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 코드: 더 비기닝
빌 게이츠 지음, 안진환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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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수많은 초보 부모들이 그러하듯, 나도 시중에 수없이 널려 있는 자녀 교육서를 부지런히 탐독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책들은 뻔한 레파토리에 "나는 이렇게 해서 내 자식을 남들보다 비범하게 키웠다."라는 일종의 자화자찬용이랄까. 물론 저자 나름의 투철한 교육관이라던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어냈다는 노하우는 같은 부모로서 귀 기울일 부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식이 번듯한 대학에 들어갔다는 둥의 내세울 성공을 거두었기에 말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에는 나는 평범하지만 내 자식은 똑똑한 놈으로 만들겠다면서 숨겨진 비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부모들의 허영심이 깔려 있다. 어쨌든 뭐라도 재주 하나 쯤은 있어야 살아가기 편한 것이 우리네 세상이니 말이다.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는 이세계 물들은 어차피 이번 생은 글러먹었으니 치트 능력을 얻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겠다는 것. 그런 능력이 있으면 굳이 머나먼 이세계까지 갈 이유가 뭐가 있겠음. 그저 꿈도 희망도 없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헛된 망상을 자극하는 것일 뿐.


자녀 교육서들의 공통된 결론 한가지는 아이는 부모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작 6천자에 불과한 손자병법을 부지런히 읽는다고 해서 누구나 천재전략가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저마다의 타고난 그릇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똑같은 방법을 쓴다고 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 교육이라는 오랜 격언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인간의 재능이란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1만시간의 법칙>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그 경지까지 오르는데 투자한 시간이 대략 1만 시간 정도가 걸렸다카더라, 따라서 결론은 재능보다 평소의 피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여기는 중대한 함정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 1만 시간의 노력을 했다고 해서 거꾸로 1만 시간의 노력을 한 모든 사람이 성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확대해석이다. 성공한 사람들이야 자신들의 성공이 하늘의 은총 덕분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며 성공하지 못한 너희는 노오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내가 여태껏 살면서 깨달은 사실은 노력도 재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재주 한 가지씩 타고 난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을 뿐더러(내 본가쪽 인간들을 보면 그건 분명하다.) 꿈과 재능을 찾아내어 발현하려면 노력 뿐만 아니라 그럴 계기와 운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콩 심은 곳에 팥이 나올 수 없고 누군가 물과 거름을 주지 않고서 제 알아서 싹이 트지는 않는다. <대학>에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고 하여 "옥도 갈아야 빛이 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옥일 때의 얘기이지 돌맹이는 뭘 어떻게 하더라도 돌맹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옥보다 돌맹이쪽이다.

유튜버로서 이 양반의 센스는 분명 놀랍지만 시류를 잘탄 덕분이기도. 만약 충주에서 공직을 시작하지 않았고 5년만 일찍 들어왔거나 5년만 늦게 들어왔어도 제아무리 큰 재주가 있다고 한들 지금처럼 유명인사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뭐 운도 능력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같은 평범한 인간들과 어떻게 달랐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었을까. 타고날 때부터 비범했을까.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것마냥 원래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A였지만 어떤 이유로 인생이 터닝하게 된 것일까. 유복한 가정 여건, 부모의 관심, 가까운 친인척, 학창시절의 친구나 선생님의 말 한마디, 또는 소위 말하는 '귀인'을 만난 덕분이라던가 어떤 비결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영화 <트루먼쇼>처럼 타인의 인생사를 직접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얘기는 들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열린 책들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소스코드 : 더비기닝>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한 명이 말하는 "나는 이렇게 컸다"라는 회고록이다. 주인공은 IT계의 황제이자 마이크로소프트사 창업주인 빌 게이츠. 덧붙여 예전에는 세계 부자 1위하면 이 양반이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는. 십 몇 년 전에는 멕시코 통신계 큰손인 카를로스 슬림에게 잠시 밀린 적도. 우리같은 서민과는 무관한 천룡인들만의 리그도 치열한 듯.

요근래의 빌 게이츠. 어느 사이 이런 영감님이 되셨나 싶다는. 하긴 1955년생이니 벌써 70살. 돈으로도 세월을 살 수는 없는 법이라.


이 책은 세계적인 거부로서 빌 게이츠의 인생 역경 전반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수학 신동으로서 하버드에 재학하던 시절, 불과 1년여 만에 때려치우고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하여 사회 초년생이자 사업가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까지 22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그 순간이 평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 중요한 시기였다는 얘기이다. 여기에는 함께 카드 놀이를 했던 '가미'라는 별명을 가진 친할머니와의 애틋한 추억을 비롯하여 그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될 사람들과의 일화를 담고 있다. 심지어 평생의 라이벌이자 여러모로 악연의 관계였던 스티브 잡스도 짧막하게 언급한다. 몇 줄 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틈만 나면 게임을 했고 나는 계속해서 졌다. 하지만 나는 지켜보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가미는 계속 부드럽게 나를 격려했다. "머리를 쓰면 돼, 트레이. 영리하게 생각하면 돼" 내가 다음 수를 고민할 때마다 가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겼다. 팡파르는 없었다. 그랑프리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처음으로 할머니보다 더 많은 게임을 이긴 그 날 어떤 게임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기뻐한 것은 생각난다. 분명히 가미는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p.31

어머니는 처음부터 우리 가족을 위한 원대한 비전을 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큰 성공을 이루길 바랬는데 여기서 성공이란 돈보다는 명성으로, 즉 지역 사회는 물론이고 더 넓은 범위의 시민 단체와 비영리 단체를 돕는 역할로 정의되는 것이었다. 자녀에 대해서는 학업과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사교적으로 활발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꿈꿨다. 이러한 비전으로 그녀는 지원 파트너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가운데 자신의 경력도 쌓아서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로 자리잡는 것을 목표했다. - p.62

선생님과 부모님, 교장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내 성적은 들쑥날쑥했고 태도는 날마다 그리고 과목에 따라 달라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무엇보다도 나의 날카롭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고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5학년 초 어느 시점부터 나는 학교의 언어 치료사를 만나기 시작했다. 이 세션의 결론으로 언어 치료사는 부모님에게 나를 1년 유급시킬 것을 권했다. 그녀가 나에 대해 <지진아>라고 평가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학교생활을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다행히도 무도님은 그녀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 p.113

나는 그렇게 1968년부터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질적인 요소가 합쳐져야 했는지를 생각하면 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놀랍다. 우리에게 단말기를 안겨 준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믿음의 도약, 전화선을 통해 컴퓨터를 공유하는 시대의 도래라는 행운을 넘어서 이 기적을 완성한 것은 다트머스 대학의 두 교수가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비전문가들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만들어진 것이었다. - p.156

켄트와의 우정이 남긴 유산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더 나아지도록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해 여름 폴과 나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우리의 나머지 삶을 정의하게 될 파트너십을 맺었다. 파트너는 서로의 관계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각자의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영감을 준다. 폴을 파트너로 삼고 나니 내 역량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에도 더욱 자신감 있게 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위험한 도전을 함께 극복한 사람이 있으면 다음 도전도 더욱 과감히 수용할 용기가 생긴다. - p.263

그 수업에서 더 잘할 수 없었던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가장 똑똑하고 가장 뛰어나다는 인식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그 지위는 사실 내 불안감을 숨기기 위한 보호막이었다. 나는 탁월한 수학 두뇌를 가졌지만 최고의 수학자가 될 수 있는 통찰력의 재능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주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발전을 해낼 능력은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해 겨울 앤디와 짐의 스위트룸에서 어울리던 중 그들도 갈피를 못 잡고 모종의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 p.326

우리가 작성한 베이직 프로그램은 다른 수천명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그런 변혁의 소용돌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10대 아이들도 컴퓨터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흔한 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컴퓨팅 비용은 매우 빠르게 떨어져 곧 무료나 다름없게 되었다. - p.383

우리 부스 앞에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확장형 베이직에 대해 설명하던 중 내 눈길 한쪽으로 긴 검은 머리와 짧게 다듬은 수염에 스리피스 정장을 입은 내 또래의 잘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몇 부스 떨어진 곳에서 자신만의 무리를 형성하며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날 난 그렇게 스티브 잡스를 만났다. - p.459

하버드로 떠날 때 부모님에게 다시는 시애틀에서 살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더 큰 세상에서 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 머리속의 더 큰 세상은 금융과 정치, 명문대, 그리고 당시에는 컴퓨터 산업의 중심지였던 둥부 연안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종의 후퇴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 홀로 귀향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창업한 회사, 다양한 직원들, 그리고 성장세에 오른 수익성 있는사업체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었다. 내 길은 정해져 있었다. 160km/h로 5번 주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앞으로 이 길이 얼마나 더 멀리 나를 데려갈까. -. p.477

작년 이맘때에 21세기 북스에서 나온, 요즘 트럼프 덕분에 미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 된 일론 머스크의 전기를 다룬 <일론 머스크>를 재미있게 읽은 것이 기억난다. 남아공 출신의 이민자인 일론 머스크가 미국에서 최고 갑부 중 한 사람으로 성공하기까지 그야말로 전투적인 삶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것에 비하면 이 책은 다소 밋밋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일론 머스크 전기는 월터 아이작슨이라는 그 방면 최고의 작가가 썼고 이 책은 글보다는 코딩 쪽이 더 익숙한 공대 출신의 빌 게이츠가 가감없이 쓴 회고록이라는 차이도 있겠지만, 그보다 빌 게이츠가 일론 머스크에 비하면 훨씬 평탄한 성장과정을 보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도 똘기를 보이면서 아들의 골칫거리로 남아 있는 일론 머스크 아버지와 달리,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변호사에 어머니 또한 고학력의 신여성으로서 지역의 유명인사였으며 그럼에도 자식들에게는 일을 핑계로 가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모범적인 부모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엄친아라는 얘기. 물론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회고록이 흔히 그러하듯, 빌 게이츠 또한 어릴 때의 자신은 성적도 별로 좋지 않고 반항기 가득했던 금쪽이였다고 평범함을 강조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학 신동이었다면서 남들과 다른 비범함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분명한 사실은 빌 게이츠에게 성장기는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이며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반드시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야만 훗날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인생에 있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4장의 부제마냥 그는 "운 좋은 아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가령 내가 어떤 기회로 회고록을 쓰겠답시고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들 남들 앞에서 떠들만큼 썩 유쾌한 추억은 없는 것같다. 그렇다고 인생의 터닝포인터가 될 만한 긍정적인 시너지를 준 사람을 만난 기억도 없다. 가정과 학교를 통틀어서 말이다. 나만이 아니라 소수의 행운아를 제외하고 군부 독재 시절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와 가방 끈 짧고 가부장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우리 세대 대부분이 마찬가지일듯. 장미빛 추억은 고사하고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하다고 말할 사람이 태반은 아닐지.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500여 페이지의 많지 않은 분량의 책은 빌 게이츠가 어떤 자기만의 비법으로 세계 최고 갑부로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빌 게이츠라는 한 인간을 알 수 있게 하는 기회였다랄까. 적어도 선거 때만 되면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대필 작가를 써서 자기 인생을 진실반 거짓반으로 포장하는 우리네 정치인들의 불쏘시개 책들보다는 훨씬 가치 있다고 엄지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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