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 대륙 -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유럽 잔혹사 걸작 논픽션 30
키스 로 지음, 노만수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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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중에서 최고의 명작은 <쉰들러 리스트>라고 꼽고 싶다. 호주 출신 작가인 토머스 케닐리(Thomas Keneally)의 소설을 원작으로 원래 나치당원이자 악명 높은 군납업자였지만 인간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나치의 광기어린 홀로코스트에 저항하여 1천여 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보내지는 것을 막음으로서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이름을 남긴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나온지 30년이 지난 지금 보더라도 감동적이다. 특히 영화 말미에 나치가 패망하고 쉰들러가 도피에 나설 때 그가 구해준 유태인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금니를 녹여 만든 반지를 넘겨주자 자신이 좀 더 노력했더라면 더 많은 생명을 구했을 거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장면이다. 쉰들러가 보여준 휴머니즘과 젊은 시절 니암 니슨의 영혼을 갈아넣은 연기가 결합한 결과랄까.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 전부를 구하는 것이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라는 탈무드의 구절이 적힌 반지를 받고 울먹거리는 쉰들러.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어떤 보답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여겼을 그로서는 그 순간에야 자신이 얼마나 숭고한 일을 했는지 비로소 절감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영화가 극적 재미를 위해서 미화되었으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유태인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폄하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름 민주화되었다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소수의 편에 서서 불의에 맞서기란 쉽지 않지만, 하물며 서슬 퍼른 분위기와 집단 광기 속에서 불이익은 물론이고 여차하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모르는 척 침묵하거나 오히려 분위기에 편승하여 개인적인 이득을 보려는 기회주의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바뀌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카멜레온마냥 변신하고 자기 행위가 정당한 선택이었다며 항변하는 비겁자들이 훨씬 많은 것이 우리네 세상이다. 쉰들러는 분명 용기 있는 사람이다.

한편으로 영화가 끝나기 직전 또 다른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온다. 쉰들러가 떠난 다음날 공장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 앞에 한 소련 장교가 말을 타고 등장한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면 되느냐는 질문에 그는 동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같으면 서쪽으로도 가지 않겠소." 전쟁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했다고 해서 이들을 위한 세상이 열린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여전히 유럽에서는 반유태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스필버그가 영화를 폴란드에서 촬영하고 있을 때에도 유태인을 미화하는 영화라면서 항의와 방해가 많았다고 한다. 영화는 유태인 생존자들이 다같이 손을 맞잡고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장면에서 막을 내리지만 현실은 동화 속 이야기마냥 "다같이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식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끝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감동과 여운을 즐길 뿐, 이들이 그 후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찾기까지 어떤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뒷 얘기는 관심없다.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인지도.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1945년에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후 적어도 10년 이상 시끄럽게 이어졌다." - 아마존 도서 소개 중에서.

역사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글항아리에서 나온 신작 도서인 <야만대륙(Savage Continent)>은 바로 그와 같은 얘기, 즉 나치 패망 이후 승리의 환희 뒤에 가리어졌던 야만과 무질서의 유럽을 다룬 책이다. 2012년에 나온 이 책은 다음해 제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최고의 논픽션 역사서에 수여되는 펜 헤셀-틸먼 상(PEN Hessell-Tiltman Prize)을 수상했으며 무려 22개국에서 출판된 베스트셀러. 저자 키스 로우(Keith Lowe)는 영국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작가. 주로 제2차 세계대전사를 전문으로 글을 쓰는 모양.

저자인 키스 로우. 1970년 생으로 12년 전 사진이라고 하니 아직 40대 중반였을 때인데 일찌감치 벗겨지신 듯. 하긴 제이슨 스타뎀은 30대 초반에 탈모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우리가 함부로 대하는 머리카락 한 올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자원이라는.


이 책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린다. 독일군과 소련군, 서방 연합군이 서로를 어떻게 파괴했으며 수천년 동안 인류가 이룩한 문화유산과 유서깊은 도시들이 불과 몇년만에 폐허로 바뀔 수 있었는지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이전의 전쟁들과 비교하여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화력이나 기술이 아니라 광기라는 점이다. 그 점에서는 원래 사람 목숨을 파리 이하로 보는 독일, 소련만이 아니라 소위 문명국을 자처하던 서방 연합군도 다를 바 없었다. 원자폭탄으로 수십만명이 사는 도시를 한방에 날려버린 것은 미국이었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건간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의 마지막 선이 무너지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지구상에서 문자 그대로 절멸시키려고 애썼다. 심지어 히틀러는 패전이 코앞에 닥치자 '네로 작전'을 하달하여 자기네 손으로 독일의 모든 것을 파괴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자신이 그토록 우월하다고 추켜세웠던 아리아인종은 러시아인들보다 하등하다고 판명되었기에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이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파멸의 규모를 묘사할 수 있는 유의미한 어휘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바르샤바는 파괴된 도시의 하나일뿐, 폴란드에서만 10여개의 도시가 파괴되었고 유럽 전체에서는 100여개의 도시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촬영된 사진들을 보면 개별 도시들의 파괴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을 유럽 대륙 전체로 확장한다면 인간의 머리로는 결코 그 참상을 이해할 수 없다. - p.35

책은 네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제1부인 '전쟁의 유산'은 종전 후의 혼란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파괴된 도시, 전시 희생자들, 약탈과 폭력, 추방, 강제 이주 등 전쟁이 남긴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이 담겨 있다.

핵전쟁 이후의 세상을 묘사한 영화 <매드맥스>는 정부 붕괴로 공권력이 사라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보여준다. 그나마 나치 몰락 후 유럽에서는 수백만명의 연합군이 주둔하면서 질서를 유지했지만 그럼에도 일탈과 범죄를 완전히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2부의 '복수'는 나치의 가해자들만이 아니라 가장 만만한 약자들을 향해 어떤 식으로 분풀이가 자행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며, 제3부 '인종청소'는 자민족 이외 소수민족들의 강제 추방과 학살이 나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을 고발한다. 여기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풀려난 유태인 난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쉰들러가 어렵게 해방한 유태인들이 화기애애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을 거라는 얘기이다. 제4부는 독일군이 물러난 뒤 유럽 곳곳에서 벌어진 내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 전에만 해도 탄압의 대상이자 궁지에 몰려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세상을 엎고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이기도 했다. 실제로 중국과 유고,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했다. 만약 전쟁으로 기성 정권이 약화되거나 무너지지 않았다면 이들이 승리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공산주의자들이 이긴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스에서는 서방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가 승리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다. 나치와 싸웠을 때 이상으로 말이다.

전쟁 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는 유대인 인구 비중이 큰 수십 개의 대도시가 있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로 알려진 빌노는 전쟁 전만 해도 6~7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나 1945년 중반에는 그 중 10%만 살아남았다. 바르샤바에서는 유대인이 인구의 약 3분1을 차지했지만 1945년 1월 붉은 군대가 비스툴라강을 건넜을 때 이 도시에서 발견한 유대인은 겨우 200명이었다. 1945년 말까지 소수의 생존자가 이 도시로 돌아왔지만 5천명이 넘지 않았다. - p.52

기아의 원인이 무엇이었던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아테네와 테살로니키에서는 사망률이 3배 증가하고 미코노스 등 일부 섬의 사망률은 평소보다 9배나 치솟았다. 전쟁 동안 사망한 41만명의 그리스인 중 적어도 25만명은 기아와 관련된 죽음일 것이다.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자 영국군은 1942년 가을 이례적으로 식량 운송선이 자국을 지나 그리스로 입항할 수 있도록 봉쇄를 풀었다. 남은 전쟁 기간 동안에도 독일과 영국의 합의 아래 구호물자는 그리스로 유입되었고 1944년 말 해방 이후 혼란기에도 반입이 계속되었다. - p.79

남자와 여자 심지어 아이들도 복수에 동참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가 해방된 후, 벤 헬프고트는 두 명의 유대인 소녀가 라이프니츠로 가는 길에 한 독일 여성을 손수레로 공격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소녀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했지만 뛰어들어 뜯어말릴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에는 수용소 안에서 군중이 나치친위대 한명을 때려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그는 말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난 아무도 미워하지 않지만 폭도는 증오한다. 사람들이 폭도로 변질되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62

미군 관할 수용소의 포로 사망률은 소련군 관할 수용소만큼 높지는 않았지만 영국군이 운영한 전쟁포로수용소 사망률의 4배 이상이었다. 더 심한 곳은 프랑스군이 운영하는 수용소로, 포로의 숫자가 영국군 수용소의 1/3도 되지 않았음에도 사망자 수는 거의 20배에 달했다. 더욱이 우리는 이 통계들이 보수적인 수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공식 역사가들조차 수천명의 사망자가 기록에서 누락되었을거라고 인정했다. - p.213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피에트로 바돌리오의 부패한 지휘 아래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파시스트 잔당들이 권력을 누렸다. 연합군은 파시스트 당원을 축출하라고 압박했지만 해방된 지역의 통제권이 이탈리아 당국에 반환되자마자 그들은 본래의 지위를 회복했다. 경찰은 공산주의자들을 괴롭히고 좌익 동조자들을 공공연히 습격했으며 파시스트당 송가를 불렀다. - p.257

유럽 여성들이 독일인과 사귄 까닭은 강요당했기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남편이나 애인이 부재했기 때문도 아니고 돈이나 음식이 필요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독일 군인의 '기사같은' 강한 이미지, 특히 자국 남자들의 나약한 인상에 비해 강렬하고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덴마크의 전시 여론조사원들은 덴마크 여성의 51%가 자국 동포 남성보다 독일 남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인정한 통계치를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p.279

수년간 이어온 나치 선전은 고작 몇주나 몇달만에 뒤집히지 않았다. 여전히 곳곳에 노골적인 반유대주의가 존재했으며 때로는 꽤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가령 1945년 그리스 도시 테살로니키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아 살아 있었어?"라거나 "유감이야. 너희가 비누가 되지 않았다니!" 따위의 인사를 받기도 했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유대인 송환자들은 등록을 담당하는 관리로부터 "독일 놈들이 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것을 까먹었나봐."라는 조롱을 받았다. 가르미슈와 메밍겐 같은 독일 도시에서는 극장에서 600만 유대인의 죽음을 언급하는 뉴스릴 영화를 보면서 "그들을 충분히 죽이지 못했어!"라는 외침과 함께 귀청을 찢을 듯한 박수가 이어졌다. - p.320

헝가리인들이 루마니아에서 추방당했듯, 루마니아인들도 헝가리에서 쫓겨났다. 알바니아계 참족은 그리스에서 추방되었고 루마니아인은 우크라이나에서 추방당했으며 이탈리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추방되었다. 핀란드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서부 카렐리야 지방을 소련에게 넘겨주면서 핀란드인 25만명이 이주해야 했다. - p.406

스탈린은 붉은 군대가 동유럽에 진입한 순간부터 자국의 시스템을 거울처럼 고스란히 반영하는 정치체제를 확실히 심어놓기로 결심했다. 스탈린은 티토의 대리인인 밀로반 질라스와 대화하면서 "누구든 영토를 점령하는 자는 그 땅 위에 자신의 사회체제도 강요한다. 모두들 자신의 군대가 도달하는 범주 안에서 자신의 시스템을 이식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이전 전쟁들과 다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 정치체제를 논리적으로 성립시킨 쪽은 공산주의자 정치인들 그리고 소련 및 기타 동맹자들의 무자비함이었다. 동유럽 공산당들은 소련과 서방 사이의 전략적 완충지대와 함께 소련 체제 복제품을 창출했다. - p.538

전쟁 중에는 침략자에게 저항하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였다면 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쓰러뜨릴 적이 사라지면서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그동안 감추어졌던 민낯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것이 7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나오는 내용이다. 흔히 알려진 것마냥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히 단죄했다는 신화와 달리(물론 친일파가 대놓고 역사의 승자 노릇을 하는 우리 사회에 비할 수는 없지만) 비시 정권의 권력자와 기업가들은 몇몇 지도자급을 제외하고 대부분 면죄부를 받았다. 비싼 변호사를 써서 법적 허점을 파고 들거나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과거사 청산 자체가 뒷전으로 밀려난 덕분이었다. 그 대신 확실하게 처벌한 대상은 있었다. 독일군과 사귀었던 여성들이었다. 프랑스 사회가 보기에 여자들의 자궁은 그녀들이 아니라 국가 소유였고 그것을 사사로이 내줌으로서 남자들의 체면을 떨어뜨린 것은 매국노보다 더 나쁜 죄라는 이유였다. 많은 여성이 남자들에 의해 삭발당하고 속옷으로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함으로서 과거사 청산의 본보기가 되었다.

독일군과 잤다는 이유로 강제 삭발당하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프랑스 여성들. 프랑스만이 아니라 독일 치하에 있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자행된 모습이기도 했다. 더욱이 여기에 앞장선 쪽은 정식 사법체계나 연합군에서 싸운 병사들이 아니라 독일군 앞에서 침묵했던 다수의 남자들이었다. 그들로서는 전시에 느꼈던 자신들의 무력함을 전쟁이 끝난 뒤 약자들에게 갚아줌으로서 스스로를 위안했다.


예전에 글항아리에서 나온 이안 부루마 교수의 <0년> 또한 1945년의 전후 유럽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보다 신랄하고 적나라하면서 충격적이다. 더욱이 그 시절 누구나 겪었지만 기억해봐야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같이 잊기로 한 역사이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당장 우리만 해도 국민들에게 모든 역사를 다 알 필요는 없으며 기억할 것만 기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역사는 학문의 영역임에도 정치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면 히틀러의 세계정복 야욕에 맞서 연합군이 어떻게 이겼는지 전투와 승리의 역사에만 포커스를 두는 것이 시중에 수없이 늘려있는 책이다. 그런 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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