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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쳐들어오면 어쩌지? -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의 모르는 타이완해협 군사 상식
왕리.선보양 지음, 최종헌 엮음 / 글항아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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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경주APEC에서 돈 많고 만만한 동맹국들 단단히 털어먹을 궁리로 왔다가 뜻밖의 신라 금관을 득템하고 입이 귀에 걸린 트황제.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일본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금단의 테크트리인 핵잠을 해금해주고 갔다.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자 오랜 숙원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핵잠은 핵무기는 아니지만 항모에 버금가는 바다의 전략무기다보니 당장 주변국들이 발칵 뒤집어졌다는.

핵잠을 가진 나라는 5대 상임이사국 외에 자기 동네에서 짱 먹는 인도 정도이다. 북한이야 인간의 상식으로 가늠 불가한 우주적 존재이므로 논외이고. 전임 수령님이 신통력으로 솔방울을 총알로 바꾸었다는데 통나무로 핵잠을 못 만들겠음? 김씨 왕조는 뮤던트인가.


물론 정치적 파장이 큰 핵잠의 특성상 첫 관문을 겨우 통과했을 뿐, 김치국부터 마시기에는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기분 한번 맞추어주었다고 한들 그 변덕스러운 영감이 언제 꼬장을 부릴 지 모르는데다, 실제로 보기까지 앞으로 숱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어쨌든 우리 사회의 유별난 핵 로망은 둘째치고라도 1990년대만 해도 동북아에서 최약체 해군으로 배수량 150톤의 돌고래급 잠수정이나 굴리다가 1200톤급의 독일제 209 잠수함을 도입하여 처음으로 잠수함다운 잠수함을 가지게 된 것이 불과 30년 전이다. 주변국들로서는 실로 괄목상대이자 격세지감이라고 할 듯. 그런데 그런 게 탐탁잖은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전 정의당 의원이자 정욱식씨와 더불어 국내 대표적인 반핵 평화 전문가를 자처하는 김종대씨가 지난 10월 31일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핵잠은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무기"라고 말한다.

실로 단세포적인 발상이다. 이 양반의 뇌내 시계는 아직도 30년 전에서 멈추어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지구 변방의 존재감 없는 나라가 아닐 뿐더러, 우즈벡이나 부탄, 몽골과 달리 우리 생명줄은 전적으로 바다를 통한 해외 수출에 달려 있다. 더욱이 트럼프 복귀 이후 서 태평양에서 미중일 갈등이 나날이 고조되는 주변 상황은 강대국들끼리 해결할 몫이지 우리같은 약소국이 주제넘게 끼어들 수 있냐면서 타조마냥 머리를 땅에 처박고 현실도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양반의 불만은 비싼 세금으로 핵잠 따위를 만들어봐야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첨병 노릇만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다른 동네로 이사가지 않는 한 좋건 싫건 여기에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며 그동안의 우리가 미국의 수혜를 공짜로 누린 게 아닌 것처럼 미국 역시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려면 그만한 댓가를 내놓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핵잠 개발에 도전하는 것은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거래할 나름의 카드를 가지기 위함이지 단순히 돈지랄이나 무슨 절대 병기이기 때문이 아니다. 핵잠 한 척이 전쟁의 판세를 바꾸지는 못해도 그게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말이다. 평소에 반미 자주국방을 부르짖는 좌파라면 오히려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발이라며 앞장서서 반기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초 치는 소리를 하는가 싶다.

과거에 우리 사회에서 밀리터리란 그 분야에 종사하는 소수 전문가들의 전유물일 뿐,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휴전국가로서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오랜 군부 독재로 사회 구석구석에 그 잔재가 남아 있으며 대다수 남성들이 의무 복무로 군대를 체험하는 나라치고는 독특한 현상이랄까. 오히려 너무 잘 알기에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원래 인간이란 미지의 세계에 호기심을 품는 법이고 '덕후 중의 덕후는 양덕'이라는 말마따나 군대 안 가는 놈들이 군인 흉내와 군복 코스프레에는 더 열심이다.

손수 만든 군복과 소총으로 나폴레옹 전쟁 시절의 전열보병을 재현하는 양덕들. 이 정도 퀄리티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듯. 그보다 휴일날에 하라는 집안일 안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이러고 노는데 가만히 내버려두는 마눌님들이 더 대단한지도. 이미 포기했나.


그런데 요 근래에 와서 분위기가 꽤 달라졌다. 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 덕분에 누구나 원하는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른바 '밀덕'이라고 관련 학위와 경력이 없는 일반인이면서 직업적인 사람들보다도 더 박식한 아마추어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유튜브에서는 전쟁사를 다룬 컨텐츠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TV 프로그램에서 저명한 밀덕이 게스트나 고정멤버로 출연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본다. 네이버 카페에는 어떤 주제를 놓고 매번 밀덕들끼리 피터지는 논쟁이 벌어지기 일쑤이다. 전쟁사는 더 이상 썩은 고인물이 아니다. 과거의 일방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각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한다. 모두가 전문가인 시대가 된 셈이지만, 한편으로는 검증되지 않은 얘기가 인터넷을 통해 함부로 난무하고 대중은 사실 여부보다 자극적인 소리에 더 쉽게 빠져든다는 점이다. 여기에 정치권이나 언론, 소위 전문가들까지 가세하여 여론을 자기네 입맛대로 조종하려 든다.

당장 북한에 대해서도 온갖 '썰'이 난무한다. 대개는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섞어서 북한의 군사력을 터무니없이 과장하는 식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절에도 구식이었던 북한의 AN-2 복엽기는 어느 순간 스텔스기로 둔갑하여 남한 여기저기에 특수부대를 침투시켜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느니, 휴전선에 늘어선 북한의 장사정포는 서울을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느니, 언제는 북한의 압도적인 머리수를 그토록 강조하더니 핵무기가 등장한 뒤에는 우리가 아무리 재래식 전력에서 우세해도 핵 한방이면 무용지물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왜곡된 정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겁주고 대중의 관심을 끌 수는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근거가 빈약할 뿐더러, 그래서 어쩌라는건가 싶다. 혹자는 상대를 과장해야 우리가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이라고 어쩌구하겠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북한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과 패배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엄연한 이적 행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가장 큰 이유가 독일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었다. '지피지기이면 백전불퇴'라는 손자병법의 유명한 격언마냥 중요한 것은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아니라 적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응책도 나온다. 그럼에도 군이나 학계 전문가들이 나서서 안보에 하등 도움 안 되는 헛소리들을 바로잡고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보다 입을 다무는 게 현실이다. 그쪽이 자기들한테는 더 이득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밀덕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읽을 책이 나왔다. <중국이 쳐들어오면 어쩌지?>라는 뭔가 아동틱한 느낌의 이 책은 오늘날 타이완인들에게 가장 큰 위협인 중국의 타이완 침공을 다루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안절부절하는 제목과는 정반대로 중국 위협론이 타이완인들의 막연한 걱정마냥 그리 겁낼 일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한마디로 타이완은 강하다는 것. 저자는 왕리라는 블로거. 찾아보니 원래는 이과를 전공한 과학 교사인데 전쟁사가 좋아서 이쪽 분야에 뛰어든 밀덕인 모양. '왕리의 제2차 세계대전 연구소(王立第二戰研所)'라는 블로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쟁사를 연재하는 중. 그 바닥 밀덕계에서는 나름 유명인사라고. 이 책 또한 타이완 군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은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그런데 왕리라는 이름으로는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오고 정작 타이완쪽 신문에는 선보양 타이베이 법대 교수(沈伯洋, 오른쪽)와 민진당의 MZ 정치인인 린빙유(林秉宥, 왼쪽)라는 사람이 공동저자라고 나온다. 왕리는 필명이고 린빙유가 본명인가. 그런 것도 아닌듯.


전체 GDP가 대한민국 국방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북한을 상대로도 '필패' 타령하는 사람들이 있는 판국에 하물며 체급 자체가 차원이 다른 중국이 타이완을 친다면 미국의 개입 없이는 시작하자마자 게임 끝이라는 게 열이면 열 공통된 대답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념이 막연한 공포심이며 중국의 선전매체들과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타이완인들에게 패배주의를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낸 근거없는 환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럼으로서 중국은 싸우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은 타이완인들을 손쉽게 굴복시켜 양안을 통일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무력 사용에 앞서 일종의 비대칭 전략으로서 선전선동과 반간계로 적을 분열시키고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오랜 수법이기도 하다. 요즘은 그것을 <초한전(超限戰)>이라고 부르면서 중국의 새로운 미래전인양 포장한다고. 저자는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이런 출처 불분명의 루머들을 자신의 풍부한 밀덕 지식을 근거로 예리하게 반박한다. 상당수는 타이완이 아니라 우리로 바꾸어도 그대로 통용될 정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 개념은 대부분 자신과 친구들의 군 복무 경험에 근거하며, 불합리한 훈련과 낡고 고장이 잦은 장비 등에 대한 기억에 쏠려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국군은 원래부터 엉망이다.'라는 명제는 경험에서 나온 사실이고 이것은 되돌리기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징병제 군대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해보면 실전 경험이 없는 군대는 일반적으로 타이완 군대와 마찬가지로 엉망임을 알 수 있다. 인민해방군의 일반 부대도 똑같이 엉망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 p.23

모든 루머가 거짓으로만 꾸며진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얼버무리거나 과장된 주장과 왜곡된 거짓으로 진실을 감추기도 한다. 거짓 속에 약간의 진실을 섞어 '3할의 사실과 7할의 허구'로 구성된 주장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 '3할의 사실'과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일치한다는 느끼는 순간 나머지 '7할의 허구' 역시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군사 지식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그 진위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고 쉽게 현혹될 수 밖에 없다. - p.33



현재의 교육제도는 그럴듯한 수치나 분석에는 쉽게 설득되면서 상식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군사 교육은 더 그렇다. 학교의 교관들은 현역 시절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지만 다른 병과나 군종에 대해서는 일반인 수준에 머물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대부분 문외한이다. 현대 무기는 기술 수준을 매우 중요시한다. 타이완 군대 내에서도 국방대학 이공계 출신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 간부는 공업 기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그 기술 뒤에 숨은 의미에 대한 이해는 더 부족하다. - p.136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제1부의 '대표적인 타이완 침공 루머 파헤치기'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무적이요, 타이완군은 허당"이라는 그간의 상식 깨뜨리기랄까. 여기에는 중국이 수천발의 탄도 미사일만으로도 몇 시간 만에 타이완을 굴복시킬 수 있다거나, 1천대가 넘는 구식 전투기들을 드론이나 심지어 인간 미사일로 사용하여 타이완 방공망을 무력화한다거나(캐스퍼 와인버거 전 미국방장관이 쓴 <넥스트 워>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공수부대를 이용한 타이완 지도부의 참수 작전이라던가, 수천척의 어선으로 100만 대군을 일거에 타이완에 상륙시킨다거나, 민간 화물선으로 위장한 미사일 플랫폼으로 미 항모부대를 괴멸시킨다 등등 모두 대륙의 허장성세라는 것. 중궈의 허세는 중궈가 간파한다?

수천 발에 달하는 탄도미사일의 위협 앞에서도 타이완군이 패트리엇 미사일을 그와 비슷한 규모로 증강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비싸거나 구매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탄도 미사일이 생각만큼 압도적인 무기가 아니기 때문임을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군사 방어 체계이건 원가 대비 효율을 따지기 마련이다. 100억 타이완 달러를 투입해 위험을 50% 줄일 수 있다면 누구든 그 정도는 감수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을 고작 5% 줄이는데 그친다면 망설이게 될 것이고 줄어드는 위험이 0.5퍼센트에 불과하자면 그 막대한 금액을 기꺼이 쓰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p.54

J-6 전투기를 일회용 미사일로 개조하는 것은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J-6의 속도는 간신히 음속을 넘는 수준이며 일반적인 미사일이 마하 2~3의 속도를 내는 것과 견줄 때 J-6의 관통력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미사일은 탄두를 목저에 따라 설계할 수 있지만 J-6은 본체가 매우 취약해 탑재한 미사일은 타이완 상공에서 뿌리는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위력도 기대만큼 높지 않다. 또한 원격 조정을 통해 무인기로 공격하려면 서로 주고받는 신호의 양이 많아져 기지국 한곳으로 다수의 기체를 동시에 조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일대일 조종 방식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다수의 기체를 동시에 조종하려면 개별 통제를 포기하고 전체 기체에 개괄적인 명령만 내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타이완과 일정 범위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는 실전 테스트를 하지 못했으므로 인민 해방군의 무인기가 전시 상태의 전파 간섭 속에서 피해 없이 타이완까지 접근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 p.66

'모든 선박이 일제히 출동한다'라는 이른바 '만선제발(萬船齊發)' 시나리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루머 중 하나이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실행 불가능한데도 오랜 세월 대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엄청난 두력움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왜 이런 엉터리 루머가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앞서 언급했던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나리오 역시 전체 내용은 오류 투성이이고 실현 가능성이 없지만 일부 사실과 역사적 사례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p.92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의 창젠 순항미사일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한 기술 자료를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창젠 순항미사일이 얼마나 강한지 분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분명한 점은 미국의 토마호크보다 더 정밀하다고 주장하는 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라인에서 독자들에게 이야기했던 '중국 순항 미사일이 한번 휩쓸면 타이완 공군은 초토화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검증된 바가 없으며 기술 자료도 없이 문서상의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타이완의 원펑 미사일의 사거리는 1만 km에 달하여 베이징 구석구석을 타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중국의 주장만은 그렇게 쉽게 믿는 것인가. - p.139

2부와 3부는 1부의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했을때 좀 더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에 대한 것이다. 어쨌든 전쟁은 상대가 있는 법이며 중국이 아무리 남는 게 사람이라고 하지만 6.25 때마냥 인해전술이랍시고 무작정 병력을 갈아넣어 물고기 밥으로 만든다고 해서 현대전에서 이길 수는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어설픈 공격이 만의 하나라도 실패로 끝났다가는 타이완에게는 자신감과 독립의 명분을 주는 것이요, 중국 입장에서는 국제적 공적이 되는 것은 물론, 타이완 정복이 영원히 물건너 가는 셈이다. 당장 푸틴만 하더라도 우크라이나를 성급하게 건드렸다가 4년째 수렁에 빠져 있다. 중국에게 남의 얘기가 아닐 것이다.

중국에 있어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완벽한 승리란 타이완의 항복 선언이다. 그것이 전면적인 항복이든 형식적인 귀순이건 간에 어쨌든 타이완의 정치 지도자가 입법기관의 절차를 통해 항복을 공식 선언하는 것이다. 만약 타이완이 항복하지 않고 법적으로 완벽한 독립을 실현한다면 그 순간 중국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중국이 쓸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비정치적인 수단, 즉 군사적 침략이다. - p.168

탄도 미사일 무적론자들은 미사일이 한번 휩쓸고 가면 타이완군의 모든 방공 및 대함 무기가 사라진다고 믿는다. 이는 지나친 환상이며 현실을 벗어난 생각이다. 정부의 공식 수치만 봐도 타이완군이 보유한 위 무기들의 수량과 탄도미사일 1차 공격으로 어느 정도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 대략적인 범위는 예측 가능하다. 분명한 점은 타이완군의 무기가 전부 파괴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 p.202

수년 전 타이완에는 14곳의 상륙 가능한 해안이 있었으나 현재는 5~8곳만 남아 있다. 해안의 콘크리트 구조물 설치 문제 뿐만 아니라 해변 후방 도시 상황과 지상 진격 경로 등을 고려해서 정규적인 상륙전을 하려면 사전에 타이완의 방어망을 충분히 처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습의 위험이 너무 크다. 이는 중국이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수만 대군을 집결시키고 모든 해군력과 공군력 절반을 동원해 타이완을 공격한다고 해도 타이완군이 불시에 기습당할 가능성이 없음을 설명한다. 중국이 움직이는 순간 이미 타이완군은 전군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할 것이고 예비군도 소집 중이거나 일부는 소집이 끝난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인민 해방군이 기습이라는 방식으로 타이완군 전체를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236

타이완이 질 가능성은 오직 하나 뿐이다. 전쟁이 두려워 죽겠고 당장이라도 항복하고 싶은 사람들이 당장이라고 항복하고 싶어하는 총통을 뽑고 항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만 입법원을 구성해서 인민해방군이 상륙하는 걸 보자마자 울면서 항복할 때 뿐이다. 오죽 이런 상황이어야만 인민 해방군은 정말로 타이완을 공격하고 싶을 것이다. 타이완 내부의 사기가 높고 저항 의지가 강한 상황이라면 타이완을 무력 통일하겠다는 생각은 못할 것이다. - p.274

4부는 양안 갈등을 놓고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접근에 대한 것인데 아쉬운 것은 수천 km 떨어진 인도와 호주는 포함하면서 우리를 쏙 빼놓았다는 점. 우리가 타이완을 보는 것만큼이나 그들에게도 한국은 존재감이 없다는 것인지, 어차피 미국 하는 일에 영혼없이 따를테니 굳이 논할 가치도 없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군 출신이 아니라 블로거 작가다보니 전문적인 분야임에도 현학적인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고 요즘 MZ세대풍에 걸맞게 써놓은 게 꽤 재미있다. 또한 그동안 타이완 군에 대한 편견이 상당부분 바뀌었다랄까. 나도 여태껏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타이완을 봉쇄하여 숨통을 쥐어매고 그래도 순순히 말을 안 들으면 탄도 미사일을 무차별로 날려서 주요 도시와 전력 시설, 항구를 초토화하여 단숨에 끝장낼 것이며 소위 딸기 병사라고 조롱당하는 타이완군은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저자의 생각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근거가 빈약하거나 저자의 주관적인 억측도 있고 지나치게 단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분도 있다.

제1부 제8장에는 <컨테이너형 미사일 기습론>에 대해서 언급한다. 저자는 중국이 민간 대형 화물선을 위장하여 미사일을 잔뜩 실고 기습한다는 것은 얼핏보면 그럴싸한 아이디어이지만 한낱 테러무기일 뿐이며 전술적 가치가 거의 없다, 이런 발상은 구 소련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들도 했으며 심지어 그 중에는 타이완도 있었지만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중국이 바보가 아니고서 그런 짓을 하겠냐고 말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바로 엊그제 상하이에서 그런 위장함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떴더라.

상하이에 정박 중인 중국의 신형 미사일 컨테이너선 중다(中达) 79호. 분석에 따르면 대형 레이더와 다수의 미사일 발사대, 대형 드론을 탑재했으며 수많은 미사일을 일거에 발사하여 적 함대에 미사일 샤워를 쏟아붓는다고. 그런 뒤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겠지만.


분명 저자의 말도 일리가 있다. 군함이 아닌 화물선을 개조해서 미사일을 암만 주렁주렁 달아봐야 방어력이 취약하여 대함 미사일 한방이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삼척동자도 알 일인데 중국이라고 해서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어쨌든 저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 이상의 효용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이다. 가령 군함보다는 값싸게 먹힌다는 점을 이용해 1~2척이 아니라 수십척을 만들어 민간 선박들 사이에 위장한다면 타이완과 미 해군도 일일이 추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유사시 정규 군함들과 연계하여 기습 공격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비록 한번 써먹고 격파될 1회성 소모품이라고 해도 말이다.

지난 주말 입만 열면 노벨 평화상 타령을 하던 트럼프가 설마하는 세간의 예상을 깨뜨리고 베네수엘라를 기습 공격하여 마두로를 생포해 미국으로 끌고 갔다. 명분은 미국에 마약을 판 죄라고 하지만 진짜 속내는 중남미에 마수를 뻗히고 있던 중국을 겨냥했다는 게 중론. 한마디로 남미는 내 나와바리이니 건들 생각 말라는 것. 하지만 미국의 힘은 한계가 있으며 중남미에 집중하는 것에 반비례하여 유럽이나 태평양 등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중남미에서 물러나는 대신 서태평양과 동남아에서 한층 공세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가장 위험한 것이 우리와 타이완, 그리고 몽골이 될 수 있다. 소아병적 자기성애자인 트럼프 덕분에 우리네 세상은 냉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전쟁의 문턱을 향하고 있는 느낌이다. 결국 살길은 각자도생이라는 얘기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진정한 적은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새삼스레 깨우치게 한다. 우리도 허구헌날 실현 가능성도 없는 핵무장론 타령이나 북한군 무적론(대표적으로 유용원씨의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따위의)같은 철지난 소리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책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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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분 -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애니 제이콥슨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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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0여년이나 되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때에는 핵전쟁이 주제인 영상물이 많았던 것같다. 그때만 해도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소련이 건재했고 미국과 상호 공멸식 핵군비 경쟁에 여념이 없었으니 말이다. 대표적인 영화가 우리가 잘 아는 주지사 형님의 터미네이터 시리즈. 미국이 정신줄을 놓고 AI한테 핵무기 통제권을 넘겼다가 핵전쟁이 일어나면서 인간들은 멸망직전까지 내몰린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스럽게 미국인(그것도 백인 남자)이 세상을 구하지만. 그리고 그 놈을 지키기 위해 미래에서 터미네이터가 호위 무사로 넘어 온다는 뻔한 설정. 시리즈마다 존 코너도 바뀌고 빌런도 바뀌지만 주지사 형님은 고정 출연이람서.

터미네이터 도입부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위 "심판의 날" 스카이넷이 인구 밀도 따지지 않고 일정 거리마다 한방씩 먹이는 느낌.


물론 터미네이터야 핵전쟁과 인류 멸망은 곁가지에 불과하고 현실 세계에서 구형과 신형이 치고박고 싸우는 액션신이 주된 내용이지만, 핵전쟁으로 인한 대재앙을 다룬 영화로는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1959년작 <그날이 오면>과 1983년 미국 ABC방송국에서 만든 <그날 이후>이 있다. 토요일 저녁에 하는 주말의 명화같은데서 했던 것같은. 지금 본다면 조잡한 고전 영화이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고.

하지만 두 영화는 어디서 핵전쟁이 시작되었고 방사능 낙진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묘사하는지라 핵무기에 대한 경각심을 알려주는 교육용이라면 몰라도 영화로서의 재미는 그다지.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퓨쳐워 198X>라는 일본 애니가 기억난다. 국내명은 <가공스런 미래전쟁>. 그 시절 작명센스 보소. 미소 냉전이 절정이던 1980년대 소련 파일럿이 최신 전투기를 타고 서독으로 탈출하고 소련 스페스나츠가 출동하여 나토군과 교전이 벌어지면서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는 내용. 스케일이 전 세계 규모일 뿐더러, 유럽 평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기갑전과 공중전은 박진감 뿜뿜이다. 또한 소련의 ICBM을 우주 공간에서 레이저로 격추하는 것은 레이건 시절의 스타워즈 계획이 성공했다는 설정. 엄연히 반전 애니임에도 너무 리얼하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시민 단체들이 상영반대 운동을 벌였다는 뒷얘기도.

그림체는 완전 양키풍이지만 엄연히 일본인이 그린 일본 작품이람서. 버블 시절의 일본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명작임에도 반일 감정이 한창이던 시절 작품이라서 그런지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괴작 취급.

이제 미소 냉전이 끝난지도 30여년이 넘었다. 소련도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는 여전히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냉전 종식에도 불구하고 핵 보유국들은 그 때보다 더 늘어났다. 심지어 파키스탄, 북한처럼 가진 게 쥐뿔도 없는 나라들까지도 온 국민들이 풀을 뜯더라도 핵무기만큼은 있어야 한다며 핵군비 경쟁에 뛰어든 판국이다. 지난 1월 28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운명의 날 시계가 자정 89초 전으로 당겨졌다. 미소 군비 경쟁이 절정이었던 1980년대보다도 지금이 더 지구 종말의 위기에 가까워진 셈이다. 뭐 사람들 관심을 끌 궁리에 여념없는 과학자들의 약팔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언제라도 영화 속의 핵전쟁 아포칼립스가 어느 순간에라도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단지 우리가 관심이 없을 뿐. 하긴 요즘은 핵무기나 외계인의 침공보다 좀비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 듯한.

문학동네에서 주목할 신작이 나왔다. 핵전쟁 가상 시나리오를 다룬 <24분>이다. 여기서 24분이란 북한이 발사한 ICBM이 워싱턴 상공에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저자인 애니 제이콥슨(Annie Jacobsen)은 밀리터리 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작가로 언론 기자이자 TV 프로그램 제작자. 아마존 스튜디오에서는 붉은 10월의 저자이자 밀리터리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시리즈의 TV판 제작을 맡았다. 2016년에는 <펜타곤의 두뇌>라는 책으로 퓰리처상 역사 분야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고. 수상은 못한 모양.

저자 아주매. 주로 전쟁과 무기, 첩보 등을 다룬다고. 이런 건 여자가 가까이 할 것이 못된다며 거부감부터 앞세우는 울 집사람과는.


이 책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핵공포의 시대가 처음으로 시작된 지 80여년이 지난 현재,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한다. <퓨쳐워 198X>에 나오는 것마냥 양측 군대가 대치한 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순간과는 거리가 멀다는게 오히려 긴장감을 자아낸다랄까. 그리고 평양 근교에서 갑자기 한발의 ICBM이 발사된다. 사거리 15,000km를 자랑하는 북한의 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화성-17였다. 실제로 북한은 몇번의 실패 뒤 2022년 11월 18일 시험 발사에 성공함으로서 미국은 물론 전세계 어디이건 핵무기로 때릴 수 있는 공격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 그 놈의 이밥에 고깃국은 못 먹어도 말이다.

딸래미 손잡고 신형 미사일 구경하는 김씨 아저씨. 세계적인 여류 밀덕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조기 특훈이랄지. 울 딸래미도 이랬으면.

ICBM이 향하는 곳은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심장부였다. 왜 북한이 미국을 향해 자멸이나 다름없는 핵공격을 감행하는지 이유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뜻밖에도 미국에게는 북한의 공격을 막을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한해 국방비가 북한 전체 GDP의 50배가 넘고 동맹국들에게는 MD 체제에 협조하라며 윽박지르던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 의외로 취약하다는 얘기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북한 미사일을 미국 대통령은 손가락 빨면서 지켜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몇 안 되는 방공 미사일이 발사되지만 죄다 빗나간다. 미국은 언제나 공격하는 쪽이지 공격받는 쪽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발사 24분 뒤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가에 300kt의 핵폭탄이 직격한다. 나가사키 이후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순간이었다. 그것도 맨하탄 계획으로 인류에게 핵공포의 시대를 열었던 미국 자신에게 말이다.

핵 전쟁은 레이더 화면의 깜빡이는 신호로 시작된다. 북한 시간으로 오전 4시 3분, 해 뜨기 전 어두운 시각이다. 수도 평양에서 32km 떨어진 황량하게만 보이는 들판 지면에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높이에서 거대한 불의 구름이 피어오른다. 북한의 강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즉 ICBM의 꼬리에서 뜨거운 로켓 배기가스가 뿜어나온다. 이 미사일은 이곳 흙바닥에 주차된 바퀴 22개 짜리 차량에서 발사된다. 분석가들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화성-17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 p.59(발사 후 0.4초)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말한다. "북한이 미국을 향해 공격용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진술처럼 들린다.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말한다. "NORAD와 STRATCOM 지휘관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알래스카 주 지상 레이더 기지에서 2차 확인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자문위원에게 훈련상황이냐고 묻는다. "이런 훈련이 아닙니다." - p.97(발사 후 3분 15초)

페어뱅크스 남동쪽 160km 떨어진 알래스카주 황야에서 조개껍데기 모양의 지하 저장고 문 여러 개가 활짝 열린다. 무게 2만2600kg, 높이 16미터에 달하는 요격 미사일이 프트그릴리의 미 육군 우주미사일방어사령부에서 공중으로 폭음을 울리며 날아간다. 요격 시스템의 목적은 미 본토를 핵 공격에서 제한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제한적'이라는 단어인데 이유는 요격 미사일이 도합 44발 뿐이기 때문이다. 2024년 초 기준으로 러시아는 1674발의 핵무기를 배치했고 그 중 대다수는 발사 대기 상태이다. 또한 중국은 500발 이상, 파키스탄과 인도가 각각 165발, 북한이 50발을 비축했다. 요격 미사일의 전체 보유량이 44발에 불과한 미국 요격 프로그램은 사실상 보여주기용이다. - p.117(발사 후 7분)

그는 버섯구름을 본다. 목장주의 증조부가 1900년대 초반에 이 땅을 샀다. 포드의 자동차가 발명되기도 전이다. 버섯구름이 땅 위로 솟아오르는 걸 보면서 그는 자기 눈을 믿지 못한다. 몽장주의 소들은 열복사에 의해 털이 그을린 채 언덕으로 달려간다. 그는 홀로 서 있다. 늙고 벌거벗은 남자. 그는 1945년 7월에 태어났다. 맨하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이 암호명 트리니티인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고 실험한 때와 같은 해, 같은 달이었다. - p.198(발사 후 24분)

뒤이어 워싱턴 교외 남쪽에 있는 미국의 중추부인 펜타곤에 두번째 ICBM이 떨어져서 펜타곤에 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워싱턴 전체가 잿더미가 된다. 미국은 북한의 핵공격을 막지 못했지만 그 대신 북한에 당한 것의 몇 배로 되갚아줄 능력은 있다. 20분 뒤 미 잠수함에서 발사된 트라이던트 핵미사일이 평양을 비롯하여 북한의 주요도시와 군사시설을 강타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북한 주민 수백만명이 먼지가 된다. 정작 그들 중에는 김씨 일가와 북한 지도부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이들은 평양에 멍청하게 앉아서 미국의 분노어린 공격을 기다리는 대신 이럴 때를 대비하여 건설한 핵벙커 속에 일찌감치 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벙커는 길게는 수십년 동안 자급자족하면서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먼 훗날에 땅 위로 기어나와서 자신들의 불장난으로 세상이 파멸한 모습을 감상할지도 모른다.

김정은은 마음만 먹으면 안전한 곳에 숨은 채 핵전쟁으로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놈들과 황야를 내달릴지도.

게다가 핵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북한은 최후의 발악으로 미국 상공에 EMP 폭탄을 터뜨려 미국 전체를 마비시킨다. 여기에 러시아와 중국 또한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으로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핵버튼을 누른다. 인류 멸망의 아마겟돈이 개막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어수선한 시대에 흔히 보는 작가의 뇌피셜 가득한 가상 군사 소설이 아니다. 여기에는 저자가 독점적으로 인터뷰한 전직 미 국방부 장관, 핵잠수함 사령관, 대통령 자문 등 그 방면의 권위자들의 증언이 등장한다. 물론 북한에게 어느 정도의 핵능력이 있는지, 이 책에 나오는 것마냥 정말로 그럴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대상이 러시아이건 중국이건 미국이 정말로 핵공격을 받았을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942년 8월 13일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맨하튼 프로젝트가 처음 발동했을 때 미국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만들지 않아도 히틀러가 만들 것이고 적어도 나치보다는 먼저 만들어야 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작 단 한발의 폭탄이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3년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고 공격을 당한 쪽보다 공격한 쪽이 오히려 겁을 먹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했다. 맨하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우리는 모두 개자식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며칠 뒤 일본의 항복으로 핵무기의 존재 가치는 사라졌다. 폐허가 된 일본 도시들의 참상은 인류가 가지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순간이 핵무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기왕 손바닥에 들어온 전지전능한 무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치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골룸처럼 말이다. 열강들은 너도나도 더 강력한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냉전이 끝난 뒤에도 정치인들의 탐욕은 핵공포 시대를 끝내지 못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자신을 비난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에게 핵공갈을 서슴치 않는다. 오늘날 인류는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누군가의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라도 한순간에 끝장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한편의 다큐멘타리를 책으로 감상한 느낌이다. 충격을 받기에는 충분하다. 과연 우리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이라도 우리가 아는 세상이 사라지고 폴아웃같은 아포칼립스가 열릴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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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만든 세계 - 500년간 지속된 서구의 군사혁명과 전쟁으로 가는 어두운 길
윌리엄슨 머리 지음, 고현석 옮김 / 미래의창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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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TV를 통해서 걸프전 뉴스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바그다드 상공을 무수히 수놓는 대공포 사격을 뚫고 주요 시설들을 정확하게 때리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과 스텔스 전투기들, 사막을 가로지르며 내달리는 미군 M1 전차 행렬,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이라크군 전차들을 사냥하는 A-64 아파치 편대,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에서 파괴하는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의 활약. 미군의 모습은 PTSD에 시달리고 약에 쩔었던 베트남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최첨단 무기의 향연이자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세계 4위의 군사대국이라고 자처하던 이라크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이전의 제2차 세계대전식 물량전이었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만만찮은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호된 맛을 보고 베트남전쟁에서는 게릴라들에게 쩔쩔 매던 미국은 걸프전에서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비로소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진정한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등극했다.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 당시 바그다드의 상황을 실시간 보도하는 CNN. 눈먼 폭탄을 쏟아붓던 과거 전쟁과 달리 스텔스 폭격기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위성과 GPS로 정밀 유도되는 스마트 폭탄의 등장은 이전과 다른 첨단 하이테크 전쟁의 개막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런 싸움은 오직 돈 많은 미국만이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와칸다는 23세기 무기로 무장한 중세 군대랄지.


걸프전이 전 세계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것에 비하여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은 12년 전의 재탕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전편을 능가하는 후속편은 없다는 할리우드 특유의 불문율이랄까. 미군은 여전히 압도적이었고 약체화된 이라크군을 토끼몰이하듯 분쇄했다. 승리는 거두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등장한 무기들도 좀 더 성능이 개선되었다는 것 이외에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아들 부시와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무계획성은 후세인 사후의 이라크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하이테크 만능론에 빠져 있던 미군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다. 미군의 값비싼 첨단 무기는 눈에 보이는 적은 몰라도 대중 속에 숨어서 암약하는 게릴라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 부시가 대히트를 친 작품을 아들 부시가 말아먹은 격이었다.

이라크 전쟁이 걸프전의 실패한 후속편이라면 제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쪽은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모습은 미군의 첨단 무기 앞에서 구닥다리 무기로 맞서는 이라크군과도 다르고 민간인을 고기 방패삼아 상대가 알아서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무한 소모전을 벌이는 탈레반이나 하마스와도 다른, 전혀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최전선에서는 우크라이나 로봇이 뛰어다니면서 러시아 전차와 보병을 사냥하고 드론이 상대편 후방 시설을 때리며 인터넷에서는 러시아의 딥페이크와 가짜 뉴스가 판을 치면서 여론을 왜곡한다. 만약 드론과 로봇이 아니었다면 우크라이나는 제아무리 서방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들 3년씩이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세계 각국 언론들은 이것이 진짜 미래전쟁이라며 어서 대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특징은 드론과 로봇이 더 이상 보조병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광선검 들고 제다이처럼 무쌍찍는 거대 로봇은 아니라도 로봇 개에서 한층 진화하여 중화기로 무장하고 고기동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저런 다족 병기를 만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듯.


돌이켜보면 우리네 세상은 정말 급변하는 느낌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상상 속의 무기들이 현실화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빨리 변화하는 순간이 있었을까. 만약 을지문덕 장군이 타임머신 타고 1천년 뒤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에 뚝 떨어져서 조선군의 지휘를 맡는다고 해도 그리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이 화기가 등장했다고 하지만 주력 무기는 여전히 냉병기이며 싸움 방식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물렁한 조선군이 대륙을 누비던 고구려의 개마무사 조상님들을 이길 수 있을지가 더 의문이. 알렉산더 대왕이 카이사르 시절에 와도 여전히 그는 위대한 왕이며 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로마 군대에게도 무서운 적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21세기 전쟁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규모는 커지고 입체적이며 군대는 전문화되었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한다. 무기의 발전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재앙적인 살육전은 늙고 고루한 장군들이 산업혁명이 불러온 변화를 무시하고 젊은 시절의 방식을 고집한 결과였다. 푸틴의 잠 못 드는 밤을 선사한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러시아군은 2년 동안 죽을 쑤고 푸틴이 무능한 똥별들 여럿 목을 날리고야 비로소 승기를 굳힐 수 있었다. 그것도 극동의 가난뱅이 동생 북한에까지 손을 벌이고 소울 친구 트럼프가 물심양면 편들어 준 뒤에 말이다.

앞으로 30년 뒤의 전쟁은 또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지금보다 훨씬 무인화, 첨단화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을 듯하다. 훈련소 입소 후에 제일 먼저 받는 제식 훈련은 수백년 전 전열 보병 시절의 유물이지만 군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절도와 복종심, 동질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우주세기의 군인들도 제식 훈련만큼은 우리와 똑같지 않을까.

미래의 창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 도서 <전쟁이 만든 세계>는 15세기 화약 무기가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500여년의 시간 동안 전쟁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오하이오 주립 대학 명예 교수이며 육군대학과 항공전 대학, 해군전쟁대학, 사관학교 등에서 역사와 외교를 강의한 전쟁사 전문 교수이다. 2023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수십편의 저서 중에서 이번 책은 최신작으로 저자의 유작이기도.

이 푸짐한 몸매의 영감님이 저자인 윌리엄슨 머리 교수. 보기에는 이래도 젊은 시절에는 미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C-130를 몰았다고.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주된 내용 또한 여느 책들마냥 몇몇 전쟁에 대한 단편적이고 뻔히 아는 사실을 단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전쟁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으며 그럼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이다. 전쟁사 교수로서 어째서 전쟁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당위성을 짚어준 셈이다. 저자는 근세 이후 총 다섯번의 군사 혁명이 있었다고 규정한다. 그 중 첫번째가 화약 무기의 등장이었다. 백년전쟁에서 처음 사용한 대포는 원시적이고 거의 쓸모가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일회성 무기로 끝나는 대신 유럽 각국들이 그 가능성에 주목하여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성능을 개량했으며 전술 또한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수천년 동안 창, 칼, 활로 육탄전을 벌이던 인간들의 싸움을 바꾸어 놓았다. 제아무리 항우의 용력, 장비의 용맹함, 관우의 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총알 한발이면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정작 화약을 더 빨리 발명한 중국이나 한 때 유럽 전체를 위협했을 만큼 강성했던 오스만 제국이 어째서 군사 혁명을 주도하지 못했는가이다. 이들의 화약 기술은 16세기에서 사실상 정지해 버렸다. 적어도 인력과 자원이 유럽보다 부족했던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들 국가들이 혁신과 적응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중국과 오스만 제국은 주변에 강력한 경쟁 상대가 없었다. 무사안일에 젖은 권력자들은 외부의 적보다 궁중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 채 반란 진압과 권력투쟁에 급급했고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네들 보기에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 더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 반면,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는 유럽국가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투닥거리며 싸웠다. 화약무기를 이용한 전쟁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가 전쟁에서 이겼고 그러기 위해서 금은보화를 찾아 신대륙 개척에 나서면서 우리가 아는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만약 중국이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춘추전국시대가 지금까지 내려왔다면,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이후의 역사는 또 달랐을까. 알 수 없다. 어쨌거나 큰 나라 세우는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석기시대부터 중세시대까지 전술 구성은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평화시에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고 전장에서의 응용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14세기 스위스 전투 대형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팔랑크스와 유사했다. 또한 서기 3세기의 파르티아의 중갑 기병대도 중세의 중갑 기사들의 방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주요 그리스 전함은 트리레미스였다. 이 형태의 전함은 16세기까지도 지중해 해군의 중추로 남아 있었다. 지중해에서 함선 설계와 해전 방식이 바뀐 것은 갤리선에 대포가 도입된 이후였다. - p.28

1543년 영국인들은 주철 대포를 만드는 법을 발견했다. 주철대포는 청동대포에 비하여 효과는 떨어지고 폭발할 가능성이 있어서 더 위험했지만 만들기 쉽고 제조 비용이 2/3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저렴한 철제 대포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포 가격이 낮아지고 사용 가능한 대포 수가 많아지면서 범선에 충분한 무기를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범선은 갤리선보다 더 효과적인 전쟁 무기가 되었다. - p.55

유럽 국가들 간의 끊임없는 충돌은 무기와 전술, 전쟁을 뒷받침하는 병참과 재정의 기본 구조에 변화와 적응을 가져왔다. 이런 변화는 육지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바다와 해양에서도 일어났다. 유럽인들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적응한 반면,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할 능력이 없는 국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15세기의 새로운 선박 설계 및 건조 방법같은 기술 변화는 군사 분야로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 p.78

더 중요한 사실은 화약 혁명이 돈키호테같은 기사들을 몰락시킨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커졌으며 산업혁명을 촉진하고 사회를 변화시켰다.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서 관료조직은 전문화되고 근대적인 조세제도와 통치 기반이 등장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오면 승리를 위해서 국가 전체가 총동원되는 총력전 시대가 열렸다. 물론 이런 발전은 유럽에만 국한된 얘기였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국가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수백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서양을 재빨리 모방한 일본이었다.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던 중국은 일본보다 한발 늦게 서구화에 나섰지만 신해혁명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변화는 매우 느렸고 최초의 총력전이었던 중일전쟁에서 일본에 시종일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수천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인류 문명이 갑자기 상승곡선을 타게 되었는지, 그런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세상을 어떻게 바꾸게 되었는지를 두루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두 번의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 그리고 가장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른바 '군사 혁명'이라고 할 만한 전쟁의 변천사가 담겨 있다.

나폴레옹 전쟁의 사상자 수는 그 후에 일어날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황폐화시킨 15년 동안 양측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는 200~300만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30년 전쟁의 사망자 수치와 비슷하다. 나폴레옹 전쟁은 30년 전쟁의 반 밖에 안 되는 기간 동안 같은 수의 사망자를 냈던 것이다. 2세기 동안 유럽의 전쟁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었다. - p.171

근대국가들이 전쟁에 엄청난 인구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영향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4차 군사-사회 혁명은 근대국가가 유럽의 대규모 전쟁의 경제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우려를 종식시켰다. 농업의 발전으로 전장의 군대와 본국의 노동력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식량과 사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근대 국가는 전례없는 막대한 자금과 자워을 동원해 탄약과 무기를 생산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전쟁터로 보낼 수 있었다. - p.229

나폴레옹 전쟁의 사상자 수는 그 후에 일어날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황폐화시킨 15년 동안 양측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는 200~300만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30년 전쟁의 사망자 수치와 비슷하다. 나폴레옹 전쟁은 30년 전쟁의 반 밖에 안 되는 기간 도안 같은 수의 사망자를 냈던 것이다. 2세기 동안 유럽의 전쟁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었다. - p.171

제1차 세계대전이 끔찍하게 오래 지속되고 엄청난 희생을 초래한 이유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의해 촉발된 광기와 산업혁명의 결합으로 일어난 제4차 군사-사회 혁명의 결과였다. 프랑스 혁명은 근대 국가가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 및 관료 구조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즉, 프랑스 혁명은 이 전쟁에 동기와 수단을 모두 부여했다. - p.295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인 전간기에 기술과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1930년대 중반 등장한 레이더가 몇 안 되는 예외적인 경우로 보일 만큼 놀라운 기술적 전진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제1차 세계대전의 무기들은 전장에서 효율성이 크게 개선되었고 군사 교리와 전술 개념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군사조직이 전투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는 무기 시스템의 숫자가 아니라 전술 및 작전 시스템의 문제였다. 따라서 평시 훈련과 연습을 얼마나 많이 제대로 수행했는지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향을 미쳤다. - p.307

또 다른 대전쟁의 발발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군사적 사회적 교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의 결합은 다시 전장을 흔들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독일의 일시적인 승리는 전쟁 수행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은 "변화가 거듭될수록 본질은 더욱 한결같아진다."라는 격언을 증명했다. 나치즘과 소련 공산주의의 본질적인 특성은 전쟁을 전례없이 격렬하게 만들었다. 이 전쟁은 나치 독일과 소련 둘 다 거대한 산업국가였음에도, 그 어떤 기술적 또는 군사적 발전도 두 교전국을 소모전이라는 불변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p.391

1970년대 초부터 이루어진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소련은 점점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989년 소련 붕괴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전임자들과 같은 무자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고르바초프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의 전임자였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소련은 몇 년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경제는 더 이상 괴물같은 국방 체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 p.579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금의 시대를 제5차 군사혁명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핵무기의 등장이 아니라 IT 기술의 발전이다. 무기는 더욱 정교해졌고 훨씬 파괴적이다. 사이버 전쟁은 전후방 구분이 없다. 여차하면 인류 문명을 끝장내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다. 동시에 인류 문명을 끌어올리는데도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 휴대폰, GPS, 인터넷 등 수많은 이기들은 원래 전쟁 무기에서 비롯되었다.

나같은 길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GPS 네비게이션. 원래는 이동식 핵미사일 유도를 위한 기술이었지만 민간에 개방한 사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명장이었던 윌리엄 셔먼 장군은 남부를 행진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해서 "전쟁은 잔인한 것이오. 그걸 바꾸려고 할 필요는 없소. 그래야 빨리 끝나는 법이오."라고 일축했다. 전쟁은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고 또 누군가는 PTSD를 얻기도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전쟁이 인류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전쟁은 파괴를 낳고 파괴는 창조로 이어진다는 점이 아이러니이다. 만약 인간에게 투쟁심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에서 머물렀을지도.

출판사에서는 <전쟁이 만든 세계>라고 의역했지만 원제는 <어둠으로 가는 길(The Dark Path)>이다. 기술 발전으로 전쟁은 나날이 참혹해지고 있음에도 정작 전쟁을 결정하는 정치인들은 오히려 갈수록 역사에 무지몽매한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서 과거의 교훈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걸프전 이후 미국이 실패를 거듭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얘기. 그 중 최악은 말할 것도 없이 트럼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역사책은 커녕, 그 어떤 책도 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촌철살인같은 평가랄지.


저 코믹한 얼굴을 보면 막연한 편견보다는 의외로 재미있는 사람일지도. 특유의 고집과 괴팍한 성질머리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중간중간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올해 들어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전쟁사 최고 전문가다운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필력으로 마치 5편짜리 전쟁 다큐멘타리를 보는 느낌이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상을 뭉떵그려서 제5차 군사혁명이라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이미 제6차 군사혁명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싶다. 인간 대신 로봇이 전장을 지배하는 시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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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시대 - 로맨스 판타지에는 없는 유럽의 실제 역사
임승휘 지음 / 타인의사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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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14세기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주인공(맷 데이먼)이 귀족의 길을 향한 눈물겨운 사투를 다루고 있다. 소지주의 아들인 그는 자신의 땅을 얻기 위해서 최전선에서 죽으라 싸웠지만 싸움에 패배했고 다른 지주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으로부터 받은 지참금조로 받은 영토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귀족이 되었지만 막상 알짜배기 땅은 자신이 속한 영주의 장난질로 친구에게 빼앗기고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그 친구와 목숨 건 결투를 벌인 끝에 최후의 승자가 되고 땅도 되찾게 된다.

땅 앞에서는 생명의 은인도, 죽마고우도 필요없다는 것이 중세 귀족들의 숙명. 귀족에게 땅이 곧 지위이자 재산이다보니.


영화 분위기는 굉장히 암울하고 초반의 잠깐 나오는 짧은 전투신과 막판의 결투 장면 말고는 <킹덤 오브 헤븐>처럼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멀지만 중세 귀족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맷 데이먼은 명색이 귀족이지만 아내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는 난폭한 모습은 우리가 아는 기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영화 내내 땅에 대한 극도의 집착은 중세 귀족에게 영지란 생명이자 모든 것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는 한몫을 벌기 위해서 전쟁터에 목숨 걸고 나가지만 이 또한 싸움에서 이겨서 전리품을 챙기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겉으로는 지배계층의 일원으로 웅장한 성에서 눌러앉아 농민들을 수탈하여 남 부럽지 않은 삶을 누린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름 개빡시게 살아야 했다는 얘기이다.

요즘 전생이 유행하는 일본 판타지 만화에서는 약소 귀족으로 태어나서 영지를 개발하고 인재를 모아서 강대국으로 거듭난다 어쩌구하는 뻔한 스토리가 난무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림없는 소리일 뿐. 비유하자면 동네 편의점을 몇년 만에 대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꼴.


물론 제아무리 불평을 늘어놓은들 왕후 귀족의 사치를 위해서 끝없이 고혈을 짜내야 했던 대다수 민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배부른 소리겠지만 말이다. "불공평이다. 부조리다. 혁명이다. 지배 계급은 공포에 떨어야 한다. 노동 계급이 잃을 것은 상전이요, 얻는 것은 세상일지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중."

타인의 사유 출판사에서 나온 <귀족 시대>는 중2병 가득한 일본 판타지 만화와는 다른 현실 속 중세 귀족들의 참된 모습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국내 대표적인 서양사 전문가로서 <벌거벗은 세계사>에도 나왔다고.


흔히 귀족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베르사유 장미>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고 한손에는 부채를 들고 철 없는 왕비의 주변을 매돌면서 어딘가 있을 돈 많은 도련님을 기다리는 허영심 가득하고 골은 빈 상류층 부인들이 생각난다. 그러다가 성난 민중에게 붙들려서 기요틴행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어보니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듯 하다. 어차피 졸부라는 게 어느 시대이건 다를 바 있겠냐만. 이 책은 유럽 사회에서 지배계층으로서 귀족들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그들이 자신들을 우리같은 평범한 소시민들과 구분짓고 자기들만의 신분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들여다 본다.


나는 한 여성이 옆에 있던 부인에게 괴상한 질문을 하는 것을 듣고는 박장대소했다. '그녀는 푸른 피를 갖고 있나요?' 이는 그녀가 진짜 귀족인지 묻는 질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귀족에게는 푸른 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푸른 피의 신회는 꽤 오랜 기간 그리고 많은 곳에서 보편화되었다. - p.16

흔히 결투를 1:1대결이라고 상상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결투에는 나름의 규범이 존재해서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무력으로 이를 보상할 것을 요구하면서 결투가 성사된다. 이 때 결투 당사자는 증인을 대동하는데, 증인들은 정해진 규범이 준수되는지를 감시하거나 사상자를 수습하려고 온 게 아니라 같이 싸우러 왔다. 17세기의 결투는 말이 결투이지 작은 전투를 방불케 했다. - p.30

결혼 적령기에 이른 귀족 자제들에게 사교 시즌은 사교계에 데뷔하는 무대였다.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귀족의 딸들, 즉 데비당트는 왕실 접견 행사나 왕비의 무도회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일주일에 두 개 이상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무도회는 춤을 추는 곳이라기보다 결혼 시장에 가까웠다. 상류 사회는 일종의 족내혼을 기대했기에 엄선된 초대 명단이 작성되었다. - p.59

귀족의 그랜드 투어에 지나친 환상을 품을 필요는 없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그랜드 투어가 늘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18~19세기 프랑스를 여행한 영국인들은 프랑스 숙소의 위상 상태에 기겁했다. 벽에는 새까만 더께가 앉아 있고 부엌에서는 개가 동물의 내장을 뜯어 먹고 있었다. 여관방에서 하룻밤에 이 48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부드러운 빵을 기대하는 건 사치일 경우가 많았다. 툴루즈 지방에서는 일주일치 빵을 한번에 구웠고 알프스 산지에서는 1년치, 심지어 2~3년치를 한번에 굽고 훈제하거나 햇볕에 말렸다. 그것을 먹으려면 망치로 깨서 5번은 삶아야 했다. - p.77

귀족 가문의 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대동소이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바느질과 자수를 배웠다. 여건이 된다면 수녀원에 보내져 기본 교육을 받았지만, 이 모든 교육의 목적은 훌륭한 신붓감이 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딸의 혼인에는 한 가지 추가적인 아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결혼 지참금이다. 지참금의 형태는 사정에 따라 규모도 달랐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귀족 집안에서 딸의 존재는 큰 부담이었다. 지참금 없이는 결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p.114

귀족의 식탁은 평민의 식탁과 재료부터 달랐다. 중세에는 하늘과의 거리에 따라 식재료 위계가 결정되었다. 땅에서 자라는 채소는 등급이 낮은 식재료로 여겨져 가난한 농민의 몫이 되었다. 반대로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과일과 하늘을 나는 새는 귀족의 몫이었다. 농민의 주식은 곡물로 만든 빵이나 죽이었지만 귀족은 흰 빵, 사냥으로 잡은 다양한 고기, 생선, 과일, 치즈를 주식으로 삼았다. 특히 향신료는 매우 중요한 식재료였다. 젤리나 파이, 튀김과 스튜 요리와 더불어 고기 요리는 단연 귀족 식단의 메인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고기가 활용되었다. - p.142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다. 스스로를 왕후이니 귀족이니 하면서 남들과 자신을 차별화함으로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남들로부터 우월한 존재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중2병 걸린 미친 놈 취급을 받을 테니 말이다. 귀족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누릴 수 없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좋은 옷과 값비싼 음식을 먹었으며 비천한 육체 노동 대신 군인이나 법률가와 같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했다. 문제는 돈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수입에 맞추어 생활 수준을 낮춘다면 귀족이기를 포기하는 셈이다. 아무리 지체 높아도 돈 없으면 귀족들 사이에서 귀족답게 살기도 쉽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이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는 조선 후기 이름만 번드레한 가난한 몰락 양반이 양반 노릇을 하는 허식적인 모습을 조롱한다. 21세기인 지금도 눈에 보이는 신분제는 없지만 현대판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극소수 상류층의 리그에 입성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게 인간의 끝없는 허영심이며 시대가 달라진다고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귀족 사회의 허영심을 통해 보는 유럽 역사의 한 단면을 다룬 대중 교양 서적이다. 3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다보니 깊이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지만 꽤 재미있다. 유튜브를 책으로 옮긴 느낌이랄까. 시간날 때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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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폐허 1~2 세트 - 전2권 피와 폐허
리처드 오버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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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2차 세계대전사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 시절 호비스트 출판사에서 나온 <알기 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덕분이었다. 호비스트는 군사 프라모델을 비롯하여 수많은 대한민국 일세대 밀덕들을 양산한 것으로 유명한 출판사인데 열악한 국내 출판 여건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 전에 문닫았다고. 편집장인 이대영씨가 엮은 이 6권 짜리 책은 핀란드 겨울전쟁을 비롯하여 바르바로사 작전, 쿠르스크 전역,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공방전에 이르기까지 동부전선을 다룸으로서 그때까지 기껏해야 엘 알라메인 전투라던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주드로 주연의 <애너미앳더게이트> 덕분에 스탈린그라드 전투 정도나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자 2차대전사에 새로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타임 라이프사에서 나온 <라이프 2차 대전사>를 대놓고 베꼈다는 욕을 먹고 있지만 말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낮았을 때라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잘못된 내용이나 오역도 많다. 그래도 어렵고 딱딱하다는 전쟁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2차대전사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다. 덧붙여 아직도 내 서재 한켠을 장식하고 있다.

교수님들이 쓴 여느 전쟁사와는 달리 이런 무기 일러스트가 특히 볼만했던. 아마도 일본쪽 책에서 무단으로 베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책 덕분에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던 게임이 이제는 고전이 된 <팬저 제너럴>과 <하츠 오브 아이언>. 무려 도스 시절에 나온 팬저 제너럴은 이대영씨 책보다 먼저 접하기는 했지만 막상 게임에서 등장하는 주요 무기나 캠페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더라는. 이 책을 읽고나니 드라군 작전이니 허스키 작전이니 발칸 전역이라던가 치타텔 작전이 뭔지 이해되더라. 그 이후에도 몇 편의 후속작이 나왔는데 1편만큼 재미있지는.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전쟁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면서 파괴적이었던 싸움이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이기면 혁명이고 지면 반역"이 아니라 말그대로 선과 악의 싸움이었다. 연합국이 절대선은 아니었다고 해도 추축국은 분명 절대악이었다. 만약 히틀러의 나치가 승리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암울한 '빅브라더'의 세상에 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정신끈 풀린 반사회적 성격장애들이 뭉쳐서 절대 권력을 잡은 격인 나치는 우생학을 추종하면서 소위 아리아 민족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자신들을 위해 무한 봉사하는 노예로 취급하거나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신의 죄악인양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자행했으니 말이다. 그런 대체역사를 다룬 것이 필립 딕의 소설이자 무려 리들리 스콧이 제작을 맡았던 <높은 성의 사나이>이다. 시즌1만 몇 편 본 듯. 드라마 특유의 질질 끄는 느낌이라. 그래도 나치와 일본의 분할 지배를 당하는 미국인들의 암울함은 확실히 와닿더라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세계지도. 나치와 일본이 세상을 양분하여 시베리아와 남미 오지 일부만이 완충지대로 남아 있다는 설정. 우리의 무대리는 아예 히틀러 휘하로 흡수된 모양. 게다가 나치와 일본 또한 분위기가 쎄한게 오래지 않아 최종전쟁을 벌일 느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의 마지막 선마저 무너지면서 어느 쪽이건 지는 쪽은 파멸이다보니 그야말로 이판사판인 총력전의 끝장을 보여주었다.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경쟁적으로 더욱 강력한 무기를 내놓았고 최신 병기조차 얼마되지 않아 금방 쓸모없는 구식으로 전락했다.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쪽이 도태되고 멸망하는 싸움이었다. 폴란드 전역의 주역이었던 1호 전차는 전쟁 말기에 오면 그보다 10배는 더 무겁고 강력한 티거-II라는 괴물 전차로 바뀌었고 복엽기는 제트 전투기가 되었으며 초보적인 탄도 미사일이 등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무기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의 발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화력 무기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핵무기까지 등장했다. 지구를 함부로 침략했다가 탈탈 털린 채 달아나는 외계인들의 흔한 클리셰인 "이 지옥같은 행성"의 시대를 연 셈. 파도파도 나오는게 소재인지라 시중에는 2차대전 관련 서적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우리같은 밀덕들이 매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근래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또 한권의 대작이 나왔더라. <피와 폐허 - 최후의 제국주의 전쟁 1931~1945>는 무려 2권 합하여 1,500여 페이지의 전례없는 분량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덕후라면 존 키건, 앤터니 비버와 더불어 모를 수 없는 권위자인 리처드 오버리 교수이다. 특히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은 저자의 출세작이자 나로 하여금 거대한 독소전쟁의 묘미에 빠져들게 만든 책이기도. 2021년에 나온 <피와 폐허>는 뉴욕 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이자 그 해에 출간된 전쟁사 중에서도 최고의 저서에 수여되는 웰링턴 공작 메달(The Duke of Wellington Medal)에 선정되었다고. 책과 함께 출판사는 2019년도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다룬 <몽유병자>를 비롯하여 작년에 윌리엄 샤이러의 고전 명작인 <제3제국사>과 <악티움 해전>, 올해에는 <팍스>, <러시아의 전쟁>, <제2차 세계대전 해전사>에 이르기까지 전쟁사와 관련하여 그야말로 주옥같은 책을 쉴 새 없이 내놓는 느낌.

저자인 리처드 오버리 영감님. 영국을 대표하는 제2차 세계대전 권위자 중 한 사람이자 엑세터 대학 명예교수. 1947년생이니 올해로 77살인데 정정하신 듯. 서양 사람들은 도무지 나이 가늠이 되지 않으니. 노화 지점이 우리와는 다른건지.


<피와 폐허>는 2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부터 베르사유 체제가 어떻게 무너지고 전쟁이 시작되었는지, 주요 전투와 일본의 패망까지 전쟁 전반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크게 색다를 것이 없는 1권보다는 오히려 2권이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존 키건의 <2차 대전사>를 비롯해 시중에 나와 있는 여느 통사들과는 달리 전차, 항공기와 같은 무기의 발전과 전략 전술, 총력전, 외교, 경제, 민방위, 게릴라 전쟁, 병사들이 겪었던 전쟁신경증(PTSD), 전후 처리 등 그동안 인물과 사건에만 집중하여 간과되기 쉬웠던 부분을 두루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수박 겉핡기 식으로 잠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 마이너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면서 꽤 디테일하게 거론한다. 과연 세계적 석학다운 내공. 그런 점에서 작년에 출간되었고 내가 감수를 맡은 바 있는 열린 책들 출판사의 <세상을 바꾼 전쟁의 모든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 그러고보니 그 책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이 이 양반이었던 걸로.

기갑 혁명은 그 숙적인 대 기갑 전력의 진화를 촉진했다. 전술 항공의 위협에 맞서 대공사격의 규모와 유효성을 키웠듯이, 기갑부대에 대항하는 능력은 기갑부대 자체에 버금갈 만큼 중시되었다. 대개 기갑사단은 적의 기갑부대와 항공부대를 상대하는 기동 공격 능력과 기동 방어 능력을 겸비했다. 이 조합은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전차는 항공기와 마찬가지로 영토를 점령하지 못했다. 전시 동안 기갑부대의 성공은 제병협동 전투의 발전에 달려 있었으며, 그 전투에서 전차는 차량화보병, 자주포와 대전차포, 야전 대공포대, 기동공병대대, 정비부대 등과 긴밀히 협력하는 기갑부대의 중핵이었다. - p.742

일본 육군이 아주 일찍부터 알아챈 상륙전의 핵심 요인은 병력, 차량, 물자를 해안선까지 실어가 빠르게 내려놓도록 설계된 전용 상륙정과 상륙함의 필요성이었다. 상륙작전 전용 함정의 발전은 연합국에나 추축국에나 추후 성공을 좌우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1930년경 일본 육군은 두가지 유형의 동력 상륙정을 보유했다. 제1형은 군인 100명을 수송했고 해협에 쉽게 접근하도록 경사판을 설치했으며, 더 작은 제2형은 군인 30명, 또는 군인 10명과 말 10마리를 수송했으나 경사판은 없었다. - p.769


미국에서 무기와 군장비의 대량 생산은 당연시되었다. 1940년 5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간 항공기 5만 대 생산을 요구하면서 공중 재무장을 개시했다. 또 나중에 전차생산계획에 개입해 연간 2만5천대 생산을 고집했다. 당시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느냐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루스벨트가 1940년 12월 노변담화에서 말한 '미국 산업계의 천재성'은 재무장과 전쟁의 요구사항에 부응했다. 1943년 미국은 벌써 적국의 생산량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군수물자를 홀로 생산하고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며칠 전 히틀러의 사령부는 그의 서명이 들어간 명령을 내리고 독일 군수산업에서도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생산 간소화와 표준화 프로그램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 p.863

경제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엄청난 비용을 지우기도 했다. 적에게 향하는 자원을 차단하려면 충분한 자원을 투입해야 했다. 1940~1941년 영국본토항공전과 1940~1945년 대독일 폭격전쟁에는 군수품 생산량 중 상당한 부분이 투입되었으며, 방어하는 쪽도 방공에 자원을 할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두 경우 모두 폭격으로 인한 경제적 영향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제한적이거나 미미했다. 영국 폭격기 사령부에서는 4만7268명이 전사했고 독일을 폭격한 미국 전략공군에서는 3만99명이 전사했다. 두 폭격기 부대가 상실한 항공기는 2만 6,606대였다. - p.960

양측의 도덕적 비난은 1941년 6월 22일 추축국의 소련 침공과 함께 사라졌다. 공격 며칠 후 마이스키는 영국 국민이 변화에 당황하고 있다고 적었다. "최근까지도 러시아는 독일의 은밀한 동맹으로, 거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별안간 24시간 만에 러시아는 친구가 되었다. - p.989

중국의 경우, 전쟁 노력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장제스가 알고 있었음에도 그 노력에 동참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42년 말 장제스는 충칭에서 열린 국민참정회 본회의에서 연설을 하면서 동포들이 자신의 총력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당시 중국의 문제들은 적당한 공동 노력이 없었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준다. 중국은 국가 절반이 일본군에 점령되었고 피점령지에서 적과의 기회주의적 협력이 만연했다. - p.1021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당이 이끄는 민족해방군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대령이 이끄는 체트니크 반란군이 무력 충돌을 벌인 이유는 전후 유고슬라비아 국가상이 상반되었기 때문인데, 전자는 공산주의 국가를, 후자는 군주제 국가를 원했다. 1942년 봄 공산당 지도부는 저항운동 경쟁 단체들을 상대로 계급 테러 전략을 구사하기로 결정하고 4월에 체트니크 지도부 500명을 살해하여 양측 간에 오래도록 이어질 내전의 서막을 열었다. 중국에서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초기에 침공군에 맞서 공동 전선을 펴자고 합의했음에도 일본군의 배후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동안 거듭 충돌했다. - p.1100

1943년 봄 파르티잔은 벨라루스 삼림지대의 약 90퍼센트, 곡물과 육류 생산량의 3분의 2를 통제하며 이들 자원을 점령군으로부터 지켜냈다. 또한 1943년 하반기에는 독일 수송시스템을 9천회 넘게 공격했고 독일 육군이 쿠르스크에서 참패를 당하고 비틀거리던 1943년 8월에만 철도 3천킬로미터를 파괴하고 약 600대의 기관차를 망가뜨렸다. 소련측이 집계했고 현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다분한 통계에 의하면 파르티잔 병력은 활동의 절정기 동안 교량 1만2천개의 차량 6만5천대를 파괴했다. - p.1110

독일 노동자처럼 일본 노동자도 적국 전쟁 노력을 위해 모든 민간인을 동원한다고 선포한 뒤 1945년 7월 어느 항공대 정보장교는 대문자로 "일본에게는 민간인이 없다."라고 썼다. 일본 영공에서 민간인들을 불사를 때 미군 항공병들은 자신이 범죄에 관여하기는 커녕 오히려 범죄를 일삼는 야만적이고 광신적인 존재로 악마화된 적과의 전쟁의 종식을 앞당긴다고 생각했다. 태평양 전구 제21폭격기 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는 "우리는 그 도시(도쿄)를 폭격할 때 다수의 여성과 아이를 살해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섰다. 그런 공격은 1939년 9월 교전국들에 적국 도시에 대한 폭격을 삼가하자고 호소했던 루스벨트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 p.1252

장제스의 전시 서방 동맹들은 중국을 새로운 세계 질서에 어떻게 꿰맞출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루스벨트는 중국이 전후 국제 안보를 강제하는 '네명의 경찰관'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46년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그러나 처칠이 보기에 자기들이 강대국의 일원이란느 중국의 주장은 허세였다. 영국 관료들도 지난 1943년 장제스가 중국의 주요 무역항에서 서구 측에 치외법권을 주는 불평등조약을 폐기할 것을 역설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포기했던 영국의 비공식 제국을 다시 주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영국의 의도는 1945년 9월 영국 해군의 홍콩 재점령으로 시험대에 올랐는데 이는 중국군의 홍콩 탈환을 용인하겠다는 장제스와 맺은 협정을 무시하는 군사행동이었다. 중국에서 존재감이 강한 미국 군부와 재계는 영국의 활동을 방해했지만 영국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유럽과 일본 세력의 옛 질서가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국민당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장제스였다. - p.1354

2부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제6장에서 언급한 대소 랜드리스에 대한 것이다. 과연 서방의 랜드리스가 소련의 승리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를 놓고 오늘날까지도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자 밀리터리 카페에서 수없이 논쟁이 벌어진 주제였기 때문이다. 재작년에는 국내 러시아 통으로 알려진 상명대학교 류한수 교수와도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본인이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실망스럽게도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답변은 쏙 빼놓았지만 말이다. 어차피 학술보다 정치의 영역인지라 답이 나올 수도 없을 듯. 이에 대한 오버리 교수의 분석은 훨씬 명쾌하고 주목할 만하며 나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전후 수년 간 소련의 공식 노선은 자국의 전쟁 노력에서 무기대여의 역할을 경시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것이었다. 이는 의도적인 역사 왜곡 행위였다. 종전 직후 소련의 비공식 지침은 무기대여가 "러시아의 승리에 그다지 뚜렷한 기여를 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었다. 1980년대까지 소련의 공식 노선은 무기대여 물자가 뒤늦게 인도되었고 대개 품질이 나빴으며 소련의 자체 노력으로 생산한 무기의 4%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소련 지도부는 사석에서는 모든 형태의 원조가 얼마나 요긴한지 인정했다. "나는 스탈린이 소수의 측근들에게 무기대여를 인정하는 말을 몇차례 들었다. 스탈린은 만약 우리가 독일을 일대일로 상대해야 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p.917

전차, 항공기, 무기는 연합국 원조에게 결정적 요소가 아니었다. 한층 더 중요했던 것은 소련 통신체계의 변혁, 과부하가 걸린 철도망에 대한 지원, 대량의 원료와 연료, 화약류의 공급이었다. 이런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의 전반적인 전쟁 노력과 군사작전만으로는 독일 육군의 주력을 물리치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서방 연합국은 무기대여를 통해 군용 무전기 3만5천대와 야전전화기 38만9천대, 그리고 150만km 이상의 전화선을 공급했다. 1943년 초 소련 공군은 항공 전투부대들을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었으며 전차에 무전기를 장착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전력을 대폭 상승시켰다. 그로 인해 독일 육군은 몇번이고 적군의 규모나 위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철도를 통한 병력 및 장비의 이동을 뒷받침한 것도 미국이 제공한 기관차 1900대(소련은 겨우 92대를 생산했다.)와 전시 동안 사용된 철로의 56%였다. 이런 규모의 연합국 원조는 결정적이었다. 소련 산업계는 무기를 대량생산하는데 집중하는 한편, 전쟁 경제에 필요한 다른 많은 물자를 공급하는 과제는 연합국 원조의 몫으로 남겨둘 수 있었다. - p.919

어마어마한 분량이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니 손을 뗄 수 없을 정도이다. 마치 20편짜리 장편 2차대전 다큐멘타리를 책으로 옮겨놓은 느낌이랄까. 번역 또한 다소 논란이 있는 <제2차 세계대전 해전사>와는 달리 나무랄 데가 없더라. 적어도 내 눈에 거슬린다고 할 만한 부분은 없는 듯. 역자가 <제3제국사>와 <옥스퍼드 세계사>, <몽유병자> 등 여러 권의 전쟁사를 번역했는데(죄다 읽었다) 하나같이 오역 시비가 없다는 점에서 국내에서 보기 드문 전쟁사 전문 번역가가 아닐까 싶다. 2차대전사 덕후라면 필히 읽어볼 책이라고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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