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 이야기 - 첨단 기술의 원점을 찾아서
정진오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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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이나 소설,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대장장이'라고 하면 드워프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근육질 땅딸보에 털보 수염을 한 드워프가 무기와 방어구 제작을 전담하는 것이 그쪽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스킬과 주문만으로 도구를 만드는 경우도 있더라만 반칙 아님? 열기로 후끈거리는 대장간에서 전심전력 망치를 휘두르며 온 몸으로 땀내를 풍기는 것이 대장장이의 마땅한 이미지이거늘.


<고블린 슬레이어>에 나오는 드워프 장인. 종족 특성 상 성격이 몹시 괴팍하면서 자신의 작품만큼은 투철한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워프의 모습은 원래 중세 시절 많은 대장장이들이 아무런 안전 장구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금속을 만지다보니 중금속에 노출되어 제대로 크지 못했던 것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더라. 그래서 드워프와는 정반대로 미형에 키가 훤칠한 위너 종족인 엘프와는 서로 상극이라는 설정. 손재주가 뛰어난데다 금속을 다룰 줄 알기에 문명 세계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고고한 엘프와 달리 술고래에 탐욕스럽고 속물 근성 가득하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썩 존중받지는 못한다. 이공계가 천대받는 건 판타지 세상도 마찬가지인 듯.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각인된 대장장이의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리들리 스콧의 2005년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올랜드 블룸. 뭐, 이쪽은 엘프가 대장장이를 하는 경우이고.


광석에서 원하는 금속을 뽑아내고 연마하여 도구로 만드는 것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자 부국 강병을 위한 수단이었기에 국가 차원의 극비 사항이었다. 따라서 대장장이들은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기술자로서 그만한 우대는 커녕, 높으신 분들 필요에 따라 무슨 열정 페이마냥 부려먹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일은 농사 이상으로 고되고 직업 훈련은 도제식이었으며 보수는 터무니없이 형편없다보니 대장장이는 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습되는 구조였다고 한다. 안 그러면 누가 하겠음. 그 시절 그렇지 않은 직종이 있었겠냐만. 어릴 때부터 대장간에서 잔심부름으로 시작하여 괴팍한 아버지한테 머리통 작살나게 맞아가면서 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이들의 고달픔이 와닿는다. 비록 고생스럽기는 해도 그럭저럭 먹고는 살았다고. 어느 시대이건 남들에게 없는 전문 기술 하나 있으면 호구는 해결할 수 있는 법이라.


김홍도의 <대장간>. 모루 위에 집게로 쇠를 올려놓고 있는 초로의 영감님이 이른바 '집게잡이'라 하여 대장간 점주이자 전체 공정을 총괄하는 야장(冶匠, 대장장이), 망치질을 하는 아죠씨들은 대장장이에게 고용된 메질꾼. 그리고 뒷쪽에서 풀무질이나 아랫쪽에서 낫을 가는 일은 어린아이들이 맡고 있다. 즉, 풀무질에서 시작하여 메질꾼을 거쳐서 집게잡이가 되는 도제식 계급 구조를 보여주는 셈.


'대장간'이라고 하면 워낙 예스러운 이름이다보니 사극 속이라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는 없을 것같지만 아직까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철공소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작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편찬한 <서울의 대장간>에서는 서울에 대장간이 네곳 남아 있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그나마도 오래지 않아 명맥이 끊어질 분위기라는데. 어쩌면 인간 대신 로봇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 매고 망치를 휘두르며 쇠를 담금질하는 날이 올지도. 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같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교유서가에서 지난 3월에 나온 신작 도서 <대장간 이야기>는 산업 혁명 이전 수천년 동안 첨단 기술의 현장이었고 근대화와 함께 이제는 우리 추억 속의 존재가 된 대장간을 다룬 에세이이다. 저자인 정진오 작가는 25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로 아마도 지금은 퇴직하신 듯 한데 한때 대장간에서 제2의 인생을 찾으려 했다는 괴짜. 그 대신 과거의 유물이 되어 그 흔적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우리 전통의 장인 정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오마이 뉴스에서 매주 연재한 칼럼을 엮은 것이라고 한다.

'대장간'이란 대장장이가 일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대장은 흔히 부대 지휘관을 가리키는 대장(大將)이 아니라 순 우리말이다. 언제부터 금속을 만지는 일을 대장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한 어원이 없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대장장이들을 찾아다니며 쓴 21가지 이야기가 있다. 인천에서 전통의 명맥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대장간들, 그리고 이런 대장간에 얽힌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 쓰고 있다. 기자 출신답게 생생한 필체 덕분에 마치 내가 대장간에 앉아 있는 양 우렁차게 귓가를 때리는 망치질 소리, 담금질하는 쇠 냄새, 화로에서 후끈하게 타오르는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다.

85세 대장장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로에서 지름 5센티가 넘는 굵은 쇠막대기가 누런 색깔로 달구어졌다. 대장장이는 커다란 집게로 그 쇠막대기의 끝을 잡고 바로 옆에 놓인 기계 해머 쪽으로 가져갔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로 해머 페달을 밟자 헤머 머리인 네모난 쇳덩이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 p.24

송종화 장인이 대장간에서 일자리를 처음 구한 것은 70년 전인 1953년 1월이었다. 그 대장간은 2023년 지금 일하는 곳에서 불과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황곡철공소.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겨울,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가 대장간에서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전쟁 통에 집에 폭격도 맞았다. 식구들이 밥 먹다가 맨몸으로 뛰쳐나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대장간에 들어갔다. - p.34

우리는 영화 <토르>를 볼 때마다 주인공 토르와 그가 휘두르는 망치에만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하지만 한번 쯤은 그 망치를 만든 대장장이 형제들의 솜씨에도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토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영어로 목요일을 일컫는 'Thursday'가 바로 '트로의 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앞으로 토르 시리즈가 계속된다면 영화 개봉을 목요일에 맞추어 잡으면 어떨까. - p.79

영조 임금은 대장장이들의 파철전을 비롯해 시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영조나 정조 때처럼 기술자나 상인들이 사농공상의 체계 속에서도 그나마 더 나은 대우를 받았던 호시절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로 조선은 쇠퇴했고 힘없는 나라는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국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확은 1923년 저술한 <조선문명사>에서 "관리들의 탐욕과 침탈로 인하여 공업이 크게 쇠락하고 말았으니! 아! 쇠락한 때의 정치에 대해서는 차마 말조차 할 수 없도다."라고 조선 후기의 타락상을 한마디로 꼬집었다. - p.103

율곡 이이의 삶과 학문세계를 다룬 평전은 대부분 백사 이항복의 <백사집>을 인용하여 율곡이 대장간을 경영했던 일화를 빼놓지 않는다. "율곡은 해주에 살 때 대장간을 차리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의리상 마땅히 해야할 것이라면 대인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행했다."는 내용이다. 율곡이 은퇴하여 처가인 해주에 머물 때 대장간을 했다는 얘기이다. - p.160

온갖 오염물질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갯벌과 바다는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 문제는 도구이다. 우리의 맨손어업 도구를 만들어낼 대장간이 문을 닫게 되면 그 도구는 어디서 날 것인가. 정부는 오랜 전통의 갯벌어로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겠다며 나섰지만 정작 갯벌어로의 도구는 우리 어민들의 손에 맞지도 않는 중국산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p.218

이순신은 왜적들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본떠 우리식의 또다른 조총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만이었다. 이순신은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임금에게 올리면서 그 주역인 대장장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고 포상을 요청하기도 했다. 임금이 읽을 문서에 노비인 대장장이 이름을 적는 일은 당시로서는 무척 용기있는 일이었을 게다. 임금에게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대신 대장장이들에게 그 공을 돌리는 일,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도 가능했을까. - p.234

대장간의 핵심 장비 중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망치를 내리쳐 모양을 잡는 모루가 있다. 그 '모루'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라는 말의 내력도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대장간은 이처럼 우리 말의 작은 알갱이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간이다. - p.294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대량 생산하여 스마트폰에서 클릭 한번이면 어떤 물건이건 못 사는 것이 없는 세상에 아직도 수공업으로 망치 두들기며 연장을 만드는 대장간은 민속촌같은 데에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체험 학습하는 것 이외에 어디 수요가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대장간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엿장수들이 엿 자를 때 쓰는 가위라던가, 무당들이 굿할 때 쓰는 소품이라던가, 해녀들이 바다에서 굴을 딸 때 쓰는 어구같은 워낙 희귀하고 수요가 적어 공장에서 찍어내기에는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물건 말이다. 그조차 요즘은 값싼 중국산에게 밀리는 판국이라고 하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로는 대장장이들도 마찬가지. 그들로서도 그저 평생 하는 일이라 업이라고 생각하고 돈 따지지 않고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아버지의 일을 자식이 물려받는 시대도 아니니 대장장이가 사장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듯 하다. 안타깝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일본에서는 '와패니즈'의 영향인지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일본도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검이라며 선호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물론 영화와 일본 아니메가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환상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보기에는 일본도가 폼나잖음. 덕분에 일본도를 만드는 도공들이 꽤 있다고. 사실은 야쿠자들만 쓰는 거 아님? 유럽에서는 수공예품이 명품이라며 브랜드화되어 비싸게 팔린다. 여자들이 죽고 못사는 구찌라던가. 알고보면 죄다 중국 공장에 싸게 하청준거지만. 결국 이름값이고 사람들의 이미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런 궁리를 할 방법은 없을까 문득 생각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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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카트야 호이어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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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후반 이후의 세대라면 미-소 냉전의 시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 TV를 통해서 우주에서 레이저로 소련의 다탄두 핵미사일을 격추한다는 레이건의 야심만만한 '스타워즈 계획'을 봤던 것이 생각난다. 물론 거의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개구라였다고 하지만, 그게 소련을 자극하여 무한군비경쟁으로 이어지면서 결과적으로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에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언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고 인류가 미-소 핵전쟁으로 멸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영화와 애니에서 흔히 보는 주제였다. 하물며 전쟁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박살날 나라가 우리였다. 어떤 썰에 따르면, 냉전 끝난 뒤 한국을 방문한 소련 미하일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러시아 장군이 한국군 장성들에게 말하기를 남한 정도는 R-36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한발이면 끝장낼 수 있었다고. 아무리 남한이 소련에게 약소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과소평가라며, 터무니없는 허풍이라는 반발에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R-36에는 500~800kt급(히로시마 원폭의 30~50배) 핵탄두 10발이 탑재 가능하며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홍천, 울산에 각기 한발씩 박아넣고도 2발이 남는다나. 그 말에 바로 데꿀멍했다고. 그런 걸 무려 300발 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소련. 돌이켜보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무사히 그 시절을 넘긴 것이 용하다. 요즘 푸틴의 불장난을 보면 아직은 인류의 미래를 안심하기란 이를지도.

빨간 내복이 보여주는 광란의 연주와 워보이 군단의 기상천외한 로드 액션, 그리고 임모탄 조의 간지나는 은색 이빨 마스크가 인상적인 <매드 맥스> 또한 핵전쟁 이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이다. 패러럴 월드 중에는 이런 세상도 있을지도 "V8! V8! V8! V8!"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냉전은 어느 한 순간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시민들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한달 뒤인 12월 2일 지중해 몰타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아버지 부시와 고르바초프는 상호 적대행위의 중단에 합의했다. 동유럽에서는 상전의 뒷배에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된 친소 위성국가들이 줄줄이 붕괴되고 1년 뒤에는 동서독이 통일했으며 1991년 8월 사흘 천하로 끝난 소련 보수파들의 쿠데타 실패와 고르바초프의 실각, 그리고 12월 8일 거대한 구 소련 제국이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방의 승리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가 냉전을 끝냈다고 하지만 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 이유는 처음부터 어떤 흑막에 의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한 관료의 말실수와 오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이날 저녁 6시, 국내외 기자들을 상대로 일상적으로 열리는 동독 정부의 일일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동독 공산당 기관지의 신임 대변인이었던 권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메모를 읽어 나갔고 그 중에는 새로운 여행법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동독 국민들의 여행 허가 규제를 이전보다 완화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바뀐 것이 없는 알맹이 없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아직 중앙의 승인조차 받지 않은 법이었다. 문제는 샤보브스키가 너무 급하게 전달받아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회견장에 나왔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그의 역할은 자신이 전달받은 내용을 읽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누가 시시콜콜 따지는 일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특유의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이탈리아 국영 통신사(ANSA) 리카르도 에르만(Riccardo Ehrman)이라는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 법이 언제 시행되며 동독 사람들은 이제부터 마음대로 외국에 나가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말이다. 샤보브스키는 별 생각 없이 그렇다고 대꾸했다. 그의 말은 대번에 전 세계로 대서특필되어 마치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당장 철거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방송을 들은 베를린 시민들은 자기들 손으로 무너뜨리겠다며 너도나도 망치와 곡갱이를 들고 장벽으로 모여들었고 어리둥절한 동독 정부가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지난 30년 동안 동서독을 막고 있던 장벽은 하루밤새 허물어졌다. 샤보브스키의 멍청한 말 한마디가 냉전을 끝내고 소련을 무너뜨리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런 게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개짓하면 맨하튼에서는 토네이도가 발생한다는 진정한 나비 효과가 아닐런지.

20세기 최대의 말실수를 한 샤보브스키. 동독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붕괴되었지만 본인도 그 대가를 톡톡이 치러야 했다. 독일 통일이 서독 주도였기에 동독 관료들은 과거의 행적에 따라 처벌받았다. 샤보브스키는 잘나가는 엘리트 관료에서 민족의 죄인이 되어 3년 형을 선도받고 옥살이를 한 후 2015년에 독일의 한 요양원에서 86살의 나이로 쓸쓸하게 죽었다고 한다. 메모만 잘 읽었어도.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샤보브스키의 별 것 아닌 말 한마디가 냉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장벽이 냉전의 상징이자 다름아닌 냉전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동맹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전쟁 말기부터 삐걱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대결은 1948년 6월 18일 제1차 베를린 위기였다. 서방이 자신을 얕본다고 여긴 스탈린은 자신의 위세를 만천하에 보여줄 요량으로 소련군을 동원하여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모든 물자와 생필품, 연료, 식수의 공급을 봉쇄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뚝심있는 유럽공군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를 시켜서 수송기를 총동원하여 물량으로 압도했다. 히틀러는 항공수송으로 보급을 책임지겠다던 괴링의 말만 믿었다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 제6군 30만명을 아사로 내몰았지만 미국은 220만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을 먹이고도 남았을 정도이니 스탈린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은 셈이다. 과연 천조국 파워. 그 대신 홧김에 벌인 것이 극동의 망나니 김일성의 남침 허락이었다.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보다 우리는 뭔 죄래. 이런 게 나비 효과라는. 게다가 베를린을 통해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동독이라는 나라가 아예 붕괴될 판국이 되자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세우게 된다.

과연 동독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가. 부패와 타락의 대명사인 남베트남을 무너뜨린 것은 성난 국민의 횃불이 아니라 북베트남의 무력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꽤 잘 사는 축이었던 동독은 어째서 서독의 무력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무너졌던가. 정작 훨씬 더 가난하고 억압적인 북한은 여전히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왜 독일은 통일하고 우리는 그렇지 못한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서해문집>에서 냉전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책이 나왔더라. 냉전에 의해 등장하여 냉전과 함께 사라진, 한때 존재했지만 이제는 잊힌 또 다른 독일의 한조각 동독을 다룬 <장벽 너머>. 여기서 말하는 장벽이란 말할 것도 없이 동독을 서방 세계와 단절시킨 베를린 장벽. 우리에게 DMZ 너머의 북한이 그러하듯, 그 시절 서방 사람들에게 장벽 너머의 세상이란 '이세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요즘 물건너 나라에서는 꿈도 희망도 없다는 젊은 세대를 이세계로 승천시켜주는 환생 트럭이 유행이라지만. 이세계도 나름이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4일 소련 크림반도의 휴양지인 얄타에서 연합국의 3거두인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후 세계 질서의 재건과 함께 무엇보다도 독일 패망 후 유럽을 어떻게 나누어가질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독일은 엘베 강을 따라서 두쪽으로 쪼개졌다. 독일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가 해방된 국가들 역시 쪼개졌다. 독일의 한패거리였는지, 독일에 맞서 싸웠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점령했는가였다. 서방 연합군이 점령한 땅은 친서방 국가로, 소련군이 점령한 땅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냉전이 시작되고 이른바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드리우면서 양쪽은 서로 다른 세계로 갈라졌다. 누구도 허락없이 들어갈 수 없고 또한 나올 수도 없는 세계였다. 양쪽 모두에 점령된 오스트리아는 운 좋게도 영세중립국이 되어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났지만 전범국인 독일은 분단되어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방식은 우리와 같았다. 소련이 독일 전체의 총선거를 거부하자 연합군 점령지역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어 서독이 세워졌다. 몇 달 뒤 소련 점령지역이 동독으로 탄생했다.

얄타 회담에 따른 독일 분할. 소련은 폴란드로부터 옛 러시아 땅인 동부지역을 빼앗는 대신 그 보상으로 오데르-나이세 강 동쪽의 독일 영토를 넘겨 주었다. 이 때문에 온전히 독립한 서독과 달리 동독으로서는 차포를 죄다 떼인 채 껍데기만 가지고 독립한 셈이었다.


그러나 동독의 면적은 소련이 점령한 독일 땅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동프로이센을 비롯한 알짜배기를 폴란드와 러시아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동독은 서독에 비하여 면적은 43%, 인구에서는 1/3에 지나지 않았다. 분단 당시 남북한이 서로 비슷한 면적에 북한 인구가 남한의 절반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독일은 처음부터 서독에 완전히 쏠려 있었던 셈이다. 만약 스탈린이 욕심을 좀 덜 부렸더라면 동독은 면적과 국력 면에서 서독과 거의 동등했을 것이며 이후의 운명 또한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더 어이없게도 분단 당시 5천만명 정도였던 서독 인구는 1990년 63백만명으로 늘어난 반면, 동독은 18백만명에서 도리어 16백만명으로 감소하면서 양쪽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경제난에 허덕이던 동독인들이 더 잘 사는 서독으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샤보브스키의 말실수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동독은 시한부 운명이었다.

이 책은 동독이 세워지기 이전의 독일 공산주의자들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혼돈의 독일을 공산주의 유토피아로 만들겠다고 꿈꾸었던 이들은 1933년 히틀러에게 완패한 뒤 지옥을 겪어야 했다. 일부는 나치의 사냥을 피하여 소련으로 달아났지만 그곳 역시 지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만들어낸 최악의 괴물이었던 스탈린은 이들을 히틀러의 첩자로 여겼고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자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한 뒤 시베리아의 굴라크에서 서서히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물론 스탈린의 칼날을 운 좋게 피한 극소수의 행운아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동독의 실질적인 건설자이자 동독에서 스탈린식 철권통치가 무엇인지 보여주게 되는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Ernst Paul Ulbricht)였다. 그는 스탈린 치하에서 사는 법을 아는 인간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히틀러에게 그러했듯 스탈린에게도 맞섰고 더욱 혹독하게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939년 9월 9일, 발터 울브리히트는 당원들을 어떻게 설득할 지 당의 집행위원회인 정치국에 방안을 제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울브리히트가 회의에서 한 발언은 그가 얼마나 논증적인 창의성을 발휘했는지 보여준다.

"소비에트연방과 독일의 조약은 독일 파시즘을 소비에트 연방의 발 아래에 두는 것이므로 세계 노동계급을 지지하는 것이자 소비에트 연방을 둘러싼 거짓말이 모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p.51

굴라크에서 살아나온 정치범들도 환영받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살해된 독일 공산당 정치인 헤르만 레멜레의 아내 아나 레멜레는 스탈린의 지하 감옥에서 썩다가 전쟁이 끝나자 독일로 돌아가기를 시도했다. 1920년대 레멜레 가족은 발터 울브리히트와 가깝게 지냈다. 아나 레멜레는 필사적으로 울브리히트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울브리히트는 아나를 철저히 외면했고 그녀는 1947년 낙담하여 세상을 떠나 남편과 아들이 살해된 외국 땅에 묻혀야 했다. 딸과 손주는 그때에도 굴라크에 있었다. - p.60

에르빈 예리스는 기나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1949년 자신에게 형을 선고한 러시아인 판사와 나는 대화를 절대 잊지 않았다. 판사는 에르빈에게 사형과 다를 바 없는 소련 굴라크 25년 형을 선고하면서 빈정거렸다. "시베리아가 말 많은 당신 입을 다물게 할거요!" 에르빈은 침착하게 받아쳤다. "그리고 당신 입도 말이죠." - p.61

1945년 5월 8일 독일은 항복했다. 완전히 페허로 변한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의 반쪽은 소련의 지배에 들어갔다. 히틀러 치하에서 나치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왔다고 여겼지만 금방 착각에서 깨어나야 했다. 소련 치하 독일은 그들이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하여 스탈린의 충견 노릇을 하던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몫이었다. 국가를 다스리는 법은 몰라도 권력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스승인 스탈린에 비하면 훨씬 서툴렀지만 말이다. 의외로 스탈린은 두 개의 독일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히틀러만큼이나 탐욕스러우면서도 히틀러와 같은 도박꾼과는 거리가 멀었던 스탈린은 언제나 서방의 눈치를 보면서 소심하게 굴었고 이참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울 욕심에 눈이 먼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향해 참을성을 가지라며 윽박질렀다. 그는 서방이 먼저 서독을 건설한 뒤에야 마지못하는 척 동독의 건설을 허락했다. 무슨 삼국지의 유비 포지션도 아니고. 물론 그렇지 않았더라도 스탈린이 서방 편으로 넘어갈 것이 뻔한 독일의 통일을 허락할 리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독일 공산주의자들 역시 모처럼 자기 앞에 놓여진 밥상을 남이 치울 때까지 군침만 흘리면서 멍청하게 지켜볼 리도 없었다. 인간의 욕심은 평등한 법이다.

오히려 스탈린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적 열정을 말리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스탈린이 전후 독일을 위해 구상한 계획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분명한 사실은 애초에 스탈린이 울브리히트에게 지시한 것은 점령지에만 국한하지 않고 독일 전체를 위하는 해법이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이미지를 딴 체제의 구축은 스탈린의 의도가 아니었다. - p.82

울브리히트는 모든 자리를 공산주의자가 꿰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모두의 지지를 받는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하려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굳이 공산주의자를 구청장에 앉힐 이유가 없다. 노동 계급이 밀집한 구에서 구청장은 독일사회민주당원이 좋다. 중산층 지역에서는 부르주아와 구청장직에 올라야 한다. 다만 반드시 반파시스트여야 하고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p.89

5월 23일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이제는 스탈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9월 27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독일사회주의 통일당 대표단을 접견했다. 울브리히트, 피크, 그로테볼은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꼬박 열흘을 초조히 기다렸다. 스탈린은 끝내 체념하여 독일민주공화국 수립에 동의했다. - p.115

이 책에서는 1949년 10월 7일 이른바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이 처음 건설되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서독에 백기투항하는 1990년 10월 3일까지 꼭 39년 동안 장벽 너머의 세상이 어떠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곳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지옥도 아니었다. 생각보다는 꽤 살만한 동네였다랄까. 서독보다는 가난하고 억압적이었다고 해도 북쪽 동네처럼 고난의 행군을 겪지도 않았고 공산주의 체제이다보니 대한민국의 우리 직장인들마냥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버둥거릴 필요도 없었다. 동독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이나 폴 포트처럼 국가적 자살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실험으로 나라를 막장으로 몰아넣거나 개인 숭배에 열을 올리는 대신 나름대로 민생에 신경썼다. 서방과의 거래로 들어온 현금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는 대신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구매했다. 심지어 국민들의 커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베트남에 대규모 커피 농장을 세우기도 했다. 통일된 후 동독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차라리 그 때가 좋았다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할 듯. 사람이란 겪어봐야 깨닫는 법이라. 문제는 그것이 동독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소련의 원조 덕분이었다는 사실이지만. 따라서 소련의 원조가 끊기자 동독의 운명도 그대로 끝장났다.

소비에트는 식량을 원조하면서 4억 8500만 루블 상당의 차관을 주었다. 뢰스트는 일주일 동안 버터, 식용유, 기름, 생선 통조림 따위를 가득 실은 마차가 3천대 씩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전쟁 후 우리는 빈털털리였다. 먹을 게 아예 없었다. 나중에는 참새를 잡으려고 씨앗을 넣은 쥐덫을 놓기도 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이 되자 형편이 훨씬 나아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갑자기 부족한 것이 없어졌고 배를 곯는 일도 없었다." - p.206

동독 여성들은 저녁이 되면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러 나가며 가정 바깥에서도 사회생활을 했고 서독에서 경험하기 훨씬 어려운 방식으로 사회의 일원임을 느꼈다. 1955년 당시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절반 이상의 여성이 노동에 참여했다. 이 비율은 점점 더 높아져 1970년에는 여성 3명 중 2명이 일을 했다. 반면 독일연방공화국은 1950년 여성 1/3만이 일자리를 가졌고 1970년에도 27.5%에 불과했다. - p.228

동서양의 타국 정치 지도자들과 달리 독일민주공화국의 엘리트들은 검소한 환경에서 살았다. 그들의 집은 젊은 가족이 얻은 방 2개 짜리 아파트에 비하면 널찍했으나 사치스럽다거나 호화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23채의 집은 하나같이 회색빛이었고 기와로 지붕을 이고 기능성 벽돌을 쌓아 지었다. 이는 독일 민주공화국 초기 일반인들이 살도록 도시에 마구 세운 조립식 건물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 p.239

사람들을 팔아서 번 돈은 소문과 달리 독일민주공화국의 엘리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기금의 목적은 서독 채권자들이 독일민주공화국에 계속 돈을 대출해 주도록 충분한 신용을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신발, 열대과일, 폭발적인 인기의 오리지널 미국산 청바지와 같은 섬유제품을 수입할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80년 8월 7일 내역에 따르면 3200만 도이치마르크가 자전거 타이어, 비스킷, 초콜릿, 포도주, 남성용 양말, 성인용 속옷, 도톰한 수건, 야외 활동용 신발, 청소용 천, 마른 행주를 사는데 쓰였다. - p.398

국가는 주택, 복지, 오락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1975년 건설 활동은 1970년 대비 128.5%나 증가했다. 많은 건물이 개조되고 확장되어 사람들은 더 나은 곳에서 살고 일했다. 집세 보조금도 넉넉히 받아서 독일민주공화국 시민들은 괜찮은 주거지를 찾고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할 일이 없었다. 서독 4인 가구가 순수입의 21%를 집세로 지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독 4인 가구의 집세는 4.4%를 차지했을 뿐이었다. 새로 지어진 조립식 건물들은 중앙난방과 단열, 개별 욕실과 널찍한 공간을 제공했다. 1980년대에는 거의 모든 집에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가 있었다. - p.400

람베르츠가 고른 대상은 에티오피아였다. 그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만나 커피를 제공받는 대가로 대형 트럭, 기계, 농기구 같은 독일민주공화국 물자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멩기스투는 자국의 저항과 반 혁명 움직임을 진압하고 이웃 국가 소말리아와 벌일 전쟁을 대비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기이거나 무기를 살 현금이었다. 결국 멩기스투와 람베르츠는 파란 콩(총알)과 갈색 콩(커피)를 맞바꾸는 커피 협정을 체결했다. 람베르츠는 커피 5천 톤을 받는 대가로 5300만 마르크 상당의 무기류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 p.427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은 무너졌다. 그것도 불만 가득한 국민들의 손에 의해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동독이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보다 더 가난해서가 아니라 서독보다 덜 풍요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독 지도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동독을 서독보다 더 부유한 나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사실을 국민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철저히 막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베를린 장벽 차단과는 별개로 서독과 동독의 친척들은 서로 서신과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었고 까다롭기는 해도 어느 정도 왕래도 가능했다. 70여년 째 철저하게 장막을 두른 채 어떠한 접촉도 허락하지 않는 남북한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것이 동독 지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독에서 끊임없이 이탈자가 발생했으며 특히 가장 잘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일수록 더 나은 삶을 찾겠다는 환상을 품고 서독으로 탈출했던 이유였다. 인간은 남이 나보다 더 잘사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점에서 너무 솔직했다는 점이 이들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한 원인이랄까. 세상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노동을 해서 월급을 받았고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상여를 얻었다. 그럭저럭 잘 살았고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러다 1987년 시누이의 60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서독을 방문했는데 그 때 비로소 넘치는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올덴부르크의 슈퍼마켓 뒤로 남아도는 식료품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유행이 지난 가구 부품은 곧장 매장에서 거대한 컨테이너로 옮겨졌다. 동독에서는 없어 못사는 것이 그곳에서는 그냥 버려지고 있었다. - p.456

1983년과 1984년 금융 협정을 계기로 바이에른과 독일민주공화국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뜻밖의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자매도시가 생겨났고 연구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문화교류가 빈번해졌다. 바이에른 국립박물관이 드레스덴에서 전시를 여는가 하면, 드레스덴의 예술 소장품이 뮌헨에 소개되었다. 1988년 기준으로 동서독이 함께 진행한 사업만 도 1천건이 넘었다. 서독 기업들은 니베아 크림처럼 독일민주공화국 시민들에게 인기 높은 몇몇 서독제품을 동독에서 생산하기도 했다. 동서독 국경 상황이 안화되고 통행 제안이 다소 풀리면서 동서독 사람들은 모든 방면에서 더욱 활발히 교류했다. 1987년 호네커는 헬무트 콜의 초청을 받아 본을 방문했다. 두 독일은 마침내 공존방법을 찾아낸 듯 했다. - p.491

1989년 11월 9일 자신들의 손으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을 때 동독 주민들은 서독과 하나가 되기만 하면 자신들도 서독처럼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었을 것이다. 이들은 서독의 풍족함만 보았을 뿐 서독에 산다고 해서 누구나 그 부를 똑같이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꿈꿀 수 없는 성공의 기회 또한 누릴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라고 하지만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은 극소수의 행운아이며, 대부분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최소한의 생활이나마 누리는 법이다. 그 경쟁에 뛰어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장벽부터 무너뜨린 동독 주민들은 대번에 그 대가를 톡톡이 치러야 했다. 3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적 격차는 여전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 어리석었고 동독 지도자들이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이 벌인 실험은 애초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차라리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동서독을 나누는 갈등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2018년 동독의 반 난민 시위. 동독 지역에서 극우세력은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통일 이후 삶이 더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팍팍해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의 실수는 자본주의의 풍요만 보았고 그게 공짜가 아님을 몰랐다. 그래서 속았다면서.


그나마 동독 주민들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일은 더 최악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남북한이 몇 번의 화해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증오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1950년부터 3년 동안 죽기살기로 싸웠기 때문이었다. 친구끼리도 주먹 다짐을 하거나 사소한 감정 싸움 만으로도 쉽게 마음을 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전쟁의 상처는 지도자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악수한다고 봄바람에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그 상처를 봉합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물지 않는 쪽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인간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이자 남북 통일을 내세웠던 우리 역대 정권의 시도가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만으로 두 나라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냉전 시절 동독 지도자들이 김일성처럼 서독을 먹겠다면서 스탈린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면 동독은 그 때 멸망했거나 반대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일성이 6.25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남북한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덜 복잡했을 것이고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저자인 카트야 호이어(katja hoyer)는 동독 출신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로 동독에서도 가장 동쪽 폴란드 국경의 구벤(Gube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 동독군 장교라고 한다. 1985년 생이라고 하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네살이었고 동독 시절의 삶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대신 동독 시절이 어떠했는지 들었을 것이고, 동독이 무너진 후의 삶은 기억할 것이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그 시절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딱딱하지 않고 부담 없이 읽을 책이다. 국내에 동독사를 다룬 책은 이 책이 거의 처음인듯. 번역도 매끄럽다. 올해 나온 역사책 중에는 교유서가의 <독일인의 전쟁>과 함께 최고의 책으로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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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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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Der Untergang)>이라는 영화가 있다. 독일 출신 영화 감독인 올리버 히르슈비겔이 2004년에 제작한 이 영화는 히틀러의 여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ge)의 관점에서 나치 최후의 14일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으로 본 명작 중 하나이다. 오직 상업성만을 따지는 할리우드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영화. 전쟁 영화이면서도 전투신은 거의 없지만 영화 내내 극적인 긴장감이 가득하다. 파멸을 앞두고 벼랑 끝에 몰린 인간들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 절망과 광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패전 직전 히틀러와 나치 일당들의 처지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자기들끼리 미친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 듯. 인간이 이판사판에 내몰리면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를 보여주는 셈.


국내에서 정식 상영한 적은 없지만(솔직히 국내 정서에서는 망하기 딱 좋은 영화라) 덕후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짤방 중 하나가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대중계몽 선전부 장관이었던 괴벨스의 막말. 전쟁 말기 베를린 대관구 지휘자로서 사실상 수도 방위와 대중 동원을 총괄하고 있었던 그에게 무장 친위대 소속의 빌헬름 몽케 소장이 괴벨스 휘하의 국민 돌격대가 변변한 무기도 없이 개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지적하자 괴벨스는 내가 알 바냐는 식으로 대꾸한다. 국민들이 우리를 선택했으니 그 책임도 그들 몫이라는 얘기이다.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신들에게 권력을 안겨다 준 우민들을 향한 경멸감을 숨기지 않으면서 마지막에는 썩소까지 날리는 그의 뻔뻔한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이지만 아픈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나치는 레닌이나 마오쩌둥, 탈레반처럼 총칼이 아니라 1933년에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았으니 말이다. 1년 뒤 힌덴부르크가 죽자 민주주의를 중단하고 히틀러에게 절대 권력을 몰아주는데 압도적인 찬성을 했던 것도 독일 국민들이었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히틀러가 승리할 때에는 그토록 열광했으면서 이제와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괴벨스 말마따나 누구를 원망하겠음.



오늘날까지도 히틀러와 나치가 그토록 욕을 먹는 이유는 단순히 독재 정권이라거나 역사의 운 없는 패배자라서가 아니라 앞으로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될 정신병자들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나치의 만행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수백만 명의 유태인 대량 절멸이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을 비롯하여 나치가 하등하다고 규정한 모든 인종, 독일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장애인, 유전 질환자들도 피해자들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 출신의 아프리카인들 역시 대량 학살을 당했다.


게다가 나치의 광기는 패전 직전으로 갈수록 도를 더했다. 막판에 오면 히틀러는 자포자기한 나머지 아예 독일의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야전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패전의 책임이 자신의 무능함 탓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열등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일종의 분풀이였다. 심지어 괴멜스가 부인은 물론, 자신의 아이들까지 총통을 위하여 순교하겠다고 말했을 때 히틀러는 말리기는 커녕 그의 비뚤어진 충성심을 칭찬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책임감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심성이 의심스러울 정도. 도대체 전생의 뭔 인연이길래 이런 뇌가 고장난 작자들끼리 잘도 모였나 싶다. 정권 잡기 전에는 평범했는데 권력이 그렇게 만든 건지.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독일인들이 뭘 믿고 정신나간 미치광이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백지위임했는가. 물론 이들도 그 선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 줄 알았더라면 나치를 찍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33년의 실수는 나치의 실체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쳐도 무솔리니를 자기들 손으로 쫓아낸 이탈리아인들과 달리 독일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치에 순종했다. 초로의 노인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히틀러의 병사가 되어 열성적으로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소련군은 말할 것도 없고, 영미 연합군이 라인강을 넘어 독일 본토로 들어왔을 때에도 독일인들이 1941년의 일부 러시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재자를 타도하겠다면서 적군에게 부역하는 일은 없었다. 하물며 참다 못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히틀러를 향해 전쟁을 멈추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나치 정권이 이전의 독일 제국이나 여느 독재 정권들과 다른 점은 단순한 총칼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여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전당 운동을 통해서 독일 국민들을 나치와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독일 국민들은 나치가 벌이는 모든 일에 열광했고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히틀러의 무모한 전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었음에도 1918년 카이저를 끌어내렸던 킬 군항의 혁명은 나치 치하에서 되풀이되지 않았다. 그게 히틀러의 선동에 집단 가스라이팅되었기 때문이건, 나치의 탄압이 무서웠기 때문이건, 소련의 보복만은 막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건 말이다. 어쩌면 세계 제일을 자처하던 사람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대다수 독일인들은 "모든 것은 나치가 나빴기 때문"이라며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이유를 대건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침략 전쟁을 초래했으며 약자들을 학살하는데 동조하거나 묵인했다는 사실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오랜만에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신작이 나왔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교유서가에서 나온 논픽션 역사서인 <독일인의 전쟁 1939~1945>이다. "전쟁 속의 민족(A Nation Under Arms)"라는 영어 부제처럼 평범했던 독일 국민들이 나치의 침략전쟁 아래에서 민간인으로서, 병사로서 겪어야 했던 전쟁 이야기이다. 저자인 니콜라스 스타가르트(Nicholas Stargardt)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 교수로 그의 아버지는 독일계 유태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나치 치하에서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해 보았을지도. 분량만도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다보니 역자 또한 여느 번역서와 달리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생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 연구에만 매달린 김학이 동아대 사학교 교수가 직접 맡았다고. 국내 몇 안 되는 나치통인 분.


이 책은 에른스트 귀킹이라는 이름의 한 무명 병사가 여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한다. 1939년 8월 25일 그는 갑작스럽게 귀대 명령을 받고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복귀해야 했다. 다음날 독일은 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 소식을 들은 독일인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1년 전만 해도 히틀러가 연합군을 상대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모한 도박을 벌이는 모습에 독일인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이들은 1914년 오만한 정치인과 장군들이 초래한 전쟁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했으며 이른바 '순무의 겨울'이라고 불리는 궁핍한 전시 생활과 패전 이후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뮌헨에서 극적인 타협이 실현되자 독일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연합군을 깔보게 되었고 자만심에 사로잡혔다. 상대의 양보에 우쭐해진 나머지, 싸우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자기 최면에 빠진 것이었다. 자신들은 언제나 베르사유 체제의 부당한 피해자였고 이제는 되갚아 줄 때였다.


문제는 '복수' 한마디로 합리화하기에는 그들이 보여준 만행은 너무 난폭하고 잔혹했다는 점이었다. 독일인들에게는 승자의 아량이나 관용이 없었다. 저항할 수 없는 약자들을 향해 그동안 쌓인 현실의 불만과 울분을 한꺼번에 해소하는 양 무제한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 대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어떤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고삐 풀린 독일인들의 광란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것을 부추겼던 히틀러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저자는 독일인들이 어떤 식으로 인간성과 도덕적 감각을 상실하는지, 폴란드의 승리에서 베를린 함락까지 6년의 시간을 그들이 남긴 수많은 편지와 일기,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재구성한다. 여기에는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오만함과 히틀러에 대한 기대감, 전쟁 초반 놀라운 승리와 열병 같은 흥분이 가라앉은 뒤의 불안감, 탐욕, 광기, 패닉, 그리고 죄책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1914년 8월과 달리 1939년 9월 1일에는 애국 행진이나 대중 집회같은 것이 없었다. 길거리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예비군들은 집합 장소에 가서 신고를 했고 민간인들은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모든 사람들이 '다가오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오직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보도했다. 니콜라스 호수 교외에 사는 요헨 클레퍼는 그 기사를 읽고 기이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런 열광도 없이 착 가라앉은 채 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걸까?" - p.60

독일인들에게 애국주의 헌선이나 정의로운 민족 대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오류는 고도로 분화되고 종종 내적 모순을 일으키는 근대 사회를 상투적인 제스처만으로 산업화 이전의 정겹고 전근대적인 '황금시대'라는 낭만적인 상상물로 바꿀 수 있다는 사고 방식 그 자체였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중앙집권적인 정부와 나치, 나치당 산하의 대중조직, 지방 정부, 교회는 민족적 연대의 결핍분을 상쇄하기 위해서 한층 노력해야 했다. - p.91

한 여대생 자원봉사자는 자신의 활동을 고향집에 전하면서 친위대가 폴란드 촌민들을 헛간에 몰아넣은 작전을 다음과 같이 썼다. "저 짐승들에 대한 동정심요? 아뇨. 나는 저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소름이 돋아요. 그들 존재 자체가 너무나 낯설어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도 그들에게 닿는 것조차 불가능해요. 내 생애 처음으로 그들이 죽든 살든 알 바 아니어요." - p.204

가족들이 탈영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2차 대전에서 독일군 병사들의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하지 않은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2차 대전 당시 동맹국 군대에서 대량 탈영이 발생한 사례들, 1943년의 이탈리아 병사들,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와 룩셈부르크, 알자스에서 징집된 병사들, 그리고 1943~1944년 보스니아 무장 친위대 병사들의 탈영은 그곳 시민 사회가 탈영병들을 흡수하고 숨겨줌으로서 군 당국을 상대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충성심과 애국심은 나치 정권이 강요하던 외적 요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일 시민사회 모든 계층에서 반복되었고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연인의 강력한 1차적 호소를 통해서 되풀이되었던 보편적 규범이었다. - p.313

독일인들은 미국이 독일계 혈통들에게 겉옷에 하켄크로이츠를 달도록 강요했다고 상상하기 시작하자 독일에게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조치들은 그리 독특하게 보이지 않았다. 독일인들 생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복수는 진작부터 진행되어온 것이기도 했다. 1933년 4월 1일 나치가 유대인 상점들을 보이콧하자 미국에게 독일 수출품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유대인 학살 작전이 여전히 동부전선에 국한되어 있었던 그 국면에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운명에 국제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소련 민간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의미였다. 유대인은 워싱턴과 런던의 중요한 권력자들이고 그 유대인들이 연합국 동맹이 구축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 p.342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자 그녀는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별 선물로 받은 낡은 리볼버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아이들을 숲속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아이들을 유대인들이 사살된 것으로 알려진 구덩이 앞에 줄지어 세워놓고 뒷머리에 차례로 권총을 발사했다. 이르나는 훗날 기억했다. 두명의 아이를 처리하자 나머지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소리를 내지 않고 그저 훌쩍였다. - p.412

1944년 9월에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심각한 공황 상태에 사로잡혔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한 달만에 독일군은 전혀 다른 군대가 되어 있었다. 연합군 사령관들은 붕괴 직전에 몰려 있다고 믿었던 적군이 오히려 갈수록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젠하워는 1944년 11월에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사령관 회의를 소집해서는 어째서 독일군의 저항 의지를 깨뜨리지 못하는지 물었다. 그는 서부전선 독일군 전쟁 포로 절반 이상이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지키고 있으며 소련군이 기진맥진한 패잔병의 무리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 p.638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준 투지는 실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히틀러는 불과 수년 만에 카이사르나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이 평생 일군 것보다도 훨씬 넓은 땅을 정복했으며 거의 모든 유럽을 지배했다. 그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이었건간에 독일인들이 한때나마 살아있는 신처럼 떠받들었던 것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그 지리한 싸움을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나폴레옹처럼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이 아니라 치졸한 복수와 편협한 인종주의를 앞세운 파괴, 광기, 방종을 남겼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죽은 뒤에도 경외의 대상으로 남았지만 히틀러는 인류 문명의 야만성을 보여준 악마이자 두번 다시 등장해서 안 될 독재자로 낙인찍혔다. 무엇보다도 그는 단순히 파멸적인 전쟁을 일으킨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간성을 마비시키고 끝없는 증오심을 심어주었으며 마음껏 폭력을 행사하라며 부추김으로서 독일 전체를 나치의 집단 공범으로 만들었다. 일부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허용한 무제한의 자유 속에서 방종을 즐겼고 유태인에게, 전쟁 포로들에게, 마지막에는 같은 독일인들을 상대로 살인 게임을 벌였다. 그리고 대다수 독일인들은 침묵하거나 방관했다.


2023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원래는 평범했던 인간이 외부의 위협과 생존을 핑계로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받았을 때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상황이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지 원래 악마였던 인간이 그 상황을 의도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숨겨진 본성을 드러내는지는 쉽게 얘기할 부분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짓을 저질러도 보복이나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일탈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특히 나 혼자보다 남들과 함께 저지를 때 인간은 덜 죄책감을 받는다. 이것이 집단 광기의 무서움이다.


일탈의 시간은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서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끝났다. 그때까지 악귀처럼 싸우던 독일인들은 그 순간 히틀러가 걸어놓은 집단 최면에서 풀려난 것마냥 모든 저항의 의지를 잃었다. 정신이 번쩍 든 그들은 자신들이 여태껏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앞으로 돌아올 응분의 결과를 두려워 하면서도 반성과 죄책감 대신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며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 역시 똑같이 고통을 겪은 양 피해자 코스프레로 전쟁 범죄를 물타기했다. 자신들이 승자일 때에는 패배자들에게 온갖 횡포를 부렸음에도 남들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뻔뻔함이자 이중성이었다.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재판이 열리자 국제 여론의 전례없는 관심이 쏟아졌다. 그 날 세 아이를 둔 한 어머니가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남편에게 이렇게 썼다. "죄는 언제나 양쪽 모두에 있는 법입니다. 승자의 권리를 앞세워 한 민족 전체를 죄악시하고 그들의 모든 자유를 빼앗을 권리는 없어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전쟁과 수용소에서 일어난 모든 악행과 우리 이름으로 자행된 수치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의 많은 이들은 결코 죄가 없습니다. " - p.771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모든 잘못을 히틀러와 나치 지도자들 탓으로 떠넘겼다. 자신들은 시키는대로 했을 뿐, 오히려 나치의 압제 속에서 함께 고통받았다고 합리화했다. 이들에게 국가 사회주의 시절은 잠깐의 악몽에 지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앞날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에 복종하여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독일군은 전쟁범죄를 모조리 무장친위대에게 돌림으로서 자신들의 명예를 '세탁'했다. 여기에는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이 뉘렌베르크에서 몇몇 거물들을 상징적으로 처단한 것 이외에 대다수 나치 부역자들에게 면죄부와 함께 새로운 체제로 복권시킨 덕분이기도 했다. 물론 미국에 충성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전범 재판은 사법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 변질되었다. 그 밖에 그들 입장에서 불리하거나 불편한 역사는 집단 망각하는 쪽을 선택했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나마 독일은 일본처럼 역사의 승자 행세를 하면서 분별없는 소리로 주변국들의 감정을 자극하지는 않으니 조금쯤 낫다고 할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히틀러가 없었더라면, 미대에 합격하여 평범한 미술 교사로 인생을 마쳤다면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광기어린 전쟁 범죄는 벌어지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악마를 재수없게 만난 죄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히틀러가 없었어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한다면 그 역시 시류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역사의 피해자라는 얘기가 된다. 진실은 아마도 그 중간 쯤이 아닐까 싶다.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일까. 이책도 여기까지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라도 빨리 읽어볼 욕심에 출판사 북 펀드에 응모하여 책을 받자말자 퇴근 후 탐독했다. 1천여 페이지의 만만찮은 분량임에도 일주일 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내용이 흥미롭고 술술 읽힌다. 제2차 세계대전 덕후라면 필히 읽어볼 책이다. 올해 최고의 역사서 중 하나로 꼽을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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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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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은 많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단순히 히틀러라는 선동 정치인에게 억지로 떠밀려서 패망직전까지 싸운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 책. 여러모로 짚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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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의 밤 -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을 암살하고자 했던 히틀러의 극비 작전
하워드 블룸 지음, 정지현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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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28일 이란 테헤란에서 세계사에 남을 빅 이벤트가 열렸다. 이른바 연합국의 '빅3', 즉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개전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만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틀 전에는 카이로에서 장제스와 회담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의 거듭된 재촉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를 껄끄럽게 여기던 스탈린은 카이로에 오기를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테헤란에서 스탈린을 위한 별도의 모임을 가져야 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굳이 수도를 떠나서 세 사람이 모인 것은 단순히 친분을 쌓거나 히틀러가 흔히 그러했듯 우리편의 승리를 의심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동맹국 지도자들을 억지로 끌어다가 알맹이 없는 연설을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제2전선의 구축과 함께 나치에게 이긴 뒤 전후 구상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였다. 바꾸어 말해서 이미 다 이긴 싸움이라는 얘기였다. 여전히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나치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주도권을 쥔 쪽은 연합군이었다. 1943년 초 독일군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완패했다. 여름에는 독일 최후의 전략적 공세였던 치타텔 작전이 소련군의 방어선 앞에서 가로막혔다. 그 사이 서방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승리하고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무솔리니 정권을 끝장냈다. 히틀러의 운명도 초읽기였다.


테헤란 회담이 열릴 때부터 독일 항복까지 연합군의 공세. 1943년 말에 오면 나치가 완전히 수세에 내몰리면서 사실상 승패는 결정난 셈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쪽이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나치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티느냐의 싸움이었다.


히틀러가 제아무리 장군들을 닥달한들, 이제와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빅3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면 과연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마다했을까. 히틀러같은 모사꾼이 워털루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나폴레옹을 저격하겠다는 병사를 향해 "장군들은 서로를 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라면서 기사도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했던 웰링턴마냥 물렁하게 굴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빅3가 모이는 장소는 워싱턴도, 런던도, 모스크바도 아니었다. 연합국의 심장부와는 거리가 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었다. 레자 샤 팔레비(Reza Shah Pahlavi)가 1925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이름이 바뀐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하자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1941년 8월 25일 영국과 소련은 이란이 독일 편에 서는 것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카운터넌스 작전(Operation Countenance)'을 발동하고 무력 침공했다. 이란군은 9개 사단 20만명에 달했지만 훈련과 무장이 빈약한 오합지졸이었던 이들로서는 압도적인 영국, 소련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변변한 저항도 못해본 채 무너졌고 6일 만에 정복당했다.


이란 침공 당시 소련군 BA-10M 장갑차와 영국군 수송차량 행렬.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양국 군대의 유일한 연합작전이었다.


반년 뒤인 1942년 1월 29일 영국, 소련은 전쟁이 끝나고 6개월 내에 이란에서의 철수를 약속했다. 1943년 9월 9일에는 이란 정부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명목상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실제로 이란군이 추축군을 상대로 싸우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빅3 입장에서 이란은 여전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란인들은 침략자들에게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고 독일 스파이들은 이란에 침투하여 연합국에 대한 무장 저항을 선동하면서 지지세력을 확보했다. 게다가 경제적 어려움과 식량난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독일군 해외방첩국 아프베어(Abwehr)는 1943년 여름에 튀르크계열의 유목민인 카슈카이족을 이용하여 서방의 대소 랜드리스 수송을 방해하는 계획을 시도했다. 작전명은 '프랑수아(Operation François)'였고 지휘 책임자는 얼마 뒤 무솔리니 구출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오토 스코르체니(Otto Scorzeny) 소령이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는 무장친위대 소속 제502저격대대 소속의 정예요원 몇명을 뽑아서 선발대로 이란에 보냈지만 낙하 도중에 영국군에게 발각되어 모조리 일망타진당했다.

그리고 더욱 야심찬 시도가 빅3 암살 계획이었던 '멀리뛰기 작전(Operation Long Jump)'이었다. 친위대의 2인자이자 힘러의 라이벌이기도 한 에른스트 칼덴부르너(Ernst Kaltenbrunner)는 빅3가 모이는 장소가 테헤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히틀러는 철천지 원수와 같은 세 지도자를 한방에 몰살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 작전 역시 스코르체니가 맡았다.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전쟁 이전에도 언제나 쿠데타나 암살 위험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스탈린이야 크렘린 궁전 깊숙한 곳에 숨어 있으니 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서방 지도자들은 훨씬 덜 조심스러웠다. 심지어 미국인들은 미국 한복판에서 자기네 대통령을 몇번이나 암살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충분한 인력과 자금도 없이 말이다. 1933년에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루스벨트를 거의 살해할 뻔 했던 사람은 주세페 장가라(Giuseppe Zangara)라는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벽돌공이었다.

만약 빅3 중의 한 사람이라도 암살에 성공한다면 당장 전쟁의 향방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연합국의 결속을 흔드는 것은 물론이고, 모처럼 독일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연합국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었다. 정말로 성공했다면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겠지만, 결론만 말하면 이번에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테헤란의 독일 첩보망과 스코르제니가 보낸 특수부대는 소련 NKVD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는데 실패했고 빅3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달을 일 없이 테헤란의 소련 대사관에서 화기애애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히틀러가 두번 다시 그런 시도를 벌이는 일 또한 없었다. 다음 회담은 1년 뒤 소련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열렸고 그 때쯤이면 독일은 베를린 코앞까지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트형 주연의 영화 <바스터즈> 이쪽은 연합군이 히틀러 암살부대를 보낸다는 내용.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양측이 서로의 지도자나 주요 인사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보안이 워낙 철통같다보니 소위 '참수작전'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효과는 적에게 겁을 줄 수는 있다는 심리적인 것에 있다. 우리나 중국이 참수작전을 숨기는 대신 대놓고 떠드는 것도 이 때문.


이것이 러시아인들이 주장하는 소위 "빅3 암살미수사건"의 전모이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소재이지만 막상 서구 쪽에서는 믿지 않는다고. "우리가 너희를 구했다"라는 러시아인들의 일방적인 주장 이외에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이다. 스코르체니는 그런 작전에 관여하기는 커녕 들어본 적도 없다면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작전"이라고 일축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영원히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사유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암살자의 밤(원저 : Night of the Assassins)>은 제2차 세계대전의 히든 스토리이자 나치판 바스터즈가 될 뻔한 멀리뛰기 작전의 전모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인 하워드 블룸(Howard Blum)는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퓰리처 상에 두번이나 노미네이트했다는데 수상은 못 한 모양. 또한 논픽션 역사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그 중에서도 이 책은 2020년에 나온 따끈따끈한 최신작.


이 분. 1948년생이라고 하니 올해로 75살. 아직 정정하신 듯. 저서로 볼 때 주로 다루는 분야는 제2차 세계대전과 범죄, 스파이물.


이 책은 테헤란 회담이 열리기 반년 전인 1943년 6월 포르투칼의 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총리이자 철권 독재자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가 통치하는 포르투칼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명목상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랜 친영 국가로서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연합국을 물밑에서 지원했고 100만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이곳을 통해서 나치 치하의 유럽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있다. 빅3 중에서 최고령자로서 일흔을 앞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전쟁 내내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쉬지 않고 온 세상을 돌아다녔던 처칠은 몇 번이나 포르투갈을 은밀하게 방문했고 살라자르를 면담하여 연합국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물론 포르투갈에는 독일 스파이들이 득실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런 여행은 그야말로 목숨 건 도박이었다. 어느날 독일 스파이는 리스본에서 출발하는 런던행 미제 더글라스 DC-3 여객기에 거물이 탄다는 정보를 알아냈고 그 거물이 처칠임을 알아낸다. 독일 공군의 Ju-88 중전투기들이 즉각 출동하여 그 불운한 비행기를 격추시키지만 독일군을 따돌리기 위한 눈속임이었고 그 사이 처칠은 다른 비행기를 타고 잽싸게 무사히 빠져나옴으로서 독일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물론 독일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고 연합국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나선다. 어차피 궁지에 내몰린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국은 머리가 셋 달린 괴물과 같았다.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아프베어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은 사무실에서 동료 스파이들과 나눈 대회에서 연합국을 '히드라'에 비유했다. 그는 동료들을 위해 사려깊게도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말해 주었다. 헤라클레스가 그 짐승의 머리를 모두 잘라낸 후에야 죽이는데 성공했다고 말이다. - p.24

그 순간 갑자기 군중의 깊은 틈새에서 칼이 날아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칼날이 대통령의 가슴으로 직행했다. 루스벨트는 칼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다리는 제자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마이크가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는 군중 사이에 서서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p.36

루스벨트는 전시든 아니든 백악관의 일이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악관의 일이란 정치이므로 공무원들이 백악관 복도를 수시로 들락날락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2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에는 백악관 문이 활짝 열리고 나무에 불을 밝히는 행사에 군중이 몰려든다는 것을 의미했다.추축국 요원이나 무장 단체 대원이 수많은 낯선 이들 가운데에 껴서 보스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이크를 초조하게 했다. - p.53

빅3의 만남이라니! 셀렌베르크는 이것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3인의 표적을 노릴 수도 있는 매력적인 기회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이들의 죽음이 전쟁의 최종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가장 열렬한 나치들 - 히틀러나 괴벨스 - 이었다. 독일의 패배는 암울하지만 확실했다. 하지만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사라진다면 다른 평화가 있을 수 있었다. - p.72

셀렌베르크는 평소답지 않게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을 만큼 열정적으로 그것은 단순히 장거리 작전이 아니라고 맞섰다. 훨씬 더 야심찬 작전이라고. 이것은 멀리뛰기와 같다고. 결국 그가 주장한 이름이 받아들여졌다. 이제 연합국 지도자 3명을 암살하려는 작전은 공식적으로 '롱 점프'라고 불리게 되었다. - p.139

이번 전쟁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틀어 중대한 특공대 작전은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로 만들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전사다운 방법으로 적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최후의 순간에 오토 스코르체니가 자신들을 끝장내러 왔다는 것을 꼭 알게 할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고 그들이 죽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폭탄이 필요했다. - p.200

나치가 처음 빅3암살을 계획하는 순간부터 테헤란 회담까지 약 반년의 시간 동안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4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드라마틱하게 풀어쓰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고 불리는 스코르체니가 침투시킨 독일 특수부대와 이들을 막기 위한 연합군 첩보부대간의 추적과 대결은 그야말로 한편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같은 느낌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논픽션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냉전 이후 기밀 해제된 구 소련의 정보 문서와 미국 OSS, CIA, FBI, 영국 정보부 보고서, 개인 회고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고 하지만 상당부분은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마지막에서 KGB 제1총국장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덧붙인다. "저는 전 세계 어떤 정보기관도 마지막 문서까지는 공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얘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과 연합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했지만 막상 적의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부대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전시에 적진 한가운데에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적의 지도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동이 조금만 수상해도 대번에 체포될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독일 특수부대가 대서양을 넘어서 미국 본토에 침투한 유일한 사례는 1942년 6월 파스토리우스 작전(Operation Pastorius)이었다. 그나마도 뭘 해보지도 못한 채 상륙하자말자 모조리 체포되어 간첩죄로 전기 의자행이 되었다. 하물며 히틀러와 스탈린처럼 평소 남의 원한을 많이 산 인간들일수록 결벽에 가까울 만큼 경계심이 철저한 법이다. 나치 킬러를 자처하는 몇몇 미친 또라이들이 히틀러를 제거한다는 <바스터즈>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스토리이다. 어차피 영화 자체가 블랙 코메디이니. 히틀러가 거의 죽을 뻔했던 순간은 연합군이 아니라 독일 장교들이 설치했던 폭탄이 터졌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멀리뛰기 작전이 실존했고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멀리뛰기 작전이 아니라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 세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1943년에 죽었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불과 1년여 뒤에 뇌출혈로 사망하는 루스벨트의 수명이 좀 더 짧았을 수도 있고, 스탈린이 과로사했을 수도 있으며 처칠이 비행기 추락으로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결코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루스벨트가 1945년 4월에 죽었을 때 히틀러는 미친 듯이 기뻐했지만 전쟁의 전환점이 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하지만 1943년이었다면 얘기는 다를 수도 있었다. 루스벨트의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리스(Henry Agard Wallace)가 과연 전시 체제에서 루스벨트에 비견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미국인들을 하나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인가.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나름의 추진력은 있었지만 정적이 많았다. 더욱이 루스벨트 이상으로 소련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는 보수파들의 반감을 사서 국론을 분열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처칠이 죽었다고 해서 독일에게 지독하게 두들겨 맞은 영국이 히틀러에게 유화적으로 바뀔 리는 없겠지만 오랫동안 서로를 적대했던 서방과 소련이 힘을 모으는데에는 처칠의 외교술이 컸다. 스탈린의 죽음은 확실히 소련 지도부를 대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다. 공산 독재국가인 소련은 영국과 달리 제아무리 나치가 자국민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했어도 그 원한을 풀기보다 지도자들끼리 권력 투쟁에 열을 올릴 나라였다. 실제로 1917년에 레닌은 국내의 동포들과 싸우기 위해서 독일에게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포기한 바 있었다. 언제나 인민보다 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또 한번 그 짓을 반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히틀러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세 사람이 힘을 모았기 때문이었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히틀러의 불운은 하필이면 이들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일까. 애초에 미대에 합격했으면 온 세상이 조용했을 것이고 히틀러도 제 손으로 자기 머리에 총알 박을 일은 없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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