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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마르크 블로크 지음, 김용자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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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 15일 수요일 아침 7시 30분, 프랑스 총리 폴 레노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그때까지 비몽사몽이었던 처칠의 잠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레노는 울부짖듯이 영어로 외쳤다. "우리가 졌습니다." 그는 다시 말했다. "우리가 졌습니다. 전투에서 졌습니다." 아니, 전쟁은 이제 시작되지 않았던가. 불과 닷새전 노르웨이 원정 실패로 탄핵을 받아 물러난 체임벌린 대신 영국 전시 총리로 임명되었던 처칠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당할 수 있다는 말이오?" 레노는 아르덴을 돌파한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스당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진격 중이라고 말했다. 처칠이 아직 승리의 기회가 있을 거라면서 필사적으로 달래려고 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레노는 "우리는 이미 졌습니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바로 전날 독일군이 뫼즈강을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프랑스 장군들은 스당이 돌파되자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허를 찔렸다거나 한 방 먹었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프랑스군 전체가 대혼란에 빠졌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그동안 쏟아졌던 수많은 경고를 고집스레 무시했던 모습이 무색했다. 프랑스군의 이인자인 알퐁스 조르주 장군은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스당이 돌파당했다! 무너졌다고!"라고 외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보다 못한 참모장 두망(Joseph Édouard Aimé Doumenc) 장군이 "전쟁에서는 원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법입니다."라면서 달래야 했다.

싸움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독일군이 프랑스 땅을 밟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며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 원수는 이제는 상황을 터무니없이 과장하여 정치인들까지 겁에 질리도록 만들었다. 이날 저녁 가믈랭은 국방부 장관 달라디에를 향해 독일군이 최후 방어선을 돌파하여 파리로 접근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달라디에가 1914년처럼 즉각 반격하여 적의 진격을 막아내라고 명령하자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그를 비롯한 프랑스 전체를 절망에 빠뜨렸다. 다음 날 아침 허둥지둥 파리로 날아온 처칠이 "전략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도 가믈랭은 "전혀 없습니다."라는 맥 빠진 대답으로 말문을 막아버렸다. 처칠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이었다."라고 썼다. 게리 올드만 주연의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도 처칠이 프랑스까지 날아가서 그들의 투지를 다시 불붙이려고 애쓰지만 프랑스 지도자들의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에 당황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칠로서는 앞이 깜깜했을 듯.

연합군 주력부대가 독일군을 딜 강에서 저지하기 위해서 벨기에로 부지런히 전진하는 동안 마지노 요새의 빈틈을 뚫고 들어온 독일군은 나중에 처칠의 유명한 표현대로 마치 낫으로 이삭을 베듯이 한방에 쓸어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던 연합군 수뇌부는 독일군의 새로운 전술인 전격전에 당했다고 떠들었지만 그 패배의 상당부분은 실상 그들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일이었다.


더욱 어이없는 점은 프랑스군 수뇌부가 독일군에게 허를 찔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차피 다 진 싸움이라며 전의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막상 히틀러와 독일군은 승리는 커녕, 이제부터가 진짜라면서 마음 단단히 먹고 있는 판국이었는데 말이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거나 판세를 뒤엎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포위된 150만명의 연합군 중 불과 33만명만이 덩케르크에서 겨우 탈출했다. 이들을 구한 것은 그때까지 남쪽에 남아 있던 100만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아니라 영국 해군과 목숨걸고 자신의 배를 끌고 영불해협을 넘어온 수많은 영국 민간인들이었다. 프랑스는 6월 22일 콩피에뉴 숲에서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만약 프랑스인들이 끝까지 버티느니 일찌감치 항복하는 쪽이 히틀러의 선처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면 엄청난 착각이었다. 히틀러에게 관용은 없었다. 거액의 배상금은 물론이고 영토의 2/3는 독일의 직접 지배에 들어갔으며 나머지 1/3 역시 독일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또한 100만명 이상의 병사들이 전쟁 노예로서 독일로 끌려갔다. 전쟁이 제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패전은 그보다 몇 배 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망각한 대가였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무기력하고 치욕스러웠던 1940년의 여름은 이렇게 끝났다.

히틀러의 지배는 꼭 4년 뒤인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과 프랑스 해방으로 끝났지만 그후에도 프랑스인들에게 한 가지 의문만은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졌는가였다. 프랑스는 독소전쟁에서의 소련군처럼 손 놓고 있다가 전략적인 기습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기 수개월 전부터 이미 서부전선은 전시 상태였다. 그렇다고 1870년처럼 자만하여 독일을 얕보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결전을 위해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했고 수십만명의 영국 원정군도 가세했다.

그들로서는 적어도 쓸 수 있는 수는 다 쓴 셈이었다. 서방의 언론인들은 서부 전선에 결집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대를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이번 전쟁은 반드시 프랑스군이 이길 것"이라고 장담했다. 막상 뚜껑을 열자 일방적으로 쓸려나간 쪽은 프랑스군이었다. 독일을 쉽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이토록 어이없게 질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로 독일군이 그렇게 강했던가. 그렇다면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프랑스 지도자들은 뭘 했던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군의 손발을 그토록 꽁꽁 묶어두었고 막대한 혈세를 마지노 요새 건설에 쏟아넣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원래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무개념한 장군들 덕분에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역사상 최악의 대국민 사기극으로 전락한 마지노 요새. 10년 전 이 요새 건설을 처음 제안했던 프랑스 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는 저승에서 "난 억울하다고!"라고 외치고 있을 듯.

서방 언론들이 독일의 놀라운 승리를 '전격전(Blitzkrieg)'이라고 부르며 호들갑을 떠는 동안 가믈랭을 비롯한 패전지장들은 그 뒤에 숨는 쪽을 선택했다. 무능한 똥별들이 그러하듯 이들 역시 자성의 목소리 대신 모든 책임을 남탓으로 떠넘겼다.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고 동맹국들이 배신했으며 무엇보다도 프랑스 내부에 숨어 있던 '제5열'들이 사보타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전쟁 중 보여주었던 이들의 행태를 본다면 그야말로 뻔뻔한 소리였다. 그것은 이적행위이나 다름없는 직무유기였다. 무슨 말을 늘어놓은들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장 빠른 시간에 말아먹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스탈린이었다면 고민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이들을 모조리 총살시키거나 시베리아 굴라크로 보냈을 것이다. 비인간적이기는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늙고 고루하면서 뇌가 굳어버린 프랑스 장군들의 케케묵은 상식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상 이해할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불행은 자신들의 둔감한 사고방식으로 따라잡기에는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 하필 이런 똘빡 영감들에게 운명을 맡겨야 했던 모든 프랑스인들의 불행이기도 했다.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 도서 <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은 지난 수십년 동안 수없이 제기되었고 논쟁의 대상이었던 "그 때 우리는 왜 아작났는가?"를 다룬 책이다. 시중에는 독일 연방군 장교가 쓴 <전격전의 전설>이나 <전격전, 프랑스 패망과 거짓 신화의 시작>, <히틀러 최고 사령부>처럼 그동안 한편의 신화로 포장되었던 독일 전격전의 허상을 벗기는 책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다. 전후 책상 위에서 기록으로 당시를 재구성한 교수나 군인이 아니라 그때의 패배를 직접 겪은 사람의 증언이라는 점이다. 저자 마르크 블로크(Marc Léopold Benjamin Bloch)는 파리 대학교의 중세학 교수이자 유대인으로 군 입대를 한번도 아니고 무려 세번이나 한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했을 때 그는 30대였고 진작에 군 복무를 마쳤지만 부사관으로 재입대했다. 마른 전투와 솜 전투 등 굵직굵직한 전투를 경험하면서 두번이나 중상을 입었으며 최고 영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대위로 제대했다.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여신의 가호를 받는 행운아였던 셈.

마지막 복무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1939년 9월 폴란드 전역이 폭발하고 연합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동원령이 선포되었고 재입대했다. 그는 이미 53살의 중년이었고 사회적으로 저명한 교수였음에도 계급은 여전히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예비역 대위였다. 본문에서는 그 이유가 자신이 군에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찍힌 탓이라고 말한다. 당시 프랑스군이 얼마나 경직되었으며 능력보다 절차와 위계질서를 따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프랑스군은 민주 군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강의 차 미국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모든 가족이 비자를 받지 못하여 포기했다. 서부전역이 폭발하자 프랑스 제1군에 소속되어 가믈랭의 명령에 따라 벨기에로 향했다가 독일군에 포위되었지만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참여하여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대로 영국에 남을 수도 있었음에도 가족이 프랑스에 있다는 이유로 돌아왔다. 프랑스가 항복했을 때 운좋게 포로 신세가 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운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저항군에 가담한 그는 1944년 3월 8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고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프랑스 해방이 눈앞에 닥치던 6월 16일 총살당했다. 그 사이 어머니와 병석에 있었던 아내도 사망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말년에 와서 전쟁으로 인생이 꼬인 셈이다.

이 책은 덩케르크 철수를 거쳐서 영국에서 귀환한 저자가 프랑스가 항복한 직후 책임 대신 변명만 늘어놓는 군의 높으신 상관들을 반박하고 프랑스의 지성이자 하급 장교로서 자신이 목격했던 프랑스군, 더 나아가 1918년 승리 이후 프랑스 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 어이없는 패배의 진짜 원인은 독일군의 기상천외한 전술이나 신무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 물론 히틀러 치하에서는 감히 내놓을 수 없었고 그가 고인이 된 뒤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 출간되었다고. 말하자면 프랑스판 징비록인 셈. 그렇다보니 그의 질타는 그야말로 신랄하면서 촌철살인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방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가. 의회제도, 군대, 영국, 간첩의 탓이라고 우리 장군들은 대답한다. 결국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프르 장군이 훨씬 현명했던 셈이다! "마른 전투에서 이긴 사람이 나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전투가 패배로 끝났다면 그것이 내 탓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 p.34

그러나 "후방"에 있어야 할 부대가 "전방" 부대라고 하는 부대보다 실제로는 전투 지역에 더 가까이 있게 되자 놀라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미 뫼즈 강에 틈새가 열리자 이동 도중에 서둘러서 전선의 돌출지대를 메운다는 구실로 늑대의 벌린 아가리 안으로 던져 넣으려던 한 사단의 하차 지점을 바꾸어야 했다. 어떤 사단의 장군이 사령부로 쓸 지점에 도착해보니 적이 그보다 먼저 와 있는 경우도 있었다. - p.54

우리는 방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가. 의회제도, 군대, 영국, 간첩의 탓이라고 우리 장군들은 대답한다. 결국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프르 장군이 훨씬 현명했던 셈이다! "마른 전투에서 이긴 사람이 나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전투가 패배로 끝났다면 그것이 내 탓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 p.34

우리가 전차, 비행기, 견인차를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닌 돈과 인력을 시멘트에 들어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동부 국경과 마찬가지로 노출되어 있는 북부 국경선에 충분한 방어선을 구축할 만큼 현명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첫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마지노 선을 믿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방어선은 많은 비용을 들이고 요란한 선전을 하면서 건설되었으나 좌측에서 너무 짧게 끝나는 바람에 결국 라인 강에서 돌아 나아가 시작만 하고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마지막 순간에 노르도에 서둘러서 시멘트 보루를 건설하는 쪽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전방 방어에만 적합하도록 건설되어 정작 후방 쪽에서 점령당했다. - p.61

군이 소속 부대의 소재를 모르는데,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명령이 제시간에 도달하겠는가? 어느날 기병부대가 이동하자 유류 저장소 장교가 평소처럼 선량한 고객을 만나러 갔다. 그가 부대로 돌아오자 나는 그를 제3국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의 고위 전략가들이 새로운 사령부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지를 확인해두는 것이 현명할 듯 싶어서였다. 대조한 결과 실제 위치와 지도 위에 목탄으로 이미 표시한 지점 사이에는 약 30km의 차이가 있었다. 우리 지적에 대해 그들이 입 끝으로 내뱃듯이 하던 "고맙소"라는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중략) 게다가 우리는 "영국군"과의 협조 체제를 제대로 조직했는가? 우리 연락체계의 비극적인 결함이 문자 그대로 이보다 더 잔인하게 표출된 것은 없을 것이다. - p.76


장군이 노했다. 전사는 원한다면 사창가에 가도 되지만 부부간의 포옹은 자기 기준에서 연약함의 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새 지휘관은 그보다 먼저 우리를 지휘한 나이 많은 예비역 장군에게 15일간의 근신 처분을 내렸다. 그 예비역 장군이 어느날 저녁 나이든 아내와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나. 사람들은 웃었다. 며칠 사이 사기가 바뀌었다. 장교에게 친절하고 정중하던 인사가 어느 순간 억지로 할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군대의 건강하고 좋은 분위기를 망쳤다. - p.101

프랑스 군대는 옛날실 처벌을 충분히 없애지 않았다. 반면, 사령부는 적이 준 몇 개월의 유예기간을 이용하여 간부급에게 필요한 숙정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제1군에서 몇 명을 요란하게 좌천시켰다. 그러나 그때까지, 즉 그렇게 늦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가? 왜냐하면 이미 전부터 몇 가지 결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02

독일군은 지나면서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우리와 비교해서 확실히 젊어보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쓸데없는 가지를 쳐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예비역 하사관에게 약간의 교육을 더 시켜서 소위나 중위 계급으로 올려주는 일도 하지 않았다. 1914년의 경험에 의해서 이들 중에 권위와 능력과 열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그들 상관인 대령이 사관후보생 과정에 나가는 것을 막은 경우를 알고 있다. 아마도 연줄이 불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 p.117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장교들, 1914년이나 1918년의 참전용사로서 아직 늙었다고 할 수 없는 사람 중에도 변화가 불가능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의 사령부는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임을. 평화시 승진규칙에 따르면 40세에 소령이 되고 장군이 되려면 60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훈장을 가득 단 백발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무훈을 세웠을 때는 젊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채 그들의 젊은 후배들의 출세길을 막는 일을 하고 있다. - p.133

"더러운 물질주의"라고 어느 날 자신도 그렇게 정신적 순수함에 매료되지 것같지 않은 한 정치인이 외쳤다. 그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노동자는 인간의 노동력을 파는 상인이다. 직물, 설탕, 또는 대포를 하는 상인이 적게 주고 많이 받으려는 상업의 대법칙을 적용한다고 해서 놀랄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정당한 이 태도가 국민이 위험에 빠진 상태에서 병사들의 희생을 앞에 두고는 매우 적절치 못한 것이 된다. 내 시골집 이웃은 배관공이었는데 징집되어 한 공장에서 일할 때 그가 작업장 내의 불문율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동료들이 어떻게 그의 연장을 감추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이것이 무서운 고발장의 생생한 상태이다. 물론 나는 예가 없지 않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쟁 승패에 크게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 p.147

소위 "우파"라는 정당들이 오늘 패전 앞에서 그렇게 쉽게 포기한 사실에 역사가는 그리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왕정복고로부터 베르사유 의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거의 전 과정에서 그것이 그들의 변함없는 전통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오해가 한때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를 혼동하면서 규칙을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차례로 극단적인 반독주의를 표방하다가 우리를 독일의 대륙체제에 봉신으로 들어가게 한다거나, 푸앵카레식 외교의 옹호자로 자처하다가 선거 때는 그들의 적이 주장하는 소위 주전론을 격렬히 바난하는 태도로 돌변하는 것은 이상한 정신적 불안정이다. 그들의 추종자들 역시 사고의 극단적인 이율배반에 놀라울 정도로 무심했다. - p.162

내 나이의 사람들은 조국의 재건을 담당하지 못할 것이다. 패배한 프랑스의 정부는 노인들의 정부였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프랑스는 젊은이들의 것이어야 한다. 지난번 전쟁의 선배들과 비교하여 그들은 승리 후에 오는 게으름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슬픈 이점을 가질 것이다. 최종적 승리가 어떤 것이든 간에 1940년의 커다란 참패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p.187

저자는 자신이 겪은 1940년의 여름과 함께 프랑스가 깨진 이유에 대해 2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다음과 같이 구구절절이 설명한다. 읽다보면 상층부의 무능한 똥별들에 대한 저자의 분노가 와닿는다는.

  1. 독일군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느린 명령 체계와 반응속도

  2. 독일군에 비하여 경직된 사고방식과 창의성 부재

  3. 독일군에 비하여 시대에 형편없이 뒤떨어진 전술

  4. 독일군에 비하여 사령부와 현장 부대, 또는 현장 부대간의 협조 결여와 소통 단절

  5. 독일군에 비하여 낙후된 병영 문화

  6. 독일군에 비하여 낮은 사기와 훈련 상태

  7. 독일군에 비하여 고령화된 프랑스군

  8. 평화 때에는 센 척 하다가 위기 앞에서 제일 먼저 꼬리를 내린 정치인들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장군들이 지배하는 1940년 프랑스군은 여전히 병사들에게 화력보다 정신력을 강요했다. 병사들에게 더는 먹히지 않아서 문제이지. 자율성과 창의성 대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으며 승진은 연공서열이었고 무능한 자가 아니라 조직 위계질서를 거스르는 자를 속아냈다. 한마디로 남들 위에 튀기보다는 사고 안 치고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장땡이라는 얘기였다. 가믈랭을 비롯한 프랑스군 수뇌부는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20년의 평화기를 거치면서 더 이상 군사 전문가가 아닌 군복 입은 공무원들이었다. 말하자면 정신력 빠진 일본군이랄까. 일본군에서 그거 빼고 나면 뭐가 남겠음. 따라서 프랑스가 방심하는 동안 독일군이 길러낸 진짜 전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프랑스의 저출산 고령화라는 점이다. 산업 혁명 이전에만 해도 유럽 최대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는 19세기에 오면 일찌감치 심각한 저출산의 늪에 빠져 버렸다. 남들은 '멜서스의 덫'이라고 하여 오히려 지나친 인구 폭발을 걱정하는 판국이었는데 말이다. 그 바람에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심지어 영국에게도 뒤쳐져 버렸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적에 눈이 먼 장군들의 정신나간 돌격주의는 프랑스에서 한 세대를 사실상 파멸로 몰아넣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프랑스의 출산율은 회복되지 못했고 1940년 당시 영국이 5천만명, 독일이 7천만명, 소련이 2억명인데 프랑스는 4천만명에 불과했다. 덕분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군의 평균 연령은 30대 후반이었다. 20대는 안 보이고 하나같이 동네 늙다리 야비군 아저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 당장 저자부터 평균 연령을 올려놓는데 일조한 셈. 재입대 영장 한장에 집에서 끌려나온 중년남들에게 뭔 싸울 의지가 있었을 것이며 가혹한 전장에서의 체력도 젊은 애들에 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란 나이 먹고 머리 굵어지면 어리고 철 모를 때처럼 위에서 시킨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 가미가제만 해도 나이 많은 고참들은 눈치껏 죄다 빠지고 새파란 20대 청춘들만 총알받이로 내몰려서 정신차리고 보니 아스쿠니 신사로 향하는 길이었던지라.

실제로 스당을 지키던 제55사단의 예비군들은 독일군을 만나기도 전에 단지 폭격을 한 차례 받은 것만으로 모조리 달아나면서 사단이 통째로 와해되었다. 하나가 괴멸하자 주변 부대들도 줄줄이 뒤따랐고 결국 프랑스군 전체가 무너졌다. 독소전쟁에서는 반대였다. 할더가 "12개 사단을 격파하면 어디서 또 12개 사단이 튀어나오더라"라는 말마따나 소련군이 그렇게 당하고도 끝없이 병력을 찍어내어 독일군을 수세에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출산율에서 독일을 압도한 덕분이었다. 젊은 남자가 무려 3배나 많았다고. 그 시절 출산율 죄다 어디 가고 요즘은 아예 러시아에서 30대 이상 남자를 보기 어려울 정도라나. 10대때부터 죄다 골초에 보드카에 찌들어서. 여기에 푸틴이 전쟁까지 벌이고 있으니 제 명대로 살기 어려운 게 러시아 남자들.

여기에 하루에 한번씩 자신이 상남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제 수명을 깎아먹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는 것이 그 동네 철칙인지라.

물론 밀덕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자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는 이 책을 1940년 가을에 썼고 오늘날 우리는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생각만큼 현대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많은 결점 또한 안고 있었다. 4년 뒤 그가 총살되었을 때 독일군은 서방 연합군과 소련군의 맹렬한 공세 앞에서 수세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1년도 되지 않아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 그가 말하는 프랑스군의 문제점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전쟁에 졌기에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결과론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만약 저자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아 10년 쯤 지난 뒤에 다시 쓸 수 있었다면 내용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어쨌든 프랑스가 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과부적이나 '졌잘싸'도 아니고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완패로 말이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고 왜 졌는지 철저히 분석하고 반성하여 그런 치욕의 역사를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네 현실은 정반대이다.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 법이라며 조직의 논리를 앞세우는 장군들, 그리고 이기적인 행태를 호되게 질타해야 할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은 오히려 실패자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하여 감싸기에 급급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기억은 망각되고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말마따나 졸장이 명장으로 둔갑하고 도리어 묵묵히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 책임을 뒤집어 쓰는 예가 얼마든지 있음을 작년에 <별들의 흑역사>를 쓰면서 뼈져리게 절감할 수 있더라. 당장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그런 점에서 저자의 증언은 8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러모로 시시하는 바가 크다. 다만 출간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닌 초고인지라 다소 정제되지 않은 느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이 옥의 티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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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중일전쟁부터 패전 이후까지
사이토 미나코 지음, 손지연 옮김 / 소명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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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IP TV에서 우연히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이라는 영화가 하더라. 동명의 만화가 원작인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수년 전 동경대 수학과 다닌다는 중2병 꼬꼬마가 항공 주병론을 제창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스카웃 되어서 해군의 전함 꼴통들에 대항하여 훗날 일본을 구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일뽕 가공전기라고.

영화 초반부 야마토 특공에 나섰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하는 야마토. 웅장하다기에는 뭔가 값싼 CG 삘이 팍팍. 그렇다고 <남자들의 야마토>처럼 비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원작에 숟가락 얹기에만 급급하여 대충 만들어 욕을 처먹는게 요즘 일본 영화들인지라.


주인공이 야마모토에게 스카웃되는 과정도 일본 만화스러운 전개. 신형 주력전함의 경합을 놓고 수세에 내몰린 야마모토가 단골 기생집에서 술을 걸치면서 상대편의 건조 예산이 엉터리임을 증명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우연히 옆방에서 기생들과 숫자 놀이를 하는 주인공을 발견하고 수학의 달인인 그를 삼고초려한다는 내용. 제아무리 일본인들이 선망하는 동대생이라고 한들 교수도 박사도 아니고 끽해야 스무살 남짓의 학부생인데. 만화니까. 중2병 애송이를 상대로 해군 중장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도움을 애걸하는 야마모토 "이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날 걸세." "전쟁요? 누구랑요?" "미국일세."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 주인공 "미국과는 절대 전쟁이 일어날 수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건가?" "공업력에서 50대 1, 석유 생산력에서 120 대 1입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죠. 애들도 이런 싸움은 안 해요." "그걸 하려는 게 일본 해군일세."


아버지 뻘의 별 두개짜리 장군(중장)을 상대로 바보같은 소리 말라며 중2병의 패기를 단단히 보여주는 주인공. 실제로 그 바보같은 짓을 벌여서 나라를 패망의 나락으로 몰고갔다는 점에서 진짜 중2병은 이런 꼬꼬마가 아니라 일본 군부였다는 일본인들의 자학 디스.


청나라, 러시아를 꺾은 것만 믿고 자만한 나머지, 정신줄 놓고 미국한테 덤볐다가 영혼을 탈탈 털리고 막판에는 핵폭탄까지 두발 맞은 덕분에 그 트라우마가 뼛속까지 단단히 각인되었는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는 정신줄만큼은 놓지 말자는 것. 그럼에도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은 죽어도 없다는 점에서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에는 오만한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보여준다랄까. 하긴 그런 게 세상 이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본이 미국에 다시는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패전 이후의 궁핍함 속에서 미국이 공급한 막대한 식량이 일본인들의 위장을 사로잡은 덕분이기도 하다. 일본은 전쟁 통은 물론이고 전쟁 이전에도 영양실조가 만연할 만큼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국가는 근대화에 성공하여 세계 최강 미국과도 맞장을 뜰 만큼 부강해졌다고 하지만 소수 엘리트들을 제외하고 정작 대다수 국민들은 그 수혜를 거의 보지 못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나 싶을 정도.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남아도는 힘을 전쟁이 아니라 국민들 복지에 쏟아야 함에도 그건 일본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다스리고 쥐어짤 대상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한결같은 일본 지배자들의 사고이다. 심지어 명색이 21세기인 지금도 그리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정치하는 양반들의 영혼이 바뀌지 않는 이상에야.

에도 시절 '마비키(間引き)'라고 하여 가난한 농민들이 입 줄이기 일환으로 영아 살해가 보편적이었던 일본은 근대 이후에도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도시는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이밥에 고깃국"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오죽하면 농촌 출신 병사들이 군대 와서 처음으로 고기라는 것을 접했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패전 덕분에 국민들을 쥐어짜던 일본 지배자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미국 점령군은 일본인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풍요로움인지를 각성시켜 주었고 일본인들이 다시는 배를 곪을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인들의 신이 되었다. 이 점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진 뒤 '순무의 겨울'을 보냈던 독일인들이 그때의 치욕을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것과 결정적인 차이이다. 제아무리 사무라이 정신이 어쩌구해도 배고픈 놈이 돈 주고 밥 주는 놈에게 어캐 이겨.


맨날 치고 박고 싸우는 전쟁사 말고 독특하거나 별난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라면 한번 주목해 볼만한 신작도서가 나왔다. 소명출판사에서 나온 <전쟁은 일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라는 책이다. 중일전쟁 때부터 태평양전쟁 말기까지 여성 잡지에 실린 요리기사를 통해서 일본인들의 전시 생활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사이토 미나코(齊藤美奈子)라는 여류 문학 평론가. 전문 역사가나 음식과 관련된 사람은 아닌 듯.

도입부에 삽입된 1929년 단오에 일본인들이 먹었다는 군국주의 버전의 오셋쿠 요리(端午の節句料理)라는데. 비행기 미트볼, 군함 샐러드, 철모 메쉬. 여기에 일장기까지 꽂는 센스. 밀덕으로서 한번 먹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본문에 레시피도 있다는.

원래는 이렇게 먹는거람서.


중일전쟁이 폭발한 뒤 식량이 부족해지자 관에서 권장하는 소위 절식밥(節約メシ). 현미를 물에 담근 다음 하루종일 불리면 부피가 불어나서 똑같은 양이라도 주부들 입장에서는 든든하게 보인다나. 뭔 눈속임도 아니고. 공무원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그렇지.


그나마 이조차도 나중에는 진수성찬이 되는데.

태평양전쟁 말기 식량이 바닥나고 배급제가 무너지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밥 대신 집 근처에 난 잡초 뜯어 먹는 판국이라. 버마에서 일본군 고위 장군으로 암약하면서 항일을 위해 멸사봉공하시던 어느 분이 그러셨지.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서 풀만 먹어도 된다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은 고사하고 만만한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부터 대번에 식량 부족에 직면한다.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보다 원래 일본이 인구는 많은데 식량이 부족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시절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 수탈하거나 동남아에서 싸게 수입한 쌀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높으신 분들이 우리 일본은 앞으로 공업국가가 될 것이므로 애써 농업을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고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폭발하자 수송선 태반이 전쟁 물자 수송에 동원되면서 국민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 수입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당장 먹거리부터 줄어들었다. 뒤늦게야 식량 증산과 함께 머리 굳은 일본 지도자들이 내놓은 방법이란 게 저런 식의 절식 강요였다. 한마디로 다들 적게 먹으면 그만큼 식량도 덜 필요하다는 것.

이 책에는 전쟁 발발 이전의 평화로울 때부터 패전기까지 당시 일본의 식생활과 다양한 레시피를 소개한다. 처음에는 다양한 식재료로 메인 메뉴는 물론이고 아이들 디저트까지 지금 만들어 먹어도 괜찮다 싶은 것에서 일본이 패전에 가까워지는 뒷페이지로 갈수록 식단이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 체감된다는.

전시 레시피에는 가끔 뜬금없는 내용도 보인다. 절미요리가 대표적인데, 대용식을 그토록 열심히 권장하면서 고구마나 감자, 호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절미요리라는 이름으로 우동, 소바, 때로는 쌀을 부족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닌가. 우동과 소바 정도는 그대로 먹어도 될 텐데 말이다. 하물며 쌀은 더더욱 그렇다. 주식을 모두 빵이나 우동으로 대체하면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리하여 반찬에 변화를 주고 주식은 가능하면 밥 한공기, 식빵 한장을 권장했다. - p.55

게다가 이처럼 관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국민들은 닥치고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 시절답게 살림 비법이랍시고 앞뒤 맞지 않는 탁상공론적인 권고사항도 난무한다. 한마디로 "쌀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라는 식. 쌀보다 밀가루가 더 비싼 나라에서 말이다. 주부들 앞에서 시장 한번 안 가본 티를 낸담서.

배급된 고기는 여러번 나누어

배급된 고기는 한 번에 다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나누어 사용합시다. 우선 큰 덩어리 째로 기름을 둘러 노릇하게 구은 후 뜨거운 물을 살짝 잠길 만큼 넣어 맛있는 스프를 만듭시다. 그런 다음 고기를 꺼내고 스프에 여러가지 제철 채소를 넣고 푹 익힙니다. 고기는 그대로 2~3일 보관할 수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두세번 나누어 사용하도록 합시다.

적은 양의 고기로 여러번 사용하기

갈거나 작게 다진 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어 섞은 후 미트볼 식으로 졸이거나 볶거나 하고 고르케나 양배추롤, 잡채 등을 만들면 적은 양의 고기로 풍성한 상차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읽고 있으면 빈곤한 식단으로 가족을 위해서 어떻게든 맛있게 창조해야 하는 그 시절 주부들의 애환이 절절이 와닿는달지. 차라리 전쟁을 멈추라고.

말린 밥 이용법

아무리 깨끗하게 먹는다고 해도 밥통이나 찜통에 눌러붙은 밥알이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가는 제반에 널어 바싹 말려두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름에 튀겨서 국물 요리 건더기로 사용하거나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서 설탕옷을 입히면 아이들 취향을 저격한 맛있는 간식이 됩니다. - p.74

이른바 설탕 누룽지 레시피. 이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에도 있는 듯. 그러고보면 밥솥에서 누룽지 말려서 먹었던 것이 언제던가 싶다는. 요즘이야 인터넷에서나 구경하는 물건이지만.

오징어말이 튀김

달걀 2개에 중간 크기의 오징어 3마리면 5~6인 가족이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오징어는 껍질을 벗기고 배를 갈라 절구공으로 두들기거나 부엌칼로 잘 저며줍니다. 이 안에 오징어 다리와 껍질 벗긴 완두와 당근, 피, 죽순 등 여러 채소를 잘게 썰어넣고 섞어줍니다. 밀가루 적당량을 넣고 소금으로 간합니다. 달걀은 잘 풀어 1할 정도의 물과 소금 한 자밤을 넣습니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얇게 부쳐내어 도마 위에 펼친 다음 밀가루를 뿌리고 갈아 놓은 오징어를 깔아 끝에서부터 말아줍니다. 끝 부분은 물에 푼 전분가루를 발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2~3개 꼬치로 고정한 후 찜통에 넣고 7~8분 찐 후 잘 익으면 꺼내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굴려가며 바싹하게 구워줍니다. 1.5cm 두께로 잘라 접시에 담아내고 국화꽃 등으로 장식합니다. 오징어 유부말이, 갈분 소스 버무림은 오징어말이 튀김과 속은 같으나 달걀 대신 유부로 말고 쩌낸 것을 곱게 썰어 갈분 소스를 걸쭉하게 얹어서 일본식으로 맛을 냅니다. - p.103

태평양전쟁 시절 아버지와 남편에게 인기 있었다는 전시 레피시. 이런 건 요즘도 술안주로 쓸만할 듯. 일본 근해에 오징어가 하도 많이 잡힌 덕분에 오징어의 오자만 들어도 물릴만큼 먹었다나. 아직은 중국 어선 떼가 그 동네까지 마수를 미치지 않을 때인지라.

저자는 전시 레시피를 통해서 그 시절 일본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특유의 역사적 피해 의식만큼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읽다보니 이런 대목이 있더라.

1941년 미국이 대일 석유 수송을 금지하자 일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진출을 꾀하게 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 p.181

1941년 8월 1일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에 전격적으로 석유 금수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미국의 금수조치가 일본을 궁지로 내몰아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이 프랑스령 베트남에 무력 진주하고 1940년 9월 27일 추축 조약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일 협상 과정에서 베트남에서의 철수와 추축에서 탈퇴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일본이 거부했기에 금수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미국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일본이 미국을 실질적인 적국으로 취급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이해하는 셈이다. 미국을 신으로 여기는 것과 별개로 자신들의 침략전쟁은 정당하다는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그건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식. 그러니 뭔 과거사 사죄를 하겠음.

전후의 식량난을 미국의 원조물자로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점령군은 군용 통조림 5천톤을 방출하고 라라물자와 유니세프로부터 기증받은 탈지분유 등도 동원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가을부터는 탈지 분유를 수입하는 등 학교 급식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분투했다. 일본인의 대미감정이 호감으로 바뀐 데에는 이러한 원조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 p.196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과 더불어 부채의식도 함께 안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일본인들의 복잡한 마음이랄까.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트루먼 행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패전 일본인들이 재빨리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이웃한 남한에서 대량의 식량을 수출한 덕분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맥아더 입장에서는 남한보다 자신이 직접 통치하는 일본이 더 중요했고 남한의 미군정은 어차피 자기 부하들이 맡고 있다보니 명령 한마디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행복은 우리의 불행이었다. 미 군정의 마구잡이식 공출에 따른 물자 부족은 일제 말기를 능가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미 군정의 어떤 양반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조선인들은 미역만 먹어도 된다"라고 하여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해방 직후에만 해도 미군에 우호적이었던 남한이 1년도 되지 않아 반미로 돌아서고 1946년 10월 1일 대구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반미 시위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의 사건이 우리가 잘 아는 제주 4.3 사건이었다. 일본인들이 진작에 패전의 혼란에서 벗어나 미국의 원조로 먹고 살만해졌을 때 우리는 최악의 기근에 직면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신생 남한의 상황이 심각함을 뒤늦게 깨달은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주의에 넘어가지 않도록 일본보다 두발짝 늦게 경제 원조에 나서면서 미제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같은 식량 원조를 받았지만 그 직후에는 한국전쟁이 폭발하는 비극까지 겪어야 했다.

일본인들도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쟁은 너희가 일으키고 벌은 우리가 받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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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마르크 블로크 지음, 김용자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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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배송받아서 부지런히 읽는 중입니다. 저자는 역사 교수이자 프랑스 장교 출신의 레지스탕스였는데 안타깝게도 프랑스 해방 직전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책상에서 사료가 아닌 당시 상황을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담은 책으로 무척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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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의 길 -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향한 카운트다운
에번 토머스 지음, 조행복 옮김 / 까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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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2015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소설가인 한즈 가즈토시(半藤一利)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국내에서는 사람들이 좀 더 알아먹기 쉽게 '일본 패망 하루전'이라는 훨씬 직설적인 표현이 붙었던 것으로. 그 말대로 패망을 앞둔 일본 지도부 내부에서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놓고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3제국의 종말을 다룬 독일 영화 <다운폴(Der Untergang)>의 일본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두 영화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운폴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의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서 독일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어떤 정신 나간 인간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무책임하게 절대 권력을 맡겼으며 인류 전체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스스로 되짚어 보게 한다. 특히 괴벨스가 독일 국민들이 변변한 무기도 없이 소련군 앞에서 개죽음 당하고 있다는 지적에 "위선 떨지 마시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강요한 적이 없소. 그들은 우리를 선택한 댓가를 치룰 뿐이오."라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할 때의 모습은 전율마저 느끼게 할 정도이다. 비록 영화의 각색이라고는 하지만 광기 어린 나치 지도자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반면,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는 한쪽에서는 원폭을 두들고 맞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련군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와중에 이 가망없고 지긋지긋한 전쟁의 악몽이 과연 누구의 소위 '성단(聖斷)' 덕분에 끝날 수 있었으며 궁지에 몰린 일본 민족이 구원받았는지가 있을 뿐이다. 광기는 일본 지도부 전체가 아니라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결사항전을 고집했던 육군의 몇몇 과격파 장교들에게만 집중된다. 그리고 이들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할복함으로서 나름의 죄과를 치렀다는 식이다. 애초에 악몽이 왜 시작되었는지, 천황이 성단을 내려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면 어째서 일이 이 지경까지 몰리기 전에 일찌감치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따위의 얘기는 없다. 그저 천황이 '옥음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24시간이 전부이다. 즉, 일본인들 입장에서 불편한 역사는 쏙 빼놓고 기억할 것만 기억하라는 영화이다. 자기네들이야 그만일지 몰라도 그들이 벌여놓은 침략전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정이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히틀러는 죽은 권력이지만 일본에서 천황은 엄연히 살아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전쟁 내내 미국인들이 '진주만을 기억하라'라고 외쳤던 것이 무색하게도 전쟁이 끝난 뒤 트루먼 행정부가 천황 일가에 아무런 죄도 묻지 않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천황만이 아니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최소한의 지도자들만이 희생양으로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처벌받았고 나머지는 유야무야되었다.

독일의 과거사 청산이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나치 정권은 철저히 단절되었다. 오늘날 독일에서 나치 경력은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니라 어떻게든 숨겨야 할 주홍글씨이다. 또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후계자나 괴벨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자가 공직에 들어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반면, 일본은 침략전쟁에 앞장섰던 자들이 미국의 묵인 아래 고스란히 권력의 중추부에 복귀했고 자신들의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단적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정치인이며 재작년 정신이상자에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베 신조만 하더라도 외조부가 A급 전범 중 한사람이자 전후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였다. 침략전쟁은 소위 아시아 해방을 위한 대동아전쟁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당시의 고통은 집단 망각을 강요받았다. 일본을 패망으로 몰고간 전범들은 애국자로 둔갑하여 야스쿠니 신사에서 일본 지도자들의 추모를 받고 있다.

흔히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말이 있지만, 승자보다 더 승자같은 패배자 일본의 오만한 태도는 미국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필리핀이나 남한, 남베트남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 미국이 보여준 모습은 물론, 같은 패배자인 독일과 비교하더라도 미국은 일본에 유별나게 관대했다. 정작 진주만을 기습하고 미국 본토에 풍선 폭탄을 날려보냈으며 미군 포로들을 잔혹하게 참수했던 것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음에도 말이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싸다구를 날려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일본에 혐오감 대신 환상을 품었고 그 건방진 용기를 일본도와 사무라이에서 찾았다. 일본은 비록 싸움에서는 졌지만 그 덕분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오른팔이 되어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으니 이런 걸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독일처럼 갈데까지 가지 않고 적당할 때 천황이 항복을 '성단'한 것은 일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을 듯. 바꾸어 말하여 히틀러 또한 일본인들과 같은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독일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싶기도 하다. 히틀러 자신이야 워낙 저지른 것이 많다보니 벌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그 한 사람에게 죄다 떠넘기는 것으로 나머지 나치 잔당들은 적당히 면죄부를 받았을지도. 누가 알겠는가. 그게 정치라는 것이니 말이다.

역사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까치 출판사에서 태평양전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볼 책이 나왔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향한 마지막 5개월을 다룬 <항복의 길(Road to Surrender)>이다. 저자는 에번 토머스.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저명한 미국 언론인이자 뉴욕 타임즈에서 두번이나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 뉴스위크에서 20여년 이상을 근무한 전형적인 뉴워커이기도.


이 책에는 3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미국 전쟁부 장관으로서 루스벨트를 보좌하고 조지 마셜 장군을 비롯한 별들을 지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으로 독일과 일본의 전략폭격을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미 공군 초대 참모총장이 되는 칼 스파츠(Carl Spaatz) 대장, 임진왜란 시절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자 일본 외무대신으로 대표적인 화평파였지만 A급 전범으로 옥사하게 되는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태평양전쟁의 키를 쥔 자들이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고 유럽에서의 총성은 멈추었지만 3개월이 지난 8월 초까지도 태평양전쟁의 앞날은 여전히 예측불허였다. 일본 해군은 괴멸했지만 일본 육군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항복시키려면 해상 봉쇄와 전략 폭격만이 아니라 수십만명의 미군이 직접 상륙하여 독일에서 그러했듯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고 도쿄의 황궁이 점령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독일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조차 연합군이 본토에 상륙한 뒤에야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고 협상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본이 일전 한번 벌이지 않고 백기를 들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적어도 전쟁은 수개월에서 1년은 더 길어질 참이었다. 이 책은 유럽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45년 3월부터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약 5개월 동안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긴박하게 벌어지는 종전을 향한 태평양전쟁의 카운트다운을 사실적이면서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다.

연합군은 적어도 12척의 병원선을 포함하여 어마어마한 대군을 집결시켜서 침공을 준비했지만, 예상된 사상자 규모가 끔찍이 커서 가장 정직한 인간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조차 부하들에게 숫자를 조작하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정해진 결론이었지만 일본이 정말로 항복할지는 미지수였다. 일본이 전쟁을 계속했다면 일본과 아시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 p.17

찌푸린 얼굴의 르메이는 부당하게도 무자비한 살인자로 묘사되었다. 특히 전략 공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근무한 말년에 그는 곧잘 냉혹한 발언을 남기곤 했다. 그는 웃지 않았고(안면 신경마비 때문에 얼굴이 굳어서 웃을 수 없었다.) 캐리커처로 그리기 쉬울 만큼 강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휘하 조종사들의 목숨까지 게의치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 p.51

도고는 성공적인 외교관이었다. 그는 일본의 전형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숙적인 러시아와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39년 두 나라가 몽골 사막에서 격전을 벌이고 일본군이 1만7천명의 사상자를 낸 뒤에 양국 간의 휴전을 마련한 사람이 도고였다. 소련의 냉혹한 외무인민위원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도고의 끈질긴 인내심에 "정치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도" 경의를 표했다. - p.101

4월의 어느 늦은 저녁, 도고는 총리 관저의 집무실에 앉아서 그답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꺼냈다. "총리 대신께서는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2~3년은 더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노년의 신사가 대답했다. 도고는 일본이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의 전쟁은 물자와 생산력이 좌우합니다. 일본은 채 1년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 p.103

6월 18일 워싱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장군들과 제독들을 만나 일본 침공으로 초래될 인명 손실을 논의했다. 최고위층은 규슈에서 35만명의 일본인이 70만명의 미군에 맞서 방어할 것으로 추산했다. 실제로는 일본군은 그 수치의 거의 3배에 달하는 90만명이 규슈 방어를 준비했다. 정규군만 해도 그랬다. 열 다섯살에서 예순살까지의 모든 남자와 열일곱살에서 마흔살까지 모든 여자가 국민의용전투대에 합류해야 했다. 전장식 머스킷, 화궁, 죽창, 쇠갈고리가 이들의 무기였다. - p.129

스파츠는 핵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서를 3번 접어 지갑에 넣고 다녔다. 어느날 스파츠가 샤워를 하는 동안 전령이 들어와 그의 바지를 가져가서는 세탁소에 보냈다. 미친 듯이 뒤진 끝에 지갑을 되찾았다. 명령서는 여전히 지갑 안에 있었다. 8월 1일 스파츠는 마닐라로 가서 일본 침공을 지휘할 맥아더 장군에게 핵폭탄과 다가올 히로시마 공격을 보고한다. 스파츠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나를 보고 말했다. 이것이 전쟁을 바꿀 것이오." - p.171

사람들에게 핵폭탄은 그저 좀 더 큰 폭탄일 뿐이라고 말하던 르메이도 깊은 인상을 받은 것같았다. 이 항공대 장군은 기자가 더 잘 알아보도록 폭탄이 일으킨 충격파를 손가락으로 짚어주었다. 르메이는 전문가다운 감탄의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작품이야." 그러나 머피는 깜짝 놀라서 다시 들여다 봤다. "나는 대단한 규모의 파괴, 적어도 거대한 폭탄 구덩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난 5주일 동안 이곳 마리아나에서 봤던 일본 도시들의 폭격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다." - p. 185

육군대신 아나미 장군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강화회담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핵폭탄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트루먼의 연설은 언제나 그렇듯 허세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을 숨기고 있었다. 그 날 일기를 보면 그는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했고 자신이 우라늄 폭탄의 영향에 관해 과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음을 인정했다. - p.198

경찰 보고서는 사실 지나친 걱정이었다. 일본 국민이 끔찍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그러나 히로히토, 긜고 무조건적인 존경과 숭배에 길들여져 있는 그 측근들은 미세한 분노의 신호만으로도 심각한 위험을 느꼈다. 황궁은 언제나 우익의 반란, 2.26사건을 일으킨 광적인 젊은 군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이제 히로히토는 공산주의자들에 선동된 노동자, 농민의 소요를 더 걱정했다. - p. 221

라디오 도쿄가 천황의 연설을 방송하던 8월 15일 정오에도 미국의 폭격기들은 여전히 일본에 폭탄을 투하 중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아널드 장군은 그때까지 괌 섬의 사령부에 있었던 스파츠 장군에게 1천대의 폭격기를 출격시키라고 엄명 내렸다. 스파츠는 제509혼성비행전대의 7대를 포함하여 B-29 폭격기 843대를 끌어모았다. 173대의 호위 전투기가 떴기 때문에 항공대의 홍보관들은 1천대의 비행기가 일본 제국 공격의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 p.283

핵폭탄은 많은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스팀슨의 글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틀렸다. 그때의 상황에서는 11월 1일로 예정된 규슈 침공이 실제로 진행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리틀 보이와 팻 맨이 미군과 연합군의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일 자체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증강을 가리키는 첩보를 완강하게 일축했지만 해군 작전 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은 임시로 승인한 침공 계획을 재빨리 철회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조차 다수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포함하여 애타게 차선책을 모색했다. 미군은 일본을 침공하는 대신 일본 국민을 굶기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 p.301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핵폭탄이 20만명을 살육했지만 그럼으로써 일본을 굴욕시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믿어지는 정설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원폭보다 소련군의 참전이 더욱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적어도 미국에게는 관용을 기대할 수 있지만(실제로도 그러했고) 스탈린에게는 어림없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만약 일본이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미군이 큐슈와 혼슈 서부에서 붙잡힌 사이 북쪽에서 소련군이 먼저 밀고 내려와서 도쿄를 점령했다면 천황을 비롯한 일본 지도부들은 푸이가 그러했듯 최소 시베리아 행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원폭 투하가 일본인들을 침략전쟁의 가해자에서 원폭의 피해자로 둔갑시켰다는 점이다. 냉전 시절 미소 핵공포 속에서 일본 지도자들은 원폭 기억을 자신들의 전쟁 책임에 대한 면죄부로 유리하게 써먹는데 성공했다. 직접 B-29를 조종하여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폴 티비츠 장군은 미국민의 전쟁 영웅에서 말년에는 수십만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살인마로서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텍사스 에어쇼에서는 원폭 투하를 재현했다가 "일본인들을 모욕했다"라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사과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정작 자신들은 무모한 침략전쟁으로 동아시아 주변국들에게 고통을 끼쳤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트루먼을 향해 "내 손은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오펜하이머나 이 책에 등장하는 스팀슨, 스피츠 등 핵무기 투하에 직접 관여했던 미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죽는 날까지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했다. 과연 천황을 비롯하여 일본 지도자들 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핵폭탄이 떨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비인도적인 무기를 쓴 미국이 나쁜 탓이지 자신들이 우물쭈물하면서 항복을 늦추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라는 영화 역시 천황이 미국의 핵위협에서 일본 민족을 구했다는 얘기가 있을 뿐이다. 세상에는 왕후장상의 법도가 있으며 백성이란 군주를 위해서 마땅히 희생하는 존재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그들로서는 고귀한 천황이 나서서 백성을 위하여 총대를 매었다는 사실 자체가 황송한 일일테니 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태평양전쟁 서적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8월인가 싶다. 하지만 인문학 불모지인 국내에서는 여전히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책이 그리 흔치 않다. 태평양전쟁 통사는 5년 전에 글항아리에서 나온 <일본제국 패망사> 정도이다. 내가 감수를 맡았던 책이기도 하다. 이런 책이 보다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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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마르크 블로크 지음, 김용자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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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유럽 최강을 자랑했던 프랑스의 어이없는 몰락은 프랑스인들로서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이상한 패배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80년이 지난 지금가지도 수많은 논쟁이 있지만 이 책 또한 무척 흥미로울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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