 깨닫게 된다. - P104
우리의 감각기관은 실재 세계의 전체 스펙트럼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하는 아주 좁은 범위만을 감지 할 수 있다. 그렇게 좁은 범위 너머에는 우리 감각기관으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는 실재의 차원들이 있다. - P92
마음을 정화하고 청정하게 하려는 것이 윗빠사나 수행 체계의 핵심이 아니다.... 중략..... 망상을 꿰뚫어 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은 깊은 고요와 정신적 몰입이 아니라 온갖 경험을 할 때 철저히 초연해 지는 것이다. 그리하면 갈애가 모두 뿌리째 뽑힌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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