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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담긴 문화사, 끽다점에서 카페까지 - 이길상 교수가 내려주는 커피 이야기
이길상 지음 / 싱긋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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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가 좋다. 흔히 인간의 3대 욕구를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하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커피욕이다. 매일 1리터 두 병을 갖다놓고 물처럼 마시는 중. 그렇다고 직접 커피 갈고 로스팅해서 맛과 향을 음미하는 커피 덕후는 아니지만 어쨌든 커피 없이는 못 버티는 몸이 되었다. 조선 시대 틈만 나면 장죽대 물고 있던 우리 조상님들은 담배를 가리켜 '식후 제일미(食後第一味)'라고 했다던가. 담배 안 피는 나로서는 그딴 풀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보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이야말로 나른한 오후를 맨정신으로 버티게 하는 진정한 식후제일미요, 현대인들을 위해 신이 내린 선물이다. 이 천상의 음료를 맛보지 못하던 시절의 인류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살았을까 싶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옛날 마리 앙투아네트는 "커피 없으면 콜라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가 혁명으로 목이 몸과 분리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이유는 커피 대신 치커리 따위나 우려먹었기에 사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고 동독 사람들은 커피도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 이 따위 체제 타도하자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라고. 미국 독립전쟁의 서막이었던 보스턴 차 사건도 사실은 차가 아니라 커피였을지도. 어디 차 따위를 피같은 커피에.

커피는 사실 과일이람서.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과일이요, 땅에서 나면 야채라던가. 흔히 커피콩이라지만 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브라질 커피이니 자바 커피이니 세상에는 다양한 커피가 있지만 원래 커피의 발원지는 에티오피아라고 한다. 그런데 저 뻘건 열매를 볶고 물에 끓여서 우려먹는다는 발상을 어떻게 했을까. 에티오피아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시 전설에 따르면 옛날 옛적 칼디라는 이름의 한 목동이 염소를 풀어놓았는데 염소 한마리가 정체불명의 붉은 열매를 먹더니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밤에 잠도 안 자길래 자기도 시험삼아 먹어보니 온 몸에 에너지가 넘치더라, 그때부터 사람들이 커피의 효능을 알게 되었다는 것. 카페인은 어쨌든 생으로 먹을 만한 맛은 아닐 것인데 말이다. 칼디가 실존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되었건 그것을 맛볼 생각을 했던 놈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호기심은 실로 놀랍다. 하긴 복어를 요리하겠다고 덤빈 것에 비하기야 하겠냐만.

그것이 중동을 거쳐서 유럽으로 전파되고 '악마의 열매'라는 둥 온갖 음해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대항해 시대를 통해서 신대륙과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며 19세기 지식인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혁명을 논했다고. 그리고 그 마수는 어느듯 은둔의 나라 조선에까지 닿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에게 커피는 한낱 기호품이 아니라 생활 필수품이자 커피 덕분에 하루가 길어지고 수많은 혁신이 탄생할 수 있었으니 인류 문명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셈. 커피가 없었으면 어쩔 뻔. 특히 나부터. 그렇다고 사탕수수처럼 한때 귀하신 몸에서 이제와서 비만의 적으로 취급받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진화하신 기특한 존재인듯.

오늘도 커피 없이 못 버티는 커피당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다. 커피가 처음 조선 땅을 밟았던 구한말부터 치킨집보다도 더 많은 커피숍이 동네 구석구석마다 차지한 채 식후의 우리 직장인들을 유혹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커피 100년사이다. 굵직굵직한 정치사부터 소시민들의 애환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인 이길상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이면서 커피 작가이자 <커피 히스토리>라는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라고 한다. 실로 커피에 죽고 못 사는 이땅의 진정한 커피 덕후인 듯.

일명 대한민국 커피 인문학자라는 저자. 커피와는 별개로 한국학 교수로서 외국에서 잘못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기도.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커피가 처음 소개된 것은 구한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이던 1852년, 윤종의라는 사람이 쓴 <벽위신편>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의 목적은 정약용처럼 신문물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위정척사와 서양 세력을 배척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물며 그 시절 뇌 굳은 사대부가 직접 커피를 어디서 구해다가 맛 봤을 리도 없고 중국쪽 책 어느 대목에서 "양놈들은 커피라는 것을 마신다카더라."라는 것. 어쨌든 변방의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커피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에 커피라는 음료가 처음 기록된 시기는 1852년으로 인문지리서 <벽위신편>에 언급되어 있다. <벽위신편>은 1848년 윤종의가 서양의 위력과 종교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한 방책 제시 목적으로 쓴 책으로 4년 뒤 중국의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을 참고하여 개정하면서 커피를 소개했다. 이들 책에 "필리핀에서는 커피라고 하는 편두(까치콩)과 비슷하고 청흑색인 열매를 볶아 끓여 마시는데 맛은 쓰고 향은 차와 비슷하다"라고 기술된 커피 생두의 모양과 만드는 법, 맛에 대한 내용을 <벽위신편>에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 p.16

그리고 국내에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였던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신부가 선교를 하면서 조선인 신도들에게 커피를 맛보게 하면서 이 땅도 커피에 물들게 되었다. 한 마디로 커피로 사람을 낚은 셈. 실제로 베르뇌는 대량의 커피를 끊임없이 주문했을 만큼 효과 작렬이었다고. 군대 시절 초코파이 하나에 주말을 헌납했던 나같은 나이롱 신도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뽀록나는 바람에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흥선대원군부터 커피의 마수에 빠뜨렸어야. 정작 아들인 고종은 둘도 없는 커피 애호가가 되었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집쟁이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의 발호였는지도.

조선인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금의환향한다는 판타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커피를 즐기는 고종. 겉은 개화되었으나 알맹이가 그대로다보니. 이 양반도 따지고 보면 불같은 아버지와 드센 마눌님 사이에 끼어서 눈치 보느라 어지간히 마음 고생했을 듯.


하지만 중세 시절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라면서 교황이 직접 커피 나무 화형식까지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커피는 온갖 박해와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것도 불과 십수년 전까지 말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외화 한푼이 아쉬운 판국에 주식도 아닌 커피를 수입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허비한다는 이유였다. 커피는 사치와 낭비의 대명사였고 퇴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내가 학창 시절에만 해도 동네 다방에는 레지라고 불리는 짧은 핫팬츠 입은 언니야들이 점심 때만 되면 스쿠터타고 커피 심부름을 했었던. 물론 요즘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어차피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것인데. 1997년 IMF가 터지자 애꿎은 커피가 외화낭비의 주범인양 여론의 몰매를 맞고 관공서에서는 커피 안마시기 운동이 벌어졌다고. 전문 커피숍인 스타벅스가 처음 생겨나자 점심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신다고 모 신문에서 질타하던 언제인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 나올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 책은 이런 얘기를 담고 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어떻게 찾아냈나 싶을 정도.

고종은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마신 첫번째 임금일 뿐만 아니라 커피를 꽤 즐겼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커피의 즐거움을 알려진 이는 아마도 초기의 의료 선교사, 서양 외교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타크나 파울 묄렌도르프같은 서울 거주 외국인이었다. 고종은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커피를 늘 가까이 했다. 힘든 시기를 살아야 했던 고종에게 커피는 위로의 음료였다. - p.38

일본식 카페 문화 유입으로 조선 카페에 등장한 흥미로운 서비스 중 하나는 광학적으로 성적 도발을 유도하는 것, 당시 용어로 '광학 서비스'였다. 홍등과 청등, 즉 현란한 불빛으로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서비스였다. 실내조명을 가능한 어둡게 하여 여급과 고객을 편리하게 해 주는 서비스였다. 단속 대상이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31년 10월 17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본정 경찰서는 연락정에 있는 카페 '미쓰와'에서의 흐릇하고 컴컴한 광선 사용을 문제 삼아 주인을 호출한 후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 p.112

1947년 2월 26일 <조선일보>는 "전 이왕가의 최근 소식, 동경서 다방 경영"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마이니치 신문> 보도를 인용한 이 기사에 따르면 이왕가 일족은 도쿄 시부야에 카페를 차렸다. 종래의 생명선이던 일본 국고의 보조금이 끊기자 선택한 길은 커피를 파는 일이었다. 상궁과 나인이 웨이트리스가 되었다. 먹고 살기 어려울 때 카페를 차리는 일, 그때나 지금이나, 왕후장성이나 서인이나 차이가 없음을 실감케 했다. 스스로 막지 못한 불행한 국망, 스스로 이루지 못한 불완전한 광복이 초래한 아픔이었다. - p.192

5.16군사 정변이 일어난지 2주일 후인 5월 29일 아침을 기해 다방에서 커피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방업자들이 자진하여 커피 판매를 중단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쿠데타 세력이 취한 강제 조치였다. 강제 조치가 아니었음을 강변했지만 믿는 사람은 없었다. 치안 국장은 "어제 28일 다방업자들을 불러서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는 커피를 되도록 팔지 말고 생강차나 기타를 대용하여 팔도록 함이 어떻겠는가라고 권장했다."라고 발표했다. 강제로 커피를 팔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 p.243

검찰에 따르면 장안다방 박군은 커피 1파운드에 보통 100잔 정도 나오는 양을 담배 가루와 소금을 넣어 250잔 내지 300잔을 만들어 하루 600여잔 씩, 유리다방 김씨는 하루 700여잔씩 팔아왔다는 것이다. 커피 가루 4파운드를 사면 2파운드에 담배 가루를 섞어 4파운드 분량의 커피를 만들고 나머지 커피 가루를 빼돌리는 수법을 쓴 것이다. 이들은 손님들이 피다 버린 담배꽁초를 연탄 화덕에 올려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 커피에 섞는 수법을 썼다. 니코틴 맛이 느끼지지 않도록 달걀 껍데기와 소금을 함께 타기도 했고 손님들이 맛에 둔감한 시각인 오후 늦은 시간에만 꽁초커피를 내놓은 주도면밀함도 보여주었다. - p.325

1980년대 중반에 퍼지기 시작한 가라오케 문화나 노래방 문화는 다방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식사 모임 후 가는 장소로 다방보다는 노래방이 선호되었다. 새로 등장한 아파트의 신식 주방시설 덕분에 집에서 손쉽게 커피를 끓여 마실 수 있게 된 것도 다방 증가 둔화의 한 요인이었다. 다방은 설 자리를 급속도로 잃어가고 있었다. 커피 암흑기 후반기에 닥친 다방의 침체였다. - p.358

우리나라에서는 1979년에 문을 연 롯데리아가 체인점 문화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는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버거킹, 맥도널드, KFC 등이 잇따라 등장했다. 커피전문점으로는 1979년 대학로에서 처음 문을 연 후 점차 매장을 늘려 한 때 전국적으로 60여개의 매장을 거느렸던 '난다랑'이 효시였다. 대학로의 1호 매장은 1986년에 '밀다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렇게 시작된 커피 체인점 문화는 급속히 성장하여 1993년 신문 광고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 p.404

외환 위기는 커피 대신 국산 차 마시기 운동을 소환했다. 늘 그랬듯 절약이 필요한 시대에 커피는 모두의 공적이었다. 커피는 광고로 시대에 어필하려고 노력했다. 맥스웰하우스는 캔커피 광고에서 취업 준비생의 면접 장면을 다루었다. 면접에서 당황하여 실수한 취업 준비생을 보여준 후 "나를 알아주는 커피, 맥스웰 캔커피"라는 메세지를 전달했다. - p.432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평생을 살면서 평균 62년 정도 커피를 마신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균 2만5110잔의 커피를 마시고 9만145달러(1억2500만원)을 지출하는 셈이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 커피 소비액이고 결코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 커피임을 말해준다. - p.446

450여 페이지에는 베르뇌 신부가 처음으로 커피를 가져오고 아관파천한 고종이 커피를 입에 대면서 커피 문화가 본격화된 지 약 한 세기 반의 시간 동안 커피로 보는 우리네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고보면 커피가 이땅에 정착하기에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기까지 잘도 살아남았다 싶을 정도. 세상이 어려울 때마다 높으신 분들은 커피 탓으로 돌리면서 우리 소시민들의 입에서 빼앗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니 말이다. 하긴 커피만의 얘기일까.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탄압에 맞선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마음껏 커피를 마시며 바쁜 일상 속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 여유가 영원하지는 않을 듯 하다. 지구 온난화로 가뭄과 폭염, 병충해가 만연하면서 커피 수확량이 나날이 줄어들기 때문. 실제로 원두 가격의 폭등으로 당장 울 사무실 근처의 커피값도 300원이나 올랐더라. 더는 값싼 아메리카를 즐기지 못할지도. 특히 트황제 몽니 덕분에 엄청난 관세로 미국인들은 모닝 커피 한잔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고.

책을 읽다가 문득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커피의 우리식 명칭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양탕국"이 사실은 아무런 근거없는 얘기란다. 양탕국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인 1968년 12월 26일 조선일보의 한 칼럼인데 그게 와전되어 마치 구한말부터 사용된 것마냥 여기저기서 언급되었다는 것. 주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실 때마다 아는 척하면서 양탕국 타령을 했는데 앞으로는 못 써먹을 것같다.

TV 교양 프로그램에도 버젓이 등장하는 '양탕국'. 누가 보면 그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여기에 밥 말아서 드신 줄 알 듯.

10월 1일이 한국커피협회에서 정한 커피의 날이라고 한다. 국군의 날과 겹치기에 아는 사람만 아는 날. 커피라는 주제로 이렇게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쓸 수 있나 싶다. 커피당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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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 코드: 더 비기닝
빌 게이츠 지음, 안진환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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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수많은 초보 부모들이 그러하듯, 나도 시중에 수없이 널려 있는 자녀 교육서를 부지런히 탐독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책들은 뻔한 레파토리에 "나는 이렇게 해서 내 자식을 남들보다 비범하게 키웠다."라는 일종의 자화자찬용이랄까. 물론 저자 나름의 투철한 교육관이라던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어냈다는 노하우는 같은 부모로서 귀 기울일 부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식이 번듯한 대학에 들어갔다는 둥의 내세울 성공을 거두었기에 말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에는 나는 평범하지만 내 자식은 똑똑한 놈으로 만들겠다면서 숨겨진 비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부모들의 허영심이 깔려 있다. 어쨌든 뭐라도 재주 하나 쯤은 있어야 살아가기 편한 것이 우리네 세상이니 말이다.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는 이세계 물들은 어차피 이번 생은 글러먹었으니 치트 능력을 얻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겠다는 것. 그런 능력이 있으면 굳이 머나먼 이세계까지 갈 이유가 뭐가 있겠음. 그저 꿈도 희망도 없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헛된 망상을 자극하는 것일 뿐.


자녀 교육서들의 공통된 결론 한가지는 아이는 부모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작 6천자에 불과한 손자병법을 부지런히 읽는다고 해서 누구나 천재전략가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저마다의 타고난 그릇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똑같은 방법을 쓴다고 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 교육이라는 오랜 격언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인간의 재능이란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1만시간의 법칙>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그 경지까지 오르는데 투자한 시간이 대략 1만 시간 정도가 걸렸다카더라, 따라서 결론은 재능보다 평소의 피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여기는 중대한 함정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 1만 시간의 노력을 했다고 해서 거꾸로 1만 시간의 노력을 한 모든 사람이 성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확대해석이다. 성공한 사람들이야 자신들의 성공이 하늘의 은총 덕분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며 성공하지 못한 너희는 노오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내가 여태껏 살면서 깨달은 사실은 노력도 재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재주 한 가지씩 타고 난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을 뿐더러(내 본가쪽 인간들을 보면 그건 분명하다.) 꿈과 재능을 찾아내어 발현하려면 노력 뿐만 아니라 그럴 계기와 운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콩 심은 곳에 팥이 나올 수 없고 누군가 물과 거름을 주지 않고서 제 알아서 싹이 트지는 않는다. <대학>에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고 하여 "옥도 갈아야 빛이 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옥일 때의 얘기이지 돌맹이는 뭘 어떻게 하더라도 돌맹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옥보다 돌맹이쪽이다.

유튜버로서 이 양반의 센스는 분명 놀랍지만 시류를 잘탄 덕분이기도. 만약 충주에서 공직을 시작하지 않았고 5년만 일찍 들어왔거나 5년만 늦게 들어왔어도 제아무리 큰 재주가 있다고 한들 지금처럼 유명인사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뭐 운도 능력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같은 평범한 인간들과 어떻게 달랐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었을까. 타고날 때부터 비범했을까.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것마냥 원래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A였지만 어떤 이유로 인생이 터닝하게 된 것일까. 유복한 가정 여건, 부모의 관심, 가까운 친인척, 학창시절의 친구나 선생님의 말 한마디, 또는 소위 말하는 '귀인'을 만난 덕분이라던가 어떤 비결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영화 <트루먼쇼>처럼 타인의 인생사를 직접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얘기는 들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열린 책들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소스코드 : 더비기닝>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한 명이 말하는 "나는 이렇게 컸다"라는 회고록이다. 주인공은 IT계의 황제이자 마이크로소프트사 창업주인 빌 게이츠. 덧붙여 예전에는 세계 부자 1위하면 이 양반이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는. 십 몇 년 전에는 멕시코 통신계 큰손인 카를로스 슬림에게 잠시 밀린 적도. 우리같은 서민과는 무관한 천룡인들만의 리그도 치열한 듯.

요근래의 빌 게이츠. 어느 사이 이런 영감님이 되셨나 싶다는. 하긴 1955년생이니 벌써 70살. 돈으로도 세월을 살 수는 없는 법이라.


이 책은 세계적인 거부로서 빌 게이츠의 인생 역경 전반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수학 신동으로서 하버드에 재학하던 시절, 불과 1년여 만에 때려치우고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하여 사회 초년생이자 사업가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까지 22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그 순간이 평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 중요한 시기였다는 얘기이다. 여기에는 함께 카드 놀이를 했던 '가미'라는 별명을 가진 친할머니와의 애틋한 추억을 비롯하여 그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될 사람들과의 일화를 담고 있다. 심지어 평생의 라이벌이자 여러모로 악연의 관계였던 스티브 잡스도 짧막하게 언급한다. 몇 줄 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틈만 나면 게임을 했고 나는 계속해서 졌다. 하지만 나는 지켜보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가미는 계속 부드럽게 나를 격려했다. "머리를 쓰면 돼, 트레이. 영리하게 생각하면 돼" 내가 다음 수를 고민할 때마다 가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겼다. 팡파르는 없었다. 그랑프리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처음으로 할머니보다 더 많은 게임을 이긴 그 날 어떤 게임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기뻐한 것은 생각난다. 분명히 가미는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p.31

어머니는 처음부터 우리 가족을 위한 원대한 비전을 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큰 성공을 이루길 바랬는데 여기서 성공이란 돈보다는 명성으로, 즉 지역 사회는 물론이고 더 넓은 범위의 시민 단체와 비영리 단체를 돕는 역할로 정의되는 것이었다. 자녀에 대해서는 학업과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사교적으로 활발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꿈꿨다. 이러한 비전으로 그녀는 지원 파트너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가운데 자신의 경력도 쌓아서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로 자리잡는 것을 목표했다. - p.62

선생님과 부모님, 교장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내 성적은 들쑥날쑥했고 태도는 날마다 그리고 과목에 따라 달라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무엇보다도 나의 날카롭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고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5학년 초 어느 시점부터 나는 학교의 언어 치료사를 만나기 시작했다. 이 세션의 결론으로 언어 치료사는 부모님에게 나를 1년 유급시킬 것을 권했다. 그녀가 나에 대해 <지진아>라고 평가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학교생활을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다행히도 무도님은 그녀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 p.113

나는 그렇게 1968년부터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질적인 요소가 합쳐져야 했는지를 생각하면 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놀랍다. 우리에게 단말기를 안겨 준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믿음의 도약, 전화선을 통해 컴퓨터를 공유하는 시대의 도래라는 행운을 넘어서 이 기적을 완성한 것은 다트머스 대학의 두 교수가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비전문가들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만들어진 것이었다. - p.156

켄트와의 우정이 남긴 유산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더 나아지도록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해 여름 폴과 나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우리의 나머지 삶을 정의하게 될 파트너십을 맺었다. 파트너는 서로의 관계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각자의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영감을 준다. 폴을 파트너로 삼고 나니 내 역량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에도 더욱 자신감 있게 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위험한 도전을 함께 극복한 사람이 있으면 다음 도전도 더욱 과감히 수용할 용기가 생긴다. - p.263

그 수업에서 더 잘할 수 없었던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가장 똑똑하고 가장 뛰어나다는 인식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그 지위는 사실 내 불안감을 숨기기 위한 보호막이었다. 나는 탁월한 수학 두뇌를 가졌지만 최고의 수학자가 될 수 있는 통찰력의 재능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주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발전을 해낼 능력은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해 겨울 앤디와 짐의 스위트룸에서 어울리던 중 그들도 갈피를 못 잡고 모종의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 p.326

우리가 작성한 베이직 프로그램은 다른 수천명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그런 변혁의 소용돌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10대 아이들도 컴퓨터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흔한 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컴퓨팅 비용은 매우 빠르게 떨어져 곧 무료나 다름없게 되었다. - p.383

우리 부스 앞에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확장형 베이직에 대해 설명하던 중 내 눈길 한쪽으로 긴 검은 머리와 짧게 다듬은 수염에 스리피스 정장을 입은 내 또래의 잘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몇 부스 떨어진 곳에서 자신만의 무리를 형성하며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날 난 그렇게 스티브 잡스를 만났다. - p.459

하버드로 떠날 때 부모님에게 다시는 시애틀에서 살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더 큰 세상에서 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 머리속의 더 큰 세상은 금융과 정치, 명문대, 그리고 당시에는 컴퓨터 산업의 중심지였던 둥부 연안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종의 후퇴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 홀로 귀향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창업한 회사, 다양한 직원들, 그리고 성장세에 오른 수익성 있는사업체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었다. 내 길은 정해져 있었다. 160km/h로 5번 주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앞으로 이 길이 얼마나 더 멀리 나를 데려갈까. -. p.477

작년 이맘때에 21세기 북스에서 나온, 요즘 트럼프 덕분에 미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 된 일론 머스크의 전기를 다룬 <일론 머스크>를 재미있게 읽은 것이 기억난다. 남아공 출신의 이민자인 일론 머스크가 미국에서 최고 갑부 중 한 사람으로 성공하기까지 그야말로 전투적인 삶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것에 비하면 이 책은 다소 밋밋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일론 머스크 전기는 월터 아이작슨이라는 그 방면 최고의 작가가 썼고 이 책은 글보다는 코딩 쪽이 더 익숙한 공대 출신의 빌 게이츠가 가감없이 쓴 회고록이라는 차이도 있겠지만, 그보다 빌 게이츠가 일론 머스크에 비하면 훨씬 평탄한 성장과정을 보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도 똘기를 보이면서 아들의 골칫거리로 남아 있는 일론 머스크 아버지와 달리,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변호사에 어머니 또한 고학력의 신여성으로서 지역의 유명인사였으며 그럼에도 자식들에게는 일을 핑계로 가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모범적인 부모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엄친아라는 얘기. 물론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회고록이 흔히 그러하듯, 빌 게이츠 또한 어릴 때의 자신은 성적도 별로 좋지 않고 반항기 가득했던 금쪽이였다고 평범함을 강조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학 신동이었다면서 남들과 다른 비범함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분명한 사실은 빌 게이츠에게 성장기는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이며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반드시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야만 훗날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인생에 있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4장의 부제마냥 그는 "운 좋은 아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가령 내가 어떤 기회로 회고록을 쓰겠답시고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들 남들 앞에서 떠들만큼 썩 유쾌한 추억은 없는 것같다. 그렇다고 인생의 터닝포인터가 될 만한 긍정적인 시너지를 준 사람을 만난 기억도 없다. 가정과 학교를 통틀어서 말이다. 나만이 아니라 소수의 행운아를 제외하고 군부 독재 시절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와 가방 끈 짧고 가부장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우리 세대 대부분이 마찬가지일듯. 장미빛 추억은 고사하고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하다고 말할 사람이 태반은 아닐지.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500여 페이지의 많지 않은 분량의 책은 빌 게이츠가 어떤 자기만의 비법으로 세계 최고 갑부로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빌 게이츠라는 한 인간을 알 수 있게 하는 기회였다랄까. 적어도 선거 때만 되면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대필 작가를 써서 자기 인생을 진실반 거짓반으로 포장하는 우리네 정치인들의 불쏘시개 책들보다는 훨씬 가치 있다고 엄지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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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 맥주를 보다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음미하다 지음 / 북폴리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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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뿐만 아니라 꿀벌도 술을 먹는다.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친 꿀벌은 벌을 받기도 한다.

수컷 초파리는 연애에 실패하면 더 많은 술을 먹는다.

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꿀벌은 일만 하지 않아. 술도 마셔. 초파리도 술마셔"

-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 중에서

평소 술을 거의 즐기지 않는 나도 치맥의 유혹만큼은 거부하기 쉽지 않다. 불금이나 토요일 저녁, 집사람과 같이 치킨을 안주 삼아 캔맥주 하나씩 따서 마시면서 영화 한편 감상하는 것. 이보다 안락할 때가 어디 있을까. 때로는 더운 여름밤 집앞 호프집에서 500cc 크림 생맥주를 시켜서 마실 때 그 톡 쏘면서 시원한 맛이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굳이 주당이 아니라도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이 유혹을 이길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여지껏 맥주를 마시면서 이것이 무슨 종류의 맥주인가 따져본 적은 없는 것같다. 하긴 종류는 고사하고 카스인지 OB인지 어디 메이커인지도 따지지 않으니 말이다. 나의 둔감한 혀로는 맥주면 맥주이지 죄다 그기서 그기인 느낌이다. 애초에 치맥의 주인공은 맥주가 아니라 치느님이 아니던가. 우리는 치느님을 먹기 위해 맥주를 마실 뿐, 맥주를 마시기 위해 치느님을 먹는 것이 아니다. 맥주는 어디까지나 치느님을 먹는 과정에서 잠시 목이 마를 때 입가심을 위한 콜라 대용일 뿐이다. 그래서 치맥이다. 맥치가 아니라.

알콜 소비량에서는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우리 사회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양한 술을 즐길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맥주는 그냥 맥주이다. 소주는 소주이고 막걸리는 막걸리이다. 어느 지역, 어느 회사에 제조했다는 것은 있어도 어차피 알콜 도수도 정해져 있고 가격은 물론이고 맛과 향 또한 대동소이하다. 획일화된 규격품이나 다름없다. 고기집이나 호프집에서 맥주를 시킬 때 메뉴판에는 오직 "맥주"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 용량의 구분은 있어도 무슨 맥주냐는 구분은 없다. 고민의 여지조차 없이 "생맥주 주세요" 한마디면 끝이다. 참 쉽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면서도 막상 술의 종류가 몇 가지 없다는 것은 술맛을 따지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우리는 술 맛 그 자체보다는 그저 술에 취하기 위해서, 또는 안주빨을 세우려고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네 세상에 주당은 많다지만 술 맛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주당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서양 술을 보면 정말 다양하다. 와인만 보더라도 그 종류가 얼마나 하늘의 별만큼 다양하며 맛과 향이 천차만별인가. 이 양반들은 진정한 술맛을, 그리고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 외국의 수입 맥주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맥주 그 자체의 맛을 취미처럼 즐기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이른바 맥주 덕후, 즉 '맥덕'시대의 개막이다.

북플리오 출판사에서 평소 맥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길을 끌만한 재미있는 책이 나왔다.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라는 책이다. 저자는 '음미하다'라는 필명을 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가인데 일러스트를 보면 아마도 젊은 여성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분명한 점은 "취미가 맥주"라는 오리지날 맥덕이라는 사실이다.

"사람 뿐 아니라 꿀벌도 꿀 술을 먹는다.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친 꿀벌은 벌을 받기도 한다. 수컷 초파리는 연애에 실패하면 더 많은 술을 먹는다. 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초파리도, 새도, 박쥐도, 원숭이도, 자연이 만들어낸 술을 먹는다."

"닉네임 : 효모, 성별 : 없음, 종교 : 닌카시, 바커스, 직업 : 맥주랑 빵만들기, 좋아하는 것 : 무조건 달달한 것, 희망사항 : 가끔 나는 야생의 사바나 초원을 달리는 자유를 꿈꾼다. - 호모 프로필 중에서."

"효모가 살아있던 과거의 맥주는 햇살을 듬뿍 받은 보리 본연의 영양 성분과 효모가 만들언내 비타민, 단백질이 가득한 든든한 한 끼 식사이자 음료였다. 맑고 깨끗한 맥주라고 해서 우리 맥주가 고대 이집트인들의 그것보다 더 나을까? 더 자연스러울까?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깨끗하게 말린 맥주잔에 6℃의 밀맥주를 45도 기울여 따라 주다가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은 병을 돌리면서 따른다. 이제 숨은 효모까지 남김 없이 마시자. - 밀맥주 맛있게 따르는 법. 진짜 맛있다~~!"

"193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딛고 베스트말레에서 만들어진 맥주가 바로 황금빛 트리플이다. 필스너와 같은 고운 빛깔에 벨기에 맥주만의 짙은 과일 향이 일품이었던 이 맥주는 곧 수도원 맥주의 대명서가 되었다. 식사와 함께 마시는 가벼운 맥주인 테이블 비어보다 대략 3배는 도수가 강하다는 의미로 트리플이라고 불렸지만 1956년부터는 공식적으로 트리펠이라고 부른다."

"피아노처럼 반짝이는 짙은 어둠이 깔린 거리를 걸어 미켈러 바로 향한다. 재즈 센터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이곳은 평일은 12시, 주말은 새벽 두 시까지 크래프트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비어가는 맥주잔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하루가 저문다."

책의 부제로 붙어 있는 "맥주를 보다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말마따나 이 책에서는 맥주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와 온갖 유익한 정보를 저자 특유의 유머러스와 함께 섞어서 풀어나간다. 맥주 특유의 허연 거품과 톡 쏘는 탄산가스가 사실은 효모가 맥아즙의 당을 소화하면서 뿜어낸 방귀라는 사실. "소리는 커도 냄새가 난다해도 너희가 좋아하는 술냄새인거?"

황금빛 연금술사 효모의 정체, 맥주가 영양가 넘치는 음식에서 술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 에일과 라거의 차이부터 대표적인 맥주들, 각각의 맥주와 찰떡 궁합인 안주 고르는 법, 나에게 꼭 맞는 맥주를 찾기 위한 관상 보는 법, 맥주를 가장 맛있게 음미하는 요령, 영국 맥주와 벨기에 맥주, 미국 맥주, 독일 맥주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등 유머러스하면서도 알딸딸한 맥주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다. 컬러풀한 사진과 글을 한장한장 넘기면서 읽다보면 절로 시원한 맥주 한잔이 떠오른다. 그것도 그저 "여기 생맥주 한잔요!"가 아니라 달콤하면서 과일향이 느껴진다는 "파울라너 에딩거 헤페바이젠 한잔요!"라고 외치고 싶다.

이 책을 읽노라니 나도 치맥 덕후를 넘어서 진짜 맥덕이 되고 싶어진다. "맛있는 맥주에는 절로 나오는 추임새 캬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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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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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 네트가 사랑했던 꽃은 장미가 아니라 감자꽃이었다?"

우리 전통 음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치이다. 온갖 양념과 함께 고추장으로 시뻘겋게 갓 담근 햇김치 하나만 있어도 다른 반찬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다 아는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붉은 김치가 우리 식단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고추는 토종 작물이 아니라 외래종이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된 것은 학자들마다 약간의 이견은 있지만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을 통해 전달되었다. 하지만 고추의 매운 맛에 더 익숙해진 쪽은 일본인보다 우리가 아닐까 싶다. 일식에서 고추냉이를 제외하고 딱히 고추가 들어가는 음식을 찾기 어려운 반면,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 한식은 상상할 수 없으니 말이다.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이다. 그곳에서 처음 고추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우리도 잘 아는 스페인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인도의 향신료를 찾겠다고 떠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발견한 것은 고추였고 그는 엉뚱하게도 고추를 후추라고 우기면서 '붉은 후추(red pepper)'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의 고추가 돌고 돌아서 한 세기만에 지구 정반대편의 존재감 없는 나라 조선에까지 전해진 셈이다. 그가 신대륙에 가지 않았거나 고추에 관심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먹음직스런 붉은 김치도 없지 않았을까. "브라질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텍사스에서는 허리케인이 일어난다."라는 이른바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는데 콜럼버스와 김치의 관계 또한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나비효과의 사례라고 하겠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적 특이점 중 하나이자 근세 시대의 시작이었다. 또한 그 전까지 인류 문명에서 변방 취급을 받았던 유럽이 처음으로 아시아를 능가하여 나중에는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해서 어째서 유럽인이 아니라 비 유럽인들, 아시아인들이나 다른 대륙 사람들은 대항해에 나서지 않았던가. 왜 하필이면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던가. 이들이 거친 파도를 뚫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머나먼 바다로 나아가게 된 가장 큰 동기는 향신료(spice)였다. 후추, 육두구, 정향, 계피 등 유럽인들은 이것을 손에 넣으려고 목숨을 걸었다. 후추의 가격은 한 때 금과 맞먹을 정도였다.

                                

수많은 바다 사나이들이 세계의 보물 "원피스" 아니 "육두구"를 찾아서 떠나는 대항해 시대.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조미료 따위에 그 정도의 가치를 매긴다는 말인가 싶지만 먹거리가 다른 탓도 있다. 아시아인들은 쌀을 주식으로 한다. 쌀은 탄수화물 외에도 단백질과 지방이 함유되어 있어 별다른 부식 없이도 그럭저럭 영양분을 확보할 수 있다. 불교에서 육식을 금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반면, 밀은 아미노산이 부족하기에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고기는 상하기 쉽상이고 그 전까지 유럽인들은 기껏해야 거친 소금으로 짠 맛나는 간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무슨 맛이 있겠는가. 아시아에서 향신료가 들어오자 한번 여기에 중독된 유럽인들은 전쟁도 불사할 정도였다. 향신료가 듬뿍 섞인 고기를 먹는 것이 곧 지위와 권력을 상징했다. 만약 아시아인들이 밀을 먹고 유럽인들이 쌀을 먹었다면 대항해 시대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향신료의 천국인 동남아에서 더 많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 훗날 식민지 건설의 첨병이 된다. 향신료 경쟁은 그야말로 살벌했고 여기에 끼지 못한 사람들은 보다 저렴하면서 대체 가능한 다른 향신료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 와중에 발견한 새로운 먹거리가 옥수수와 감자였다. 밀과 쌀에 비해서 훨씬 강인한 생명력과 수확 능력을 가진 두 먹거리는 기근 해결에 크게 일조했다. 하지만 설탕의 재료인 사탕수수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재앙이 다름없는 노예 무역 시대를 열었다. 사탕수수 재배는 다른 작물과 달리 가축의 힘을 빌릴 수 없고 사람 손이 엄청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럽인들의 향신료 경쟁이 만든 세상인 셈이다.

사람과 나무사이 출판사의 신작 도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은 현대 인류 사회를 이룩하는데 일조했던 13가지 식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일본의 권위 있는 식물학자이자 시즈오카 대학 교수이며 자신의 전공인 식물을 통해서 본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쓰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이 양반의 저서 중 하나인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글항아리>도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프랑스 혁명을 그린 만화이다. 이 만화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궁전에 핀 고고한 장미 한 송이에 비유했다. 하지만 왕비가 실제로 사랑한 꽃은 만화 제목에 있는 장미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사랑한 꽃은 감자꽃이었다. 고귀한 왕비 신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장비나 백합같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감자꽃을 사랑했을까?" - p.26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식물 1위는 옥수수이다. 그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곡물이 밀이고 3위가 벼이다. 그 다음 4위는 감자, 5위는 대두이다. 토마토는 이 세계 5대 주요 작물 바로 뒤인 여섯번째로 생산량이 많은 작물이다." - p.68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즐긴 귀족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귀족이나 상류층에서 후추의 인기가 치솟은 것은 실용적인 목적보다 자신의 높은 지위와 부를 과시하기 위한 상정성이 컸다. 이것은 설탕이 귀하던 시절 사람들이 설탕을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 p.90

"고추는 유럽인들에게는 외면당했지만 장기간 항해해야 하는 뱃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했다. 당시 뱃사람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괴혈병이었다. 비타민C를 다량 함유한 고추는 괴혈병 예방과 치료에 특효가 있었다. 뱃사람들은 항해를 떠날 때 소중한 식량이자 의약품으로 고추를 챙겼다." - p.105

"논 시스템과 벼라는 작물은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서 16세기 섬나라 일본은 같은 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해서 6배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 밀을 재배할 수 있었지만 아시아에서는 1년 동안 쌀과 밀을 모두 수확할 수 있었다." - p.240

이 책에서는 도합 13가지의 식물이 나온다. 저자가 붙인 별명도 거창하다.

1. 초강대국 미국을 세운 악마의 식물 감자

2. 인류의 식탁을 바꾼 붉은 열매 토마토

3. 다항해시대를 연 검은 욕망 후추

4. 콜럼버스의 고뇌와 아시아의 열광 고추

5. 거대한 피라미드를 떠받힌 약효 양파

6. 세계사를 바꾼 두 전쟁의 촉매 차

7. 인류의 재앙 노예무역을 불러온 사탕수수

8. 산업혁명을 일으킨 목화

9. 한 톨의 씨앗이 문명을 탄생시킨 밀

10. 고대 국가의 탄생 기반이 된 벼

11.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한 콩

12.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작물 옥수수

13. 인류 최초 거품 경제를 불러온 욕망의 알뿌리 튤립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친숙하면서도 이들이 인류 역사에 남긴 발자취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위의 13가지 식물 중에서 하나라도 없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누가 알겠는가. 대항해 시대를 연 후추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가령 우리가 주식으로 쓰는 쌀이 없었다면 아시아 문명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감자와 옥수수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인류가 70억에 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산업혁명은 영국 면직물 산업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면직물의 원료인 목화가 없었다면 산업혁명도 없었으리라. 하물며 고추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백김치, 물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별로다.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트라도 뽕뽕 날려주고 싶다.

고추는 일본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는데 왜 정작 일본인들은 고추를 즐기지 않을까. 반대로 우리는 고추 없이는 살 수 없을까. 고추가루를 넣어서 부글부글 끓인 매운탕은 상상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고추장을 바른 불고기를 밥과 함께 쌈에 싸서 입에 넣고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이보다 맛있는 별미가 없다. 저자는 종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즐기지 않는 반면, 고려 시대 이후 우리는 불교의 영향이 약화되면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육식에는 향신료가 빠질 수 없다.

이 책에서 나오는 13가지 식물의 역사 이야기는 다채로우면서 흥미진진하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식물들에게 알고 보니 이런 역사가 담겨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다. 또한 누구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직 여름 휴가를 가지 않은 분, 갈 곳이 마땅찮은 '동남아(동네에 남아 있는 아저씨)'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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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책 생각
Team BLACK 지음 / 책과강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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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앉아서 고민하기만 하기보다 뭐라도 쓴다.
그러다보면 결국 생각이 보인다. 게으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변에서 생각의 원천을 묻는다. 그런게 있을 리가 있나.
생각날 때까지 생각하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아무나 할 수 있다. 벽에 부딪치는 것만 겁내지 않는다면.  

  - 「기획자의 책 생각」  중에서

인터넷과 SNS이 우리 주변의 수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지만 글쓰기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작가가 된다는 것은 꽤 장벽이 높은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쓰고 싶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직업으로서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우리 여건 상 작가가 될 수 있는 등용문 자체가 아주 좁았기 때문이다. 지금 40대, 50대이면서 로맨틱한 사람이라면 학창 시절 방송국에 자기 사연을 보낸 뒤 라디오 앞에 앉아서 진행자가 내 글을 읽어주기를 학수고대하추억을 가진 사람도 있으리라. 몇 줄에 불과한 글이나마 사람들에게 읽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요즘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글을 쓰고 싶고 작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굳이 어딘가의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아도 SNS를 이용하여 내가 좋아하고 관심있는 이야기를 얼마든지 풀어내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 먹기 나름이다. 내 주변에 일어난 일상 이야기, 시나 소설 또는 만화, 영화, 게임, 여행같은 취미에 대한 글을 쓸 수도 있다. SNS 상에서는 학위 하나 없는 일반인이면서도 어지간한 전문가 뺨치는 글을 쓰는 사람도 많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어떠한 구속이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내 마음이 가고자 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SNS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가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어떤 글이건 제대로 쓰려면 그만한 시간과 공력을 투자해야 하는 법이다. 관련 자료도 모으고 발품도 팔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대충 쓴 글은 우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번이나 고쳐 쓴 끝에 비로소 남들 앞에 내놓게 되지만 그래도 다시 보면 뭔가 이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반드시 있다. 이리 고치고 저리 손 댄다.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게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누군가의 공감을 얻는 것은 꽤 즐겁고 뿌듯한 일이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어지간히 중독성이 있는 것이 글쓰기이다. 누가 말했던가. 한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해 본 사람은 없다고. 글쓰기 또한 그렇잖은가.

SNS에 연재했던 글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면 출판할 기회도 생긴다. 더 이상 책은 교수나 프로 작가들같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초등학생 소설가, 배낭 하나 매고 여기 저기를 여행하는 대학생,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육아 일상을 블로그에 올리는 전업 주부, 고양이를 키우는 20대 직장 여성. 누구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글로 쓰고 책으로 만들어서 남들과 공유할 수 있다. 글 대신 만화나 일러스트를 그려서 웹툰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무명 작가의 작품이지만 프로 못지 않은 수준에 내용도 꽤 재미있다. 요즘은 이외수 같은 원로 작가들 또한 원고지 대신 SNS에 올린 글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요즘은 글쓰기도 탈권위의 시대이다보니 사람들은 딱딱하고 어려운 전문서보다 쉽고 부담없는 책을 찾는 분위기이다.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책보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일반인도 쉽게 작가가 될 수 있다보니 여기에 편승하여 허황된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책쓰기가 인생 역전의 기회라는 둥, 누구는 책 쓰기로 수 억 짜리 스포츠카를 끌고 다니더라는 둥. 소위 "책 코칭"이라 하여 자기에게 책 쓰기 수업을 받으면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남의 밥벌이를 함부로 폄하할 수야 없지만 실제로 책을 써보거나 출판계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실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소리이다. 그런 양반들이 과연 본인들은 책을 팔아서 번 돈이 더 많을까, 멋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박 꿈을 주고 끌어모아서 수업료랍시고 받은 돈이 더 많을까 궁금하다. 책을 몇 십권을 냈다는 둥, 두달 세달만에도 책을 썼다고 온갖 자랑을 하는데 책쓰기를 얼마나 얕보고 있는가 싶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책을 낼 수 있지만, 누구나 남들이 읽어주는 책,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년, 20년, 어쩌면 평생이 걸려야 할 일이다. 부단한 노력, 타고난 재능, 그리고 운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책 코칭 운운하는 양반들의 이력을 보면 작가가 된 지 겨우 몇 년이다. 고작 도서관에서 몇 년 살았다고, 몇 년 글을 썼다고 마치 자신이 공지영, 이외수, 조정래 급의 프로 작가라도 되는 양 으스대면서 내가 했으니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떠든다. 알맹이도 없는 책 몇 권 내고 "세상에서 책쓰기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꼴이다. 실로 오만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런 양반들에게 비싼 돈을 내고 수업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책을 쓸까. 언젠가 그런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책의 2/3는 자신의 신변 잡기와 왜 책을 써야 하는가 따위의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헛소리로 분량을 채워놓았더라. 정작 본론은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다. 자기 계발서인지, 에세이인지, 광고인지 의문스럽다. 저자 자신은 자기 돈을 내고 자기가 쓴 책을 사보겠는가 묻고 싶다. 실제로 어떤 유명 책 코칭 강사는 허위 광고와 사기죄, 저작권 침해로 고발당한 사례도 있다.

책쓰기를 돈벌이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배고픈 직종이다. 누구나 아다시피 연예인 지망생은 수십만명이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일을 하면서 나의 꿈을 남과 공유할 기회를 가지는 것, 그게 책쓰기이다. 글쓰기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책쓰기를 배우겠답시고 사기꾼들에게 거금을 갖다 주는 사람은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호구다.

그런 점에서 책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눈 여겨 볼만한 책이 나왔다. 책과 강연 출판사에서 나온 <기획자의 책 생각>이라는 책이다. 저자는 기획 컨설팅만 장장 15년이라고 한다. 실제로 출판계에 뛰어든 것은 1년 남짓이라고 하는데, 그것치고는 책쓰기가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여느 책코칭 서적들마냥 내가 도서관에서 어떻게 인생을 바꾸었으며 당신도 책을 쓰면 대박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둥의 허황된 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크기는 손바닥만한 포켓 사이즈에 겨우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인데, 막상 읽어보면 그 정제된 글쓰기에서 책의 깊이와 저자의 오랜 내공이 와닿는다.

기획이란 무엇인가?’ 참 쉽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아는 것’과 ‘안다고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이어서 간혹 이런 질문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기획이란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 중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기획된 것이다. 이 책은 지난 1년간 45종의 책을 기획해가며 통찰한 기획자의 생각을 담아냈다. 15년째 콘텐츠기획자로 살아오면서 책을 기획해본 지난 1년간의 경험은 무척이나 특별했다. 내게 있어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낯선 질문은 ‘기획이란 무엇인가’라는 익숙한 질문과 다르지 않았다. 

최근 ‘책을 써서 성공하라’는 카피를 여기저기서 목격한다. 기획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건 난센스다. 한 해 출간되는 책이 7만 5천여 종에 달한다. 한 달 사이에 6천3백여 종의 책이 서점 평대 위로 쏟아진다. 책에는 저마다의 신간 수명이 있는데 대개는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서가로 사라진다. 인세와 강연 수입을 통해 성공하라는 주장은 출판 통계 자료만 보더라도 그 논리가 얼마나 박약한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책을 내본 저자들을 만나보면 대게 ‘한번 써봤다’는 식으로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단순히 지면 위에 옮겨놓은 수준이다. 사용자를 생각하지 않은 상품에 관심을 가져줄 만큼 시장은 너그럽지 않다. 책은 철저히 기획되어야 한다. 무엇을 쓸 것인지(출발점), 누가 읽을 것인지(도착점)를 잇는 선명한 일직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작가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콘텐츠 크리에이터란 개념으로 책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책을 쓰는 직업인이지만, 크리에이터는 작가의 개념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의 관점에서 출판을 정의하자면 책을 잘 쓴다는 개념 자체가 확대될 수밖에 없다. 작가라고 하면 한곳에 머물면서 억척스럽게 원고에만 매달리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오로지 자신의 글에만 충실하면 됐다. 기획, 마케팅, 영업은 당연히 출판사 고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작가와 독자가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작가가 설정한 독자의 캐릭터가 구체적일수록 책은 독자의 삶에 밀착된 내용들로 채워진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대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대화는 헛돌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의 욕구를 예리하게 파고들며 공감할 만한 실마리를 풀어내야만 한다. 책을 마치 한 사람과 1대 1로 대화한다는 감각으로 써보라. 이렇게 독자층을 좁혀놓으면 과연 읽을 사람이 있겠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읽을 수 있는 두루뭉술한 책을 쓰는 것보다, 독자를 구체화하여 책을 선택할 분명한 이유를 만드는 것이 판매에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개인이 강력한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책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대외적으로 확대해나간다. 유튜브크리에이터 ‘대도서관’처럼 개인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책을 내는 경우도 있다. 역시 관심이 집중되는 곳에 기회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소셜미디어를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연결(Link)’이다. 나에게서 타인으로 확장되는 연결을 통해 콘텐츠의 최초 생산자를 중심으로 밀도 높은 브랜드가 만들어지게 된다.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이 모두가 타인과의 연결이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해야 할지도 모른다. ‘모든 링크의 합’이라고 말이다.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콘텐츠는 발견되지 못한다. 아무리 콘텐츠가 훌륭해도 발견되지 못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작가의 이름값만으로 100만 부를 팔아치우던 시대는 갔다. 출판시장에 드리워진 불황의 그늘은 여전히 짙기만 하다. ‘Social’이라는 미디어 환경 안에서 자기만의 글 세계를 구축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젊고, 감각적이며, 깊다고 볼 수 없을지는 모르나 최소한 대중의 코드를 읽어내는 ‘feel’만큼은 충만하다. 대중들은 어려운 종이책을 집어 드는 대신, 그들의 몽글몽글한 언어에 기꺼이 손을 내민다.

당신의 미래는 더 이상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연결에 의해 결정되고, 연결의 강도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인력이 작용할 때에만 연결이 일어난다. 인력(끌어당김)이란 타인의 관심이 당신을 향하게 하는 힘이다. 

이 책은 책쓰기 요령이나 기획서 쓰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전문적인 개론서와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들의 원고를 봐주고 그것을 어떻게 상품화할 수 있을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지 기획하는 컨설턴트로서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쓰고 있다.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마따나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라고 해도 제대로 다듬어 옥석으로 만들지 못하면 돌맹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어떻게 예쁘게 다듬는가에 따라서 남들이 돌맹이라고 여겼던 것을 옥석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돌맹이를 옥석으로 만들기도 어렵지만 돌맹이 중에서 옥석이 간혹 끼어 있는 것이지, 모든 돌맹이가 옥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돌맹이 중에서 무엇이 옥석인지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기획자이고 돌맹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옥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속인다면 그건 사기꾼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돌맹이가 아닌 옥석을 만들 수 있는지, 애초에 무엇이 돌맹이이고 옥석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우리가 알고 싶은 건 그런 것이다.

SNS 상에서 남들이 쓴 글을 읽다보면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어진다. 이 정도 글은 쉽게 쓸 수 있을 것같다. 하지만 막상 써보려고 하면 막막하다. 당장 첫줄부터 막힌다. 뭘 써야 할지 머리 속에는 있는데, 그걸 꺼내기는 어렵다. 나 또한 장장 20년 째 취미 삼아서 글을 쓰고 있고 역사 서적을 한번 내 본 적이 있는 아마추어 작가이지만 솔직히 일상의 짧은 이야기를 쓰는 것조차 쉽지는 않다. 글을 쓰는 것은 꽤나 스트레스이다. 글을 쓰는 게 부담된다기보다 잘 써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다. 무작정 생각나는대로 적으면 그건 글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똑똑한 교수들조차 의외로 글쓰기에는 서툰 경우를 많이 본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그걸 글로 정리하기란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고 친절하여 한 눈에 요점이 파악되는 글, 잘 다듬어지고 감칠맛나면서 때로는 인상적인 글귀로 다 읽은 뒤에도 여전히 뇌리에 남을 수 있는 글, 그런 글이 남들이 읽어보고 싶은 글이다. 그런 글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고 소위 책 코칭 강사에게 비싼 돈 들여서 속성 과정으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쓰고 또 써봐야 한다. 처음에는 머리 속이 정리되지 않아도 쓰다보면 자연스레 정리가 된다. 필력도 늘어난다. 다른 사람들의 글도 많이 읽어봐야 한다. 흔히 작가 지망생들은 유명 작가들의 책을 100번이고 200번이고 그대로 필사하면서 그들의 글쓰는 방법을 익힌다고 한다. 어디에서도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저자는 책을 쓰고 싶은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지는 않는다. 분류는 자기 계발서라지만 「기획자의 책 생각」이라는 제목 그대로 기획일을 하는 사람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에 더 가깝다. 하지만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정도는 알았으면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담고 있다. 읽다보면 와닿는 부분,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책은 쓰고 싶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망설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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