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싯다르타 (문고판) - 1922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진권 옮김 / 더스토리 / 2023년 2월
평점 :
절판


원래 <싯다르타> 독후감은 안 남기려고 했다.

이책을 이미 올 봄에 감명 깊게 읽고난 후 곧 바로 <유리알 유희>를 통해 나름 힘겹게 헤세의 사유를 정리했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싯다르타는 굳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 한것이다.

그런데 몇일전 <타이탄의 도구들> 이란 책을 읽는데 책의 서문에서 싯다르타의 구절을 언급하는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내용은 <싯다르타> 를 읽으면서 내 마음으로 들어온 구절 이였다.

"나는 사고 할수 있습니다. 나는 기다릴수 있습니다. 나는 단식 할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 갈수는 없을것 같다.

<싯다르타> 에 대해 다시 정리해 봐야겠다고 생각이 든것이다.

 

어릴때 부터 <싯다르타> 는 책 제목만 보고 부처님의 또 다른 이름 '고타마 싯다르타' 라고 여겨져서 그냥 단순히 부처님 일대기를 소설로 쓴것 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어쭙잖게 안다는 오만한 생각에 읽고 싶은 마음이 안들었다.

그러다 어쩌다 올 초에 알라딘에 뜬 광고에서 '초판본 표지 디자인' 이란 광고에 충동 구매를 한것이다.

이거 불교 소설이고 표지 디자인이 초판이니 소장 가치가 있을 꺼란 이상한 심리가 들었다.

 

그런데 막상 책은 소장용 치고는 너무 아담하고 깔끔해서 책꽃이에 두기엔 폼은 안난다.

그래도 구매를 했으니 안읽을수가 없지 않나?  별다른 기대는 안했지만....

그뒤에 어마어마한 감동이 올지 몰랐다.

 

사람들은 소위 명작이란 작품은 나이가 변함에 따라 다시 읽어 보면 다른 느낌을 받는다고들 한다.

대표적 인게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가 있다.

10대에 읽을때는 어린 왕자의 지구 여행기 수준의 감흥이 있을것이고

20대에 읽을때는 장미와 어린 왕자의 사랑, 여우를 통한 길들임에 대한것을 느끼게 되고,

30대에는 지구에 오기전에 여행하며 각각의 행성에서 만난 인간 군상의 상징까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40대 때는 세상과 사랑에 대해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읽게 되는것 같다. 적어도 나에겐...

 

그래서 책은 당시 읽는 이의 마음 상태, 이해도, 삶에서 경험한 체험 상태에 따라 사람마다 시기마다 느끼고 이해하는게 전부 다르지 않나 싶다.

싯다르타 또한 그런것 같다.

내가 젊은 시절 착오로 몰라 봤지만 만약 그때 읽었었더라도 지금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를것이다.

지금 상태의 나에게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대한 헤르만 헤세의 풀이 이자 서양판 <유마경> 소설로 읽힌다.

 

싯다르타는 어릴때 부터 총명했고 잘 생겼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인물에 출신 또한 바라문 이였다.

'사마나' 라고 부르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 친구 고빈다와 같이 스승을 찾아가 수행을 한다.

그리고 그 스승들이 만족할 만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물위를 걷거나, 사람을 부리는 마법 같은 초능력을 할 줄 안다 해도 그건 해탈이 아니다.

그런 정도의 수행과 경지로는 싯다르타의 마음을 비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타마 붓다' 의 문하(門下) 를 찾아가게 된다.

붓다는 당시에 완전한 깨달음, 즉 무등정각을 성취한 분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계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제자가 되길 청하고 수행하기를 원했다.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는 결국 붓다 곁에 남아 제자가 되지만 싯다르타는 붓다에게서 떠나게 된다.

 

<오, 지존이시여! 제가 당신의 제자들 중 하나가 된다면, 저의 자아가 단지 겉으로만, 허위로만 안식에 도달하고 해탈을 얻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실제로는 저의 자아가 계속 살아서 커지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P. 69 >

 

난 이 부분에서 당시 싯다르타의 입장을 안타까워 했다.

왜 지금 눈앞에 계신 최고의 스승을 온전히 받아 들이지 못하는지?

스승에 대한 완전한 귀의(歸依)  만이 자신과 스승을 하나로 만들수 있을 텐데...

어쩌면 싯다르타는 너무나도 영리해서 아상 (我相) 과 교만 때문에 진정한 스승을 못 알아 본 것인가?

 

하지만 싯다르타가 스승에 대한 존경이 없거나 아만, 아상이 높아서가 아니였음을 책을 다 읽고 난후 에야 겨우 싯다르타의 마음을 알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은 '붓다 만의 체험' 이라고 봤다.

붓다가 아무리 설법을 훌륭하게 하고 제자들을 교화 시켜도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건 각자 자신들의 체험이 아니라고 본것이다.

싯다르타 자신은 자신만의 길로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속으로 나와서 카말라와 사랑에 빠지고, 상인이 되어 장사를 하고, 노름과 술에 빠지는 둥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다 반복되는 세속적인 삶의 염증 끝에 그 모든것을 버리고 떠난 싯다르타는 강가에 이르게 된다.

그 강가에서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나게 된다.

바수데바의 언행에서 감명을 받은 싯다르타는 자신 또한 뱃사공이 되어 강() 의 노래를 들을줄 알게 된다.

 

<싯다르타는 강으로 부터 끊임없이 배웠다. 무엇보다고 강으로부터 고요한 마음으로, 영혼을 열고서 기다리는 마음으로, 격정을 일으키거나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의견을 말하지 않고서 경청하는 법과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P. 178 >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점차 깊어지는 깨달음에 다다랐지만

고타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던 카말라와 자신의 아들과 상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카밀라의 죽음과 남겨진 혈육에 대한 애착을 싯다르타는 마주 해야만 했다.

자식에 대한 애착은 싯다르타 자신도 몰랐을 정도로 큰 상처만 남겼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 다시 또 강에서 싯다르타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싯다르타는 들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귀 기울이는 자가 되었고, 완전히 경청하는 데 몰두 했고,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완전히 빨아들였다....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옴', 완성이었다. P. 226 >

 

결국 싯다르타에게는 자신이 체험한 모든 장면들이 전부 구도(求道)였던 것이다.

 

나는 이부분에서 전에 읽었던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 에서 산티아고가 사막에서 바람으로 변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산티아고는 '만물의 언어' 를 익혀 '사막' 과 대화를 하고, '바람' 과 대화를 하며, '태양' 하고 대화를 한다.

종국에는 세상을 창조한, '천지만물을 기록한 손' 에게 아무 바람도 없는 기도를 하며 깨우친다.

만물의 정기가 신의 일부이고 신의 정기가 곧 자신의 영혼임을.

 

뿐만 아니라 후에 읽은 헤세의 <유리알 유희> 의 세편의 이력서는 모두 <싯다르타> 의 이야기 결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특히 고해사에 나오는 두 수도승의 관계는 싯다르타와 바수데바의 관계, 싯다르타와 고빈다의 관계는 각 각 다른 소설이지만 서로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수 있었다.

아마도 헤세의 입장에서 싯다르타에서 하고 싶은 메세지는 헤세가 말년 까지 고수한 자신이 추구한 이상(理想) 혹은 깨달음과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옛친구 고빈다와의 재회에서 궁극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통해 여실히 체험하게 된다.

이 장면이 바로 내가 본 이 소설의 백미(白眉) 이자 헤세가 추구했던 깨달음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모든 진리의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다..... 세존 고타마께서 가르치시면서 세상에 대해 말씀하실때,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눌수 밖에 없었다네.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없네. P.236>

 

현대 물리학에서 차원에 대해 이렇게 정의 한다.

일차원은 점으로 되있고 이차원은 선으로 된 평면이고 삼차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인 입체 공간이며 사차원은 입체 공간 에다가 시간이 더 해졌다고 한다.

차원에 대한 특징은 각각의 차원은 자신보다 높은 차원을 볼수도 없고 이해 할수도 없다는 것이다.

일차원은 이차원을 이해를 못하고, 삼차원은 4차원을 이해를 할수가 없는것이다.

하지만 4차원은 3차원을 알수 있고, 3차원은 2차원을 알수가 있단다.

즉 우리가 사는 3차원은 4차원을 모르지만 4차원은 3차원을 잘 안단다는 뜻이 된다.

이런식으로 보면 깨달음의 세계는 3차원을 넘어선 세계나 다름없다.

그 세계를 3차원인 현실 세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려면 이해할수 있는 범위에서 설명해야 한다.

그 도구가 언어이다. 즉 말을 통해 이해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란 도구로 진리, 깨달음을 설명 하려해도 그 전하는 말 자체는 진리가 아닌것이다.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고 항상 부를수 있는게 아니고 이름을 항상 이름 지어져 부를수 없다) 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존께서 깨달은 경지를 아무리 말로 표현 하려 해도, 결국 우리의 관념안에 있는 것으로 밖에 설 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不立文字,敎外別傳) 이라고 하는것이다.

 

싯다르타가 붓다의 문하를 떠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라고 해도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의 길에서 자신만의 체험으로 진리를 알고자 했던것이다.

 

<한 인간이 완전히 신성하거나 완전히 죄를 짓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네. 우리가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세계와 영원사이, 번뇌와 행복 사이, 선과 악 사이에 놓인 것 처럼 보이는 간격 또한 착각이라네. P.237 >

 

<죄인 안에서, 자네 안에서, 모든 사람 안에서 생성되고 있는 붓다, 가능성을 지닌 붓다, 숨겨져 있는 붓다를 존경해야만 하네.... 이 세상은 불완전하지도 않고 또는 완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지도 않다네. 아니 세계는 매 순간 완전하네. P.238>

 

얼마전에 읽은 유마경의 사상과 일치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가 곧 불국토라는것.

더럽다 깨끗하다도 없으며 번뇌와 깨달음의 차별이 없는 바로 이 자리에서 , 지금 내 안에 있는 불성(佛性) , 즉 참성품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이 둘이 아니 () 라는 불이 사상과 일맥상통하다.

 

<사랑이야 말로 나에게는 무엇보다 도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네..... 그 분께서 어떻게 사랑을 모르시겠나? ..... 그분의 손짓 하나하나가 그분의 의견보다고 더 중요하다네. 나는 그분의 설법, 그분의 사상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깨닫는게 아니라, 오직 행위와 삶 속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네. P.246 >

 

이 부분에서는 얼마전에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비록 조르바의 차원과 붓다의 차원은 다르겠지만 사랑에 대한 본질과 순간순간을 걸림없이 산것은 틀림없다.

 

<고빈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위대한 사랑과 예감에 이끌려 그에게 순종하여 그의 몸 가까이로 몸을 숙여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술을 대는 사이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고빈다는 자기가 바로 조금전에 입을 맞추었고, 바로 조금전에 모든 형상과 생성과 모든 존재의 무대였던 싯다르타의 고요한 얼굴 위로 몸을 굽힌 채 잠시 서있었다..... 싯다르타는 잔잔히 미소지었고, 그윽하고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P.252>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는 순간 오랜 여정 동안 싯다르타가 추구했으며 세존 고타마가 한 체험을 고빈다 본인이 몸소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은 오직 각자의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헤세가 전하는 깨달음에 대한 소설적 표현 이라고 본다.

 

<싯다르타> 는 1922년에 출판 되었다고 한다. 계산을 해보면 헤세의 나이 45세 즈음에 완성된 것이다.

헤세의 말년에 지은 <유리알 유희>는 1943년 에 나왔으니 20년이 흐른 시간 뒤에 65~66세가 되는 나이다.

두 작품의 연관성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분명히 이어져 있다고 본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했던 일이관지(一以貫之 : 한가지로 꿰뚤어 버리는) 처럼 그의 사상은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관통하지 않았나 싶다.

 

싯다르타는 어쩌면 이미 완성된 자 일수도 있겠다.

붓다의 또 다른 모습이며, 유마경에 유마의 또 다른 모습으로도 볼수 있고, 헤세의 또 다른 분신이기도 하다.

 

 

헤세가 말했던 산문의 시대 속에서 남들에게 의지 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사고하는 능력,

바쁜 세상속에 홀로 여여하게 기다릴 수 있는 여유.

맛있어 보이는 식()의 유혹에서 벗어나 스스로 단식할 수 있는 선택.

각각의 능력이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스스로가 선택하는것 보다 AI  나 남들의 평판에 의지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는 느긋하게 기다리는것 보다 남들 보다 더 빨리 성취하려고 조급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맛집 과 먹방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고 단식을 하기는 너무나 힘들지 않는가?

 

그래서 시대엔 사고할 있고, 기다릴 알고, 단식할 아는 능력은 사실 대단한 능력 인것이다.

 

 

 

그것은 곧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를 의미 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고할 수 있는 능력과 기다릴 수 있는 능력, 단식할 수 있는 능력은 독서에 빠지면 자연스레 이루어 지는 능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앞으로 누군가 헤세의 작품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싯다르타 !" 라고 외쳐야 겠다.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사고하고, 단식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채, 마치 물속을 헤쳐 나가는 돌처럼 세속의 일들을 헤쳐 갑니다.
- P105

만약 사고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면, 누구나 마술을 부릴수 있고, 누구나 자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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