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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담긴 문화사, 끽다점에서 카페까지 - 이길상 교수가 내려주는 커피 이야기
이길상 지음 / 싱긋 / 2025년 8월
평점 :
나는 커피가 좋다. 흔히 인간의 3대 욕구를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하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커피욕이다. 매일 1리터 두 병을 갖다놓고 물처럼 마시는 중. 그렇다고 직접 커피 갈고 로스팅해서 맛과 향을 음미하는 커피 덕후는 아니지만 어쨌든 커피 없이는 못 버티는 몸이 되었다. 조선 시대 틈만 나면 장죽대 물고 있던 우리 조상님들은 담배를 가리켜 '식후 제일미(食後第一味)'라고 했다던가. 담배 안 피는 나로서는 그딴 풀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보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이야말로 나른한 오후를 맨정신으로 버티게 하는 진정한 식후제일미요, 현대인들을 위해 신이 내린 선물이다. 이 천상의 음료를 맛보지 못하던 시절의 인류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살았을까 싶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옛날 마리 앙투아네트는 "커피 없으면 콜라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가 혁명으로 목이 몸과 분리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이유는 커피 대신 치커리 따위나 우려먹었기에 사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고 동독 사람들은 커피도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 이 따위 체제 타도하자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라고. 미국 독립전쟁의 서막이었던 보스턴 차 사건도 사실은 차가 아니라 커피였을지도. 어디 차 따위를 피같은 커피에.

커피는 사실 과일이람서.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과일이요, 땅에서 나면 야채라던가. 흔히 커피콩이라지만 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브라질 커피이니 자바 커피이니 세상에는 다양한 커피가 있지만 원래 커피의 발원지는 에티오피아라고 한다. 그런데 저 뻘건 열매를 볶고 물에 끓여서 우려먹는다는 발상을 어떻게 했을까. 에티오피아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시 전설에 따르면 옛날 옛적 칼디라는 이름의 한 목동이 염소를 풀어놓았는데 염소 한마리가 정체불명의 붉은 열매를 먹더니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밤에 잠도 안 자길래 자기도 시험삼아 먹어보니 온 몸에 에너지가 넘치더라, 그때부터 사람들이 커피의 효능을 알게 되었다는 것. 카페인은 어쨌든 생으로 먹을 만한 맛은 아닐 것인데 말이다. 칼디가 실존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되었건 그것을 맛볼 생각을 했던 놈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호기심은 실로 놀랍다. 하긴 복어를 요리하겠다고 덤빈 것에 비하기야 하겠냐만.
그것이 중동을 거쳐서 유럽으로 전파되고 '악마의 열매'라는 둥 온갖 음해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대항해 시대를 통해서 신대륙과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며 19세기 지식인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혁명을 논했다고. 그리고 그 마수는 어느듯 은둔의 나라 조선에까지 닿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에게 커피는 한낱 기호품이 아니라 생활 필수품이자 커피 덕분에 하루가 길어지고 수많은 혁신이 탄생할 수 있었으니 인류 문명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셈. 커피가 없었으면 어쩔 뻔. 특히 나부터. 그렇다고 사탕수수처럼 한때 귀하신 몸에서 이제와서 비만의 적으로 취급받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진화하신 기특한 존재인듯.

오늘도 커피 없이 못 버티는 커피당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다. 커피가 처음 조선 땅을 밟았던 구한말부터 치킨집보다도 더 많은 커피숍이 동네 구석구석마다 차지한 채 식후의 우리 직장인들을 유혹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커피 100년사이다. 굵직굵직한 정치사부터 소시민들의 애환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인 이길상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이면서 커피 작가이자 <커피 히스토리>라는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라고 한다. 실로 커피에 죽고 못 사는 이땅의 진정한 커피 덕후인 듯.

일명 대한민국 커피 인문학자라는 저자. 커피와는 별개로 한국학 교수로서 외국에서 잘못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기도.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커피가 처음 소개된 것은 구한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이던 1852년, 윤종의라는 사람이 쓴 <벽위신편>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의 목적은 정약용처럼 신문물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위정척사와 서양 세력을 배척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물며 그 시절 뇌 굳은 사대부가 직접 커피를 어디서 구해다가 맛 봤을 리도 없고 중국쪽 책 어느 대목에서 "양놈들은 커피라는 것을 마신다카더라."라는 것. 어쨌든 변방의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커피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에 커피라는 음료가 처음 기록된 시기는 1852년으로 인문지리서 <벽위신편>에 언급되어 있다. <벽위신편>은 1848년 윤종의가 서양의 위력과 종교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한 방책 제시 목적으로 쓴 책으로 4년 뒤 중국의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을 참고하여 개정하면서 커피를 소개했다. 이들 책에 "필리핀에서는 커피라고 하는 편두(까치콩)과 비슷하고 청흑색인 열매를 볶아 끓여 마시는데 맛은 쓰고 향은 차와 비슷하다"라고 기술된 커피 생두의 모양과 만드는 법, 맛에 대한 내용을 <벽위신편>에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 p.16 |
그리고 국내에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였던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신부가 선교를 하면서 조선인 신도들에게 커피를 맛보게 하면서 이 땅도 커피에 물들게 되었다. 한 마디로 커피로 사람을 낚은 셈. 실제로 베르뇌는 대량의 커피를 끊임없이 주문했을 만큼 효과 작렬이었다고. 군대 시절 초코파이 하나에 주말을 헌납했던 나같은 나이롱 신도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뽀록나는 바람에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흥선대원군부터 커피의 마수에 빠뜨렸어야. 정작 아들인 고종은 둘도 없는 커피 애호가가 되었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집쟁이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의 발호였는지도.

조선인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금의환향한다는 판타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커피를 즐기는 고종. 겉은 개화되었으나 알맹이가 그대로다보니. 이 양반도 따지고 보면 불같은 아버지와 드센 마눌님 사이에 끼어서 눈치 보느라 어지간히 마음 고생했을 듯.
하지만 중세 시절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라면서 교황이 직접 커피 나무 화형식까지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커피는 온갖 박해와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것도 불과 십수년 전까지 말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외화 한푼이 아쉬운 판국에 주식도 아닌 커피를 수입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허비한다는 이유였다. 커피는 사치와 낭비의 대명사였고 퇴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내가 학창 시절에만 해도 동네 다방에는 레지라고 불리는 짧은 핫팬츠 입은 언니야들이 점심 때만 되면 스쿠터타고 커피 심부름을 했었던. 물론 요즘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어차피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것인데. 1997년 IMF가 터지자 애꿎은 커피가 외화낭비의 주범인양 여론의 몰매를 맞고 관공서에서는 커피 안마시기 운동이 벌어졌다고. 전문 커피숍인 스타벅스가 처음 생겨나자 점심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신다고 모 신문에서 질타하던 언제인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 나올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 책은 이런 얘기를 담고 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어떻게 찾아냈나 싶을 정도.
고종은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마신 첫번째 임금일 뿐만 아니라 커피를 꽤 즐겼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커피의 즐거움을 알려진 이는 아마도 초기의 의료 선교사, 서양 외교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타크나 파울 묄렌도르프같은 서울 거주 외국인이었다. 고종은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커피를 늘 가까이 했다. 힘든 시기를 살아야 했던 고종에게 커피는 위로의 음료였다. - p.38 |
일본식 카페 문화 유입으로 조선 카페에 등장한 흥미로운 서비스 중 하나는 광학적으로 성적 도발을 유도하는 것, 당시 용어로 '광학 서비스'였다. 홍등과 청등, 즉 현란한 불빛으로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서비스였다. 실내조명을 가능한 어둡게 하여 여급과 고객을 편리하게 해 주는 서비스였다. 단속 대상이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31년 10월 17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본정 경찰서는 연락정에 있는 카페 '미쓰와'에서의 흐릇하고 컴컴한 광선 사용을 문제 삼아 주인을 호출한 후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 p.112 |
1947년 2월 26일 <조선일보>는 "전 이왕가의 최근 소식, 동경서 다방 경영"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마이니치 신문> 보도를 인용한 이 기사에 따르면 이왕가 일족은 도쿄 시부야에 카페를 차렸다. 종래의 생명선이던 일본 국고의 보조금이 끊기자 선택한 길은 커피를 파는 일이었다. 상궁과 나인이 웨이트리스가 되었다. 먹고 살기 어려울 때 카페를 차리는 일, 그때나 지금이나, 왕후장성이나 서인이나 차이가 없음을 실감케 했다. 스스로 막지 못한 불행한 국망, 스스로 이루지 못한 불완전한 광복이 초래한 아픔이었다. - p.192 |
5.16군사 정변이 일어난지 2주일 후인 5월 29일 아침을 기해 다방에서 커피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방업자들이 자진하여 커피 판매를 중단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쿠데타 세력이 취한 강제 조치였다. 강제 조치가 아니었음을 강변했지만 믿는 사람은 없었다. 치안 국장은 "어제 28일 다방업자들을 불러서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는 커피를 되도록 팔지 말고 생강차나 기타를 대용하여 팔도록 함이 어떻겠는가라고 권장했다."라고 발표했다. 강제로 커피를 팔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 p.243 |
검찰에 따르면 장안다방 박군은 커피 1파운드에 보통 100잔 정도 나오는 양을 담배 가루와 소금을 넣어 250잔 내지 300잔을 만들어 하루 600여잔 씩, 유리다방 김씨는 하루 700여잔씩 팔아왔다는 것이다. 커피 가루 4파운드를 사면 2파운드에 담배 가루를 섞어 4파운드 분량의 커피를 만들고 나머지 커피 가루를 빼돌리는 수법을 쓴 것이다. 이들은 손님들이 피다 버린 담배꽁초를 연탄 화덕에 올려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 커피에 섞는 수법을 썼다. 니코틴 맛이 느끼지지 않도록 달걀 껍데기와 소금을 함께 타기도 했고 손님들이 맛에 둔감한 시각인 오후 늦은 시간에만 꽁초커피를 내놓은 주도면밀함도 보여주었다. - p.325 |
1980년대 중반에 퍼지기 시작한 가라오케 문화나 노래방 문화는 다방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식사 모임 후 가는 장소로 다방보다는 노래방이 선호되었다. 새로 등장한 아파트의 신식 주방시설 덕분에 집에서 손쉽게 커피를 끓여 마실 수 있게 된 것도 다방 증가 둔화의 한 요인이었다. 다방은 설 자리를 급속도로 잃어가고 있었다. 커피 암흑기 후반기에 닥친 다방의 침체였다. - p.358 |
우리나라에서는 1979년에 문을 연 롯데리아가 체인점 문화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는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버거킹, 맥도널드, KFC 등이 잇따라 등장했다. 커피전문점으로는 1979년 대학로에서 처음 문을 연 후 점차 매장을 늘려 한 때 전국적으로 60여개의 매장을 거느렸던 '난다랑'이 효시였다. 대학로의 1호 매장은 1986년에 '밀다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렇게 시작된 커피 체인점 문화는 급속히 성장하여 1993년 신문 광고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 p.404 |
외환 위기는 커피 대신 국산 차 마시기 운동을 소환했다. 늘 그랬듯 절약이 필요한 시대에 커피는 모두의 공적이었다. 커피는 광고로 시대에 어필하려고 노력했다. 맥스웰하우스는 캔커피 광고에서 취업 준비생의 면접 장면을 다루었다. 면접에서 당황하여 실수한 취업 준비생을 보여준 후 "나를 알아주는 커피, 맥스웰 캔커피"라는 메세지를 전달했다. - p.432 |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평생을 살면서 평균 62년 정도 커피를 마신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균 2만5110잔의 커피를 마시고 9만145달러(1억2500만원)을 지출하는 셈이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 커피 소비액이고 결코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 커피임을 말해준다. - p.446 |
450여 페이지에는 베르뇌 신부가 처음으로 커피를 가져오고 아관파천한 고종이 커피를 입에 대면서 커피 문화가 본격화된 지 약 한 세기 반의 시간 동안 커피로 보는 우리네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고보면 커피가 이땅에 정착하기에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기까지 잘도 살아남았다 싶을 정도. 세상이 어려울 때마다 높으신 분들은 커피 탓으로 돌리면서 우리 소시민들의 입에서 빼앗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니 말이다. 하긴 커피만의 얘기일까.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탄압에 맞선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마음껏 커피를 마시며 바쁜 일상 속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 여유가 영원하지는 않을 듯 하다. 지구 온난화로 가뭄과 폭염, 병충해가 만연하면서 커피 수확량이 나날이 줄어들기 때문. 실제로 원두 가격의 폭등으로 당장 울 사무실 근처의 커피값도 300원이나 올랐더라. 더는 값싼 아메리카를 즐기지 못할지도. 특히 트황제 몽니 덕분에 엄청난 관세로 미국인들은 모닝 커피 한잔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고.
책을 읽다가 문득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커피의 우리식 명칭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양탕국"이 사실은 아무런 근거없는 얘기란다. 양탕국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인 1968년 12월 26일 조선일보의 한 칼럼인데 그게 와전되어 마치 구한말부터 사용된 것마냥 여기저기서 언급되었다는 것. 주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실 때마다 아는 척하면서 양탕국 타령을 했는데 앞으로는 못 써먹을 것같다.

TV 교양 프로그램에도 버젓이 등장하는 '양탕국'. 누가 보면 그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여기에 밥 말아서 드신 줄 알 듯.
10월 1일이 한국커피협회에서 정한 커피의 날이라고 한다. 국군의 날과 겹치기에 아는 사람만 아는 날. 커피라는 주제로 이렇게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쓸 수 있나 싶다. 커피당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