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권성욱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장감 넘치는 사진과 각국의 세력권, 전쟁 흐름을 한눈에 보여 주는 지도, 세세한 전투 서열 표를 통해 독자는 승자의 서사에 가려져 있던 작은 나라들의 결정과 그 대가를 차분히 따라간다. 책은 그 선택들이 어떤 맥락 속에서 불가피해졌는지, 국제정치의 현실이 약소국에 무엇을 포기하게 하고 어떤 행동을 강요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 국방일보 2026년 3월 4일 소개글 중에서.


올 초 윌북에서 나온 던컨 웰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에서는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힌 한 경제학자가 미국을 어떻게 망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주인공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때 "칼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유명한 경제사학자"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케네디와 존슨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월트 휘트먼 로스토(Walt Whitman Rostow)였다. 그리고 미국을 영원한 악몽의 수렁으로 빠뜨린 베트남 전쟁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로스토는 15세에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예일대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다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24살에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 교수를 맡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영재 중의 영재인 셈.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머리가 명석한 대신, 세상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고집불통이면서 자신에 대한 어떤 비판과 오류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독불장군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우리네 세상이 어느 한 사람의 머리로 죄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명성을 등에 업고 존슨 행정부의 고위직으로 입성한 그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미국의 힘을 보여주어 굴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과 달리 굴복한 쪽은 북베트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모든 것을 미국식 경제논리로만 생각했던 그는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산업을 파괴한다면 손해를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 거라고 기대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공산주의 진영이 북베트남을 도운 덕분도 있었지만 베트남인들 특유의 저항 의식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알아도 다른 나라를 알지 못했던 책상물림 학자의 한계였다. 


북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며 시작된 미국의 북폭 작전인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이 퍼부은 폭탄은 800만톤에 달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폭탄의 3배였다. 그리고 군부를 설득하여 작전을 밀어붙인 사람이 경제학자인 로스토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경제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했고 전쟁을 망쳤다. 


로스토의 독선이 초래한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은 물론이고 미국에게도 5만 명의 전사자를 비롯하여 수십 만 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100만 명이 넘는 PTSD 환자, 그리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하지만 그는 2003년에 87살의 나이로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존슨 시절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라마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뒤늦게 회고록을 통해서 베트남 전쟁의 개입이 실수였다고 후회하자 로스토는 온갖 궤변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신공격까지 퍼부었다고 한다. 자신이 신이 아니라 한낱 평범한 인간임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잘났기 때문이었을까. 로스토만이 아니라 미국만 알고 미국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것은 워싱턴 정가 엘리트들의 흔한 모습이다. 이 때문에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또 한번 쓴맛을 보고 나왔음에도 요근래 트럼프가 이란을 상대로 죽을 쑤고 있는 것을 보니 인간이란 역시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했지만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해야.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열린 책들의 신작도서 <약소국의 제2차 세계대전사>는 여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사의 바이블로 손꼽히는 존 키건이나 리처드 오버리, 앤터니 비버 등 기존에 나온 책들이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강대국들의 얘기라면 이 책에서는 그동안 강대국 중심의 역사에서 스쳐가는 단역 치부를 당했던 약소국들이 주인공이라는 점. 


저자는 놀랍게도 학계 교수가 아니라 공무원 출신의 전쟁사 작가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랄까. <중일전쟁><중국군벌전쟁><별들의 흑역사>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내놓았으며 특히 마이너한 전쟁사를 주제로 다루는 모양. 


이 책은 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장하는 나라 만도 20개에 달한다. 책의 첫번째 장을 장식하는 것은 당시 아프리카 유일의 독립국이었던 에티오피아이다. 우리에게는 오랜 내전과 가난에 허덕이면서 국제 사회의 도움을 호소하는 세계 최빈국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원래는 인류의 발상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의 하나이며 무엇보다도 수천년의 역사에서 단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쟁쟁한 국가들이 유럽 열강들에게 짓밟히는 순간에도 자신들의 힘으로 유럽의 침입자들을 격파하고 끝까지 독립을 지켰다. 그야말로 아프리카의 자존심인 셈. 그런 에티오피아가 1935년 10월 로마제국의 부활을 내건 이탈리아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무솔리니의 침공을 당한다. 일부 역사 학자들은 이 순간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기도.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의 제6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가 되는 하일레 셀라시에는 무솔리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비록 말년에는 장기 집권의 불만과 경제난, 미소 냉전의 파고 속에서 군부 내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비운의 군주가 되지만 그는 자기만 살자고 국민을 히틀러의 손에 내동댕이치고 달아났던 이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나 알바니아 조구 1세같은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암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물며 오늘날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나라를 막장으로 몰고가며 부귀영화와 개인 우상화에만 열을 올리는 여느 철권 통치자들과도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 p.48


다음날 새벽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영광의 상징인 아두와 상공에 이탈리아 공군의 카프로니 Ca.101 폭격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티오피아 병사들이 비행기를 향해 정신없이 총을 쏘았지만 폭격기들은 여유롭게 날아와 폭탄의 비를 떨어뜨렸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에티오피아인들이 처음 겪는 현대전이었다. 이와 함께 12만 명의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을 흐르는 마레브 강을 넘어서 진군을 시작했다. - p.62

 

유화정책이 상대에게 약점으로 악용되어 도리어 더 큰 전쟁을 불러오리라는 생각은 간과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막대한 이권이 있었고 히틀러를 막는데 무솔리니의 협력이 필요한 처지였다. 이들에 보기에 골칫거리는 무솔리니가 아니라 분수도 모르고 그에게 맞서려는 에티오피아인들이었다. 따라서 그 대가도 마땅히 에티오피아인들이 치러야 할 몫이라는 게 열강들의 결론이었다. 최소한의 정보도 없이 편협한 선입견과 자국의 이익만 내세워 자신들은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으면서 약소국만 제물로 삼아 밀실에서 흥정하려는 열강들의 이기적인 행태는 2년 뒤 뮌헨 회담에서도 그대로 반복될 참이었다. - p.72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은 국제연맹에서 국가 간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을 금지한 부전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지만 열강들은 오지랍 넓게 끼어들어봐야 득 될 게 없다는 이유로 침묵했다. 그러면서도 중재안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약소국인 에티오피아더러 일방적으로 양보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고립무원이었고 구식무기로 무장했지만 그럼에도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황제의 진두 지휘 아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침략자들에게 용감하게 맞서 싸운다. 뜻밖의 고전에 직면한 이탈리아군은 국제법에서 금지한 독가스를 꺼내야 했다. 결국 반년의 싸움 끝에 수도 아디스 아바바가 함락되고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무솔리니는 로마제국 부활의 첫발에 내딛는다. 하지만 그 후에도 에티오피아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구한말 맨주먹으로 일본의 총칼에 맞섰던 우리 의병들을 보는 것 같다랄까.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국령 이집트와 수단으로 진격하지만 영국의 반격으로 패배한다. 


영국의 망명생활 동안 약소국이라는 이유로 온갖 푸대접을 감수해야 했던 황제는 가만히 앉아서 외세에 의한 해방을 기다리는 대신 자기 손으로 나라를 되찾는 쪽을 선택했고 1941년 5월 5일 아디스 아바바로 돌아왔다. 나라를 잃은 지 꼭 5년 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에티오피아를 자국 식민지로 삼으려는 영국을 상대로 또 다른 투쟁을 벌어야 했다. 제국주의 시절 강대국들의 이기심 앞에서 약소국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보여주는 셈이다. 


국제연맹이 무솔리니더러 국제법을 어기고 금단의 무기를 썼다고 해서 문제 삼거나 더 강력한 제재에 나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에티오피아 현지에서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참상을 경고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보낸 보고서들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개가 거부되었다. 물론 상투적인 핑계일 뿐, 열강들로서는 자기네와 상관없는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방독면을 보내달라는 요구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에티오피아인들은 최소한의 보호를 위해 목면으로 원시적인 방독면을 만들어야 했다. - p.87

황제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자신이 자랑하는 친위대였다. 라스 게타체우 아바테의 지휘 아래 친위대가 에리트레아 제2사단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들은 분명 여느 에티오피아 전사들과는 달랐다. 서구식 군사 전문가들에 의해 고도로 훈련받았으며 뛰어난 규율과 현대적인 무기로 무장했다. 친위대는 에리트레아군 1개 대대를 단숨에 괴멸시키고 이탈리아군 측면을 위협했다. 하짐나 이들 역시 이탈리아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폭격 앞에서는 무력했다. 오후 4시 가랑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최후의 공격에 나섰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 p.103

황제는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국제 연맹이 약소국을 지켜주기로 했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것을 호되게 질타했다. 연설을 마치고 마이크가 꺼지기 직전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듣고 있던 모든 참석자들의 양심을 후벼팠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이며 내일의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 p.118


이탈리아의 지배는 끝났다. 하지만 그것이 에티오피아의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영국인들은 <적의 영토를 점령한 것>이라고 얼버무렸다. 에티오피아가 동맹국이 아니라 적성국의 식민지라는 얘기였다. 이탈리아인들로부터 접수한 모든 물자와 자원, 공장  설비, 인프라는 죄다 영국인들 차지였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영국의 군정을 받아야 했다. 황제는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영국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153

2부의 "두 거인 사이에서"는 인구 350만명의 약소국이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소련을 상대로 모두 승리했던 핀란드의 위대한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3부의 "처칠의 도박"과 4부의 "중립의 딜레마"는 반대로 오랜 중립만 믿고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가 독일과 연합군의 싸움에 휘말려서 제대로 저항도 못해 본 채 몰락한 나라들을 다루고 있다. 5부 "발칸의 악몽"에서는 에티오피아와 마찬가지로 무솔리니의 야욕에 용감하게 맞선 그리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는 초기 승리에 도취되어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쳤고 이참에 알바니아까지 먹겠다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가 도리어 히틀러의 제물이 되어 이웃동네 유고슬리비아와 도매금으로 멸망한다. 6부 "동유럽의 파편들"은 히틀러에게 먹히거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남기 위해 사냥개 노릇을 해야 했던 동유럽 국가들의 이야기이다. 헝가리가 마지못해 추축 편에 섰다면 바로 옆동네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 에서 독일과 싸웠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히틀러의 가장 든든한 동맹국이었다. 불가리아는 직접 전쟁에 끼어들지 않으면서 히틀러에게 요령껏 단물만 뽑아먹은 유일한 추축국이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히틀러와 엮이게 되었건 간에 결말은 똑같았다. 다같이 나라를 잃고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발트3국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차례로 스탈린에게 굴복했다. 이들은 결코 소련의 지배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군비를 너무나 소홀히 한데다 이제야 대응책을 마련하거나 저항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이었다. 발트 3국의 군대를 모두 합해도 7만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 중 에스토니아군이 1만 7천여명, 라트비아군이 2만8천명, 리투아니아군이 2만4천명 정도였다. 무기와 장비도 구식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운명을 체념한 채 아예 손을 넣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p.179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소련과 독일 두 나라를 상대로 양쪽 모두에게 승리한 유일한 나라였다. 그것은 야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핀란드인들은 어떤 외세도 자신들을 정복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힘만으로 얻어낸 성과였다. 반면 발트해 너머 3국은 그다지 운이 좋지 못했다. - p.298

유틀란드 반도의 작은 나라 덴마크는 그야말로 무책임하리만큼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나라가 살아남기는 커녕 잠시도 버티지 못할 판국이었다. 면적은 4만3천㎢에 인구는 384만명에 불과했다.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신세인 벨기에와 비교하여 영토는 조금 더 크면서 인구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위스나 핀란드처럼 자연이라는 막강한 우군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랜 평화에 젖어 전쟁을 남의 일로만 여겼기 때문이었다. - p.332

노르웨이인들이 이웃 형제인 핀란드인들보다 결코 용기가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업었다. 또한 핀란드인들처럼 스키와 사격술에 능했다. 부족한 것은 전의와 국난을 극복할 지도력이었다. 비록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가 형인 덴마크 국왕과 달리 결사 항전을 선택했지만 막상 대다수 국민은 침략자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군비가 최소한으로 억제되면서 노르웨이군은 현대 무기 도입은 커녕 체계적인 동계 훈련이나 기동 훈련조차 거의 하지 못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자국 군대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일보다 국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는데 활용되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무기를 들어 침략자에 맞서야 한다는 정부의 호소를 냉담하게 받아들였다. - p.368


스웨덴 육군은 5개 보병사단 및 1개 기병 여단 10만명 정도였고 전시에 최대 40만명을 동원할 예정이었다. 전차는 체코제 AH-1V탱켓을 라이선스 생산한 M/37 48대와 스웨덴에서 독자적으로 생산한 L-60 경전차 20대가 전부였다. 1930년대 초반에 생산된 이 전차들은 하나같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장갑과 화력이 매우 빈약했다. 공군력으로는 5개 전투 비행대 전투기 158대, 폭격기 116대, 정찰기 100대 등 374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 p.394

온 유럽에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벨기에가 프랑스와 힘을 합치는 커녕 도리어 거리 두기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히틀러의 감언이설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근본적으로는 프랑스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의 동맹이 자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프랑스의 이기심 때문에 원치 않는 싸움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벨기에의 오랜 후견국인 영국은 매번 독일을 핑계 삼아 불장난을 벌이는 프랑스를 히틀러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라고 낙인찍었다. - p.436


6월 21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8만 명의 이탈리아군은 모든 전선에 걸쳐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숨어 있는 프랑스군 저격병의 사격을 받아야 했다. 눈은 두껍게 쌓였고 땅은 진창이었다. 이탈리아군의 주력 전차인 L3 경전차들은 원래 알프스의 산악지대에서 쓰기 위해 개발했음에도 엔진이 약하고 궤도가 너무 좁아 눈이 가득 쌓인 산길을 제대로 오르지 못했다. - p.522


그리스 해군은 전 드래드노트급 전함 1척과 장갑 순양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0척, 잠수함 6척, 어뢰정 13척, 기뢰부설함 4척, 수리함 1척 등 37척의 군함과 병력 6500명을 보유했다. 그 중 현대적인 군함은 1930년대 말에 영국에서 구매한 배수량 1300톤의 그레이하운드급 구축함 2척이 전부였다. 배수량 15000톤의 그리스 유일 전 드래드노트급 전함인 렘노스는 노후화가 너무 심해서 1937년에 퇴역한 뒤 무장 해제되어 그리스 해군의 모항인 살라미스에 정박한 채 썩어가는 신세였다. - p.569

4월 20일 서부 마케도니아 군관구와 에피루스 군관구가 항복했다. 그리스 15개 사단 20만명이 포로가 되면서 그리스 북부 전선이 와해되었다. 뒤늦게 그리스가 자신을 빼놓고 독일군과 협상 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무솔리니는 분통을 터뜨리며 카발렐로 장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리스군도 독일군이라면 몰라도 이탈리아에게 굴복한 생각은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끝까지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다. - p.642

합스부르크 제국이 남긴 근대 산업 대부분을 차지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단숨에 중부 유럽 제일의 공업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헝가리에 남은 것은 수도 부다페스트를 제외하고는 가난하고 낙후한 농촌이었다. 제국 시절의 자유 시장은 사라졌고 농산물에는 높은 관세가 부과되었다. 패전의충격에다 경제적 장벽으로 유통이 막히면서 경제는 막히고 실업자가 늘어났으며 물가는 폭등하고 재정은 파산 지경이었다. - p.717


헝가리가 주변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끌려 나왔다면 반대로 아예 국운을 걸다시피한 쪽은 루마니아였다. 안토네스쿠의 충동적인 결정 때문이었다. 루마니아도 헝가리만큼 전쟁에 끼어들 처지가 아니었다. 전해에 영토 태반을 빼앗기면서 인구와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1940년 말의 겨울과 다음 해 봄은 루마니아인들에게 어느 때보다도 혹독했다. 폭우로 인한 홍수와 추운 날씨로 전에 없는 흉작이었다. 루마니아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였다. 무기와 장비는 구식이었다. 당장이라도 소련군이 프루트 강을 넘어서 남은 영토까지 넘볼까봐 전전긍긍하는 판국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겠답시고 이쪽에서 치고 나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 p.802


소련군이 1812년의 나폴레옹 군대나 1941년의 독일군이 직면했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러시아인들이 다른 민족보다 추위에 더 강하게 진화해서도,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용기가 부족해서도, 하물며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더 뛰어난 전략가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서방이 넘겨준 수십만 대의 차량과 막대한 양의 고품질 연료 덕분이었다. (중략) 전쟁 내내 서방을 향해 끊임없이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았던 소련 지도자들은 전쟁이 끝나자 자신들에게 불편한 사실을 깡그리 잊기로 했다. 어느 순간 서방의 원조는 소련 전체 생산량의 4퍼센트에 불과했다는 것이 공신 노선으로 정지고 소련 관변학자들은 자기네 승리에서 시방 기여분을 축소하려고 인간힘을 썼다. 한마디로 서방의 도움 따위가 없었어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 p.931


이 책을 읽으면서 약소국이라고 해서 죄다 고래 싸움에 휘말린 새우들마냥 운명에 휘둘린 비련의 주인공들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쳤고 때로는 강대국들의 운명을 바꾸어놓기도 했다. 그리스의 영웅적인 항전은 무솔리니를 파멸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탈리아와 헝가리가 어영부영하다가 히틀러의 손아귀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한 반면, 루마니아 국왕 미하이 1세는 전쟁 말기에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독일군을 물리치고 연합군으로 갈아타는데 성공한다. 국난의 순간에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셈이다.


무려 1천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국방대 교수들의 딱딱한 학술서적이 아니라 역사 스토리텔러가 풀어 쓴 논픽션이기에 읽기 쉽고 팍팍 와닿는다랄까. 장대하고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마치 2차 세계대전 다큐멘타리나 <벌거벗은 세계사>를 보는 느낌. 밀덕으로서 저자의 필력이 느껴진다. 그보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특히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사진들과 지도, 당시 사용한 무기, 부대 전투 서열 등 풍부한 자료는 여느 전쟁사 서적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소위 "신 냉전"이라고 부르는 시대이다. 우리 시대의 평화는 커녕,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느낌이다. 푸틴은 4년이 넘도록 여전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외치는 트럼프는 실속없는 세계 경찰 노릇 대신 미국의 이익만 챙기겠다고 공언하면서 만만한 동맹국들의 주머니 털기에만 여념이 없다. 일본은 갈수록 전쟁 국가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중국은 태평양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미국에 대한 도전을 감추지 않는다. 과연 우리도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강대국보다 약소국의 역사에 주목하고 그들로부터 우리가 살아남을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역덕들의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 - 악마와의 두뇌 게임, 괴링에 빠져들다
잭 엘하이 지음, 채재용 옮김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성격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특이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 권력을 쥐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이들이 여기에는 없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저는 미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절반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미국인 절반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기꺼이 그 자리에 오르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늘도 민주주의의 권리를 반민주적으로 이용하며 떠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본문 중.


독일 역사학자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가 쓴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 2003년 영화 <몰락(Der Untergang)>은 독일 제3제국의 최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45년 4월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 함락을 앞두고 총통 벙커에서 벌어지는 14일의 모습은 좌절과 광기, 발악이었다. 지상에서는 병사들이 죽기로 싸우는 동안 벙커에서는 장교들과 여자들이 광란의 파티를 벌이다가 포탄이 떨어져서 참벌을 당하고, 위대한 아리아 민족의 부흥을 내걸어 전쟁을 일으켰던 힛총통은 독일 국민들이 열등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더 이상 살아남을 가치조차 없다면서 국가적 자폭을 명령한다. 게다가 마지막 희망이었던 펠릭스 슈타이너(Felix Steiner) 장군의 부대가 공격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간신히 지탱하던 이성의 마지막 끈이 끊어진다. 그리고 장군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면서 진정한 멘탈 붕괴란게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 와중에도 괴링, 히믈러 등 일부 나치 지도자들은 서로 자기가 히틀러의 후계자라며 추악한 권력 투쟁에 여념이 없다.


최후의 반격이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멘탈이 완전히 나간 히틀러. 배우의 신들린 연기 덕분에 수많은 인터넷 밈의 원천이 되기도.


영화에서 가장 충공깽을 보여주는 인물이 히틀러의 심복 중 한 사람이자 나치의 선전가로 악명을 떨쳤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 부부이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방위전 때 모스크바를 지킨 사람이 소련 최고의 명장인 주코프였다면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베를린 방위를 맡긴 사람은 군사 전문가는 커녕 신체 장애를 이유로 군대 문턱도 가 본 적이 없었던 괴벨스였다. 이것이 스탈린과 히틀러의 차이랄까. 중앙청사지구 지휘관 헬무트 몽케(Wilhelm Mohnke) 장군이 괴벨스의 국민 돌격대가 빈약한 무기로 사실상 집단자살을 강요당하고 있다면서 항의하자 그는 이렇게 조롱한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소. 동정할 이유가 없지! 위선 떨지 마시오. 누구도 우리에게 권력을 넘기라고 강요하지 않았소. 그들 스스로 그런 운명을 선택했고 그 댓가를 치르는거요." 썩소까지 날리며 독일 국민 전체를 비아냥거리는 그의 표정은 섬뜩하다 못해 악마를 연상케 한다. 영화 말미에는 총통에게 충성심을 증명하겠다며 가족 동반 자살을 선택했다. 그의 아내는 6명에 달하는 자녀들에게 잠을 재운다면서 약을 먹인 다음 두 사람 모두 자살한다. 워낙 충격적인 장면이기에 배우들조차 트라우마가 남았다고. 히틀러는 알면서도 말리기는 커녕 어린 아이들마저 저승 길동무로 데려가는 것을 묵인한다.


위의 히틀러 멘붕과 함께 나치 정권의 실체를 보여주는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괴벨스의 망언. 엄밀히 말하면 괴벨스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여론 조작과 대중 선동으로 히틀러를 권좌에 올린 그로서는 저 장면을 보면서 저승에서 "옳소!"라고 하고 있을지도.


물론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영화적인 허구가 섞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치는 탄생부터 마치막 순간까지 정상이 아니었음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명나라 말기 반란군에게 포위된 숭정제가 치욕을 피하기 위해 자기 가족들을 제 손으로 베고 스스로 목을 멨다고는 하지만 근대 국가에서 패전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권력자가 수습 대신 다 같이 죽자면서 온 국민에 집단 자살을 강요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이탈리아는 제 손으로 무솔리니를 끌어내렸고 '1억 총옥쇄'를 부르짖던 군국주의 일본조차 파국을 눈앞에 두자 마지막 순간 무기를 내려놓았으니 말이다. 왜 나치는 그토록 뒤틀렸던 것일까. 사이코 패스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일까, 권력이 평범한 사람들을 사이코 패스로 만든 것일까. 영원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 1윌에 히포크라테스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뉘렌베르크 - 나치와 정신과 의사>는 영화 <몰락> 이후를 다루고 있다. 독일 공군 수장이자 나치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을 비롯하여 패전 이후 연합군에게 체포된 악명높은 나치 지도자들이 전범재판을 위해 뉘렌베르크 수용소에 감금되고 미군 정신과 의사로서 이들의 정신 상태 진단을 맡았던 더글라스 켈리(Douglas Kelley)의 이야기이다. 작년 말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뉘른베르크>의 원작이기도.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장군으로 명연기를 보여준 러셀 크로우, <맨 오브 스틸>의 조드 장군을 비롯하여 화려한 출연진 덕분에 국내에서도 개봉 얘기가 있는 것같더니만 그 뒤로 쏙 들어간 느낌. 하긴 코믹물과 화려한 액션물에 익숙한 국내 정서에서는 망하기 딱 좋은 영화라. 저자인 잭 엘하이(Jack El-Hai)는 미국 언론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주로 의학이나 과학사를 주제로 글을 쓴다고.


저자 영감님과 영화 <뉘른베르크>의 출연진. 1961년 영화 <뉘른베르크 재판>이 연합군 검사와 나치 전범들의 신경전이라면 이쪽은 정신과 의사 켈리와 괴링의 내면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지루한 주제임에도 배우들의 명연기와 드라마틱한 연출로 재미있게 봤담서.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영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 말미에 나오는 것마냥 괴링의 말빨에 밀려서 궁지에 몰린 조드 장군이 켈리의 힌트로 상황을 뒤집고 승리하는 극적인 장면 따위는 없다. 거의 이길 뻔한 괴링을 무너뜨린 비결은 연합국 검사들이 오랜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 수집한 빼박 증거 덕분이었다. 그보다도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괴링이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아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읽는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일단 나부터. 이 책은 나치 전범들과 인터뷰한 정신과 의사의 얘기이다.

괴링은 키츠뷜의 미 제7군 사령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그곳에서도 신변 보장을 요구하고 아이젠하워와의 면담을 재차 요청했다. 그러나 그를 체포한 사람들은 그런 만남이 성사될 가능성은 낮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스택과 참모들은 괴링에게 많은 예우를 베풀었다. 괴링은 미군 병사들과의 환영 자리에서 샴페인을 마셨고 기념사진을 찍고 기자회견도 했다. 그는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국가 고위 대표로서 마지막 대접을 받았다. - p.17


그것은 누구나 탐낼 만한 임무였다. 20세기 최악의 범죄자들로 널리 알려진 자들과 직접 마주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여러 정신병원에서 감독자로 일하는 동안 켈리는 일탈적 행동에는 종종 불가사의하면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근원이 있음을 배웠고 임시 수용소에서의 근무 역시 자신만의 목표를 세우고 임했다. 그는 나치 지도자였던 수감자들에게서 공통된 결함, 즉 악행을 서슴치 않는 성향의 흔적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공통된 정신질환이나 정신의학적 원인이 있었을까? 그들의 끔찍한 범죄를 설명해줄 '나치 성격'이란 게 존재했을까? 켈리는 그 답을 밝혀내려고 했다. - p.44


그러나 이느 기업의 이사회와도 달리, 이 이사회는 전 세계를 6년에 걸친 전쟁 속으로 몰아넣고 조약과 국제 협정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며 무시했고 셀 수 없이 많은 무고한 공동체를 말살했으며 수백만명을 노예로 만들고 또 다른 수백만명을 효율적으로 학살하기 위해 설계한 수용소에 몰아넣고 인종차별과 공포정치까지 합법화한 집단이었다. 이들을 범죄자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중 많은 이들도 유혹을 느낄 만한 기회를 붙잡았던 것일까. 애초에 악한 성향을 타고 났던 걸까.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만한 일종의 '나치 정신'같은 정신 질환을 함께 앓고 있었던 걸까. 교도소 당국은 물론,향후 재판을 맡은 검사들조차 켈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질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 p.99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연합국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열고 나치 지도자들의 처벌에 나선 것은 단순히 이들이 침략전쟁을 일으켜서 평화를 깨뜨리고 전 세계를 전란의 불구덩이에 빠뜨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연합국도 캥기는 것이 없지 않을 뿐더러 승자가 패배자를 단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국제법에서 규정하는 침략전쟁의 정의부터 모호했다. 그것만으로는 법정에서 첨예하게 벌어질 나치와의 논쟁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전쟁의 승자가 나치였다면 이런 구질구질한 문제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악명높은 다하우 정치범 수용소에 죄다 잡아처넣고 최대한의 굴욕을 주었겠지만 말이다.

나치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 범죄 중에서 정말로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홀로코스트'였다. 러시아어로 '포그롬(Pogrom, 대박해)'라고 불리는 유대인 박해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일상적인 모습이었다고는 하지만 국가 권력이 한 인종 전체를 가스실에 넣어서 조직적으로 절멸시킨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선을 넘은 것이고 그 옛날 훈족의 침공이나 칭기스칸 시절에나 나올 만한 얘기였다. 그것도 비문명국가도 아닌 유럽 제일의 지성과 문명을 자랑하는 독일에서 말이다. 유럽 전역에서 희생자는 60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한 연합군 병사들은 타다 만 뼈무더기와 생존자들의 비참한 모습에 경악했다. 나중에 재판장에서 범죄 현장을 찍은 필름이 공개되었을 때 여론은 격앙되었고 기세등등하던 나치 지도자들조차 꼬리를 내리고 외면하거나 "나는 몰랐다"라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그보다도 중요한 의문은 과연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까지 하도록 만들었느냐였다. 그리고 정신 감정을 통해서 그것을 알아내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미 육군 정보부 소속 정신과 의사이자 책의 주인공인 켈리였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임에도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느낌이다. 그렇다보니 유대인이라고 해봐야 오늘날 중동에서 행패 부리는 이스라엘을 떠올릴 국내 독자들로서는 아무래도 감정 이입이 어려운.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굳이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런 점에서 다소 불친절하달까.

원래 샌프란시스코의 정신병원 원장이었던 더글라스 켈리는 전쟁이 터지자 유럽 전선으로 향했고 전쟁 쇼크로 PTSD에 시달리는 미군 병사들의 치료를 맡았다. 그는 집단 정신 치료를 통해서 많은 병사들을 전선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가 오기 전 1943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PTSD 환자 중 회복한 병사는 2%였지만 1년 뒤에는 복귀율이 95%에 달했다고 한다. 만약 켈리가 조금만 일찍 입대했더라면 패튼 장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PTSD 환자를 두들겨 팼다가 곤혹을 치르는 망신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인데 말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켈리는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1945년 8월 4일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앞두고 나치 최고위 지도자 22명에 대한 심리상담을 통해 이들이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정신의학적인 원인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러 수감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들의 내면을 파고 들었다. 그 중에서도 켈리가 보기에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헤르만 괴링이었다.

켈리는 괴링을 보자마자 그에 대한 또렷한 인상을 갖게 되었다. 다른 나치 수감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괴링이 "지적인 인물이었기에 의심의 여지없이 감옥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아차렸다고 의무 기록에 남겼다. "그는 정신적으로 잘 발달했고 전반적으로 균형 잡혀 있었다. 걸을 때 살이 출렁이는 것을 망토로 가릴 수만 있다면 거대하고 힘이 넘치는 체격이었고 멀리서 보기엔 제법 그럴듯한 용모를 갖춘 아주 강하고 역동적인 인물이었다." - p.44



켈리는 나중에 피고인 22명 각각에게 최소한 80시간을 쏟았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면 몽도르프와 뉘른베르크에서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전혀 남지 않았을 것이니 다분히 과장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학문적 의무감과 개인적 선호가 맞물려 그 가운데서도 괴링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다. 감방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유대감을 쌓아갔고 서로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끌려 상대의 한삼을 사려고 했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연민이나 존경심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둘은 서로의 말과 감정을 이해했고 함께 있을 때만큼은 어느 정도 본모습으로 지낼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겼다. - p.107



교도소라는 부자연스러운 환경에서도 로르샤흐 검사는 평소라면 좀처럼 들여다보기 어려웠을 성격의 깊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켈리는 로르샤흐 검사를 "정신감정에서 가장 유용한 단일 기법"이라고 불렀다. 만약 뉘른베르크 수감자들의 로르샤흐 검사 결과에서 일정한 패턴이나 유사성이 드러난다면 켈리는 '나치 정신'의 핵심적 특징에 성큼 다가서게 될 터였다. 이 검사는 무대 마술처럼 검사자의 숙련도와 해석 기술에 크게 의존했다. - p.132



길버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로르샤흐 검사를 시행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그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 가치를 이해했기에 켈리가 아직 검사하지 않은 피고인들에게 잉크 반점 검사를 시행했고 이미 검사를 받은 일부는 다시 검사했다.괴링 재검 결과에 대한 길버트의 해석은 켈리와 달랐다. 길버트는 괴링의 결과에 대해 "그의 지성이 질적으로 평범하다는 점을 드러냈다"라고 생각했다. 잉크 반점 검사에서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을 많이 묘사하긴 했지만 길버트는 그의 반응에서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탁월하게 창의적인 지능이라기보다 피상적이고 평범한 현실주의"가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즉 괴링은 영리하고 냉소적이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 p.153



기소팀이 괴링에게 유리해진 판세를 수습하고 그의 인격에 다시 타격을 가하는데는 몇 주가 걸렸다. 전환점은 1944년 체포된 영국군 장교 50명의 처형을 괴링이 묵인했다는 증거가 제시되면서였다. 명백한 전쟁 범죄였다. 법정에 제출된 다수의 증거와 달리 그는 유대인 말살을 겨냥한 "최종 해결책"에 대해 자시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히틀러 역시 몰랐다고 말해 좌중을 경악시켰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괴링의 신뢰도는 급격히 추락했다. 그때부터 나치 피고인들은 줄곧 수세에 몰렸다. - p.199



켈리가 피고인들에게 공통된 일탈적 성격, 이른바 나치 병균을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면 그런 증거는 거의 없었다. 대신 그는 그들의 성격에서 자신이 신경증이라고 부른 특성을 발견했다. 이러한 특성들은 드물지 않은 정신의학적 결함으로 분명 그들을 괴롭히고 잔혹함을 부추길 수는 있었지만 정상 범주의 바깥으로 밀어내지는 못했다. 켈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기애에 이끌리는 괴링같은 사람들이 현실에는 셀 수 없이 많다고 믿었다. "그들은 기업가나 정치인으로, 때로는 범죄 조직과 결탁한 사기꾼으로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 p.216



길버트는 뉘른베르크 피고인들 가운데 몇몇을 정상적이거나 평범한 성격으로 보지 않고 위험하고 독특한 인격유형을 지닌 사이코패스로 여겼다. 길버트에 따르면 괴링은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도덕적 용기가 부족했고 친절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상대에게 거칠게 달려드는 성향이 있었다. 가족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괴링에게 전쟁은 국가 이익을 둘러싼 고상한 투쟁이 아니라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우월성을 과시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길버트가 괴링의 이런 불쾌한 특성들을 정신병적 인격의 징후로 제시한 반면, 켈리는 사업과 정치에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보이는 성향으로 보았다. 또한 모든 정치적 권위의 목적을 의심했던 켈리와 달리 길버트는 나치즘을 특수한 조건에서만 뿌리내릴 수 있는 독특하고 유해한 권력 지배 형태로 보았다. - p.236


영화에서는 주로 켈리와 괴링 두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추면서 켈리가 괴링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지만 재미를 위한 허구일 뿐, 이 책에서는 켈리 외에 또 한 사람의 경쟁자를 등장시킨다. 켈리와 마찬가지로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PTSD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뉘른베르크 심리상담에 동참한 구스타브 마크 길버트(Gustave Mark Gilbert) 중위였다. 영화에서 그는 켈리와 갈등을 빚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 것 외에 단역에 가깝지만 오히려 대중적으로나 인생에서 성공한 쪽은 켈리가 아니라 길버트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 서로 협력하여 공동 저서를 내기로 했지만 켈리가 약속을 어기면서 무산되었다. 오만하고 고집 센 성격의 켈리는 길버트를 동료가 아닌 불청객으로 여겼고 물과 기름같았던 두 사람은 협력과 소통 대신 각자의 방식대로 수감자들을 연구했다. 따라서 그 결론 또한 정반대였다. 그럼에도 영화의 주인공이 길버트가 아니라 켈리가 된 것은 괴링과 더 친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켈리의 주장이 요즘 미국 돌아가는 상황에 더 걸맞다는 얘기일 것이다. 길버트는 나치 지도자들이 희대의 사이코 패스이며 패전으로 분노 가득한 독일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이들로 하여금 권력을 쥐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 반면, 켈리는 이들이 결코 특별한 인간들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개새끼'이며 심지어 미국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과연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누구도 쉽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시절의 검사 방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도 의문이다. 정신병 치료를 한다면서 꼬챙이로 전두엽을 찔렸던 시대이니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중간 쯤 되지 않을까. <살인의 심리학>의 저자 데이브 글로스먼 교수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사람은 본능적으로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의 사이코패스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목베기 시합을 벌였으며 문화대혁명에서 어린 홍위병들은 자기 부모와 스승을 죽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과연 이들을 집단 광기의 피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중에라도 죄책감에 시달렸을까. 하물며 911테러의 주모자들은 인간폭탄이 되는 것을 악이 아니라 선으로 여겼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지만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언제나 똑같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 진짜 문제는 누가 사이코패스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절대 권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실패했고 미국 또한 완벽하지는 못함을 트럼프가 보여주고 있다랄까.

책에서는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 진실도 얘기한다.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켈리의 경고를 무시했고 마치 이 때문에 자괴심을 느낀 켈리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보지 않고 미국으로 귀국한 그는 무시당하기는 커녕 정신과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조현병 증세를 드러냈고 때때로 분노를 참지 못하여 심지어 아내에게 총을 쏜 적도 있었다. 나치 지도자들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에게 향했다면 켈리는 가족들에게 풀었다. 뉘른베르크로부터 12년 뒤인 1958년 집에서 저녁 준비 도중에 부부 싸움을 하다가 가족이 보는 앞에서 괴링과 마찬가지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괴링 탓은 아닐 것이다. 정신과 의사로서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정신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원래부터 그런 증세가 있었는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발현되었는지는 이 책에서 나오지 않는다. 어쨌든 정신 결함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흔하다는 사실만큼은 켈리가 입증한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웨이저 - 난파선에서의 반란과 살인, 그리고 생존을 향한 사투
데이비드 그랜 지음, 김승욱 옮김 / 프시케의숲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예전만 못한 듯하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레전드급 인기를 누리는 만화로 <원피스>가 있다. 이 만화의 특징은 고풍스런 범선들이 전세계 바다를 누비던 대항해시대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근대와 미래가 뒤죽박죽 섞인 느낌이지만 말이다. 심지어 주인공 동료 중에는 눈에서 레이저 나가는 사이보그 로봇까지. 배도 겉모습만 범선의 탈을 썼을 뿐 현대 기술을 초월한. 어차피 고증 따지면 지는 만화인지라.


현대식 회전포탑을 탑재한 원피스의 평범한 범선들. 포탑을 돌리는 동력이 뭔지는 둘째치고 나무 갑판이 포의 반동을 견딜 수 있을지.


이 만화의 주인공은 해적을 꿈꾼다. 물론 지나가는 배를 습격하여 삥뜯는 불한당같은 현실 속 해적이 아니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해적이라는 이유이다. 해적의 의미를 단단히 착각한 듯. 아무튼 마음 맞는 동료들과 함께 '위대한 항로'를 누비면서 모험을 즐기고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지만 공권력을 우습게 여겼다는 이유로 해군에게도 쫓기면서 인간으로서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에게 바다는 도전이자 로망이다. <원피스>만이 아니다. 감독과 여배우가 함께 폭망했다는 <컷스로트 아일랜드>나 조니 뎁의 능청스런 연기가 대박을 친 <캐리비안의 해적> 또한 바다는 보물과 모험, 낭만의 장소이다. 지구가 아니라 이세계 속 대항해시대일지도.


물론 현실의 바다는 훨씬 냉엄했다. 오래전에 읽은 <전투함과 항해자의 해군사>라는 책에서는 그 시절 선원들의 선상 생활이 얼마나 열악하고 고달팠는지를 언급한다. 일단 바다로 나서면 보급이 끊길 수밖에 없으므로 최소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의 항해 동안 먹거리라고는 소금으로 쩔은 염장고기와 벌레가 우글대는 쉽비스킷이 전부이고 제대로 씻지도 않은 오크통에 담긴 식수는 금방 썩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나마도 제때에 항구를 못 찾아서 물과 식량이 도중에 바닥나면 굶주림과 기약없이 싸워야 했다. 하물며 수백명이 좁은 선상에서 부대끼며 살다보니 제대로 씻거나 했을 것이며 위생은 오죽했을까. 해적 따위보다 병균과 기생충이 더 무서웠을 듯. 특히 대항해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괴혈병일 것이다. 비타민C 결핍으로 생기는 이 병은 우리 현대인들이 겪을 일은 거의 없지만 처음에는 만성 무기력과 더불어 '괴혈병'이라는 말마따나 잇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치아가 죄다 빠지고 피부 곳곳에 혈종이 생기며 격심한 통증과 내출혈으로 고통을 겪다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말로만 들어도 끔찍하담서. 옛날 코에이 게임 <대항해시대2>에서 망망대해에서 헤매다보면 괴혈병이 돌고있다면서 선원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던 악몽이 새록새록하다는.


<원피스>에서 괴혈병 치료법. 위의 두 놈이 다 죽어가는 환자한테 저런 식으로 라임을 꾸역꾸역 먹이니까 즉석에서 완치되어 어깨동무하고 코사크 댄스까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프랑스 어린이용 과학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위험하니까 어린이는 따라하면 안되요?


근무환경은 가혹했고 규율은 엄격했다. 로망은 개뿔, 꿈도 희망도 없는 것이 그 시절 바다였다. 하물며 해적은 <원피스>에 나오는 것마냥 무슨 목표와 신념이 아니라 그저 지옥같은 사축생활을 견디다 못해 도망간 사람들의 마지막 도피처일 뿐이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처럼 정식으로 영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해적질을 했다면 몰라도 대개는 한탕을 노리기는 커녕 토벌대에게 쫓겨다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 일쑤였고 평균 수명은 20대를 넘기기 힘들었다고. 이게 다 19세기 말 영국 소설가 로버트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가 만든 이미지. 대항해시대 후반부로 가면서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바다는 위험한 곳이었다. 수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사람을 무한정 갈아넣으며 결국 5대양을 정복했으니 유럽인들의 끈기에는 실로 탐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요즘에 와서는 주4일제도 길다며 워라벨을 강조하는 것이 그동네이지만 말이다.


올초에 프시케의 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웨이저>는 원피스나 캐리비안의 해적처럼 소년의 꿈을 담은 판타지가 아니라 바로 이런 대항해시대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논픽션 소설이다. 저자는 미국 언론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주로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다루는 모양. 2017년에 국내에서도 개봉한 바 있는 <잃어버린 도시 Z>의 원작자이기도. 조금 앞서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에서 어벤져스 뉴페이스이자 고딩 스파이더맨으로 등장하여 "쟨 또 누구래?"했던 톰 홀랜드가 주연을 맡았다고 하는데 보지는 않았담서.


머리 대부분이 멸종하신 이 아재가 저자. 머리숱은 아쉽지만 저서는 죄다 공전의 히트를 쳤다고. 신은 인간에게 다 주지 않는다던가.


이 책은 18세기 영국 해군 소속의 550톤급 소형 군함이었던 웨이저(HMS Wager) 승무원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고난과 비극의 이야기이다. 1734년에 건조된 이 배는 원래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이었지만 5년 뒤 영국 해군에 매각되었다. 대영제국 흑역사 중 하나이자 <젠킨스의 귀전쟁>으로 더 유명한 영국-스페인 전쟁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찰스 웨이저(Charles Wager) 제독의 이름을 따서 웨이저라는 이름이 붙었고 1740년 8월 용맹하고 노련한 베테랑 군인이지만 지휘 경험은 부족했던 데이비드 칩(David Cheap)을 비롯한 250명의 선원과 28문의 대포를 실고 조지 앤슨(George Anson) 제독이 이끄는 소함대의 일원이 되어 남미로 출발했다. 그 중에는 훗날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이자 바람둥이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조지 고든 바이런의 할아버지였던 존 바이런(John Byron) 경도 있었다. 당시 나이는 불과 17살로서 갓 입대한 견습 사관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스페인 식민지 해안가를 약탈하고 보물을 실고 오는 스페인 상선들을 털어 먹기 위함이었다. 그 시절 흔한 정부 공인 해적선인 셈.

소함대의 기함인 센추리온 호의 데이비드 칩 중위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40대 초반의 튼튼한 스코틀랜드인인 그는 코가 길쭉하고 눈빛이 강렬했다. 그리고 도망자이기도 했다. 유산을 놓고 형과 벌이던 싸움, 뒤를 쫓는 채권자들, 적당한 신붗감을 구할 수 없게 만든 빚으로부터 그는 도망쳤다. 그러나 해군의 삼각모를 쓰고 영국 군함의 후갑판에 앉아 쌍안경을 들고 광대한 바다를 항해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찰랑거렸다. 심이어 오만함이 살짝 엿보인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 p.35


이 낡은 동인도 무역선은 5월에 마침내 뎃퍼드 조선소에서 전함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군은 포의 개수로 전함을 분류하는데 28문의 포가 있는 웨이저 호는 가장 낮은 6등급이었다. 이 배의 이름은 일흔 네살의 해군대신인 찰스 웨이저 경을 기념해서 지어졌다. 잘 맞는 이름 같았다. 그들 모두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지 않은가.(웨이저는 '노름' '내기'라는 뜻도 있었다.) - p.50

칩은 배로 들어오는 환자들을 지켜보았다. 너무 쇠약해서 들것에 실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겁에 질린 그들의 얼굴에는 누구나 내심 알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 있었다. 그들의 항해가 죽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월터 신부는 이렇게 인정했다. "그들은 십중팔구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으로 아무 쓸모없는 죽음을 맞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청춘의 활기와 힘을 바쳤던 사람들인데." - p.58

그러나 이들이 만난 것은 스페인 보물선이 아니라 태풍이었다. 악천후 속에서 낙오된 웨이저는 함대를 찾던 중 1714년 5월 14일 칠레 남부의 해안가에서 암초에 부딪쳐 좌초되었다. 항해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생존자들은 인근의 무인도에 상륙했지만 황량한 섬에는 주민은 커녕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구조될 가능성 또한 희박했다. 이들은 엄연한 영국 수병이었지만 문제는 당시 영국 해군의 모호한 규정 덕분에 지휘 계통은 소속된 배가 있을 때에만 유지되며 만약 침몰이나 난파 등으로 배가 소멸하면 더 이상 해군법을 적용받는 군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웨이저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은 대부분 해군에서 잔뼈가 굵은 정예가 아니라 머릿수 맞출 요량으로 억지로 끌려나온 사회 낙오자들이었다. 심지어 군에서 운영하는 요양병원에서 동원된 60~70대의 노인들도 있었다. 항해 도중에 웨이저의 선장을 맡은 칩은 전투라면 몰라도 이런 상황에 가장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신뢰를 얻는 노력 대신 그 시절 여느 귀족 장교들마냥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규율은 금방 무너졌고 성난 선원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칩은 섬에 버려졌다. 그 자리에서 살해되지 않은 것만도 운이 좋았다랄까. 침몰부터 탈출까지 수개월 동안 웨이저의 승무원들은 <오징어게임>마냥 그야말로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여주게 된다. 이 책은 극한 상황에 직면한 인간들의 민낯을 다룬 드라마이다.

환자들은 비좁은 곳의 해먹에서 몸부림치며 크게 고통스러워했다. 고열로 식은땀을 흘리고 양동이나 자기 몸에 구토했다. 헛것을 보는 바람에 휘청거리다가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발진티푸스라는 박테리아 폭탄이 출항하기도 전에 미리 배 안에 심어져 있다가 이제 함대 전체에서 터지고 있었다. "부하들은 점점 크게 앓으며 병약해졌다." 한 장교는 이렇게 적은 뒤 그 열병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라고 덧붙였다. - p.96

웨이저호가 3월 7일 르메르 해협을 통과하자마자 바이런은 많은 동료가 이제 해먹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피부는 처음에는 파랗게 변하더니 금새 석탄처럼 새까매졌다. 월터 신부는 "살에 곰팡이가 잔뜩 피었다."라고 묘사했다. 그들의 몸을 좀먹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점점 영역을 넓히면서 넓적다리로, 엉덩이로, 어깨로 번져갔다. 여기에는 "무릎, 발목, 발가락 간절의 지독한 통증"이 동반되었는데 "내가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인간이 이런 통증을 결코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바이런도 나중에 이 무시무시한 병에 걸려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격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병이 승조원들의 얼굴까지 침범하자 몇몇 사람의 얼굴이 상상속 괴물과 비슷해졌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금방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치아와 머리카락이 빠지고 입냄새는 부패의 악취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 p.131

이제 표류자가 된 승조원들은 몸을 후려치는 차가운 빗속에서 해변에 움츠리고 있었다. 칩이 계산해보니 원래 웨이저호에 타고 있던 성인남자와 소년 250명 중에 145명이 살아남은 것같았다. 모두 수척하고 허약하고 옷차림이 빈약해서 이미 난파를 당한 지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같았다. 이제 열 일곱살이 된 바이런과 벌클리가 보였다. 해병들 다수가 목숨을 잃었지만 지휘관인 로버트 펨버턴은 살아남았다. 칩은 여기에 정확히 어디인지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유럽 배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만큼 이 섬 가까이 지나가는 일도 없을 듯 했다. 그들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 p.171

총성과 하극상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칩이 거처에서 튀어나왔다.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손에는 이미 권총을 쥐고 있었다. 빗줄기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는 코전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총을 쏜 범인이 코전스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그 악당 자식 어디 있어?" 그는 점점 불어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코전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어떤 질문이나 절차도 없이 차가운 총구를 그의 왼쪽 빰에 댔다. 그러고는 자신이 나중에 표현한 것처럼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 p.229

바이런의 동료 중 일부는 너무 굶주린 나머지 시신을 먹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헛것을 보던 소년 한명이 아직 매장되지 않은 시신에서 살을 베어내자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 그것을 먹지 못하게 했다. 비록 대다수의 사람이 글로 남긴 기록에서 식인이라는 단어를 언급조차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이런은 몇몇 사람이 죽은 동료의 시신을 잘라 먹기 시작했음을 인정했다. 바이런은 그것을 "최후의 비상수단"이라고 지칭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곧 이 섬을 떠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이 신성 모독의 행위에 무릎을 꿇을 터였다. - p.259

다음날 아침 벌클리 일행은 다시 항해에 나서면서 황량한 바다의 파도 속에서 작고 하얀 것이 출렁거리는 것을 언뜻 보았다. 커터 호의 돛이었다! 보트는 무사했고 열두 명의 사람도 멍한 상태로 물에 흠뻑 젖기는 했어도 살아 있었다. 벌클리는 이 기적적인 재회로 그들 모두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썼다. 커터 호는 스피드웰 호의 선미에 밧줄로 연결했고 그 배의 승조원들은 수병 1명을 제외하고 전원 스피드웰 호로 올라와서 잠을 청했다. 새벽 2시 밧줄이 끊어지면서 커터호는 바다로 떠내려겼다. 보트는 바위에 부딪혀 박살나면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동료 한명을 또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구하러 해안을 오갈 수단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이제 일흔 명이나 되는 사람이 밤낮으로 스피드웰 호에 빽빽이 타고 있어야 했다. "커다란 불안감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절망에 빠진 사람도 많다" 벌클리는 이렇게 썼다. - p.283


생존자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섬에서 한줌의 먹을 것을 놓고 동료들과 싸워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나만 살아남겠답시고 인간성까지 버리는 일은 없었다. 이들은 가능한 서로를 도왔고 폭군 노릇을 하는 선장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도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몇몇은 선장과 운명을 함께 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했다.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서 <매드맥스>에 나오는 것마냥 다들 모히칸 머리를 하고 막장 찍는 무법천지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 그런 놈도 없지는 않겠지만. 

 

더 놀라운 점은 이들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 중에는 섬에 버려졌던 선장도 있었다. 하지만 섬에서 빠져나와서 온갖 고초를 이기고 문명 세계로 왔다고 해서 불행의 끝은 아니었다. 반란자들보다 두달이나 늦게 섬을 출발할 수 있었던 칩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스페인 식민지에 상륙했다가 붙들려서 기나긴 포로 생활을 보내야 했고 젠킨스의 귀전쟁이 끝난 1746년 3월에야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군사 재판이 열렸고 결과는 유야무야되었다. 어차피 전쟁은 끝났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상대로 이제와서 시시비비를 따져봐야 영국 해군의 위신만 실추될 뿐이라는 것이 높으신 분들의 판단이었다.


웨이저 호가 난파된 장소. 사건을 기리기 위해 배의 이름을 따서 웨이저 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면적은 완도보다 조금 큰 105㎢ 정도인데 워낙 황량한 섬이라서 지금도 사람 사는 동네는 아닌 모양. 2006년에는 당시 침몰한 웨이저 호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한다.


당초 250명이 출발하여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3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재앙을 맞이한 것은 웨이저호만이 아니었다. 웨이저 호가 속한 앤슨 제독의 함대는 6척의 군함과 2천여명에 달하는 승무원이 있었지만 폭풍우와 괴혈병, 말라리아로 기함인 1천톤급의 4등급 전열함 센추리온(HMS Centurion)을 제외하고 모든 배가 침몰하거나 버려야 했고 불과 500여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단 한번의 항해로 80%가 몰살한 셈. 정작 전투로 죽은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고. 게다가 이런 비극은 바다에서 일상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마젤란이 처음으로 세계 일주를 한 지 2세기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대항해시대의 해군이 얼마나 명 짧은 직업인지 보여준다랄까. 그럼에도 앤슨 제독은 다 죽어가는 부하들을 이끌고 스페인 보물선을 상대로 승리했고 그야말로 역대급 대박을 쳤다. 소장 진급은 물론이고 우리 돈으로 280억원에 달하는 상금까지 챙겨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선원들도 각각 20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다. 바로 이맛에 해군한담서.


칩도 말년이 썩 불운하지는 않았다. 이후 더 큰 군함의 선장을 맡았고 스페인 상선을 약탈하여 많은 상금을 받은 다음 해군에서 물러나 고향 땅에서 슬로우 라이프를 즐겼다고. 수습장교로서 마지막까지 칩과 함께 한 바이런 또한 승승장구하여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싸웠으며 캐나다 뉴펄랜드 섬 총독과 해군 중장까지 지냈다. 웨이저 호의 포수이자 섬에서의 반란을 주도했던 존 버클리(John Bulkeley)는 자신들이 겪은 재난에 대한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메데따시~메데따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재난 스토리이지만 저자의 필력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내용을 단숨에 읽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위키백과를 보니까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얘기가 있더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을, 영화에서 약빤 연기를 보여준 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는다고. 대항해시대를 철저히 고증한 것으로 잘 알려진 영화가 2003년에 나온 러셀 크로우 주연의 <마스터 앤드 커맨더>인데 그 못지 않을 듯. 벌써부터 기대가.



번역 또한 전문 번역가 작품답게 전반적으로 매끄럽다. 하지만 한 가지 지적할 부분이 있다면 p.35에서 선장인 데이비드 칩의 계급을 중위라고 번역했는데 엄밀히 말하여 "first lieutenant"는 육군에서는 중위지만 영국 해군에서는 '일등항해사'라는 뜻이며 대위에 해당한다. 육군의 대위인 "captain"이 해군의 대령인 것과 마찬가지. 원문을 보면 "센추리온 호의 데이비드 칩 중위"보다는 "센추리온 호의 일등 항해사인 데이비드 칩(David Cheap, the first lieutenant of the Centurion)"이 더 맞지 않을까 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주인이 될 것이다 - 표트르 대제에서 푸틴까지 러시아 동진의 역사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12
크리스 밀러 지음, 김남섭 옮김 / 너머북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럽에서 우리는 머슴이자 노예였지만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주인으로 가게 될 것이다."

(In Europe we were hangers-on and slaves, whereas we shall go to Asia as masters.)

☞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작가의 일기(Writer’s Diary), 1881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느듯 4년째를 앞에 두고 있던 2024년 11월 눈을 의심케 하는 기사가 떴다. 우크라이나군이 점령한 쿠르스크 전선에 뜬금없이 북한군이 등장했다는 소식이었다. 반년 전인 6월 19일 개전 이후 크렘린 궁전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던 푸틴이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뒤 김정은과 러시아-북한 조약을 맺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로 약속을 얻어낸 결과였다. 실제로 북한은 여태껏 그러했던 것처럼 소수의 군사 고문단으로 생색내는 대신 1만 명이 넘는 병력을 지구 반대편으로 보냈다. 실전으로 단련된 우크라이나군 정예부대들을 상대로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결국 쿠르스크를 탈환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세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째서 푸틴이 벨라루스나 투르크메니스탄같은 구 소련 시절의 속국들이 아니라 굳이 북한의 손을 빌렸는지 복잡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우리로서는 두 나라의 밀월이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답답한 사실은 러시아의 행태를 보면서도 마치 남의 일인양 손놓고 태평스럽게 강건너 불구경하는 우리네 정치하는 양반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지만 말이다. 만약 요근래 중동에서 크게 사고 친 트럼프가 타이완더러 최신 무기 줄 테니 이란 해협에 군함을 보내라고 했다면 당장 중국이 발끈했을 것이다.

쿠르스크 전역에서 북한군. 어떤 의미에서는 북한판 '나선정벌'이기도.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먼저 북한을 적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한의 참전은 러시아의 용병일 뿐 아무런 국제적 명분이 없을 뿐더러, 엄연히 유엔 결의 위반임에도 케이블 TV에서 자칭 전문가들이 해묵은 북한 위협론으로 국민들을 겁주는 것 이외에 러시아에 경고는 커녕 변변히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 주소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북한이 7천 km나 떨어진 이역만리의 쿠르스크까지 대부대를 파병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기 때문이다. 쿠르스크가 어디에 붙은 동네인지조차 몰랐을 북한군 병사들은 푸틴이 제공한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그곳까지 도착했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러시아는 정말 큰 나라이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서쪽의 발트해에서 극동의 베링해협까지 동서 길이는 1만km가 넘는다. 비록 넓은 영토 대부분은 사람 살기에 너무 춥고 척박하여 거의 텅 빈 공간이기는 해도 말이다. 손바닥만한 땅에 수천만명의 사람이 부대끼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와는 천양지차랄까.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가 훨씬 더 큰 나라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 원래 러시아의 뿌리는 13세기에 세워진 모스크바 공국이다. 키에프 루스국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 공국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만 해도 듣보잡의 약소국이었지만 17세기에 오면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며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표트르 대제가 제국을 선언했을 때 이미 시베리아를 발밑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베링해를 넘어서 북미 대륙으로 진격했다. 1867년에 단돈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넘겼다는 알래스카 조약은 유명한 사건이지만 알래스카만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심지어 하와이까지도 러시아 땅이 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명청 시대 해금령을 선언했던 중국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본질을 해양국가가 아니라 대륙국가로 규정했고 바다 너머에서 힘에 부치는 모험을 벌이기보다 시베리아 경영과 서쪽과의 투쟁에 힘을 쏟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무조건 크면 클수록 알흠답다"라고 여기는 오늘날 러시아인들로서는 그 시절 조상님들의 근성이 부족하다 어쩌구 할런지 모르지만.

작년 말 너머북스에서 나온 <우리는 주인이 될 것이다>는 러시아 제국의 창시자였던 표트르 대제가 처음 동쪽으로 눈을 돌린 이래 푸틴에 이르기까지 3세기 반에 걸친 동방을 향한 러시아 불곰의 야심차고 파란만장했던 동방 모험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인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교수는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외교 및 경제 전문가로서 2023년에는 <칩워>라는 책을 출간하여 국내에서도 선풍을 끌었다는데 읽어보지는.

이 학자 풍의 말라깽이 아재가 저자. 대표 저서인 <칩워>는 삼성전자가 있는 우리와도 밀접한 주제다보니 한국에서도 엄청 팔렸다고.

이 책은 1697년 러시아 제국의 동쪽 끝인 캄차카 반도에서 러시아 탐험대가 우연히 정체불명의 남자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러시아인들은 엉뚱하게도 그리스인이라고 여겼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인이었다. '덴베에'라는 이름의 그는 오사카의 무역상으로 에도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머나먼 모스크바까지 압송되어 표트르 대제를 알현하게 된다. 모스크바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일본인이자 러시아와 극동의 섬나라 일본의 첫 접촉이기도 했다. 마치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랄까.

표트르는 유렁 왕실들 및 기독교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과 외교를 수행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국가적 업무를 잠시 뒤로 미루어 일본인 표류민을 만날 시간을 냈다. 1702년 1월 8일 표트르는 자신의 별장에서 덴베에를 접견했다. 별장 자체는 표트르 대제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서구의 건축 전통을 참조했을 뿐만 아니라 가로등같은 최신 유럽 기술을 접목했고 표트르 개인의 전쟁 게임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작은 성채도 있었다. 유럽 기술에 대한 매료와 전쟁에 대한 사랑이라는 차르의 두 가지 특징이 묻어나는 거처에서 표트르가 덴베에를 맞이한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그리고 덴베에는 흔히 간과되던 표트르 통치의 세번째 측면, 즉 머나먼 동방 땅에 대한 관심을 의미했다. - p.21

1724년 12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 표트르는 평생 질시하며 동경하던 서구가 아닌 아시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한 제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북극해를 통해 중국과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방안을 깊이 고려해왔습니다." -p.22

두 사람의 만남이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건간에 러시아는 영토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숨기지 않으면서 동쪽으로 끊임없이 뻗어나갔다. 미국 개척민들이 마차 타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신생 미국의 영토를 넓혀나갈 때 러시아인들 또한 베링해협을 넘어서 알래스카를 지나 캘리포니아로 행진했다. 북미 대륙은 러시아와 미국, 영국령 캐나다로 삼분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세 나라의 운명은 지금과는 완전히 바뀌어졌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먼저 꼬리를 내린 쪽은 러시아였다. 러시아의 심장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차르는 스스로를 아시아에서 징기스칸의 후예가 아니라 유럽 군주의 일원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1867년 미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와 러시아 주미 대사 에두아르드 데 스토클이 알래스카 판매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차르가 알래스카를 헐값에 넘겼다며 분개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러시아가 개척한 영토라기보다 원주민 땅에 깃대만 꽂아놓고 뻔뻔하게 주인 행세를 하면서 멋대로 돈 받고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로서는 어차피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동방 정책은 오락가락하고 원칙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의 땅에 대한 욕심을 순순히 접지도 않았다. 때로는 황금알을 얻기도 했고 뼈저린 댓가를 치르기도 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에 직면한 청조를 압박하여 연해주를 뜯어간 러시아는 만주까지 탐내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한방 먹고 체제가 붕괴될 뻔했다. 볼셰비키들은 중국에서 세계 혁명의 기회를 노렸지만 장제스에게 쓰라린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1939년 가을 노몬한에서는 숙적 일본과의 리매치전에서 완승을 거두기도 했다. 어지간히 쓴맛을 봤는지 일본은 두번 다시 시베리아를 넘보지 못했다. 스탈린의 관심사는 항상 동쪽보다 서쪽이었지만 일본이 패망했을 때 동쪽에서 자기 몫을 챙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우리의 분단이었다. 저자는 500여 페이지에 걸쳐 성공과 실패의 파란만장했던 러시아 동진 350년사를 흥미롭게 다룬다.

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러시아 선박은 레자노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알래스카로 가는 세계 일주 항해 중에 타고 있던 나데즈다호와 네바호였다. 1802년 6월 두 배는 하와이 해안에 정박했고 이 섬들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식량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러시아 방문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곳에서는 돼지고기, 빵나무 열매, 바나나, 코코넛, 타로 토란, 얌, 바타타, 소금, 나무, 물, 그리고 배에 비축하기에 특히 좋은 여러가지 물품을 풍부하게 구할 수 있다." - p.83

포트 로스와 알래스카 정착지는 몇 십년 동안 더 유지되었지만 사실상 거의 무시당했다. 러시아인들은 왜 그것들을 신경써야 하는지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더 이상 북아메리카에서 러시아의 공간을 확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1830년대 후반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이사들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해달이 거의 멸종했다. 로스 정착지는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1841년 회사는 이 요새를 3만 달러에 매각했다. - p.101

무라비요프는 "잉글랜드인들이 그 금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사할린과 아무르 강 하구를 차지하고 말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염려했던 이유는 자문관인 발라소글로가 아무르강 삼각주와 북태평양 연안이 이집트에게 나일강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만큼이나 러시아의 미래에 핵심적인 지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무라비요프는 이 지역이 유럽 제국들의 팽창에 알맞은 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문제는 어느 제국이 그 지역을 차지하는가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아무르강 하구에 영국 요새 대신 러시아 요새가 서 있기만 한다면 러시아의 지배는 영원히 보장될 것이다." - p.127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러시아 지도자들의 주된 관심은 극동 지역이 러시아의 나머지 부분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국경 너머의 지역들 - 중국 만주와 청의 보호를 받지만 독립국인 조선 -은 러시아에게 더욱더 관심 밖의 존재였다. 러시아는 1880년대 중반까지 조선과 거의 무역이 없었다. 1880년대에 영국이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했을 때 러시아 관리들은 '불간섭 정책'을 주장했다. 러시아 해군 제독들은 당시에는 조선 해안에 항구가 생긴다 해도 러시아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 p.219

1927년 4월 스탈린이 평가했듯 국민당 우파와 우한의 국민당 좌파, 그리고 중국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동맹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가 다수를 점하고 있고 그들 우파가 우리의 말을 듣고 있는데 왜 우파를 쫓아내겠는가?" 국민당은 "철저히 이용되고 레몬처럼 즙이 짜인 뒤에 버려져야 한다." - p.309

스탈린이 아시아에서 기회를 포착한 것은 군사적 균형에 대한 냉철한 계산이자 팽창에 대한 열망의 결과였다. 차르 니콜라이의 제국은 복원되었다. 몰로토프는 한때 알래스카까지 꿈꾸었지만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알래스카가 여전히 크램린의 손이 닿지 않는다손쳐도 얻은 것은 많았다. 세계 지도가 새로 그려지는 가운데 크렘린은 소련의 힘을 아시아에서 확대할 새로운 기회를 감지했고 영토 확장의 가능성도 함께 보았다. "외무장관으로서 나의 임무는 우리 조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것이다."라고 몰로토프는 은퇴 후에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 p.374

두 나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흐루쇼프는 아주 유치하다"라고 마오쩌둥은 선언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쉽게 속는다." 한편 소련 지도자들은 미국과의 대립 뿐만 아니라 버마, 인도네시아, 인도를 포함해 모스크바가 구애하고 있는 여러 탈식민지 국가들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베이징을 비난했다. 내부 회의에서 소련 지도자들은 중국의 도발이 사회주의 진영 내에 불필요한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 p.419

남한이 투자 자금의 주요 공급처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계속 있었지만 실제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었다. 1992년 옐친이 선언했듯 두 나라는 "이제 서로를 갈라놓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두 나라를 결속시키는 요소 또한 거의 없었다. 옐친은 서울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1983년 소련군이 격추한 대한항공 007 여객기 사건을 조사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가 남한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과 거리를 두었음에도 평양의 핵 프로그램은 서울로 하여금 안보의 주요 제공국인 미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가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 p.500

러시아 통치자들이 왜 거듭하여 아시아에서 기회를 찾으려고 했을까? 그 이유로는 중국과 일본의 거대한 시장, 시베리아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접근, 태평양으로의 출구, 자주 그렇게 여겨져 왔듯이 지정학적인 팽창과 영토 확장을 위한 공간,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오늘날 카라가노프가 러시아의 아시아 전환을 설명하며 말했듯이 "유럽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라시아적 출구"를 찾으려는 희망 등을 들 수 있다. 수 세기 동안 러시아의 아시아 국경은 온갖 거창한 계획을 펼칠 수 있는 열린 문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 p.518


벌써 30여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예전에 불곰사업이라고 러시아제 T-80 전차와 BMP-3 장갑차가 국내에 들어와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 기억난다. 노태우 시절 북방 외교의 일환으로 구소련에 거액의 돈을 빌려줬다가 소련이 망하면서 못 받게 되자 그 대신 일종의 현물 상환으로 무기를 받아낸 것이었다. 그게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가를 떠나서 북한조차 언감생심이었던 러시아제 최신 무기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에 호기심 어린 시선과 더불어 처음으로 미국일변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우리에게는 놀라운 도약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밀덕들에게는 말이다. 소위 '러빠'들이 PC통신을 중심으로 한창 양성되기도. 우리 사회에서 러시아 붐이 불면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로 유학갔다. 그 시절 러시아는 기회의 땅이었다. 특히 통일이 된다면 북한을 거쳐서 유럽까지 열차를 타고 횡단하는 시대가 열릴 거라는 장밋빛 환상을 품기도 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러시아를 얼마나 아는가. 얼마 전에 JTBC 비정상회담에도 출연한 바 있는 러시아인이 쓴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라는 책을 읽었다. 여기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러시아란 금발 미녀와 보드카, 푸틴이 곰을 붙잡고 헤드락을 거는 나라"라고 하더라. 우리의 대외 무역에서 러시아는 10위권에도 속하지 못한다. 별로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는 얘기. 더욱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폭발과 함께 양국의 경제 협력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그 와중에 푸틴이 우리 대신 북한을 새로운 전략적 동반자로 선택한 것은 단순히 코드 맞는 독재자들끼리의 야합만이 아니라 30년 북방 외교의 실패이자 여전히 좁은 한반도라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만 보는 우리 외교의 한계를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이 책은 2021년에 씌여졌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푸틴과 김정은의 결탁에 대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지적처럼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서쪽에 집중하다가도 기회가 될 때마다 동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유럽에서 우리는 2류였지만 아시아에는 우리가 1류가 될 것이다."라는 게 러시아인들의 오랜 갈망이라고 강조한다. 설령 기대만큼 큰 재미를 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과 극한 갈등을 빚고 있는 푸틴이 서쪽 대신 동쪽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겠다고 나서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미국과 중국이 단단히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우리로서는 러시아가 언제 중국, 북한과 손을 잡고 이빨을 들이댈지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여전히 멀고도 먼 나라 러시아의 동방 야심을 경고한다. 한마디로 금발 미녀에만 눈이 돌아가서 안 된다는 것. '올초 글항아리에서 나온 러시아 제국주의 역사를 다룬 <로스트 킹덤>과 함께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의 가을 - 중국과 서양, 그리고 태평천국 전쟁의 역사 걸작 논픽션 33
스티븐 플랫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하던 <마지막 황제>를 한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초기 서양인 감독이 자금성을 5주 동안 통째로 빌려서 찍었다는 이 영화는 청나라의 1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눈을 통해서 격동의 중국을 서사적으로 묘사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궐앞에 수많은 신료들이 도열해 있는 자금성의 웅장한 모습은 엄청난 비주얼이었다. 당시 투자 유치와 이미지 개선에 진심이던 중국 정부가 열성적으로 지원한 덕분. 심지어 톈안먼에 걸린 마오 수령의 대형 초상화까지 뗐다고. 참고로 톈안먼 사태 터지기 2년 전 영화. 중국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요즘처럼 호주머니 두둑하고 목에 힘주는 시진핑 시대라면 어림없는 소리겠지.


영화에서는 할머니 격인 서태후에 의해 생후 34개월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푸이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상황과 시대의 흐름에 휘둘리며 파란만장한 인생 역경을 겪는 과정을 인간적인 동정심을 섞어서 묘사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본다면 꽤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른다. 당장 앞선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만 하더라도 푸이가 즉위한 그 자금성을 향해 사방에서 성난 농민군이 몰려오는 와중에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자살했으니 말이다. 또한 남명 정권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는 청군에 투항한 항장 오삼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원래 망국의 황제들이란 최후가 썩 좋지 않은 법이다. 자살하거나 아니면 살해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는 길로틴에서 목이 잘렸으며 청조가 망한 지 6년 뒤 러시아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어쨌든 푸이는 옥좌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럭저럭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렸다. 하물며 그 시절 가축과 다를 바 없었던 대다수 중국 민중의 삶에 비하면야.

말년의 푸이(가운데)와 루쭝린(왼쪽), 슝빙쿵(오른쪽) 루쭝린은 원래 군벌 출신으로 푸이를 자금성에서 쫓아낸 장본인이고 슝빙쿵은 신해혁명의 서막인 우창봉기를 일으킨 인물. 공산당에 의해 연출된 사진이기에 저 어깨동무가 어디까지 본심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듯. "웃는게 웃는 것이 아니야" 그래도 푸이로서는 말년이 남들 시선 신경쓰지 않고 제 의지대로 살았던 유일한 시간이 아니었을지.


청조는 푸이 대까지 갈 것 없이 진작에 망할 수도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시원하게 아작나면서 처음으로 콧대 높은 중화의 존엄이 짓밟힌 이후 청조는 문을 닫는 순간까지 동네북 신세였다. 그 중에서도 태평천국의 난은 이자성이 명나라를 끝장낸 것처럼 청조를 거의 결딴낼 뻔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영국, 프랑스는 청나라의 버릇을 고치겠다면서 톈진을 침공했고 함풍제는 북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청조는 우여곡절 속에서 버텨냈고 반 세기나 더 살아남았다. 서태후를 가리켜 '중국 3대 악녀'라느니 청조를 말아먹은 여편네쯤으로 불리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으로 황제의 무능함을 죄다 주변 여자 탓으로 돌리기 십상인 중국 남정네들의 뿌리깊은 관념이 만들어낸 것일 뿐, 영화 <남한산성>에서 조선군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그 거친 아재들은 어디가고 온실 속 화초처럼 담작고 심약한 사내들만 가득했던 만주족 황실에서 그나마 강단이 남아 있는 여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국지 초반에 동탁에 의해 제거되는 하태후마냥 그 바닥에서 진작에 퇴장당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는 보수반동의 전형으로 꼽혔지만 청 말 자강운동은 그녀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반란이 일어난 신장성을 도로 복속하고 갑신정변에서는 조선과 일본을 상대로 모처럼 청조의 위엄을 보여주어 우리 아직 안 죽었음을 뼈저리게 각인시켜 주기도 했다. 청조를 찬탈하는 위안스카이조차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야심을 드러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한족의 도전과 외세의 핍박 속에서 다 쓰러져가는 청조를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구심점이었으며 서태후가 죽자 청조도 망했다.

근래에 와서 '권력과 사치의 대명사'라는 서태후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빵이 없으면 고기 먹으면 되지"라고 했던 마리 앙투와네트의 유명한 말이 가짜뉴스였던 것처럼 서태후의 실정 또한 캉유웨이를 비롯해 그녀를 원수로 여겼던 한족 지식인들에 의해 상당부분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권력 농단으로 중국에 지울 수 없는 해악을 끼친 악녀는 마오의 경박한 황후인 장칭이었다.


반대로 청조는 태국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청일전쟁과 의화단 난의 재앙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희 신정으로 서태후 말기에 오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서태후의 진짜 실수는 사치나 개혁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죽기 직전 세 살 짜리 어린아이를 옥좌에 앉혔다는 사실이었다. 푸이를 대신하여 섭정이 된 순친왕 짜이펑 또한 서태후에 비하면 20대 초반의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서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다른 만주족들 또한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우창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청조는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토벌하여 일벌백계할 수 있었음에도 지레 겁을 먹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마냥 야심 넘치는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군권을 넘김으로서 자폭한 꼴이 되었다. 만약 순친왕이 좀 더 현명했거나 위안스카이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했더라면 청조는 살아남았을까. 러시아나 오스만처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자강에 노력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후난성의 촌놈인 마오쩌둥은 동네 선생 노릇하다가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오늘날 시진핑이 트럼프와 대립각 세우는 동아시아는 좀 더 평온할까.



새해 벽두부터 중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눈 여겨 볼 신작이 나왔더라.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글항아리에서 나온 <천국의 가을>은 아편전쟁 이후 내우외환에 허덕이던 청조 최대의 위기인 태평천국의 난을 다룬 책이다. 저자인 스티븐 플랫은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중국사 교수라고. 주로 청나라쪽 역사를 다루는 모양. 태평천국의 난은 1850년부터 1864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중국 전토를 전란의 불길에 빠뜨렸다. 서북과 동북을 빼고 중원 18개 성 중에서 17개 성이 휘말렸으며 죽은 사람이 2천만명에서 많게는 8천만명까지 추산되어 당시 4억명 정도였던 중국 인구의 거의 1/5에 달했을 정도.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기세. 가장 특이한 것은 태평천국의 지도자였던 홍수전이 중국 역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느 농민 반란군과 달리 기독교에서 파생한 사이비 짝퉁 교주였다는 사실. 그런 사람 대한민국에도 많이 있지 않남. 차이가 있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 대신 '멸만흥한'을 외쳤다는 점. 하지만 서양과 한족 양쪽 모두를 내편 삼으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 두 마리 물고기 모두 놓치게 되면서 결국 패망했지만 말이다.

전성기 시절 태평천국 판도. 한때 중원의 태반을 지배하고 베이징 코앞까지 육박하기도. 하지만 사이비 짝퉁 교리의 한계와 지도부의 내분, 홍수전의 리더십 부족으로 중국판 메이지 유신을 여는 데 실패함으로서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았을 민폐만 끼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비중있는 쪽은 홍수전이 아니라 그의 사촌이자 태평천국 5천왕 중 한 사람으로 홍콩과 상하이에서 외국인 선교사 밑에서 서양물 먹고 서구식 근대화를 외쳤던 간왕 홍인간이다. 서구인들 입장에서 본다면 적어도 성경으로만 서양을 접한 동료들에 비하면 좀 더 깨였다는 것. 참고로 중국에서 철도와 보험 도입을 가장 먼저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주장은 당시 중국의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이세계에서 산업혁명을 하자는 얘기였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에 실현되지 못했다. 원래 이론과 실천은 별개인지라. 그보다도 본인부터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를 써먹은 것이지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다보니 주변 사람들로서는 뭔 뜬구름 잡는 소리였을 것이다. 오히려 청조 관료들 중에서 그의 저서에 주목하여 시도해 본 게 양무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일본한테 폭망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수박 겉핡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만 증명한 셈. 어쨌든 그 시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서양인에게는 신비로운 모양.

홍인간이 이야기했듯 언제나 돋보였던 인물은 그의 사촌인 아홉살 연상의 홍수전이었다. 그들은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에서 약 50km 떨어진 서로 이웃한 마을에서 살았다. 맑은 날이면 광저우 동북쪽에 위치한 바이윈 산이 보일 만큼 광저우에서 가까운 마을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친척 사이로 과거에 세도가였던 한 씨족에 속해 있었다. 송나라 때에는 그들 중에서 고관과 황제의 참모가 다수 배출되었지만 이미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가난한 농민에 지나지 않았다. - p.61

어떤 중국인도 쉽게 칭찬하지 않았던 레그는 홍인간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품었고 그를 "내가 아는 가장 다정하고 다재다능한 중국인"이라고 묘사했다.레그의 딸도 이를 뒷받침해 까탈스러운 자기 아버지가 홍인간에 대해 "다른 어떤 중국인에게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특별한 애정과 따뜻한 감탄"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홍인간의 성품에는 그와 함께 일한 많은 선교사들의 관심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그를 "기독교 진리를 분명하게 잘 이해하고 있는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물의 소유자"라고 묘사했다. - p.72


이 책은 광둥성의 하카족(객가인)이자 과거 4수생이었던 홍수전이 낙방의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고 느닷없이 신내림을 받았다더니 중생의 구원을 외치며 세상에 나서는 것부터 14년 동안 벌어지는 태평천국의 파란만장했던 흥망성쇠를 서양인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태평천국군은 오합지졸 도적떼에 불과한 황건적이나 나중에 등장하는 동네 양아치 집단인 의화단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훨씬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5명으로 구성된 1개 분대부터 5개 분대가 1개 소대를, 4개 소대가 1개 중대를, 5개 중대가 1개 여단을, 5개 여단이 1개 사단을, 그리고 5개 사단이 1개 군을 구성했다. 서구식 사단에 해당하는 1개 군은 1만3천여명에 달했다. 군사 편제가 명나라 시절에 머물렀던 청군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게다가 엄격한 규율과 서양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서양제 최신 무기로 무장하여 기강 빠진 청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실제로 태평천국은 겁 많고 무능한 함풍제의 청조를 교체할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중국을 양분하여 북부보다 훨씬 풍요롭고 한족들이 사는 남부를 통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주원장의 홍건적과 차이가 있다면 한족 사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서구 열강이라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었다. 홍콩과 상하이를 통해 중국에 발을 걸친 서구 열강들은 중국인 반란군이 캐캐묵은 공자 대신 기독교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지만 결국 자신들의 판돈을 청조가 이기는 쪽에 걸기로 했다. 후난 성의 한족 관료인 증국번은 나약한 청군을 대신하여 '상군'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고 거의 아무런 지원도 없이 태평천국군과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인다. 태평천국을 파멸시킨 것은 청조의 군사력이 아니라 증국번과 서구 열강이었다. 봉기 초기에 합류하지 못한 채 떠돌이 생활을 했던 홍인간은 홍콩과 상하이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성경 너머의 서양 문명을 배웠다. 하지만 서구의 무관심과 태평천국 내부의 복잡한 권력 투쟁 속에서 그 인맥과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천국의 몰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그의 운명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엘프 주인공보다 훨씬 비극적이었다. 난징을 탈출한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저자는 그 과정을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을 통해 서사적이고 흥미롭게 묘사한다.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하고 재빠른 몽골인 기병대는 다가오는 연합군의 왼쪽 측면을 향해 넓은 파도를 이루며 돌격했다. 연합군은 좌측에 기병대, 중아에 포병대, 우측에 보병대, 이렇게 세 개의 열을 이루며 진군했다. 중앙의 포병대가 돌격하는 몽골인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대포들의 방향을 틀자 영국과 프랑스 기병들이 재빨리 흩어지며 비켜섰다. 그러자 암스트롱포들이 다가오는 청국군 기병대 대열 한가운데로 일제 공격을 퍼부었고 결과는 처참했다. 몽골 기병들이 혼비백산해 멈췄고 이 순간 영국 기병대는 전력을 다해 중앙부로 돌격하여 청군 방어선을 깨뜨렸다. - p.214

1854년 2월에 이르러 증국번은 전투에 투입될 준비가 된 육상 병력 13개 대대와 이를 지원하는 수군 10개 대대를 갖추고 있었다. 수군은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함대는 200척 이상의 전함, 군용 물자를 나르는 100척의 정크선, 크고 넓은 기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만 아는 증국번은 전술 지휘관으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서툴렀고 말을 타는 것도 간신히 했다. - p.247

홍인간은 태평천국의 정치적 선전물을 쓰고 출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궁에 있는 서양식 납활자 인쇄기를 사용하여 그러한 선전물을 대량 인쇄했다. 그렇게 나온 출판물 가운데 어떤 것들에서는 산업화에 대한 그의 신념이 드러났다. 그는 철도, 기계식 무기, 증기선, 전신의 중요성과 전국적 신문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인쇄기 자체가 그런 혁신의 하나였고 그의 인쇄 담당 인력은 외국의 가동 활자 기술을 손쉽게 익혔다. 그 인력은 반란군 수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축에 속했고 한 방문자의 기록에 따르면 그 도시에서 종교적 열정이 가장 적은 축에 속했다. - p.302

여름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매일의 쌀 배급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텃밭의 채소와 잡초는 남김없이 먹어치워버렸다. 쥐를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 사라졌고 도시 안의 굶주린 사람 수천 명을 먹여살릴 것은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9월 5일 그 도시로 들어간 승자들은 그 동안에도 안칭의 시장이 문을 닫은 적이 없음을 알고 경악했다. 인육의 가격은 마지막까지 600그램(1근) 당 은화 반냥, 즉 1파운드 당 38센트에 달했다. - p.394

반란군 군대가 성안으로 진입했다. 하비 영사는 곧 이렇게 보고했다. "이제 닝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스란히 태평천국 군대의 수중에 있다." 그것은 비교적 평화로운 정복이었다. 하비 영사의 예상과 달리 광범위한 학살은 없었다. 또한 청국군이 그 도시에서 도망쳐 나오기 앞서 불을 지른 것 말고는 화재도 없었다. 어느 정도의 약탈은 있었으나 반란군이 "굉장한 절제"를 발휘했다고 하비는 놀라워했다. 지휘관들은 전장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호적이었고 "모든 외국인과 우정 및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또한 외국인 시민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다 처형하겠다고 말했다. - p.443

하비의 보고에 따라 이제 <타임스>는 영국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은 태평천국을 괴멸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란군은 "우리와 우리의 황금 사과 사이를 가로막는 용"이 되었다. 편집진이 독자들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문제였다. 만약 상하이와 닝보의 차 시장이 태평천국에 의해 파괴된다면 영국 정부는 차 무역으로 얻는 꼭 필요한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서 차에 대한 세율을 인상해야 할 것이며 랭커셔 섬유 산업 붕괴로 이미 굶주리고 있던 사람들을 포함해 차를 마시는 영국 사회 하층 계급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 p.509

당면한 전쟁의 압박으로 홍인간은 중국의 새로운 정부 구성과 외교를 위한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군사 작전과 보급로 확보가 최우선이었고 그 전선들에서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그가 꿈꿨던 국가의 시작은 점점 멀어졌다. 철도, 법원, 무역중개소, 신문, 광산, 은행, 산업 등 그가 소중히 여겼던 개혁들은 모두 미뤄질 것이었다. 수도의 지도부를 단결시키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군사적 패배가 짙어질수록 홍수전의 광기는 커져갔고 파멸의 조짐은 환영을 보는 그의 정신을 묵시록으로 몰아갔다. 그는 물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만 의지했으며 추종자들에게 함부로 보상과 영예를 베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유주가 이름을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새로운 왕을 만들어냈다. 그래서는 안될 시기에 수도의 관리들 사이의 다툼이 커지고 격해지고 있었다. - p.595

외국인이 마지막으로 홍인간을 본 것은 난징 함락 직전 후저우에서였다. 패트릭 넬리스라는 용병이 그곳에 있었는데 원래 셰러드 오즈본 함대의 선원이었으나 반란군에게 끌려가서 그 도시의 방어를 돕고 있었다. 7월 초였고 왕국은 사방에서 무너지고 있었지만 후저우의 성벽은 아직 버텨내고 있었다. - p.618

얼마 전에 읽은 <동인도 회사 : 제국이 된 기업>에서 아우랑제브 황제 사후 무굴 제국의 분열과 혼란상을 기회삼아 일개 기업에 불과한 영국 동인도 회사가 거대한 인도 대륙을 집어삼키는 과정을 설명한다. 어째서 중국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차이는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질 때에는 동인도회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 정치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중국 내전에서 어느 쪽 편을 들지를 놓고 국가적 윤리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사이에서 주판을 두들기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이게 정치인과 상인의 가장 큰 차이일지 모른다. 상하이에는 '상승군'이라는 소규모 용병 집단 외에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조직한 세포이 부대와 같은 거대한 현지인 고용병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개입은 느리고 제한적이었으며 청조를 자신들의 괴뢰로 만들지도, 애초에 그럴 의사도 없었다. 중국인들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랄까.

저자는 태평천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지만, 과연 태평천국이 이겼더라면 이후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쉽게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고 여긴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과 달리 광둥성의 산골 촌놈들이었던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정체불명의 사이비 교리와 한족 천하를 되찾겠다는 슬로건 외에 근대 국가를 향한 구체적인 비전이 없었다. 이들은 머리를 깎거나 양복을 입는 대신 만주족의 상징인 변발을 잘랐을 뿐이다. 하지만 신진 세력답게 청조보다는 더 활기차고 역동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금방 발기부전의 무기력증에 빠지는 중국 왕조사들을 보건대 얼마나 오래 갈지는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적어도 이건 분명하다. 태평천국의 난은 정권 교체에 실패했고 머리 굳은 청조의 영감님들이 구태의연하게 추진한 양무운동은 젊고 활기왕성하며 뇌주름이 유연했던 일본 지도자들의 도전 앞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만약 일본 또한 막부가 도막파를 꺾고 승리했다면 청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지만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사다보니 중간중간 착각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도 눈에 띈다. 가령 p.617에는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증국번과 포로가 된 충왕 이수성을 가리켜 "백발의 두 총 지휘관이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치 남북전쟁 말기 코트 하우스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마주한 그랜트와 리를 연상케 하지만 이수성은 증국번보다 12살이나 아래로 당시 41살에 불과했다. 아무리 전쟁터에서 고생해서 얼굴이 좀 삭았다고 해도 백발 성성은 아닐 듯. 정작 이수성과 동갑인 이홍장에게는 p.459에서 "젊은 인재가" 어쩌구. 그럼에도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역사책 중의 하나로 손꼽기에는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