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베트남전쟁 - 미국은 왜 실패할 전쟁에 빠져들었는가
제프리 와우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입만 열면 미국과의 혈맹을 강조하는 우리로서는 섭섭하지만 오늘날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아예 잊혀졌다고 할 수는 없어도 극동의 오지에서 벌어진 지루하고 재미없는 싸움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하다. 할리우드에서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교적 최근인 2022년에 장진호 전투를 배경으로 하는 <디보션(Devotion)>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장진호 전투보다 미 공군 최초의 흑인 조종사였던 제시 브라운(Jesse LeRoy Brown) 소위에게 포커스를 맞춘 것이라. 게다가 블록버스터 영화도 아닐 뿐더러 평이한 내용 탓에 흥행에서 완전 폭망했다고. 솔직히 내가 봐도 따분하더라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없는 장군 중 한 사람인 맥아더와 엮인 탓에 논란이 일어날 게 뻔한 인천상륙작전은 그렇다쳐도 미 해병대가 10배의 중공군을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장진호 전투는 충분히 영화화할만 것인데 말이다. 할리우드의 이러한 홀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 액션 영화들을 끝없이 만드는 대조적이다. 갈수록 살기 팍팍한 미국인들로서는 자기네 리즈 시절이다보니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모양. "그때가 좋았지"

심지어 <트랜스포머5>에서는 미군이 외계인 로봇들과 편먹고 처칠 본가이자 나치 소굴이 된 블레넘 궁전을 터는 장면이 나오기도. 그러고보니 캡틴 아메리카와 울버린, 원더우먼도 2차대전 참전용사라던가. 이런 미친 괴물들과 맞짱뜬 독일군이 더 대단하달지.


제2차 세계대전이 두고두고 새겨야 할 영광의 순간이고 한국전쟁이 존재감 없는 무승부전이었다면, 베트남전쟁은 미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맛 본 악몽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싸움에 졌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힘에 도취된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약자를 괴롭힌 부도덕하고 명분없는 전쟁이었고 미국 역사의 오점이었다. 민간인들을 상대로 과거 그들의 아버지들이 맞서 싸웠던 나치나 일본군과 다를바 없는 전쟁범죄가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으며 수많은 참전 군인들이 PTSD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를 비롯하여 미국을 믿고 자국 군대를 보냈던 동맹국들 역시 지금까지도 파병의 정당성을 놓고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베트남전쟁 초반 아이드랑 전투에서 활약한 미 제1기병사단의 대대장 할 무어 중령을 다룬 <위워 솔저스>에서는 멜 깁슨이 특유의 마초 분위기와 프로파간다적인 국뽕을 한껏 보여주지만 약 빨기 전의 찰리 신이 주연을 맡은 <플래툰>이나 <지옥의 묵시록>, <굿모닝 베트남> 등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대개 암울하고 부정적이다. 실버스타 스탤론의 <람보> 또한 시리즈를 더할수록 황당무계한 인간병기의 B급 액션물로 변질하지만 주지사님의 <코만도>와는 달리 원래 이 영화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재향군인의 PTSD와 부적응을 다룬 반전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에게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베트남전쟁의 기억이라는 얘기이다.

엑스맨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통하는 <엑스맨의 탄생>에서는 울버린 형제가 불사신으로 살면서 남북전쟁부터 베트남전쟁까지 미국의 모든 전쟁에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베트남에서는 민간인 학살과 강간, 상관 살해까지. 이 양반들 6.25에도 참전하지 않았을지.


이후의 미국에게 베트남전의 악몽은 끊임없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후임자들은 덩치크고 비효율적이었던 미군을 뿌리부터 바꾸었고 억지로 끌려온 오합지졸 신병 대신 잘 훈련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미군은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일방적으로 아작내어 베트남전쟁의 트라우마를 털어냈다. 부시는 이참에 후세인 정권을 끝장내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쫓아내는 선에서 만족하여 또다시 수렁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반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정치는 배웠으되 절제를 배우지 못한 아들 부시는 911테러를 빌미로 아프간과 이라크에 발을 들였고 결과는 제2의 베트남전쟁이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2021년 8월 15일 카불 함락은 반 세기 전 사이공의 데자뷰였다. 전직 미국 버클리 대학교수이자 기업가 출신인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이 카불로 진격하자 과거 남베트남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버리고 가족과 재산만 챙겨서 잽싸게 달아났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또 한번 자신의 힘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위신만 실추한 채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책임을 통감하는 대신 궤변과 핑계를 늘어놓으며 자신들을 합리화한 것도 50년 전과 똑같았다. 몇달 전에는 강박적인 관심 종자인 트럼프가 이란을 상대로 벌집을 건드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수렁에 빠뜨렸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말마따나 되풀이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이랄까.

역사 인문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에서 지난 5월에 나온 신작도서인 <베트남전쟁>은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베트남전쟁 통사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주요 전투의 나열 만이 아니라 700여 페이지에 걸쳐 미국이 베트남에서 장장 10년에 걸쳐서 그토록 많은 돈과 물자, 인명을 소모하고도 결국에는 두 손 들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전모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 푸틴이 삽질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쳐 보이기도. 저자는 명문 예일대 출신의 미국 노스텍사스대학교 군사사 교수이자 TV 역사 채널 진행자이기도 한 제프리 와우로(Geoffrey Wawro). 보불전쟁, 보오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 주로 근현대 전쟁사가 전문인 모양. 그 중에서도 이 책은 2024년에 나온 그의 가장 따끈따끈한 최신작이라고.

뭔가 캐빈 코스티너 닮은 둣한 이 핸섬한 아재가 저자인 제프리 와우로 교수. 뉴욕타임즈는 그의 신작인 <베트남전쟁>을 가리켜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 최고의 통사이자 기본서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영혼까지 털린 채 인도차이나를 떠난 프랑스에 이어서 아이젠하워가 바통을 넘겨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디엔비엔푸 전투 두달 뒤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서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임시적으로 분단하되 2년 뒤에 전국 총선거를 실시하여 재통일키로 한 약속을 깨뜨리기로 했다. 7년 전 한반도에서는 소련이 생깠다면 이번에는 미국이 써먹은 꼴이었다. 어차피 남쪽의 3류 지도자들로서는 북쪽의 국민 영웅인 호치민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결코 프랑스가 손 떼고 간 전쟁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국내 반공여론의 비난을 면피할 만큼의 생색내기만 하겠다는 속편한 계산이었다. 그로 인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치를 것이며 북베트남이 순순히 받아들일지, 남베트남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없었다. 히틀러가 북아프리카에서 죽을 쑤는 무능한 동맹자 무솔리니를 구하겠답시고 살짝 발을 들였다가 이탈리아의 전쟁 전체를 떠맡아야 했던 것을 되풀이한 셈이었고 후임자들에게는 지옥문을 여는 순간이기도 했다. 불과 10년 전 나치를 상대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조차 아시아에 대해서는 이토록 안이했다는 것이 놀랍다랄까.

아이젠하워는 미군 투입 방안에서는 물러서기는 했지만,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키시 주변에 모여든 빨갱이 탄압 반공주의자들을 우려하여 남베트남에 군사 경제 원조를 쏟아부어 자신이 공산주의 위협을 진지하게 여긴다는 것을 입증코자 했다. 그는 조지프 매카시에게 트집 잡히지 않을 만큼만 남베트남을 지원하려고 했고 과하게 지원할 생각은 없었다. 남베트남은 부채가 너무 많았기에 아이젠하워는 설령 그곳이 함락된다고 해도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다. - p.28


1961년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로부터 어떤 상황을 넘겨받았는지 알고 경악했다. 1950년대에 미국 뉴저지주 레이크우드에 있는 메르놀 신학대학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에게 자신을 유망한 활동가로 선전했던 지엠은 당시 남베트남에서 잘 풀리지 않고 있었다. 지엠은 인기 없고 독신을 고수하며 예의범절에 엄격한 독불장군으로 자기 주변을 가족들과 측근들로 에워쌌다. 그들 대다수는 부패와 폭정으로 빠져들었다. - p.32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호치민보다 11살 아래였던 응오딘지엠은 명문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프랑스 식민지 관료를 지내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나름대로의 명망을 얻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기반은 호치민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무장 투쟁의 경험도 없었고 휘하에 호치민의 베트민과 같은 무력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베트남을 독립시킨 것은 호치민 군대이지 그가 아니었다. 어쨌든 남베트남을 통틀어 그나마 호치민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1960년 1월 15일 또 다른 반공 거두인 타이완의 장제스를 방문한 응오딘지엠. 미국이 보기에 이승만, 장제스, 응오딘지엠은 '아시아의 부패 독재자 삼인방'이자 골칫거리였지만 이들은 그저 미국에 빌붙어 단물을 빠는 기생충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민족주의 지도자였다. 응오딘지엠 치하의 혼란상은 말기적 증세보다 한 나라가 탄생 과정에서 겪는 불가피한 진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참아낼 인내심이 없는 쪽은 미국이었고 고결한 자신들의 위상에 흠집이라는 이유로 제거함으로서 남베트남에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아마도 300년 전 쯤이었다면 한 왕조의 창시자로서 그런대로 무난하게 나라를 이끌었을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농민들을 선동하는데 익숙하고 산악지대의 싸움에 이골이 난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서구식 교육을 받고 독실한 기독교도였음에도 정작 그의 본질은 봉건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한계였다. 20세기식 게릴라전을 구사하면서 사정없이 파고드는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캐캐묵은 방식으로 맞섰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자 미국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자충수가 되었다. 미국은 갈수록 성가시고 부담스러웠던 응오딘지엠을 잘라내기로 결심하고 남베트남 장군들을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켰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남베트남은 인기 없는 독재자라고는 하지만 군부를 억누르고 북쪽과의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심점을 잃었고 권력을 맛본 장군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우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자 미국은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로 했다. 아직 북베트남이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남베트남의 개혁을 압박하거나 남베트남군을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만드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전쟁을 떠맡은 것이었다. 그것은 한 나라를 망친 것에 대한 속죄도, 책임감도, 하물며 미국 자신의 국익 때문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경솔했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일부 권력자들의 아집과 체면 치례를 위해서였다.

​

저자는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존슨 행정부가 본격적인 개입에 나서는 것부터 1973년 1월 27일 헨리 키신저가 사실상 남베트남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파리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2년 뒤 사이공이 함락되기까지 10여년 동안 베트남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을 신랄하게 파헤친다. 그것은 목표없는 전쟁이었고 설사 이긴다고 한들 무엇을 얻을지도 불분명했다. 애초에 개입을 결정한 존슨부터 아무런 열의가 없었다. 그는 베트남전쟁을 원치 않았지만 남베트남이 붕괴되면 미국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따라서 다음 대선에 좋을 것이 없다는 지극히 타산적인 이유로 뛰어들었다. 장군들 역시 개입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칼자루를 쥔 대통령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찬성했다.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전쟁이 머나먼 오지에서 벌이는 심심풀이 막간극에 지나지 않는다면 북베트남의 목표는 훨씬 분명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베트남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한 어떤 댓가와 희생조차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적을 상대로 미국이 명분이나 전략도 없이 자신의 판돈이 넉넉하다는 것만 믿고 덤벼서는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살짝 발만 걸칠 요량으로 시작된 전쟁은 남베트남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스스로도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의 가식과 위선, 무분별한 작전은 책을 읽는 내내 분노를 자아낸다.


합참은 존슨에게 "스스로 정한 제한을 제쳐두고" "더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합참은 북베트남의 모든 전력 거점을 타격하는 초토화 항공전역을 원했다. 하지만 존슨은 중국이 개입하거나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그런 조치를 승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맥나마라는 합참이 밀어붙이는 '강한 타격' 대신 '점진적 압박'을 선택했다.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장성들이 점진적 압박을 '수용가능한' 전략으로 여긴다고 거짓으로 단언했다. - p.51


미군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적을 발견하면 우월한 전술과 기술로 섬멸할 계획이었다. 이름하여 공중기동작전이었다. 전쟁의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야전군이 수천 대의 헬기를 전술적 이동의 주된 방법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우기로 결심한 무렵 이 전쟁의 아이콘이 전투에 도입되었다. 바로 벨 사의 UH-1 이로쿼이 다목적 헬리콥터, '휴이'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헬기였다. - p.119


1966년 1월 연두교서에서 존슨은 베트남전이 끝없이 이어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며칠이 몇 달이 될 수도 있고 몇 달이 몇 년이 될 수도 있지만 공격성이 우리에게 전투를 명령하는 한 우리는 계속 머무를 것입니다." 연두교서 이후 인터뷰에서 존슨은 자신이 사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으며 전쟁에서 이기거나 빠져나올 수 있는 계획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얼마나 오래 갈지 얼마나 들지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무심코 말해버렸다. 그러더니 잠시 말을 멈추었다고 이렇게 덧붙였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입니다. 나는 우리가 옳다고 믿습니다." 달리 말하면 전략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위선과 뒤섞인 폭력이었다. - p.173


베트남전쟁에서 낭비, 목적 없는 활동, 바보짓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씩씩한 플라이급 권투 선수처럼 비어 있는 링을 춤추듯 돌아다니면서 펀치를 날렸다. 다만 그런 펀치를 위협으로 여길 상대 선수가 없었다. 상대는 로프 사이로 빠져나갔다가 웨스트모얼랜드가 지쳐서 자기 코너로 돌아가 땀을 닦고 다음번 급습을 준비할 때만 다시 나타났다. - p.247


그동안 웨스트모얼랜드의 승리 이론은 미군의 기동성과 화력을 이용하는 '소모전략'으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주력 부대들을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과 전략은 너무나 명백하게 실패하고 있었다. 적의 침투가 줄기는 커녕 도리어 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1967년에 매달 평균 8500명을 남베트남에 침투시켰는데 이 수치가 연말에 급증하고 1968에 들면 두배인 2만 350명으로 한층 늘어날 터였다. 소모 전략은 적이 사상자를 전원 교체하고 새로운 부대를 추가하고 남베트남으로 더 깊이 밀고 들어옴에 따라 좌초하는 중이었다. - p.280


미라이 학살 소식, 그리고 인근 미케 촌락에서 제3보병연대 제4대대의 1개 중대가 최소 90명의 민간인을 더 학살했다는 소식은 미군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미 잔혹행위가 흔한 일이었고(보병들은 마주치는 마을 주민들을 강간하거나 학대하거나 살해했다) 그에 대한 소문을 보통 상부에서 은폐하긴 했지만 이번 학살은 은폐하기에 너무 큰 규모였다. 사이공의 한 장교는 '핑크빌 학살'에 대해 거의 즉각 들었고 육군이 학살을 1년 넘게 쉬쉬할 수 있었다는 데 '놀랐다'고 회상했다. - p.429


임기 막판에 웨스트모얼랜드는 전시 동안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행위에 대한 변명문을 작성하느라 바빴다. 그는 "어떤 미군 사령관이든 잡 장군만큼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면 하룻밤 사이에 해임되었을 것이다."라고 투덜댔으며 이로써 본인이 이끈 전쟁의 성격을 여전히 오판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평판을 만회하려는 웨스트모얼랜드의 열의는 끝이 없었다. 훗날 그는 해병대의 케산 역사서에 서문을 쓰기로 하고 이 작전의 가치에 대한 이기적인 허튼 소리로 지면을 채웠다. 마치 변호사처럼 지적한 수정 사항은 그가 북베트남에게 속은 이후 자신의 흔적을 감추려고 얼마나 열을 올렸는지 드러낸다. "내가 병력을 '덜 결정적인' 지역이 아니라 '덜 압박받는' 지역에서 데려왔다고 수정해 주십시오." - p.470


닉슨은 1968년에 본인의 당선을 위해 강화 절차에 훼방을 놓았다. 그때 닉슨은 미국에 더 유리한 조건으로 하노이에 종전을 강요하는 일은 자신이 존슨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서 강해 방해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1969년에 제37대 대통령은 유권자에게 약속했던 강화 교섭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 p.567


베트남에서 복무한 미군 병사 중 4분의 3이상은 노동계급이나 저소득 가정 출신이었다. 전문직이나 경영직, 기술직 부모를 둔 병사는 23퍼센트에 불과했다. 부유층의 아들은 학교에 머물거나 꾀병을 부리는 수법으로 징병 유예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는 미래의 대통령 조지 부시처럼 예일 대학을 졸업해 학생 징병 유예권을 잃기 2주 전인 1968년 5월에 마치 마법처럼 주방위군에 임관함으로서 베트남 복무를 피했다. 그날 부시와 함께 또 한명의 고위층인 텍사스 상원의원 로이드 벤슨의 아들도 징집을 피하기 위해 같은 주 공군 부대에 비집고 들어갔다. - p.596


5개 사단의 5만 명으로 신속히 병력을 증원한 북베트남군을 퇴각하기 시작한 남베트남 지상군을 타격했다. 남베트남군은 온갖 실책을 저질렀다. 공중 엄호, 정찰, 측면 보호, 후위 전투를 거의 않았다. 무턱대고 후진하다가 번번히 매복 공격을 당했다. 손질과 패주에 가속이 붙는 가운데 어느 미군 조종사는 "속으로 이 모든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생각했다." - p.645


p.404에서는 존슨 대통령이 참모들을 향해 "어째서 북베트남인이 남베트남인보다 훨씬 더 결연하게 그토록 잘 싸우는건가"라면서 절망을 토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모든 미국인들이 품었을 핵심질문이자 핵심을 비켜난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몰랐을까. 베트남전쟁의 딜레마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전쟁임과 동시에 미국의 전쟁이 아니었고 남베트남인들에게도 남베트남의 전쟁이면서 자신들의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존슨은 말로만 남베트남을 동맹국이라고 부르면서 평화와 안정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방식은 20세기 초반 필리핀 식민지에서 현지 독립군을 상대로 벌인 토벌전이었다.

​

남베트남에서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전쟁의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군복 입은 공무원이었고 전쟁을 모르는 책상물림 장군이었다. 그는 흔히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착한 베트콩은 죽은 베트콩"이 아니라 "죽은 베트남인들이 나쁜 베트콩"이라는 식이었다. 마치 대로에서 눈을 감고 칼을 마구 휘두르는 식으로 벌였던 미군의 작전은 무분별한 학살극이었고 칼을 맞아 죽은 사람이 베트콩이라는 게 웨스트모얼랜드가 말하는 전과였다. 이 전쟁을 통틀어 유일하게 자신들의 전쟁이었던 북베트남이 미군을 연구하고 꾸준히 약점을 찾아냈던 반면, 웨스트모얼랜드는 자신의 방식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러면서 전과를 과장하고 허위 보고를 일삼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 것이며 남베트남인들이 미국의 전쟁에 열광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하지만 미국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자성하거나 바로잡는 대신 애초에 이런 싸움에 끼어든 것이 잘못이라며 난장판을 내팽게치고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남은 자들이 알아서 치울 몫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베트남전쟁 동안 단 한발의 포탄이 떨어질 일도 없었던 미국은 5만명의 전사자와 막대한 전비, 국론 분열, 오만한 자존심에 처음으로 금이 간 정도라면 남베트남인들은 나라를 잃었다. 이들은 통일 베트남에서 2등 국민으로 전락했고 전체 인구의 1/10이 공산정권의 보복을 피해 해외로 탈출했다.

1973년 1월 초 미국 양원은 자국 전쟁포로들이 송환되자마자 베트남 전쟁의 자금 지원을 전면 중단한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서방 연합국은 11일간의 항공 전역과 민간인 사상자 수천 명에 경악했다. 라인베커II가 끝난 뒤 파리로 날아간 키신저는 1월 27일 마침내 파리 강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종료했다. 닉슨은 "전쟁을 종결해 베트남과 동남아에 명예로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자랑했다. 지난 5년 간 250차례 4자 회의를 통해 줄다리기를 벌인 녹샌 모직천이 덮인 커다란 테이블 주변에는 축하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두 차례 따로따로 진행된 서명식은 한 목격자가 보기에 "보슬비 내리는 잿빛 파리 하늘이 침울한" 것 만큼이나 "냉담하고 음울한" 분위기였다. - p.707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해군기지와 비행장 주면에서 남베트남군 부대들끼리 싸우는 소규모 접전을 지켜보았다. 다낭에서 탈출해 남하한 해병대와 유격대, 그리고 이 지역 본부를 확보하기 위해 사이공에서 파견된 병력 간의 전투였다. 이 부대들은 이제 미국의 원조가 줄었으니 '가난한 자의 전쟁'을 치르라는 티에우의 지시를 따르기는 커녕 오히려 군율을 팽개치고 눈앞의 전리품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웠다. 그들은 피아스터, 달러, 금, 보석, 가보 등 속수무책인 피란민들로부터 약할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리품으로 챙겼다. - p.727


북베트남군 전차들이 사이공 시내로 진입했고 그 중 한 대가 대통령궁의 출입문을 들이받아 부수었다. AP 통신의 사이공 지국장 조지 에스퍼는 이 행위로 "한 세기에 걸친 서구의 영향이 종언을 고했다."라고 기록했다. 즈엉반민은 라디오로 남베트남군 전체에 오전 10시 24분에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공식적으로 항복하기 위해 대통령궁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즈엉반민은 이미 인민혁명으로 권한이 넘어갔으니 있지도 않은 권한으로 항복할 수는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 P.741


과연 베트남전쟁은 처음부터 실패가 정해진 싸움이었을까. 여기서 내가 그때 이래야 했다, 저래야 했다라고 떠드는 것은 한낱 탁상공론일 뿐더러 미국이 몰라서 생고생한 것도 아닐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웨스트모얼랜드같은 무능한 보신주의자가 아니라 마셜이나 아이젠하워, 브래들리같은 미국 최고의 장군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또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미군이 힘든 것만큼이나 북베트남에게도 힘든 싸움이었고 실제로 북베트남이 먼저 손을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누가 그 자리에 있어도 눈앞의 자기 선거에만 눈이 멀고 책임지지 않을 궁리만 하는 지도자 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보다도 존슨이 하필이면 웨스트모얼랜드같은 인간을 기용하여 제 발등을 찍은 것도 미 육군에 정말로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대통령으로서 존슨의 그릇이었을테니 말이다.

​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오로지 미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이다. 정작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남베트남인들에 대한 얘기는 없다. 과연 이들은 미국의 아집이 벌여놓은 전쟁에 억지로 휘말린 피동적인 존재이기만 했던가. 저자는 본문 내내 베트남에서 미국은 명분도 없었고 전략도 없었으며 충분한 병력도, 방법도, 의지도 없었다고 강조한다. 물론 결코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전쟁이 남베트남인들에게도 아무런 의미 없는 전쟁이었을까. 남베트남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저주받은 사생아에 지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 안 되는 사실은 남베트남인들이 상전 노릇하는 미국의 횡포에 분노하고 남베트남의 부패한 군부 정권에 실망했다고 해서 북쪽의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라는 점이다.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저지른 수많은 만행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원래 전쟁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공산주의 치하에서 기다리고 있을 궁핍과 압제가 그보다 덜 할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미국의 원조와 자유 무역 덕분에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인들보다 전반적으로 생활 수준이 더 높았다.

​

어쩌면 남베트남은 살아남을 수도 있었고 스스로 혼란상을 딛고 우리가 그러했듯 '사이공의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남베트남인들이 아니라 미국인들이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 내내 남베트남인들과 괴리되었던 미국은 이 재미없는 전쟁이 갈수록 부담이라는 이유로 아시아는 아시아인들이 지키라며 야반도주했다. 그로 인해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할 만큼 했는데 남베트남인들이 싸우지 않은 탓이라며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자생할 기회를 줬던가. 애초에 부패하고 무능한 남베트남 정권과 남베트남군의 무기력함은 자연 발생이 아니라 미국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남베트남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이끌만한 역량과 강단 있는 민족주의자들을 배척하고 부패하고 인기 없지만 말 잘 듣는 사람을 선호한 것이 미국의 방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베트남군이 퍼주는 것만큼 밥값을 못 한다고 타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충분히 퍼준 것도 아니었다. 존슨 행정부 말기에 와서야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를 외치며 남베트남군의 강화에 착수했다지만 프로그램은 졸속이었고 시간은 촉박했다. 어차피 자기네가 떠난 뒤의 일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의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진입하는 북베트남군의 59식 전차. 미군이 철수한 지 불과 2년 1개월 만이었다. 철수하면서 대량의 무기를 남겨놓았던 미국은 남베트남군의 무력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무기의 태반은 가져가는게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이유로 쓰레기 버리듯 투기하고 떠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남베트남군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것이 베트남전쟁 내내 남베트남군과 괴리되어 머리수 채우는 식민지 군대로만 취급했던 미국의 한결같은 방식이었다.


같은 시기 남한과 타이완 또한 미국의 원조에 기댔다고 하지만 이곳에서 싸우는 주체는 엄연히 이들이지 미국이 아니었다. 국공내전에서 남베트남군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장제스 군대는 1949년 10월 진먼다오에서 처음 승리한 이후 1950년대 내내 공산군이 타이완 해협을 넘는 것을 막아냈다. 미군이 나서지 않고도 말이다. 어째서 남베트남군은 그렇지 못했던가. 남한과 타이완 역시 비민주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권위적인 정부가 지배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 세력은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민주화에 성공했으며 비서구권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가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 국가와 남베트남의 운명을 갈랐던가. 이 책에서는 그저 미국인의 시각에서 남베트남이 부패하고 무능하고 타성에 젖은 구제불능의 정권이었다는 뻔하고 단편적인 사실만이 있을 뿐 왜 자립에 성공할 수 없었는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없다. 이것이 반세기가 넘도록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식 베트남전쟁 연구의 한계이자 그 많은 교훈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

그럼에도 이 책은 미국의 10년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데 비할 바 없이 훌륭한 개괄서이다. 다만 지적할 부분은 번역. 사단장을 '사단 사령관', 중화기를 '무거운 화기'를 번역한 것이나, p.470쪽에서는 "웨스트모얼랜드의 후임은 그의 부관인 53세 장군 크레이튼 에이브럼스였다."라고 나오는데 'deputy'는 보좌관을 의미하는 부관(aide)가 아니라 부사령관이다. 둘 다 같은 4성장군인데 영관급이 맡는 부관으로 해석해서야. p.636의 "응우옌쫑루엇 대령의 기갑기동부대"는 '기갑임무부대(Armored Task Force)'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보다도 번역 전반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고 가독성이 떨어지는 느낌. 역자가 문외한도 아니고 <몽유병자들>과 <제3제국사>, <피와 폐허> 등 중량 있는 전쟁사를 여럿 번역한 바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기독교-이슬람 전쟁사 - 패권을 두고 격돌한 1400년의 대립
레이먼드 이브라힘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엘프 오빠가 절대 반지 대신 성지 수호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흔한 양판소가 아니라 1187년 7월 4일 이슬람군의 공세로 지난 100년 간 십자군이 알박기한 예루살렘의 몰락을 묘사한 실제 역사이다. 말그대로 킹덤 오브 헤븐의 몰락인 셈. 주인공인 발리앙을 비롯하여 이슬람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이나 예루살렘 왕국의 은가면 성군 보두앵 4세, 그 뒤를 이어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사고뭉치 금쪽이 르노와 함께 빌런 노릇을 하다가 폭망하는 기 드 뤼지냥 등 등장캐 대부분이 실존 인물이다. 물론 발리앙이 사생아 출신 대장장이였다거나 예루살렘 여왕 에바 그린과의 썸씽은 픽션이지만 말이다.


20년 전 영화지만 십자기를 앞세운 보두앵 4세가 예루살렘의 대군을 이끌고 나오는 모습은 실로 장엄하다. 오히려 CG로 떡칠하는 요즘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광경. 중세 마을의 재현이나 전투 장면 또한 그저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고증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기의 개삽질로 저 군대 대부분을 궤멸시킨 하틴 전투가 '어른의 사정'으로 패한 장면만 나오고 넘어간 건 아쉽지만 말이다.


감독판 기준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내내 유혈이 낭자하지만 이 영화의 메세지는 종교적 관용과 화해이다. 양 진영을 대표하는 살라흐 앗 딘과 보두앵 4세는 오랜 숙적이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한다. 반면 오만한 성격의 기는 살라흐 앗 딘의 유인작전에 휘말려 사막 한가운데로 진격했다가 보급로가 끊기는 바람에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패배를 당하고 발리앙은 궁지에 몰린 예루살렘을 끝까지 지켜내지만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결국 살라흐 앗 딘과 조약을 맺고 평화적으로 성을 넘겨준다. 극장판에서는 잘렸지만 영화 마지막에서 시종일관 시비 털던 기와 한판 붙고 그에게 참벌을 내린다. 그리고 머리 빡빡 깎은 여왕님과 손 잡고 속세를 떠나는 대신 고향인 프랑스로 향한다. 사실은 엘프 대장장이 영주님의 영지 개발물이라는 얘기도.


영화는 이슬람의 성지 탈환과 십자군의 패배로 끝나지만 9차에 달하는 길고도 파란만장했던 십자군 원정 전체로 본다면 이제 중반부 즈음이랄까. 중동에서 십자군 세력이 완전히 쫓겨나기까지는 앞으로 100년은 더 싸워야 했다. 게다가 이슬람의 공세는 시작일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었다. 유럽을 지켜주는 마지막 방파제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발칸과 동유럽을 휩쓸고 유럽의 중심인 빈까지 진격했다. 지중해에서도 오스만 해군이 신성 동맹 함대를 격파하고 해상 제국 베네치아를 몰락시켰다. 훈족과 몽골족의 침입 이후 또 한번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유럽 전체가 이슬람화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지만 오스만은 결국 빈의 두꺼운 성벽을 넘지 못했다. 이제 수세에 몰린 쪽은 이슬람이었다. 19세기가 되자 오스만은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고 다른 이슬람 세력이 오스만을 대신하여 산업혁명으로 약진하는 유럽에 도전하지도 못했다.


지금에 와서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문명의 기나긴 대결은 기독교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과 서구 유럽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문명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 체제를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살만한 동네가 된 반면, 이슬람 국가들은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의 몇몇 석유 부국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가난뱅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에서도 후진적이며 특히 여성 인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파키스탄이나 '중동의 북한'이라고 불리며 요즘 트럼프를 상대로 이슬람의 깡을 보여주고 있는 신정 국가 이란으로 이민가겠다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하물며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은 숨쉬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할 판.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패배자로 치부하는 것 또한 성급한 결론일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1/4이 이슬람 교도이며 몇년만 지나면 기독교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자랑하게 된다고 한다. 그만큼 인기가 있다기보다 이슬람 국가들이 대개 종교 선택의 자유가 없고 짧은 수명과 가난 덕분에 아이를 많이 낳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선진국들이 저출산 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에 허덕이는 사이 이들이 곳곳에서 침투하면서 세를 늘리고 있다. 하지만 썩 환영받지는 못하는 처지. 내전을 피하여 유럽으로 넘어온 백만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들은 자기네를 받아준 포용에 대한 감사와 절제 대신 폭력과 범죄로 온 유럽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 옛날 쉴레이만 대제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이들이 하고 있는 셈이다. 이슬람과 역사적으로 별 인연 없는 우리조차 잠재적인 테러 집단 취급하면서 색안경끼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판국이다. 911테러 이후 갈수록 고조되는 반 이슬람 분위기를 죄다 그들이 자초한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막연한 편견이라고만 할 수도 없을 듯하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이슬람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2023년 알제리계 이민자 소년의 죽음으로 폭발한 프랑스 무슬림 폭동. 2명이 죽고 600여명이 다쳤으며 피해액은 1조원에 달했다. 무슬림들은 프랑스 사회의 인종차별과 경찰의 과잉 대응이 초래한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남의 땅에서 행패부리는 짓이 용납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 해결은 커녕 이슬람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스스로 입증하여 이미지만 더 나빠진 꼴이 된 셈이었다.


1천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우세해 진 것은 불과 2백여년 남짓이다. 형세가 언제 또다시 역전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기독교가 예전에 어떠했건 근대에 와서 이성주의와 인본주의를 선택한 반면, 여전히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람보다 종교를 우선하는 게 이슬람의 현 모습이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살라흐 앗 딘이 보여준 관용은 온데간데 없고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소위 '지하드'라는 이름으로 증오와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이교도들과 싸우다가 순교하면 저승에서 72명의 처녀가 기다리고 있다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순진한 소리겠지만 판타지와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측실들의 암투 때문에 신세 망친 사내가 얼마나 많으며 말이 꽃밭이지 기 센 여인네들 사이에 끼여서 골머리 썩히느니 차라리 홀홀단신 싸움터가 낫다고 할런지도.


역사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에서 얼마 전에 나온 신작도서 <기독교-이슬람 전쟁사>는 무려 1400여년 동안 동서양의 경계에서 벌어진 숙명과도 같았던 두 문명의 패권 다툼을 다루고 있다. 저자인 레이먼드 이브라힘(Raymond Ibrahim)은 미국인 작가이자 칼럼리스트이며 이슬람과 아랍을 주제로 글을 쓰는 모양. 그런데 종교적 화해를 강조하는 도덕 교과서 같은 여느 서구 학자들과 달리 이슬람이 서구 문명을 위협한다는 둥 직설적인 소리를 늘어놓다보니 이슬람 쪽에서 알라의 적으로 낙인찍힌 모양. 게다가 미국 내 대표적인 반 이슬람 싱크 탱크이자 트럼프 1기 시절 국가 안전 보좌관을 지냈지만 지금은 앙숙이 된 것으로 유명한 존 볼트가 회장을 맡기도 했던 게이트스톤 연구소(Gatestone Institute)의 선임 연구원이기도. 마가 아님?


이 눈빛 험악한 털보 아재가 저자인 레이먼드 이브라힘. 그러고보니 <킹덤 오브 헤븐>에서 기와 함께 강경파로 나오는 르노 역을 맡은 브렌던 글리슨과 닮은 것같기도.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슬람 비판이 혐오라며 그 동네 인권단체들로부터 욕도 거하게 먹고 있다고.


예전에 미지북스에서 나온 <십자가 초승달 동맹>이라는 책에서 이슬람이 언제나 기독교의 적은 아니었으며 때로는 서로 협력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면, 여기서는 이슬람이란 불리하면 평화를 거론하다가 형편이 좋아지면 대번에 본색을 드러내는 후안무치한 족속들이므로 결단코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식. 학술적 차원에서의 역사 기술을 넘어서 때로는 이슬람을 향한 저자의 증오심마저 노골적으로 드러내다보니 누군가에게는 속 시원할지 몰라도 나처럼 중립적 시각을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걸려 읽어야 싶은 부분도 있더라는.


<기독교-이슬람 전쟁사>는 서방과 이슬람 세계가 약 1400년 전 이슬람교가 탄생한 이래로 불구대천의 원수였음을 보여주고 그들의 군사사를 서술하는 맥락에서 양측의 가장 역사적인 전투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 가운데 일부는 세계사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대부분의 군사사가 아무리 흥미롭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학문적 논의에 머무는 것과 달리 이 책은 시의적절한 교정을 제공한다. 즉 두 문명 사이의 심하게 왜곡된 역사 기록을 바로잡고 이를 통해 이슬람교도의 서방에 대한 적대가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라 이슬람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온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 머리말 중에서(p.23)


이 책은 634년에서 시작한다.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력이 중동의 패권을 놓고 처음으로 맞붙는 역사적인 한해였다. 결과는 동로마 제국의 참패였다. 무함마드의 충복이자 '알라의 검(Sayf Allah)'이라고 불리는 걸출한 군사 지도자인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Khalid ibn al-Walid)가 이끄는 이슬람군의 공세 앞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시리아를 빼앗겼다. 동로마 제국은 총력을 기울여 반격에 나섰지만 2년 뒤 시리아와 요르단 국경에서 벌어진 야르무크 전투(battle of Yarmouk)에서 때마침 불어온 모래폭풍 때문에 재앙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이슬람에게는 알라의 가호였고 기독교도들에게는 신의 외면이었다. 이 전투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 동로마 제국은 내분까지 겹치면서 80년 뒤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포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동로마 제국의 패배는 부패와 타락으로 약해져서라기보다 이슬람이 여태껏 본 적 없는 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슬람 특유의 복종에 대한 보상과 가차없는 처벌의 공포에서 비롯된 종교적 광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하디스>에 적혀 있다는 72명의 처녀 어쩌구는 죽음조차 불사할 만큼 그 동네 남정네들에게는 어지간히 매력적이었던 모양. 그 이유에 대해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지하드를 수행하는 이들은 반드시 진심이거나 경건한 의도를 가져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코란>의 냉정하고 사무적인 언어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지하드를 수행하는 자는 누구든 알라에 좋은 대출을 해주는 것이며 알라는 그 대가를 여러 배로 보상해주는 것을 보장한다. "그들은 알라의 길에서 싸우며 죽이고 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맺은 이 거래에 기뻐하라." 죄에 대한 즉각적인 용서가 신자들에게 주어지면서 이는 자연스럽게 믿음이 약한 이슬람교도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면허가 되었다. 지하드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기도나 단식같은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여러가지 면제 혜택이 있었다. - p.36


땅에 쓰러져 죽어가던 이슬람 병사들은 지하드를 통해 죽은 자에게 약속된 천국의 미녀가 양팔을 벌이고 자신들을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이러한 여러 일화가 이슬람 연대기에 들어갔다. 한 이슬람 병사는 야르무크 강변에서 칼을 맞고 땅에 쓰러진 전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쳐드는 것을 보았고 그가 기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미녀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른 아라비아 지휘관은 깃발을 흔들며 병사들에게 "기독교도 개들에게 맹렬히 돌진하는 것은 미녀들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라고 외쳤다. - p.61


이집트는 기독교 인구가 많은 지역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이슬람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초기 이슬람 연대기들은 수백년에 걸친 박해와 재정적 수탈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콥트인들이 샤하디를 고백하게 되었고 이로서 이집트가 오늘날과 같이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국가가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슬람 역사학자 타키알딘 알마크리지는 그의 방대한 이집트사를 통해 이슬람교도들이 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도들을 학살 또는 화형에 처하고 그들의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는 여러 별도의 기록들을 전하고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많은 기독교도가 이슬람교도가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 p.77


이 책은 636년 야르무르 전투, 717년 콘스탄티노플 포위전, 732년 투르 전투,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1187년 하틴 전투,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1683년 빈 포위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와 이슬람이 벌였던 8번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균형적 시각이라기보다 백인 기독교도의 눈에서 본 이슬람의 침략에 맞선 기독교의 항전사이랄까. 이슬람은 악이요, 기독교는 선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관점이 구석구석에서 와닿는 느낌. 저자는 이슬람의 잔혹함을 단순한 일부의 일탈이 아닌 교리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은 종교라고 매도하면서도 정작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기독교의 만행에 대해서는 마치 불가피한 선택인양 옹호한다. 흔히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라는 이슬람이 일부 지식인들의 막연한 환상마냥 다른 종교보다 더 관용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독교가 이교도들에게 덜 폭력적이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물론, 특히 근세에 와서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던 아시아, 아프리카인들 입장에서는 말이다. 저자도 다이야 할당 못 채웠다고 손목이 잘려봐야.


실제로 10세기의 이슬람세계는 유럽의 생산물이나 천연자원을 소비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오직 유럽인들의 몸 자체만이 필요했다. 수요가 많은 것은 젊은 여성과 소년이었지만 10세기 중 거의 모든 연령과 계층, 그리고 대륙의 거의 모든 지역의 유럽인들이 사슬에 묶여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실렸다. 이 끊임없는 습격의 결과는 원인은 잊혔을지라도 잘 알려져 있었다. 점점 가난해지고 문맹이 되어가던 유럽인들은 해안을 떠나 고지대의 요새와 성으로 피신했고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어떤 영주나 기사에게든 충성을 맹세했다. 유럽의 '암흑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 p.155


요컨대 사도 바울이 말한 기독교도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특정 형태의 공적 폭력을 용인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용서의 교리에서 본질적인 모순은 없다. - p.214


서방 기사들은 동료 기독교도 기사를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여 끊임없이 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는 전투 중심이었고 전쟁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것이 그들이 잘하는 일이자 아마도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는 예수의 사랑과 평화의 명령을 어긴다는 죄책감에 늘 시달리고 있었다. - p.21


<코란> 제3장 28절은 타키야를 정당화하는 주요 구절 중 하나이다. "믿는 자들은 이교도를 친구나 동맹으로 삼지 말라. 누그든 그렇게 한다면 그는 더 이상 알라와 관계 없다. 다만 이교도를 조심해야 할 위험이 있을 때에는 예외로 하되, 신중하게 처신하라." "만약 이슬람교도가 이교도의 권위 아래 놓여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고 느낀다면 말로는 충성을 가장하되 마음 속으로는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품어라. 알라께서는 신자들이 이교도와 우호적이거나 친밀해지는 것을 금지하셨다. 다만 이교도가 권세를 가졌을 경우에는 예외이다. 그럴 때에는 그들에게 친근하게 굴되, 종교는 지켜야 한다." - p.309


역설적이게도 미화된 역사 속 다른 이슬람 제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아이들에 대한 유괴, 강제 개종, 지하드 세뇌 제도는 일부 주요 학자들에 의해 마치 아이를 좋은 교육 기관에 보내 성공적인 경력을 위한 훈련을 받게 하는 것에 해당하는 듯 묘사된다. 실제로는 세뇌와 비인간화라는 가혹한 시련을 견뎌낸 자들만이 이교도와의 전쟁에 대한광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으로 변신해 오스만 군대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바로 '새로운 병사'라는 뜻의 예니체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가족과 본래 신앙으로부터 납치한 책임이 있는 술탄에게 '개처럼 충성'했고 그들의 옛 가족과  신앙을 상대로 광란의 행동을 보였다. 이것은 기록에 남아 있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역사상 최초 사례 가운데 하나라는 증거였다. - p.328


샤리아에 따르면 언제 이교도와 평화 조약을 맺을 지 결정하는 요인은 상황이다. 이슬람 교도가 강할 때에는 공격을 지속해야 하고 약할 때에는 평화를 청해야 한다. 6장에서 보앗듯 개종을  가장하는 타키야가 그런 겨웅이다. 일반적으로 이교도에게 우위를 점하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하는 거은 선지자의 유명한격언 "전쟁은 속임수이다"에 근거한다. 그는 한 젊은 개종자에게 선지자를 조롱했던 늙은 유대인 시인을  속여 이슬람 교도가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하도록 만들 것을 허락했다. 유대인이 경계를 풀고 이슬람교도 청년을 신뢰하게 되자 그 청년은 노인을 암살했다. - p.351


제노바 상인이자 오스만 제국의 관습에 정통했던 야코포 데 캄피는 그 절차를 이렇게 묘사했다. "튀르크 황제는 벌하고자 하는 사람을 땅에 눕힌다. 팔로라고 불리는 날카롭고 긴 장대를 항문에 꼽고 집행인은 두 손으로 큰 망치를 잡아서 있는 힘껏 내리친다. 그러면 장대가 인체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그것이 지나가는 경로에 따라 불행한 자는 오래 고통을 겪다가 죽기도 하고 즉사하기도 한다. 그 후 장대를 들어서 땅에 꽂아 세운다. 그렇게 불행한 자는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되며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 p.352


쉴레이만의 전례없는 유럽 진출은 시기적으로도 최악의  순간에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오스만이 맘루크 술탄국의 광대한 영토를 흡수한 해인 1517년에 기독교 세계의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한 최악의 분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궁극적 결과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이익이 되었다. 가톨릭 성직자인 마르틴 루터는 이 때 역사적인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루터의 행위는 의도치 않게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 맞선 유럽의 단합을 약화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아마도 가장 심각한 점은 루터와 다른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가톨릭 교황을 수십만의 기독교도를 학살하고 노예화한 책임이 있는 오스만 술탄보다 더한 '적 그리스도'로 묘사함으로서 일종의 상대주의를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만연한 이 상대주의는 가톨릭 역사 속 종종 왜곡된 사례를 끌어와서 지금도 계속되는 이슬람교도의 만행을 축소하거나 희석하는데 이용된다. - p.392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이 처음으로 치러야 했던 전쟁이 이슬람과의 싸움이었다고 말한다. 북아프리카에서 미국 선박을 상대로 노략질했던 바르바르 해적 토벌전 말이다.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요근래 트럼프가 이란을 상대로 벌집을 건드려서 전 세계 기름값을 폭등시킨 것 또한 이슬람과의 기나긴 성전의 일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듯. 내가 보기에는 그 양반에게 원대한 계획이 있다기보다 치매나 충동조절장애가 더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아무튼 "서방은 바뀌었지만 이슬람은 여전하다"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그리고 서방의 정신이 해이해진 사이 이슬람은 지금도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 사회 일각에서 잊을 만하면 북한 위협론을 들고 나오는 느낌이랄까.


물론 저자의 지적처럼 이성적인 서구 기독교도들에 비하여 탈레반이나 ISIS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우리네 세상에 훨씬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동에서 깡패 노릇을 하는 이스라엘이 과연 그들보다 덜 하다고 할 수 있으며 서방 또한 묵인하고 있지 않은가. 소위 '스트롱맨'을 자처하는 트럼프조차 이란 핵에 대해서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이스라엘의 핵은 우리편이라면서 모르쇠로 일관하여 역시 만만한 적에게만 스트롱맨임을 입증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미국식 이중잣대에는 침묵한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이슬람은 서쪽의 기독교 세계를 끊임없이 위협했지만 동쪽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가령 오늘날 인도네시아가 이슬람 국가인 것은 대항해시대 향신료 무역과 개종의 결과이지 전쟁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오스만 제국은 유교 국가인 중국을 상대로 종교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그들의 칼끝은 동쪽이 아니라 언제나 서쪽으로 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또한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출판사의 소개글이나 옮긴 이의 말에는 영원한 숙적이었던 기독교와 이슬람 갈등의 역사를 담백하게 거론할 뿐, 저자의 특수한 배경이나 이런 내용의 책이라는 얘기는 쏙 빼놓고 있다. 처음부터 알고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슬람이 탐탁치는 않지만 기독교 하는 짓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나로서는 교인이라면 몰라도 우리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 이슬람 포비아를 자극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외친들 둘 다 도찐개찐 아닌가 싶기도. 어떻게 평가할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권성욱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장감 넘치는 사진과 각국의 세력권, 전쟁 흐름을 한눈에 보여 주는 지도, 세세한 전투 서열 표를 통해 독자는 승자의 서사에 가려져 있던 작은 나라들의 결정과 그 대가를 차분히 따라간다. 책은 그 선택들이 어떤 맥락 속에서 불가피해졌는지, 국제정치의 현실이 약소국에 무엇을 포기하게 하고 어떤 행동을 강요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 국방일보 2026년 3월 4일 소개글 중에서.


올 초 윌북에서 나온 던컨 웰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에서는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힌 한 경제학자가 미국을 어떻게 망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주인공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때 "칼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유명한 경제사학자"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케네디와 존슨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월트 휘트먼 로스토(Walt Whitman Rostow)였다. 그리고 미국을 영원한 악몽의 수렁으로 빠뜨린 베트남 전쟁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로스토는 15세에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예일대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다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24살에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 교수를 맡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영재 중의 영재인 셈.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머리가 명석한 대신, 세상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고집불통이면서 자신에 대한 어떤 비판과 오류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독불장군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우리네 세상이 어느 한 사람의 머리로 죄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명성을 등에 업고 존슨 행정부의 고위직으로 입성한 그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미국의 힘을 보여주어 굴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과 달리 굴복한 쪽은 북베트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모든 것을 미국식 경제논리로만 생각했던 그는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산업을 파괴한다면 손해를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 거라고 기대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공산주의 진영이 북베트남을 도운 덕분도 있었지만 베트남인들 특유의 저항 의식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알아도 다른 나라를 알지 못했던 책상물림 학자의 한계였다. 


북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며 시작된 미국의 북폭 작전인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이 퍼부은 폭탄은 800만톤에 달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폭탄의 3배였다. 그리고 군부를 설득하여 작전을 밀어붙인 사람이 경제학자인 로스토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경제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했고 전쟁을 망쳤다. 


로스토의 독선이 초래한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은 물론이고 미국에게도 5만 명의 전사자를 비롯하여 수십 만 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100만 명이 넘는 PTSD 환자, 그리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하지만 그는 2003년에 87살의 나이로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존슨 시절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라마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뒤늦게 회고록을 통해서 베트남 전쟁의 개입이 실수였다고 후회하자 로스토는 온갖 궤변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신공격까지 퍼부었다고 한다. 자신이 신이 아니라 한낱 평범한 인간임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잘났기 때문이었을까. 로스토만이 아니라 미국만 알고 미국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것은 워싱턴 정가 엘리트들의 흔한 모습이다. 이 때문에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또 한번 쓴맛을 보고 나왔음에도 요근래 트럼프가 이란을 상대로 죽을 쑤고 있는 것을 보니 인간이란 역시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했지만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해야.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열린 책들의 신작도서 <약소국의 제2차 세계대전사>는 여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사의 바이블로 손꼽히는 존 키건이나 리처드 오버리, 앤터니 비버 등 기존에 나온 책들이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강대국들의 얘기라면 이 책에서는 그동안 강대국 중심의 역사에서 스쳐가는 단역 치부를 당했던 약소국들이 주인공이라는 점. 


저자는 놀랍게도 학계 교수가 아니라 공무원 출신의 전쟁사 작가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랄까. <중일전쟁><중국군벌전쟁><별들의 흑역사>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내놓았으며 특히 마이너한 전쟁사를 주제로 다루는 모양. 


이 책은 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장하는 나라 만도 20개에 달한다. 책의 첫번째 장을 장식하는 것은 당시 아프리카 유일의 독립국이었던 에티오피아이다. 우리에게는 오랜 내전과 가난에 허덕이면서 국제 사회의 도움을 호소하는 세계 최빈국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원래는 인류의 발상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의 하나이며 무엇보다도 수천년의 역사에서 단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쟁쟁한 국가들이 유럽 열강들에게 짓밟히는 순간에도 자신들의 힘으로 유럽의 침입자들을 격파하고 끝까지 독립을 지켰다. 그야말로 아프리카의 자존심인 셈. 그런 에티오피아가 1935년 10월 로마제국의 부활을 내건 이탈리아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무솔리니의 침공을 당한다. 일부 역사 학자들은 이 순간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기도.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의 제6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가 되는 하일레 셀라시에는 무솔리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비록 말년에는 장기 집권의 불만과 경제난, 미소 냉전의 파고 속에서 군부 내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비운의 군주가 되지만 그는 자기만 살자고 국민을 히틀러의 손에 내동댕이치고 달아났던 이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나 알바니아 조구 1세같은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암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물며 오늘날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나라를 막장으로 몰고가며 부귀영화와 개인 우상화에만 열을 올리는 여느 철권 통치자들과도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 p.48


다음날 새벽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영광의 상징인 아두와 상공에 이탈리아 공군의 카프로니 Ca.101 폭격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티오피아 병사들이 비행기를 향해 정신없이 총을 쏘았지만 폭격기들은 여유롭게 날아와 폭탄의 비를 떨어뜨렸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에티오피아인들이 처음 겪는 현대전이었다. 이와 함께 12만 명의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을 흐르는 마레브 강을 넘어서 진군을 시작했다. - p.62

 

유화정책이 상대에게 약점으로 악용되어 도리어 더 큰 전쟁을 불러오리라는 생각은 간과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막대한 이권이 있었고 히틀러를 막는데 무솔리니의 협력이 필요한 처지였다. 이들에 보기에 골칫거리는 무솔리니가 아니라 분수도 모르고 그에게 맞서려는 에티오피아인들이었다. 따라서 그 대가도 마땅히 에티오피아인들이 치러야 할 몫이라는 게 열강들의 결론이었다. 최소한의 정보도 없이 편협한 선입견과 자국의 이익만 내세워 자신들은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으면서 약소국만 제물로 삼아 밀실에서 흥정하려는 열강들의 이기적인 행태는 2년 뒤 뮌헨 회담에서도 그대로 반복될 참이었다. - p.72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은 국제연맹에서 국가 간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을 금지한 부전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지만 열강들은 오지랍 넓게 끼어들어봐야 득 될 게 없다는 이유로 침묵했다. 그러면서도 중재안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약소국인 에티오피아더러 일방적으로 양보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고립무원이었고 구식무기로 무장했지만 그럼에도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황제의 진두 지휘 아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침략자들에게 용감하게 맞서 싸운다. 뜻밖의 고전에 직면한 이탈리아군은 국제법에서 금지한 독가스를 꺼내야 했다. 결국 반년의 싸움 끝에 수도 아디스 아바바가 함락되고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무솔리니는 로마제국 부활의 첫발에 내딛는다. 하지만 그 후에도 에티오피아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구한말 맨주먹으로 일본의 총칼에 맞섰던 우리 의병들을 보는 것 같다랄까.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국령 이집트와 수단으로 진격하지만 영국의 반격으로 패배한다. 


영국의 망명생활 동안 약소국이라는 이유로 온갖 푸대접을 감수해야 했던 황제는 가만히 앉아서 외세에 의한 해방을 기다리는 대신 자기 손으로 나라를 되찾는 쪽을 선택했고 1941년 5월 5일 아디스 아바바로 돌아왔다. 나라를 잃은 지 꼭 5년 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에티오피아를 자국 식민지로 삼으려는 영국을 상대로 또 다른 투쟁을 벌어야 했다. 제국주의 시절 강대국들의 이기심 앞에서 약소국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보여주는 셈이다. 


국제연맹이 무솔리니더러 국제법을 어기고 금단의 무기를 썼다고 해서 문제 삼거나 더 강력한 제재에 나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에티오피아 현지에서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참상을 경고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보낸 보고서들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개가 거부되었다. 물론 상투적인 핑계일 뿐, 열강들로서는 자기네와 상관없는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방독면을 보내달라는 요구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에티오피아인들은 최소한의 보호를 위해 목면으로 원시적인 방독면을 만들어야 했다. - p.87

황제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자신이 자랑하는 친위대였다. 라스 게타체우 아바테의 지휘 아래 친위대가 에리트레아 제2사단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들은 분명 여느 에티오피아 전사들과는 달랐다. 서구식 군사 전문가들에 의해 고도로 훈련받았으며 뛰어난 규율과 현대적인 무기로 무장했다. 친위대는 에리트레아군 1개 대대를 단숨에 괴멸시키고 이탈리아군 측면을 위협했다. 하짐나 이들 역시 이탈리아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폭격 앞에서는 무력했다. 오후 4시 가랑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최후의 공격에 나섰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 p.103

황제는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국제 연맹이 약소국을 지켜주기로 했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것을 호되게 질타했다. 연설을 마치고 마이크가 꺼지기 직전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듣고 있던 모든 참석자들의 양심을 후벼팠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이며 내일의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 p.118


이탈리아의 지배는 끝났다. 하지만 그것이 에티오피아의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영국인들은 <적의 영토를 점령한 것>이라고 얼버무렸다. 에티오피아가 동맹국이 아니라 적성국의 식민지라는 얘기였다. 이탈리아인들로부터 접수한 모든 물자와 자원, 공장  설비, 인프라는 죄다 영국인들 차지였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영국의 군정을 받아야 했다. 황제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영국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153


2부의 "두 거인 사이에서"는 인구 350만명의 약소국이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소련을 상대로 모두 승리했던 핀란드의 위대한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3부의 "처칠의 도박"과 4부의 "중립의 딜레마"는 반대로 오랜 중립만 믿고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가 독일과 연합군의 싸움에 휘말려서 제대로 저항도 못해 본 채 몰락한 나라들을 다루고 있다. 5부 "발칸의 악몽"에서는 에티오피아와 마찬가지로 무솔리니의 야욕에 용감하게 맞선 그리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는 초기 승리에 도취되어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쳤고 이참에 알바니아까지 먹겠다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가 도리어 히틀러의 제물이 되어 이웃동네 유고슬리비아와 도매금으로 멸망한다. 6부 "동유럽의 파편들"은 히틀러에게 먹히거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남기 위해 사냥개 노릇을 해야 했던 동유럽 국가들의 이야기이다. 헝가리가 마지못해 추축 편에 섰다면 바로 옆동네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 에서 독일과 싸웠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히틀러의 가장 든든한 동맹국이었다. 불가리아는 직접 전쟁에 끼어들지 않으면서 히틀러에게 요령껏 단물만 뽑아먹은 유일한 추축국이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히틀러와 엮이게 되었건 간에 결말은 똑같았다. 다같이 나라를 잃고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발트3국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차례로 스탈린에게 굴복했다. 이들은 결코 소련의 지배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군비를 너무나 소홀히 한데다 이제야 대응책을 마련하거나 저항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었다. 발트 3국의 군대를 모두 합해도 7만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 중 에스토니아군이 1만 7천여명, 라트비아군이 2만8천명, 리투아니아군이 2만4천명 정도였다. 무기와 장비도 구식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운명을 체념한 채 아예 손을 넣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p.179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소련과 독일 두 나라를 상대로 양쪽 모두에게 승리한 유일한 나라였다. 그것은 야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핀란드인들은 어떤 외세도 자신들을 정복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힘만으로 얻어낸 성과였다. 반면 발트해 너머 3국은 그다지 운이 좋지 못했다. - p.298

유틀란드 반도의 작은 나라 덴마크는 그야말로 무책임하리만큼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나라가 살아남기는 커녕 잠시도 버티지 못할 판국이었다. 면적은 4만3천㎢에 인구는 384만명에 불과했다.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신세인 벨기에와 비교하여 영토는 조금 더 크면서 인구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위스나 핀란드처럼 자연이라는 막강한 우군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랜 평화에 젖어 전쟁을 남의 일로만 여겼기 때문이었다. - p.332

노르웨이인들이 이웃 형제인 핀란드인들보다 결코 용기가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업었다. 또한 핀란드인들처럼 스키와 사격술에 능했다. 부족한 것은 전의와 국난을 극복할 지도력이었다. 비록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가 형인 덴마크 국왕과 달리 결사 항전을 선택했지만 막상 대다수 국민은 침략자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군비가 최소한으로 억제되면서 노르웨이군은 현대 무기 도입은 커녕 체계적인 동계 훈련이나 기동 훈련조차 거의 하지 못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자국 군대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일보다 국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는데 활용되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무기를 들어 침략자에 맞서야 한다는 정부의 호소를 냉담하게 받아들였다. - p.368


스웨덴 육군은 5개 보병사단 및 1개 기병 여단 10만명 정도였고 전시에 최대 40만명을 동원할 예정이었다. 전차는 체코제 AH-1V탱켓을 라이선스 생산한 M/37 48대와 스웨덴에서 독자적으로 생산한 L-60 경전차 20대가 전부였다. 1930년대 초반에 생산된 이 전차들은 하나같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장갑과 화력이 매우 빈약했다. 공군력으로는 5개 전투 비행대 전투기 158대, 폭격기 116대, 정찰기 100대 등 374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 p.394

온 유럽에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벨기에가 프랑스와 힘을 합치는 커녕 도리어 거리 두기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히틀러의 감언이설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근본적으로는 프랑스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의 동맹이 자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프랑스의 이기심 때문에 원치 않는 싸움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벨기에의 오랜 후견국인 영국은 매번 독일을 핑계 삼아 불장난을 벌이는 프랑스를 히틀러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라고 낙인찍었다. - p.436


6월 21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8만 명의 이탈리아군은 모든 전선에 걸쳐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숨어 있는 프랑스군 저격병의 사격을 받아야 했다. 눈은 두껍게 쌓였고 땅은 진창이었다. 이탈리아군의 주력 전차인 L3 경전차들은 원래 알프스의 산악지대에서 쓰기 위해 개발했음에도 엔진이 약하고 궤도가 너무 좁아 눈이 가득 쌓인 산길을 제대로 오르지 못했다. - p.522


그리스 해군은 전 드래드노트급 전함 1척과 장갑 순양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0척, 잠수함 6척, 어뢰정 13척, 기뢰부설함 4척, 수리함 1척 등 37척의 군함과 병력 6500명을 보유했다. 그 중 현대적인 군함은 1930년대 말에 영국에서 구매한 배수량 1300톤의 그레이하운드급 구축함 2척이 전부였다. 배수량 15000톤의 그리스 유일 전 드래드노트급 전함인 렘노스는 노후화가 너무 심해서 1937년에 퇴역한 뒤 무장 해제되어 그리스 해군의 모항인 살라미스에 정박한 채 썩어가는 신세였다. - p.569

4월 20일 서부 마케도니아 군관구와 에피루스 군관구가 항복했다. 그리스 15개 사단 20만명이 포로가 되면서 그리스 북부 전선이 와해되었다. 뒤늦게 그리스가 자신을 빼놓고 독일군과 협상 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무솔리니는 분통을 터뜨리며 카발렐로 장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리스군도 독일군이라면 몰라도 이탈리아에게 굴복한 생각은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끝까지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다. - p.642

합스부르크 제국이 남긴 근대 산업 대부분을 차지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단숨에 중부 유럽 제일의 공업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헝가리에 남은 것은 수도 부다페스트를 제외하고는 가난하고 낙후한 농촌이었다. 제국 시절의 자유 시장은 사라졌고 농산물에는 높은 관세가 부과되었다. 패전의충격에다 경제적 장벽으로 유통이 막히면서 경제는 막히고 실업자가 늘어났으며 물가는 폭등하고 재정은 파산 지경이었다. - p.717


헝가리가 주변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끌려 나왔다면 반대로 아예 국운을 걸다시피한 쪽은 루마니아였다. 안토네스쿠의 충동적인 결정 때문이었다. 루마니아도 헝가리만큼 전쟁에 끼어들 처지가 아니었다. 전해에 영토 태반을 빼앗기면서 인구와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1940년 말의 겨울과 다음 해 봄은 루마니아인들에게 어느 때보다도 혹독했다. 폭우로 인한 홍수와 추운 날씨로 전에 없는 흉작이었다. 루마니아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였다. 무기와 장비는 구식이었다. 당장이라도 소련군이 프루트 강을 넘어서 남은 영토까지 넘볼까봐 전전긍긍하는 판국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겠답시고 이쪽에서 치고 나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 p.802


소련군이 1812년의 나폴레옹 군대나 1941년의 독일군이 직면했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러시아인들이 다른 민족보다 추위에 더 강하게 진화해서도,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용기가 부족해서도, 하물며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더 뛰어난 전략가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서방이 넘겨준 수십만 대의 차량과 막대한 양의 고품질 연료 덕분이었다. (중략) 전쟁 내내 서방을 향해 끊임없이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았던 소련 지도자들은 전쟁이 끝나자 자신들에게 불편한 사실을 깡그리 잊기로 했다. 어느 순간 서방의 원조는 소련 전체 생산량의 4퍼센트에 불과했다는 것이 공신 노선으로 정지고 소련 관변학자들은 자기네 승리에서 시방 기여분을 축소하려고 인간힘을 썼다. 한마디로 서방의 도움 따위가 없었어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 p.931


이 책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순간마다 약소국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되짚는다. 약소국이라고 해서 죄다 고래 싸움에 휘말린 새우들마냥 운명에 휘둘린 비련의 주인공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쳤고 때로는 강대국들의 운명을 바꾸어놓기도 했다. 히틀러의 첫번째 도박이자 유럽 전쟁으로 향하는 첫 관문인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 점령은 때마침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던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전쟁이 한창이었다. 히틀러가 서방을 향해 무모한 도전에 나설 수 있었고 나중에 추축동맹이 결성된 발단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채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던 벨기에는 서부전역이 시작되자 자신은 물론이고 프랑스를 파멸시키는데에도 일조했다. 뒤이어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놀라운 성공을 질투한 나머지, 성급하게 그리스를 침공했다가 톡톡히 개망신을 당하고 추축의 큰형님에서 히틀러의 졸개로 전락한 채 독일군에 빌붙어 근근히 명줄을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전쟁 말기 이탈리아와 헝가리가 어영부영하다가 히틀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루마니아의 젊은 국왕 미하이 1세는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반나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독일군을 물리치고 연합군으로 갈아타는데 성공한다. 국난의 순간에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셈이다. 


저자는 그동안 내노라하는 영미 학자들이 자국 중심의 역사관에 갇혀서 무심코 넘어갔던 역사의 빈칸을 채운다. 무려 1천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국방대 교수들의 딱딱한 학술서적이 아니라 역사 스토리텔러가 풀어 쓴 논픽션이기에 읽기 쉽고 내용이 팍팍 와닿는다. 장대하고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마치 2차 세계대전 다큐멘타리나 <벌거벗은 세계사>를 보는 느낌이랄까. 밀덕으로서 저자의 필력이 느껴진다. 그보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특히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사진들과 지도, 당시 사용한 무기, 부대 전투 서열 등 풍부한 자료는 여느 전쟁사 서적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소위 "신 냉전"이라고 부르는 시대이다. 우리 시대의 평화는 커녕,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느낌이다. 푸틴은 4년이 넘도록 여전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외치는 트럼프는 실속없는 세계 경찰 노릇 대신 미국의 이익만 챙기겠다고 공언하면서 만만한 동맹국들의 주머니 털기에만 여념이 없다. 일본은 갈수록 전쟁 국가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중국은 태평양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미국에 대한 도전을 감추지 않는다. 과연 우리도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강대국보다 약소국의 역사에 주목하고 그들로부터 우리가 살아남을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역덕들의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 - 악마와의 두뇌 게임, 괴링에 빠져들다
잭 엘하이 지음, 채재용 옮김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성격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특이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 권력을 쥐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이들이 여기에는 없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저는 미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절반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미국인 절반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기꺼이 그 자리에 오르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늘도 민주주의의 권리를 반민주적으로 이용하며 떠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본문 중.


독일 역사학자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가 쓴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 2003년 영화 <몰락(Der Untergang)>은 독일 제3제국의 최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45년 4월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 함락을 앞두고 총통 벙커에서 벌어지는 14일의 모습은 좌절과 광기, 발악이었다. 지상에서는 병사들이 죽기로 싸우는 동안 벙커에서는 장교들과 여자들이 광란의 파티를 벌이다가 포탄이 떨어져서 참벌을 당하고, 위대한 아리아 민족의 부흥을 내걸어 전쟁을 일으켰던 힛총통은 독일 국민들이 열등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더 이상 살아남을 가치조차 없다면서 국가적 자폭을 명령한다. 게다가 마지막 희망이었던 펠릭스 슈타이너(Felix Steiner) 장군의 부대가 공격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간신히 지탱하던 이성의 마지막 끈이 끊어진다. 그리고 장군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면서 진정한 멘탈 붕괴란게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 와중에도 괴링, 히믈러 등 일부 나치 지도자들은 서로 자기가 히틀러의 후계자라며 추악한 권력 투쟁에 여념이 없다.


최후의 반격이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멘탈이 완전히 나간 히틀러. 배우의 신들린 연기 덕분에 수많은 인터넷 밈의 원천이 되기도.


영화에서 가장 충공깽을 보여주는 인물이 히틀러의 심복 중 한 사람이자 나치의 선전가로 악명을 떨쳤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 부부이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방위전 때 모스크바를 지킨 사람이 소련 최고의 명장인 주코프였다면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베를린 방위를 맡긴 사람은 군사 전문가는 커녕 신체 장애를 이유로 군대 문턱도 가 본 적이 없었던 괴벨스였다. 이것이 스탈린과 히틀러의 차이랄까. 중앙청사지구 지휘관 헬무트 몽케(Wilhelm Mohnke) 장군이 괴벨스의 국민 돌격대가 빈약한 무기로 사실상 집단자살을 강요당하고 있다면서 항의하자 그는 이렇게 조롱한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소. 동정할 이유가 없지! 위선 떨지 마시오. 누구도 우리에게 권력을 넘기라고 강요하지 않았소. 그들 스스로 그런 운명을 선택했고 그 댓가를 치르는거요." 썩소까지 날리며 독일 국민 전체를 비아냥거리는 그의 표정은 섬뜩하다 못해 악마를 연상케 한다. 영화 말미에는 총통에게 충성심을 증명하겠다며 가족 동반 자살을 선택했다. 그의 아내는 6명에 달하는 자녀들에게 잠을 재운다면서 약을 먹인 다음 두 사람 모두 자살한다. 워낙 충격적인 장면이기에 배우들조차 트라우마가 남았다고. 히틀러는 알면서도 말리기는 커녕 어린 아이들마저 저승 길동무로 데려가는 것을 묵인한다.


위의 히틀러 멘붕과 함께 나치 정권의 실체를 보여주는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괴벨스의 망언. 엄밀히 말하면 괴벨스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여론 조작과 대중 선동으로 히틀러를 권좌에 올린 그로서는 저 장면을 보면서 저승에서 "옳소!"라고 하고 있을지도.


물론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영화적인 허구가 섞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치는 탄생부터 마치막 순간까지 정상이 아니었음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명나라 말기 반란군에게 포위된 숭정제가 치욕을 피하기 위해 자기 가족들을 제 손으로 베고 스스로 목을 멨다고는 하지만 근대 국가에서 패전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권력자가 수습 대신 다 같이 죽자면서 온 국민에 집단 자살을 강요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이탈리아는 제 손으로 무솔리니를 끌어내렸고 '1억 총옥쇄'를 부르짖던 군국주의 일본조차 파국을 눈앞에 두자 마지막 순간 무기를 내려놓았으니 말이다. 왜 나치는 그토록 뒤틀렸던 것일까. 사이코 패스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일까, 권력이 평범한 사람들을 사이코 패스로 만든 것일까. 영원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 1윌에 히포크라테스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뉘렌베르크 - 나치와 정신과 의사>는 영화 <몰락> 이후를 다루고 있다. 독일 공군 수장이자 나치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을 비롯하여 패전 이후 연합군에게 체포된 악명높은 나치 지도자들이 전범재판을 위해 뉘렌베르크 수용소에 감금되고 미군 정신과 의사로서 이들의 정신 상태 진단을 맡았던 더글라스 켈리(Douglas Kelley)의 이야기이다. 작년 말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뉘른베르크>의 원작이기도.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장군으로 명연기를 보여준 러셀 크로우, <맨 오브 스틸>의 조드 장군을 비롯하여 화려한 출연진 덕분에 국내에서도 개봉 얘기가 있는 것같더니만 그 뒤로 쏙 들어간 느낌. 하긴 코믹물과 화려한 액션물에 익숙한 국내 정서에서는 망하기 딱 좋은 영화라. 저자인 잭 엘하이(Jack El-Hai)는 미국 언론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주로 의학이나 과학사를 주제로 글을 쓴다고.


저자 영감님과 영화 <뉘른베르크>의 출연진. 1961년 영화 <뉘른베르크 재판>이 연합군 검사와 나치 전범들의 신경전이라면 이쪽은 정신과 의사 켈리와 괴링의 내면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지루한 주제임에도 배우들의 명연기와 드라마틱한 연출로 재미있게 봤담서.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영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 말미에 나오는 것마냥 괴링의 말빨에 밀려서 궁지에 몰린 조드 장군이 켈리의 힌트로 상황을 뒤집고 승리하는 극적인 장면 따위는 없다. 거의 이길 뻔한 괴링을 무너뜨린 비결은 연합국 검사들이 오랜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 수집한 빼박 증거 덕분이었다. 그보다도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괴링이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아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읽는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일단 나부터. 이 책은 나치 전범들과 인터뷰한 정신과 의사의 얘기이다.

괴링은 키츠뷜의 미 제7군 사령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그곳에서도 신변 보장을 요구하고 아이젠하워와의 면담을 재차 요청했다. 그러나 그를 체포한 사람들은 그런 만남이 성사될 가능성은 낮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스택과 참모들은 괴링에게 많은 예우를 베풀었다. 괴링은 미군 병사들과의 환영 자리에서 샴페인을 마셨고 기념사진을 찍고 기자회견도 했다. 그는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국가 고위 대표로서 마지막 대접을 받았다. - p.17


그것은 누구나 탐낼 만한 임무였다. 20세기 최악의 범죄자들로 널리 알려진 자들과 직접 마주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여러 정신병원에서 감독자로 일하는 동안 켈리는 일탈적 행동에는 종종 불가사의하면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근원이 있음을 배웠고 임시 수용소에서의 근무 역시 자신만의 목표를 세우고 임했다. 그는 나치 지도자였던 수감자들에게서 공통된 결함, 즉 악행을 서슴치 않는 성향의 흔적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공통된 정신질환이나 정신의학적 원인이 있었을까? 그들의 끔찍한 범죄를 설명해줄 '나치 성격'이란 게 존재했을까? 켈리는 그 답을 밝혀내려고 했다. - p.44


그러나 이느 기업의 이사회와도 달리, 이 이사회는 전 세계를 6년에 걸친 전쟁 속으로 몰아넣고 조약과 국제 협정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며 무시했고 셀 수 없이 많은 무고한 공동체를 말살했으며 수백만명을 노예로 만들고 또 다른 수백만명을 효율적으로 학살하기 위해 설계한 수용소에 몰아넣고 인종차별과 공포정치까지 합법화한 집단이었다. 이들을 범죄자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중 많은 이들도 유혹을 느낄 만한 기회를 붙잡았던 것일까. 애초에 악한 성향을 타고 났던 걸까.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만한 일종의 '나치 정신'같은 정신 질환을 함께 앓고 있었던 걸까. 교도소 당국은 물론,향후 재판을 맡은 검사들조차 켈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질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 p.99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연합국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열고 나치 지도자들의 처벌에 나선 것은 단순히 이들이 침략전쟁을 일으켜서 평화를 깨뜨리고 전 세계를 전란의 불구덩이에 빠뜨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연합국도 캥기는 것이 없지 않을 뿐더러 승자가 패배자를 단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국제법에서 규정하는 침략전쟁의 정의부터 모호했다. 그것만으로는 법정에서 첨예하게 벌어질 나치와의 논쟁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전쟁의 승자가 나치였다면 이런 구질구질한 문제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악명높은 다하우 정치범 수용소에 죄다 잡아처넣고 최대한의 굴욕을 주었겠지만 말이다.

​

나치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 범죄 중에서 정말로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홀로코스트'였다. 러시아어로 '포그롬(Pogrom, 대박해)'라고 불리는 유대인 박해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일상적인 모습이었다고는 하지만 국가 권력이 한 인종 전체를 가스실에 넣어서 조직적으로 절멸시킨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선을 넘은 것이고 그 옛날 훈족의 침공이나 칭기스칸 시절에나 나올 만한 얘기였다. 그것도 비문명국가도 아닌 유럽 제일의 지성과 문명을 자랑하는 독일에서 말이다. 유럽 전역에서 희생자는 60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한 연합군 병사들은 타다 만 뼈무더기와 생존자들의 비참한 모습에 경악했다. 나중에 재판장에서 범죄 현장을 찍은 필름이 공개되었을 때 여론은 격앙되었고 기세등등하던 나치 지도자들조차 꼬리를 내리고 외면하거나 "나는 몰랐다"라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

그보다도 중요한 의문은 과연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까지 하도록 만들었느냐였다. 그리고 정신 감정을 통해서 그것을 알아내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미 육군 정보부 소속 정신과 의사이자 책의 주인공인 켈리였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임에도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느낌이다. 그렇다보니 유대인이라고 해봐야 오늘날 중동에서 행패 부리는 이스라엘을 떠올릴 국내 독자들로서는 아무래도 감정 이입이 어려운.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굳이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런 점에서 다소 불친절하달까.

​

원래 샌프란시스코의 정신병원 원장이었던 더글라스 켈리는 전쟁이 터지자 유럽 전선으로 향했고 전쟁 쇼크로 PTSD에 시달리는 미군 병사들의 치료를 맡았다. 그는 집단 정신 치료를 통해서 많은 병사들을 전선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가 오기 전 1943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PTSD 환자 중 회복한 병사는 2%였지만 1년 뒤에는 복귀율이 95%에 달했다고 한다. 만약 켈리가 조금만 일찍 입대했더라면 패튼 장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PTSD 환자를 두들겨 팼다가 곤혹을 치르는 망신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인데 말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켈리는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1945년 8월 4일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앞두고 나치 최고위 지도자 22명에 대한 심리상담을 통해 이들이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정신의학적인 원인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러 수감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들의 내면을 파고 들었다. 그 중에서도 켈리가 보기에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헤르만 괴링이었다.

켈리는 괴링을 보자마자 그에 대한 또렷한 인상을 갖게 되었다. 다른 나치 수감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괴링이 "지적인 인물이었기에 의심의 여지없이 감옥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아차렸다고 의무 기록에 남겼다. "그는 정신적으로 잘 발달했고 전반적으로 균형 잡혀 있었다. 걸을 때 살이 출렁이는 것을 망토로 가릴 수만 있다면 거대하고 힘이 넘치는 체격이었고 멀리서 보기엔 제법 그럴듯한 용모를 갖춘 아주 강하고 역동적인 인물이었다." - p.44



켈리는 나중에 피고인 22명 각각에게 최소한 80시간을 쏟았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면 몽도르프와 뉘른베르크에서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전혀 남지 않았을 것이니 다분히 과장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학문적 의무감과 개인적 선호가 맞물려 그 가운데서도 괴링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다. 감방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유대감을 쌓아갔고 서로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끌려 상대의 한삼을 사려고 했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연민이나 존경심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둘은 서로의 말과 감정을 이해했고 함께 있을 때만큼은 어느 정도 본모습으로 지낼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겼다. - p.107



교도소라는 부자연스러운 환경에서도 로르샤흐 검사는 평소라면 좀처럼 들여다보기 어려웠을 성격의 깊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켈리는 로르샤흐 검사를 "정신감정에서 가장 유용한 단일 기법"이라고 불렀다. 만약 뉘른베르크 수감자들의 로르샤흐 검사 결과에서 일정한 패턴이나 유사성이 드러난다면 켈리는 '나치 정신'의 핵심적 특징에 성큼 다가서게 될 터였다. 이 검사는 무대 마술처럼 검사자의 숙련도와 해석 기술에 크게 의존했다. - p.132



길버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로르샤흐 검사를 시행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그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 가치를 이해했기에 켈리가 아직 검사하지 않은 피고인들에게 잉크 반점 검사를 시행했고 이미 검사를 받은 일부는 다시 검사했다.괴링 재검 결과에 대한 길버트의 해석은 켈리와 달랐다. 길버트는 괴링의 결과에 대해 "그의 지성이 질적으로 평범하다는 점을 드러냈다"라고 생각했다. 잉크 반점 검사에서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을 많이 묘사하긴 했지만 길버트는 그의 반응에서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탁월하게 창의적인 지능이라기보다 피상적이고 평범한 현실주의"가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즉 괴링은 영리하고 냉소적이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 p.153



기소팀이 괴링에게 유리해진 판세를 수습하고 그의 인격에 다시 타격을 가하는데는 몇 주가 걸렸다. 전환점은 1944년 체포된 영국군 장교 50명의 처형을 괴링이 묵인했다는 증거가 제시되면서였다. 명백한 전쟁 범죄였다. 법정에 제출된 다수의 증거와 달리 그는 유대인 말살을 겨냥한 "최종 해결책"에 대해 자시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히틀러 역시 몰랐다고 말해 좌중을 경악시켰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괴링의 신뢰도는 급격히 추락했다. 그때부터 나치 피고인들은 줄곧 수세에 몰렸다. - p.199



켈리가 피고인들에게 공통된 일탈적 성격, 이른바 나치 병균을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면 그런 증거는 거의 없었다. 대신 그는 그들의 성격에서 자신이 신경증이라고 부른 특성을 발견했다. 이러한 특성들은 드물지 않은 정신의학적 결함으로 분명 그들을 괴롭히고 잔혹함을 부추길 수는 있었지만 정상 범주의 바깥으로 밀어내지는 못했다. 켈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기애에 이끌리는 괴링같은 사람들이 현실에는 셀 수 없이 많다고 믿었다. "그들은 기업가나 정치인으로, 때로는 범죄 조직과 결탁한 사기꾼으로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 p.216



길버트는 뉘른베르크 피고인들 가운데 몇몇을 정상적이거나 평범한 성격으로 보지 않고 위험하고 독특한 인격유형을 지닌 사이코패스로 여겼다. 길버트에 따르면 괴링은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도덕적 용기가 부족했고 친절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상대에게 거칠게 달려드는 성향이 있었다. 가족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괴링에게 전쟁은 국가 이익을 둘러싼 고상한 투쟁이 아니라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우월성을 과시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길버트가 괴링의 이런 불쾌한 특성들을 정신병적 인격의 징후로 제시한 반면, 켈리는 사업과 정치에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보이는 성향으로 보았다. 또한 모든 정치적 권위의 목적을 의심했던 켈리와 달리 길버트는 나치즘을 특수한 조건에서만 뿌리내릴 수 있는 독특하고 유해한 권력 지배 형태로 보았다. - p.236


영화에서는 주로 켈리와 괴링 두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추면서 켈리가 괴링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지만 재미를 위한 허구일 뿐, 이 책에서는 켈리 외에 또 한 사람의 경쟁자를 등장시킨다. 켈리와 마찬가지로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PTSD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뉘른베르크 심리상담에 동참한 구스타브 마크 길버트(Gustave Mark Gilbert) 중위였다. 영화에서 그는 켈리와 갈등을 빚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 것 외에 단역에 가깝지만 오히려 대중적으로나 인생에서 성공한 쪽은 켈리가 아니라 길버트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 서로 협력하여 공동 저서를 내기로 했지만 켈리가 약속을 어기면서 무산되었다. 오만하고 고집 센 성격의 켈리는 길버트를 동료가 아닌 불청객으로 여겼고 물과 기름같았던 두 사람은 협력과 소통 대신 각자의 방식대로 수감자들을 연구했다. 따라서 그 결론 또한 정반대였다. 그럼에도 영화의 주인공이 길버트가 아니라 켈리가 된 것은 괴링과 더 친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켈리의 주장이 요즘 미국 돌아가는 상황에 더 걸맞다는 얘기일 것이다. 길버트는 나치 지도자들이 희대의 사이코 패스이며 패전으로 분노 가득한 독일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이들로 하여금 권력을 쥐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 반면, 켈리는 이들이 결코 특별한 인간들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개새끼'이며 심지어 미국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

과연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누구도 쉽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시절의 검사 방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도 의문이다. 정신병 치료를 한다면서 꼬챙이로 전두엽을 찔렸던 시대이니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중간 쯤 되지 않을까. <살인의 심리학>의 저자 데이브 글로스먼 교수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사람은 본능적으로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의 사이코패스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목베기 시합을 벌였으며 문화대혁명에서 어린 홍위병들은 자기 부모와 스승을 죽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과연 이들을 집단 광기의 피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중에라도 죄책감에 시달렸을까. 하물며 911테러의 주모자들은 인간폭탄이 되는 것을 악이 아니라 선으로 여겼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지만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언제나 똑같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 진짜 문제는 누가 사이코패스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절대 권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실패했고 미국 또한 완벽하지는 못함을 트럼프가 보여주고 있다랄까.

​

책에서는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 진실도 얘기한다.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켈리의 경고를 무시했고 마치 이 때문에 자괴심을 느낀 켈리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보지 않고 미국으로 귀국한 그는 무시당하기는 커녕 정신과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조현병 증세를 드러냈고 때때로 분노를 참지 못하여 심지어 아내에게 총을 쏜 적도 있었다. 나치 지도자들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에게 향했다면 켈리는 가족들에게 풀었다. 뉘른베르크로부터 12년 뒤인 1958년 집에서 저녁 준비 도중에 부부 싸움을 하다가 가족이 보는 앞에서 괴링과 마찬가지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괴링 탓은 아닐 것이다. 정신과 의사로서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정신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원래부터 그런 증세가 있었는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발현되었는지는 이 책에서 나오지 않는다. 어쨌든 정신 결함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흔하다는 사실만큼은 켈리가 입증한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웨이저 - 난파선에서의 반란과 살인, 그리고 생존을 향한 사투
데이비드 그랜 지음, 김승욱 옮김 / 프시케의숲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예전만 못한 듯하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레전드급 인기를 누리는 만화로 <원피스>가 있다. 이 만화의 특징은 고풍스런 범선들이 전세계 바다를 누비던 대항해시대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근대와 미래가 뒤죽박죽 섞인 느낌이지만 말이다. 심지어 주인공 동료 중에는 눈에서 레이저 나가는 사이보그 로봇까지. 배도 겉모습만 범선의 탈을 썼을 뿐 현대 기술을 초월한. 어차피 고증 따지면 지는 만화인지라.


현대식 회전포탑을 탑재한 원피스의 평범한 범선들. 포탑을 돌리는 동력이 뭔지는 둘째치고 나무 갑판이 포의 반동을 견딜 수 있을지.


이 만화의 주인공은 해적을 꿈꾼다. 물론 지나가는 배를 습격하여 삥뜯는 불한당같은 현실 속 해적이 아니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해적이라는 이유이다. 해적의 의미를 단단히 착각한 듯. 아무튼 마음 맞는 동료들과 함께 '위대한 항로'를 누비면서 모험을 즐기고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지만 공권력을 우습게 여겼다는 이유로 해군에게도 쫓기면서 인간으로서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에게 바다는 도전이자 로망이다. <원피스>만이 아니다. 감독과 여배우가 함께 폭망했다는 <컷스로트 아일랜드>나 조니 뎁의 능청스런 연기가 대박을 친 <캐리비안의 해적> 또한 바다는 보물과 모험, 낭만의 장소이다. 지구가 아니라 이세계 속 대항해시대일지도.


​물론 현실의 바다는 훨씬 냉엄했다. 오래전에 읽은 <전투함과 항해자의 해군사>라는 책에서는 그 시절 선원들의 선상 생활이 얼마나 열악하고 고달팠는지를 언급한다. 일단 바다로 나서면 보급이 끊길 수밖에 없으므로 최소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의 항해 동안 먹거리라고는 소금으로 쩔은 염장고기와 벌레가 우글대는 쉽비스킷이 전부이고 제대로 씻지도 않은 오크통에 담긴 식수는 금방 썩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나마도 제때에 항구를 못 찾아서 물과 식량이 도중에 바닥나면 굶주림과 기약없이 싸워야 했다. 하물며 수백명이 좁은 선상에서 부대끼며 살다보니 제대로 씻거나 했을 것이며 위생은 오죽했을까. 해적 따위보다 병균과 기생충이 더 무서웠을 듯. 특히 대항해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괴혈병일 것이다. 비타민C 결핍으로 생기는 이 병은 우리 현대인들이 겪을 일은 거의 없지만 처음에는 만성 무기력과 더불어 '괴혈병'이라는 말마따나 잇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치아가 죄다 빠지고 피부 곳곳에 혈종이 생기며 격심한 통증과 내출혈으로 고통을 겪다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말로만 들어도 끔찍하담서. 옛날 코에이 게임 <대항해시대2>에서 망망대해에서 헤매다보면 괴혈병이 돌고있다면서 선원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던 악몽이 새록새록하다는.


<원피스>에서 괴혈병 치료법. 위의 두 놈이 다 죽어가는 환자한테 저런 식으로 라임을 꾸역꾸역 먹이니까 즉석에서 완치되어 어깨동무하고 코사크 댄스까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프랑스 어린이용 과학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위험하니까 어린이는 따라하면 안되요?


근무환경은 가혹했고 규율은 엄격했다. 로망은 개뿔, 꿈도 희망도 없는 것이 그 시절 바다였다. 하물며 해적은 <원피스>에 나오는 것마냥 무슨 목표와 신념이 아니라 그저 지옥같은 사축생활을 견디다 못해 도망간 사람들의 마지막 도피처일 뿐이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처럼 정식으로 영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해적질을 했다면 몰라도 대개는 한탕을 노리기는 커녕 토벌대에게 쫓겨다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 일쑤였고 평균 수명은 20대를 넘기기 힘들었다고. 이게 다 19세기 말 영국 소설가 로버트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가 만든 이미지. 대항해시대 후반부로 가면서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바다는 위험한 곳이었다. 수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사람을 무한정 갈아넣으며 결국 5대양을 정복했으니 유럽인들의 끈기에는 실로 탐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요즘에 와서는 주4일제도 길다며 워라벨을 강조하는 것이 그동네이지만 말이다.


올초에 프시케의 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웨이저>는 원피스나 캐리비안의 해적처럼 소년의 꿈을 담은 판타지가 아니라 바로 이런 대항해시대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논픽션 소설이다. 저자는 미국 언론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주로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다루는 모양. 2017년에 국내에서도 개봉한 바 있는 <잃어버린 도시 Z>의 원작자이기도. 조금 앞서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에서 어벤져스 뉴페이스이자 고딩 스파이더맨으로 등장하여 "쟨 또 누구래?"했던 톰 홀랜드가 주연을 맡았다고 하는데 보지는 않았담서.


머리 대부분이 멸종하신 이 아재가 저자. 머리숱은 아쉽지만 저서는 죄다 공전의 히트를 쳤다고. 신은 인간에게 다 주지 않는다던가.


이 책은 18세기 영국 해군 소속의 550톤급 소형 군함이었던 웨이저(HMS Wager) 승무원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고난과 비극의 이야기이다. 1734년에 건조된 이 배는 원래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이었지만 5년 뒤 영국 해군에 매각되었다. 대영제국 흑역사 중 하나이자 <젠킨스의 귀전쟁>으로 더 유명한 영국-스페인 전쟁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찰스 웨이저(Charles Wager) 제독의 이름을 따서 웨이저라는 이름이 붙었고 1740년 8월 용맹하고 노련한 베테랑 군인이지만 지휘 경험은 부족했던 데이비드 칩(David Cheap)을 비롯한 250명의 선원과 28문의 대포를 실고 조지 앤슨(George Anson) 제독이 이끄는 소함대의 일원이 되어 남미로 출발했다. 그 중에는 훗날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이자 바람둥이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조지 고든 바이런의 할아버지였던 존 바이런(John Byron) 경도 있었다. 당시 나이는 불과 17살로서 갓 입대한 견습 사관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스페인 식민지 해안가를 약탈하고 보물을 실고 오는 스페인 상선들을 털어 먹기 위함이었다. 그 시절 흔한 정부 공인 해적선인 셈.

소함대의 기함인 센추리온 호의 데이비드 칩 중위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40대 초반의 튼튼한 스코틀랜드인인 그는 코가 길쭉하고 눈빛이 강렬했다. 그리고 도망자이기도 했다. 유산을 놓고 형과 벌이던 싸움, 뒤를 쫓는 채권자들, 적당한 신붗감을 구할 수 없게 만든 빚으로부터 그는 도망쳤다. 그러나 해군의 삼각모를 쓰고 영국 군함의 후갑판에 앉아 쌍안경을 들고 광대한 바다를 항해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찰랑거렸다. 심이어 오만함이 살짝 엿보인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 p.35


이 낡은 동인도 무역선은 5월에 마침내 뎃퍼드 조선소에서 전함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군은 포의 개수로 전함을 분류하는데 28문의 포가 있는 웨이저 호는 가장 낮은 6등급이었다. 이 배의 이름은 일흔 네살의 해군대신인 찰스 웨이저 경을 기념해서 지어졌다. 잘 맞는 이름 같았다. 그들 모두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지 않은가.(웨이저는 '노름' '내기'라는 뜻도 있었다.) - p.50

칩은 배로 들어오는 환자들을 지켜보았다. 너무 쇠약해서 들것에 실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겁에 질린 그들의 얼굴에는 누구나 내심 알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 있었다. 그들의 항해가 죽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월터 신부는 이렇게 인정했다. "그들은 십중팔구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으로 아무 쓸모없는 죽음을 맞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청춘의 활기와 힘을 바쳤던 사람들인데." - p.58

그러나 이들이 만난 것은 스페인 보물선이 아니라 태풍이었다. 악천후 속에서 낙오된 웨이저는 함대를 찾던 중 1714년 5월 14일 칠레 남부의 해안가에서 암초에 부딪쳐 좌초되었다. 항해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생존자들은 인근의 무인도에 상륙했지만 황량한 섬에는 주민은 커녕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구조될 가능성 또한 희박했다. 이들은 엄연한 영국 수병이었지만 문제는 당시 영국 해군의 모호한 규정 덕분에 지휘 계통은 소속된 배가 있을 때에만 유지되며 만약 침몰이나 난파 등으로 배가 소멸하면 더 이상 해군법을 적용받는 군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웨이저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은 대부분 해군에서 잔뼈가 굵은 정예가 아니라 머릿수 맞출 요량으로 억지로 끌려나온 사회 낙오자들이었다. 심지어 군에서 운영하는 요양병원에서 동원된 60~70대의 노인들도 있었다. 항해 도중에 웨이저의 선장을 맡은 칩은 전투라면 몰라도 이런 상황에 가장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신뢰를 얻는 노력 대신 그 시절 여느 귀족 장교들마냥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규율은 금방 무너졌고 성난 선원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칩은 섬에 버려졌다. 그 자리에서 살해되지 않은 것만도 운이 좋았다랄까. 침몰부터 탈출까지 수개월 동안 웨이저의 승무원들은 <오징어게임>마냥 그야말로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여주게 된다. 이 책은 극한 상황에 직면한 인간들의 민낯을 다룬 드라마이다.

환자들은 비좁은 곳의 해먹에서 몸부림치며 크게 고통스러워했다. 고열로 식은땀을 흘리고 양동이나 자기 몸에 구토했다. 헛것을 보는 바람에 휘청거리다가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발진티푸스라는 박테리아 폭탄이 출항하기도 전에 미리 배 안에 심어져 있다가 이제 함대 전체에서 터지고 있었다. "부하들은 점점 크게 앓으며 병약해졌다." 한 장교는 이렇게 적은 뒤 그 열병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라고 덧붙였다. - p.96

웨이저호가 3월 7일 르메르 해협을 통과하자마자 바이런은 많은 동료가 이제 해먹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피부는 처음에는 파랗게 변하더니 금새 석탄처럼 새까매졌다. 월터 신부는 "살에 곰팡이가 잔뜩 피었다."라고 묘사했다. 그들의 몸을 좀먹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점점 영역을 넓히면서 넓적다리로, 엉덩이로, 어깨로 번져갔다. 여기에는 "무릎, 발목, 발가락 간절의 지독한 통증"이 동반되었는데 "내가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인간이 이런 통증을 결코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바이런도 나중에 이 무시무시한 병에 걸려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격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병이 승조원들의 얼굴까지 침범하자 몇몇 사람의 얼굴이 상상속 괴물과 비슷해졌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금방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치아와 머리카락이 빠지고 입냄새는 부패의 악취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 p.131

이제 표류자가 된 승조원들은 몸을 후려치는 차가운 빗속에서 해변에 움츠리고 있었다. 칩이 계산해보니 원래 웨이저호에 타고 있던 성인남자와 소년 250명 중에 145명이 살아남은 것같았다. 모두 수척하고 허약하고 옷차림이 빈약해서 이미 난파를 당한 지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같았다. 이제 열 일곱살이 된 바이런과 벌클리가 보였다. 해병들 다수가 목숨을 잃었지만 지휘관인 로버트 펨버턴은 살아남았다. 칩은 여기에 정확히 어디인지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유럽 배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만큼 이 섬 가까이 지나가는 일도 없을 듯 했다. 그들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 p.171

총성과 하극상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칩이 거처에서 튀어나왔다.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손에는 이미 권총을 쥐고 있었다. 빗줄기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는 코전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총을 쏜 범인이 코전스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그 악당 자식 어디 있어?" 그는 점점 불어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코전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어떤 질문이나 절차도 없이 차가운 총구를 그의 왼쪽 빰에 댔다. 그러고는 자신이 나중에 표현한 것처럼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 p.229

바이런의 동료 중 일부는 너무 굶주린 나머지 시신을 먹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헛것을 보던 소년 한명이 아직 매장되지 않은 시신에서 살을 베어내자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 그것을 먹지 못하게 했다. 비록 대다수의 사람이 글로 남긴 기록에서 식인이라는 단어를 언급조차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이런은 몇몇 사람이 죽은 동료의 시신을 잘라 먹기 시작했음을 인정했다. 바이런은 그것을 "최후의 비상수단"이라고 지칭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곧 이 섬을 떠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이 신성 모독의 행위에 무릎을 꿇을 터였다. - p.259

다음날 아침 벌클리 일행은 다시 항해에 나서면서 황량한 바다의 파도 속에서 작고 하얀 것이 출렁거리는 것을 언뜻 보았다. 커터 호의 돛이었다! 보트는 무사했고 열두 명의 사람도 멍한 상태로 물에 흠뻑 젖기는 했어도 살아 있었다. 벌클리는 이 기적적인 재회로 그들 모두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썼다. 커터 호는 스피드웰 호의 선미에 밧줄로 연결했고 그 배의 승조원들은 수병 1명을 제외하고 전원 스피드웰 호로 올라와서 잠을 청했다. 새벽 2시 밧줄이 끊어지면서 커터호는 바다로 떠내려겼다. 보트는 바위에 부딪혀 박살나면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동료 한명을 또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구하러 해안을 오갈 수단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이제 일흔 명이나 되는 사람이 밤낮으로 스피드웰 호에 빽빽이 타고 있어야 했다. "커다란 불안감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절망에 빠진 사람도 많다" 벌클리는 이렇게 썼다. - p.283


생존자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섬에서 한줌의 먹을 것을 놓고 동료들과 싸워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나만 살아남겠답시고 인간성까지 버리는 일은 없었다. 이들은 가능한 서로를 도왔고 폭군 노릇을 하는 선장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도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몇몇은 선장과 운명을 함께 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했다.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서 <매드맥스>에 나오는 것마냥 다들 모히칸 머리를 하고 막장 찍는 무법천지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 그런 놈도 없지는 않겠지만. 

 

더 놀라운 점은 이들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 중에는 섬에 버려졌던 선장도 있었다. 하지만 섬에서 빠져나와서 온갖 고초를 이기고 문명 세계로 왔다고 해서 불행의 끝은 아니었다. 반란자들보다 두달이나 늦게 섬을 출발할 수 있었던 칩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스페인 식민지에 상륙했다가 붙들려서 기나긴 포로 생활을 보내야 했고 젠킨스의 귀전쟁이 끝난 1746년 3월에야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군사 재판이 열렸고 결과는 유야무야되었다. 어차피 전쟁은 끝났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상대로 이제와서 시시비비를 따져봐야 영국 해군의 위신만 실추될 뿐이라는 것이 높으신 분들의 판단이었다.


웨이저 호가 난파된 장소. 사건을 기리기 위해 배의 이름을 따서 웨이저 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면적은 완도보다 조금 큰 105㎢ 정도인데 워낙 황량한 섬이라서 지금도 사람 사는 동네는 아닌 모양. 2006년에는 당시 침몰한 웨이저 호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한다.


당초 250명이 출발하여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3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재앙을 맞이한 것은 웨이저호만이 아니었다. 웨이저 호가 속한 앤슨 제독의 함대는 6척의 군함과 2천여명에 달하는 승무원이 있었지만 폭풍우와 괴혈병, 말라리아로 기함인 1천톤급의 4등급 전열함 센추리온(HMS Centurion)을 제외하고 모든 배가 침몰하거나 버려야 했고 불과 500여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단 한번의 항해로 80%가 몰살한 셈. 정작 전투로 죽은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고. 게다가 이런 비극은 바다에서 일상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마젤란이 처음으로 세계 일주를 한 지 2세기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대항해시대의 해군이 얼마나 명 짧은 직업인지 보여준다랄까. 그럼에도 앤슨 제독은 다 죽어가는 부하들을 이끌고 스페인 보물선을 상대로 승리했고 그야말로 역대급 대박을 쳤다. 소장 진급은 물론이고 우리 돈으로 280억원에 달하는 상금까지 챙겨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선원들도 각각 20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다. 바로 이맛에 해군한담서.


칩도 말년이 썩 불운하지는 않았다. 이후 더 큰 군함의 선장을 맡았고 스페인 상선을 약탈하여 많은 상금을 받은 다음 해군에서 물러나 고향 땅에서 슬로우 라이프를 즐겼다고. 수습장교로서 마지막까지 칩과 함께 한 바이런 또한 승승장구하여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싸웠으며 캐나다 뉴펄랜드 섬 총독과 해군 중장까지 지냈다. 웨이저 호의 포수이자 섬에서의 반란을 주도했던 존 버클리(John Bulkeley)는 자신들이 겪은 재난에 대한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메데따시~메데따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재난 스토리이지만 저자의 필력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내용을 단숨에 읽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위키백과를 보니까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얘기가 있더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을, 영화에서 약빤 연기를 보여준 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는다고. 대항해시대를 철저히 고증한 것으로 잘 알려진 영화가 2003년에 나온 러셀 크로우 주연의 <마스터 앤드 커맨더>인데 그 못지 않을 듯. 벌써부터 기대가.



번역 또한 전문 번역가 작품답게 전반적으로 매끄럽다. 하지만 한 가지 지적할 부분이 있다면 p.35에서 선장인 데이비드 칩의 계급을 중위라고 번역했는데 엄밀히 말하여 "first lieutenant"는 육군에서는 중위지만 영국 해군에서는 '일등항해사'라는 뜻이며 대위에 해당한다. 육군의 대위인 "captain"이 해군의 대령인 것과 마찬가지. 원문을 보면 "센추리온 호의 데이비드 칩 중위"보다는 "센추리온 호의 일등 항해사인 데이비드 칩(David Cheap, the first lieutenant of the Centurion)"이 더 맞지 않을까 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