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
헤르만 헤세 지음, 강민경 옮김 / 로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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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의 믿음

지은이: 헤르만 헤세/ 강민경 옮김

   : 믿음의 씨앗은 나무로 자란다

 

 

 

이 책<나의 믿음>은  헤르만 헤세(1877~1962)가  가졌던 종교와 그 믿음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헤세가 생전에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그의 믿음을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집과 같다.

1910년대 에서 1960년대 에 걸쳐 헤세가 남긴  기고문과  편지글을 통해서 그가 어떤 믿음을 가졌고 그가 추구했던  영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나는 헤세가 그의  자전적 작품들속에서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사랑' '구원' 이 아니였을까  짐작해 본다.

나는 그가 신실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 이였기 때문에 사랑과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헤세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신학교에  진학해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했을 정도로 그는 평생을  종교 없이 산 적이 없으며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교회라는 테두리안에  갇혀 있길 거부 하였으며 오히려 일생을 교회 없이도 살아 왔다고 고백 한다.

즉 헤세는 교회를 중요시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보다 영성() 생활을 중요시 하는 그리스도 인이 되고자 했다.

그가 생각했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보편적으로 말하는 기독교식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의 영적인 삶에 대한 추구는  탈무드에서 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우파니 샤드, 붓다의 가르침을 거쳐서 공자와 노자에 이르기 까지  진리에 이르는 길을 탐색 했다.

그에게 있어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였다.

헤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붓다의 깨달음을 같은 경지라 여겼고, 공자의 덕()을 이해한 후에는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형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때 부터 외할아버지와 부모님이 가진  경건주의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교회 단체나 교회 종파 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생각 했다.

그의 집안 어른들이 인도에서 선교 생활을 통해 인도의 종교를 접한 후 결국 종교에는 우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반면에 그가 믿었던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에 대한 헤세의 평가는 가차 없다.

<그가 그저 개신교 신자 였다면, 성직 제도를 반대 했거나 교회와 국가에 맞선 개인의 대변자였더라면 그를 나쁘게 탓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교회보다 그 무엇하나 나은것 없는 새로운 교회를 스스로 세웠지요. 또한 국가와 지배자들을 적극적으로 보좌했고 농민들을 져버렸습니다.>

 

또한 또 다른 종교 개혁가 칼뱅(1509~1564)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칼뱅의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봐도 그가  은총의 신비를 아주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은총이란  이름은  다를지라도 그러한 것이 항상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빛이자  신 그 자체요. 우리가  잠시 마음을 열면 그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어린아이든, 현자든  상관 없이 말이지요.>

 

이처럼  헤세는 단지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의 사랑과 그리스도 인만 구원을 받는 다는 식의 경직되고 편협한  믿음은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믿음 이었다.

이를  헤세의 세계관 작품속에선  어린시절 순수함을 지나 사춘기 시절의 절망과 타락을 거쳐 결국 어른이 되면서 구원을 얻는  패턴으로 구조화 시켜 표현 했다.

이것은 곧 그가 체험했던 영적 성숙의 단계를 작품속 세계관에 반영한 것이었다.

 

 

 

그의 소설  <싯다르타> 에서 언급 했던 붓다의 '깨달음' 은 곧 '사랑' 이였다.

이는 기독교의 사랑과 다르지 않고 그 '사랑' 을 불교에서는 '자비' 라고 부른다.

그는 이처럼 그에게  사랑과 구원은 맹목적인 종교적 가르침이 아닌 오로지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에게 믿음은  '진리는 둘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교회에 대한 실망은 가졌지만 자신의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즉 개신교를 버리지 않고 불교적이며 유교적이고 또 도교적인 믿음을 갖춘 신앙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원효가 대승기신론에서 주창했고 유마거사가 삶을 통해 보여줬던 불이 ( : 둘이 아닌)의 경지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던게 아닐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주목한  것은 헤세가 1944년 발표했고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와  그의 친구 '카를로 페로몬터' 에게  보낸 가상의 편지글 이다.

1960년에 쓴 편지글 엔 헤세가 나이 83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접한 선불교(禪佛敎)에 대한 이해를 흥분된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편지글에서  <벽암록> 제 1칙을 비롯한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을 통해 그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 하고 매력적인 깨달음의 순간에 대하여  어린이 같은 호기심을 가졌던 것이 느껴졌다. 

이는 자신이 80 평생 추구 했던 모든 영적인 삶이 '' 이라는 진리의 큰바다로 흘러 들어 간 것을 기뻐한 게 아닌가 싶다.

 

 

 

본래 불교에서 ''은 혁명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혁명은 기존의 모든 관념을 전복 시켜버린다.

소승불교라는 작은 수레를 던져 버리고 큰 수레에 중생들을 태워 모두 함께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했던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 이라는 정신 혁명을 통해 불교는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 서게 되었다.

그렇게  선은 기존의 형식적이며  기복적인 불교를 뒤엎고   깨달음의 불교로 진화 시킨것 이다.

 

 

 

이 책을 통해 헤세가 추구했던 영적인 삶이 어떠 했는지 잘 알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했고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그가 향한 믿음은 밖으로가  아닌  자신의 안을 향한 것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헤세가 종교간에는  우열이 없고  모든 종교가 결국은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그가 분명 편협된  믿음을 가진  개신교인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성경의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잘 알려진 용어  '믿음, 소망, 사랑' 을  불교식으로 바꿔 보면 믿음은  신심(信心)으로, 소망은 발원(發願)으로, 사랑은 자비(慈悲)로 부를 수 있다.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했는데 사랑은 곧  자비이다.

자비는 지혜를 모체로 삼는다.

그래서 지혜는 다른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반야 바라밀' 이라고  부른다.

결국 육바라밀의 마지막 반야 바라밀이 바로 지혜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사랑이 제일이라  했듯이 불교에서도 자비가 곧 지혜요, 지혜가  깨달음이니 사실상 두 종교 모두 다 같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먼저  믿음을 굳게 가져야 발원을 세울수 있고  결국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 라고 한 옛 선사(禪師)들의 말씀은  틀림 없다.

 

헤세가 이렇게 까지 상세히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믿음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헤세에게 심어진 믿음의 씨앗이 개신교의  뿌리에서 위로 싹이 터져 나와 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 거쳐 마지막   불교에 이르는 줄기와 가지 이어져 뻗어  믿음의 나무 보이는 듯 하다.

 

 

 

 

 

이 책을 덮고 난후 나에게 헤세는 마치   독일에 태어난 유마거사 처럼 느껴진다.

 

 

 

 

 

 

 

 

 

 

일상적인 대화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영혼을 담아 말하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면 성인에 가깝다. - P30

나에게 삶은 이 세상의 양극 사이를 오가는 것, 즉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기둥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 P43

중국인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자신들의 훌륭한 성품과 재능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P97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결국 삶에는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 P167

저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는 신을 믿을 겁니다.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그림으로, 언어로 나타났기에 신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테지요.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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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5-3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내용이라 유익했어요. 마힐님^^

마힐 2024-05-31 18:13   좋아요 0 | URL
구름 모모님, 저에게 한 분의 지음(知音)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