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깨닫는 유마경 강의 - 집착과 분별을 넘는 큰 가르침
성태용 지음 / 북튜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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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지금, 여기에서 깨닫는 유마경 강의)을 알라딘의 추천으로 보고 나의 대학졸업 논문이 떠올랐다.

그 시절에 썼던 논문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에 관한것 이었다.

왕유의 자(:이름 대신 부르는 별칭)가 '마힐(摩詰)' 이었다.

이 '마힐'이란 이름은 불교 대승 경전의 하나인 <유마경(維摩經>의 '유마힐' 거사에서 유래 한것이다.

그 당시 처음 <유마경> 을 보고 내용이 너무 파격적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나는 것처럼 마치 옛친구를 오랜 시간이 흐른뒤에 다시 만나는 느낌과 비슷했다.

 

원래 대승(大乘) 경전인 '유마경'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 所說經: 유마에 의해 전해지는 경)> 을 줄인말이다.

실제 경전은 '불국품'으로 시작해서 '법공양품'까지 13품으로 이루어졌다.

불경은 팔만 대장경이라 부를 정도로 방대한 양과 수많은 방편(方便)을 가지고 있다.

불자가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 불교 경전은 모르는 한자와 범어(梵語) 등으로 써져 있어 읽기도 어렵고 내용 또한 심오하여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 불자들도 반야심경 이나 천수경 독송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불교의 대부분의 경에는 스토리로 구성 되어 있다.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등 부처님 당시의 설법들을 경전에서 소설 속의 장면들 처럼 각각의 이야기와 주제가 펼쳐진다.

유마경 또한 그러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마힐이다. 보통은 유마거사라고 부른다.

거사(居士)는 출가를 하지않고 불법 수행을 하는 남자를 보통 일컫는다.

요즘으로 치면 신심 많은 '재가(在家) 불자' 인셈이다.

 

줄거리는 병이 난 유마거사를 부처님 제자들과 문수보살 일행들이 병문안 하러가는 내용이 큰 줄기다.

이때 병문안 가기전에 발생하는 제자들과의 설전, 그후 병문안 하러간 문수보살과의 문답과 유마거사의 방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들로 짜여져 있다.

유마거사가 부처님 제자들과 심지어는 보살들까지 하나하나 통쾌하게 깨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설정은 사실 상징적 이지만 뒤에 나오는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 아래에서 <지금, 여기에서 깨닫는 유마경 강의>을 읽어 보았다

오래전에 잊었던 그 감동이 다시 살아 난것 같다.

지금 시대에 맞는 언어로 다시 재해석한 작가에 탄복했다.

불자가 아닌, 유마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을 위한 작가의 배려가 느껴졌다.

작가의 책은 불교 경전은 어렵다는 편견을 단숨에 없애준다.

 

이책의 작가 성태용님은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님 출신이시다.

더구나 한학을 깊이 배우신 분으로 본래 지니고 계신 내공이 엄청난 분이신것 같다.

작가는 이책을 집필할때 시중에 나온 다른 유마경 해석서나 해설을 참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관념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지금 시대의 언어로 경전의 참 뜻을 전한다.

부처님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가? 깨달음은 어려운 언어로 표현하는게 아니라고.

작가 본인이 원래 한학을 연구한 유학자 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불교의 교학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작가는 유마경 자체가 지닌 강력한 메세지를 통해  '경전에 갇히고 산속에 숨겨진 듯한 깨달음을 '지금 여기에서' 꺼내야 된다' 고 주창한다.

본래 불교의 역사에서  대승(大乘) 불교가 일어난 배경에는 출가자 중심의 불교 때문이였다.

소승(小乘), 즉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일반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을 소외 시킨 불교의 모습에 대한 정화 운동에서 시작했다.

대승 운동전에는 중생들의 삶은 하찮고 열등한 것이고 출가자들 삶은 뛰어나고 청정하다고 여겼다.

그러니 중생들은 이생에서 수행은 포기 하고 출가자들에게 보시와 공양하며 복이나 빌고 내생에나 출가하여 수행할수 밖에 없는다는 것이다.

우리 삶 전체가 마음의 위안을 삼는 불교에서 마저 소외 당한것이다.

이러한  출가자와 재가자, 깨달은자와 못 깨달은 자라는 이분법을 유마경에서는 철저히 깨고 있다.

깨달음은 소수의 출가 수행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누구나 일상에서 지금 이 순간에 대중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념의 유희에 머물렀을 뿐 구체적인 현실을 바꾸는데 등한했던 길고도 긴 불교의 역사! 핵폭탄급 파괴력을 가진 힘 있는 가르침을 불발탄으로 만들어 온 역사 아닌가요? P.123>

 

<보수와 진보, 남자와 여자의 평등과 차별, 자유와 평등, 있는자와 없는 자, 사용자와 피사용자 등의 갈등도 결국 그 뿌리를 거슬러 살펴보면  둘에 매달리고 그것을 정말 있는것으로 여기는 집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양극화의 현상이지요. P.150>

 

<차별성을 뭉개 버리고 하나로 만들려는 것은 획일화라는 다른 하나의 방식을 만드는 것일뿐이지요.... 그런  획일화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위험한 사상이지요... P.150>

<둘이 아닌 진리에 깨달아 들어간 이는 상대적 차별에서 벗어나되, 다시 상대적 차별의 세계속에서 노니는 이가 되는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P.153>

 

수많은 선지식들 께서 말씀하시는 유마경의 핵심 사상은  '불이법문(不二法門) : 둘이 아닌 진리의 문' 이다.

'일체가 둘이 아니다. 둘로 보면 안된다. 둘로 보는 차별에서 벗어 나야 한다.'

깨달으신 선지식들께서는 모두 이렇게 공통적으로 설()하신다.

참 쉽다. 둘이 아니라는 말.  정말 어렵지 않고 머리로는 정말 쉽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걸 실천 수행하는것은 대단히 어려운 관문(關門)이다.

 

우리가 소위 '속세(俗世)'라고 부르는 이 현실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 같이 화합하면서 잘 살고 있는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은 왜 벌어졌는가?

멀리 갈것도 없이 우리나라만 봐도 남과 북의 이념 대립, 보수와 진보의 대립, 지역 감정 대립, 남여 차별이 항상 존재 한다.

또 더 가까이 보면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나 내 주위의 친인척, 그리고 가족까지 매일 매일 닥치는 갈등에 번뇌하고 있지 않는가?

유마경을 읽었다고, 아니 불교의 팔만 대장경을 전부 다 읽었다고 해도 이 모든걸 다 극복하고  둘로 보지 않을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관문이다. 그렇지만 꼭 넘어야 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불국품>에서 사리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을 의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처님이 보살시절에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수행했으니 청정하지 못했을것 이라고 생각한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는 여전히 청정하지 않고 더럽지 않는가?

그런데, 부처님은 마치 이러한 현실의 우리를 대변하는 사리불의 마음을 알고 일깨워 주신다.

 

<나의 불국토는 청정한데 네가 보지 못하는것일 뿐이야. 해와 달은 밝은데 장님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해와 달의 탓이겠니?  P.15>

 

<"이세계는 더럽다."라는 생각은 부정적 관점이고, 그런 부정적 관점으로는 절대 온전한 이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본래 청정함.  그것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실천이고 수행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디 부처 라는 관점에서확고하게 서서 부처가 되는길을 걸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본디 부처임을 확고하게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중생의 나라도 똑같습니다. P.25>

 

그러면서 부처님께선 그 더러운 사바세계를 본래 청정한 불국토의 모습으로 드러내 보인다.

마치 요즘 영화에서 CG 기술 같이 또는 가상현실속의 홀로그램이 겹쳐 보이듯이 현실세계위에 바로 본래 세계인 불국토를 드러낸것이었다.

 

유마는 왜 병이 들어야 했는가?

유마는 왜 중생이 아프므로 내가 아프다고 했는가?

연꽃은 왜 진흙에서만 피는가?

 

앞에 했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수 있으리라.

역대 선지식들 께서는 둘이 아닌 도리를 철저히 깨치려면 내 근본부터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대행 선사께서는 나무로 비유하셨었다.

나무의 뿌리는 흙에 가려 보이질 않지만 흙위로 보이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 잎은 다 각각 있는것 같지만 뿌리는 하나에서 나온것이라고 하셨다.

즉 우리가 둘로 보는 것은 가지에 달린 잎들이 서로 '나다. 너다' 하고 분별하는것과 다르지 않은것 이지만  그 근본 뿌리는 하나 라고 하셨다.

이런 비유를 통해 둘이 아닌 도리를 명쾌하게 설하신적이 있다.

그렇다면 수행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근본 불성을 믿는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마는 이순간에도 설하고 있다.

바로 이 혼탁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나라라고.

번뇌에 휩싸인 중생이 바로 부처라고.

수행은 번뇌를 버리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연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게 아니라 바로 진흙에서라야 필수 있는것이라고.

이 모든것이 바로 이 현실에서 이뤄지고 있는 거라고.

그렇다. 진리는 고정되지 않았다.

양극화 되고 분별이 있는 이세계가 고정된 채 있는게 아니다.

 

둘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고히 믿는데서 출발한다.

내가 본래 부처이고 내가 사는 이세계가 곧 불국토임을 믿는것.

이렇게 유마경은 이 혼탁한 세상이 본래 불국토라는 희망을 전하는 대긍정의 법문이다.

 

따라서 작가가 고민했던 현시대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해답을 유마경에서 찾는 시도는 굉장히 환영할만 일인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수행이 뒷바침이 되어야 한다.

책에는 구체적인 수행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쉽긴 했지만 아마도 지면 관계상 어쩔수 없으리라 짐작된다.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 유희>에서 언급했던 '산문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물질문명에서 정신세계로의 전향을 앞두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작가가 제안했던 유마힐식의 태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르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활이 곧 수행이 되고, 바로 이 자리가 불국토가 되는 도리.

 

왕유가 '마힐'이라는 자로 불리며 일생을 유마힐 거사를 롤모델 삼아 삶을 살았듯이, 앞으로 나도 '마힐' 로 불러 달라고 해야겠다. 비교는 하지 말고... 이름만.... 뻔뻔 한가?

<중생이란 것은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라고 금강경에도 써있지 않던가?

마힐이라고 부른다고 마힐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힐일뿐이니... 자격은 논하지 말자.

 

 

 

中歲頗好道     중세파호도     (중년에 무척 도를 좋아해서)

晩家南山隱     만가남산은     (만년에 종남산에 은거하네)

興來每獨往    흥래매독왕    (흥이 나면 매번 홀로 거닐고)

勝事空自如     승사공자여    (좋은 일은 혼자만 알고 있네)

                                                                        <終南別業 종남별업 중에서>

 

- 왕유(王維)는 중국 성당(盛唐)시대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더불어 시불(詩佛)이란 별호가 있는 대표적인 자연시와 선시의 대가이며 수묵 산수화 남종화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것 같다.

남이 알아 주기를 바라서 하는 배움, 즉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하는 사람은 꼭 티를 내고 냄새를 풍기는 것이지요. 완전히 소화해 낸 사람은 그 가르침의 냄새를 풍기고 다니지 않습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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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3-11-01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힐: 마음을 힐링 하다. 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 그래 마힐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