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 코드: 더 비기닝
빌 게이츠 지음, 안진환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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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수많은 초보 부모들이 그러하듯, 나도 시중에 수없이 널려 있는 자녀 교육서를 부지런히 탐독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책들은 뻔한 레파토리에 "나는 이렇게 해서 내 자식을 남들보다 비범하게 키웠다."라는 일종의 자화자찬용이랄까. 물론 저자 나름의 투철한 교육관이라던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어냈다는 노하우는 같은 부모로서 귀 기울일 부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식이 번듯한 대학에 들어갔다는 둥의 내세울 성공을 거두었기에 말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에는 나는 평범하지만 내 자식은 똑똑한 놈으로 만들겠다면서 숨겨진 비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부모들의 허영심이 깔려 있다. 어쨌든 뭐라도 재주 하나 쯤은 있어야 살아가기 편한 것이 우리네 세상이니 말이다.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는 이세계 물들은 어차피 이번 생은 글러먹었으니 치트 능력을 얻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겠다는 것. 그런 능력이 있으면 굳이 머나먼 이세계까지 갈 이유가 뭐가 있겠음. 그저 꿈도 희망도 없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헛된 망상을 자극하는 것일 뿐.


자녀 교육서들의 공통된 결론 한가지는 아이는 부모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작 6천자에 불과한 손자병법을 부지런히 읽는다고 해서 누구나 천재전략가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저마다의 타고난 그릇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똑같은 방법을 쓴다고 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 교육이라는 오랜 격언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인간의 재능이란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1만시간의 법칙>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그 경지까지 오르는데 투자한 시간이 대략 1만 시간 정도가 걸렸다카더라, 따라서 결론은 재능보다 평소의 피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여기는 중대한 함정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 1만 시간의 노력을 했다고 해서 거꾸로 1만 시간의 노력을 한 모든 사람이 성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확대해석이다. 성공한 사람들이야 자신들의 성공이 하늘의 은총 덕분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며 성공하지 못한 너희는 노오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내가 여태껏 살면서 깨달은 사실은 노력도 재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재주 한 가지씩 타고 난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을 뿐더러(내 본가쪽 인간들을 보면 그건 분명하다.) 꿈과 재능을 찾아내어 발현하려면 노력 뿐만 아니라 그럴 계기와 운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콩 심은 곳에 팥이 나올 수 없고 누군가 물과 거름을 주지 않고서 제 알아서 싹이 트지는 않는다. <대학>에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고 하여 "옥도 갈아야 빛이 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옥일 때의 얘기이지 돌맹이는 뭘 어떻게 하더라도 돌맹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옥보다 돌맹이쪽이다.

유튜버로서 이 양반의 센스는 분명 놀랍지만 시류를 잘탄 덕분이기도. 만약 충주에서 공직을 시작하지 않았고 5년만 일찍 들어왔거나 5년만 늦게 들어왔어도 제아무리 큰 재주가 있다고 한들 지금처럼 유명인사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뭐 운도 능력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같은 평범한 인간들과 어떻게 달랐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었을까. 타고날 때부터 비범했을까.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것마냥 원래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A였지만 어떤 이유로 인생이 터닝하게 된 것일까. 유복한 가정 여건, 부모의 관심, 가까운 친인척, 학창시절의 친구나 선생님의 말 한마디, 또는 소위 말하는 '귀인'을 만난 덕분이라던가 어떤 비결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영화 <트루먼쇼>처럼 타인의 인생사를 직접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얘기는 들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열린 책들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소스코드 : 더비기닝>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한 명이 말하는 "나는 이렇게 컸다"라는 회고록이다. 주인공은 IT계의 황제이자 마이크로소프트사 창업주인 빌 게이츠. 덧붙여 예전에는 세계 부자 1위하면 이 양반이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는. 십 몇 년 전에는 멕시코 통신계 큰손인 카를로스 슬림에게 잠시 밀린 적도. 우리같은 서민과는 무관한 천룡인들만의 리그도 치열한 듯.

요근래의 빌 게이츠. 어느 사이 이런 영감님이 되셨나 싶다는. 하긴 1955년생이니 벌써 70살. 돈으로도 세월을 살 수는 없는 법이라.


이 책은 세계적인 거부로서 빌 게이츠의 인생 역경 전반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수학 신동으로서 하버드에 재학하던 시절, 불과 1년여 만에 때려치우고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하여 사회 초년생이자 사업가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까지 22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그 순간이 평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 중요한 시기였다는 얘기이다. 여기에는 함께 카드 놀이를 했던 '가미'라는 별명을 가진 친할머니와의 애틋한 추억을 비롯하여 그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될 사람들과의 일화를 담고 있다. 심지어 평생의 라이벌이자 여러모로 악연의 관계였던 스티브 잡스도 짧막하게 언급한다. 몇 줄 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틈만 나면 게임을 했고 나는 계속해서 졌다. 하지만 나는 지켜보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가미는 계속 부드럽게 나를 격려했다. "머리를 쓰면 돼, 트레이. 영리하게 생각하면 돼" 내가 다음 수를 고민할 때마다 가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겼다. 팡파르는 없었다. 그랑프리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처음으로 할머니보다 더 많은 게임을 이긴 그 날 어떤 게임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기뻐한 것은 생각난다. 분명히 가미는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p.31

어머니는 처음부터 우리 가족을 위한 원대한 비전을 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큰 성공을 이루길 바랬는데 여기서 성공이란 돈보다는 명성으로, 즉 지역 사회는 물론이고 더 넓은 범위의 시민 단체와 비영리 단체를 돕는 역할로 정의되는 것이었다. 자녀에 대해서는 학업과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사교적으로 활발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꿈꿨다. 이러한 비전으로 그녀는 지원 파트너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가운데 자신의 경력도 쌓아서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로 자리잡는 것을 목표했다. - p.62

선생님과 부모님, 교장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내 성적은 들쑥날쑥했고 태도는 날마다 그리고 과목에 따라 달라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무엇보다도 나의 날카롭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고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5학년 초 어느 시점부터 나는 학교의 언어 치료사를 만나기 시작했다. 이 세션의 결론으로 언어 치료사는 부모님에게 나를 1년 유급시킬 것을 권했다. 그녀가 나에 대해 <지진아>라고 평가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학교생활을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다행히도 무도님은 그녀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 p.113

나는 그렇게 1968년부터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질적인 요소가 합쳐져야 했는지를 생각하면 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놀랍다. 우리에게 단말기를 안겨 준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믿음의 도약, 전화선을 통해 컴퓨터를 공유하는 시대의 도래라는 행운을 넘어서 이 기적을 완성한 것은 다트머스 대학의 두 교수가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비전문가들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만들어진 것이었다. - p.156

켄트와의 우정이 남긴 유산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더 나아지도록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해 여름 폴과 나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우리의 나머지 삶을 정의하게 될 파트너십을 맺었다. 파트너는 서로의 관계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각자의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영감을 준다. 폴을 파트너로 삼고 나니 내 역량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에도 더욱 자신감 있게 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위험한 도전을 함께 극복한 사람이 있으면 다음 도전도 더욱 과감히 수용할 용기가 생긴다. - p.263

그 수업에서 더 잘할 수 없었던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가장 똑똑하고 가장 뛰어나다는 인식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그 지위는 사실 내 불안감을 숨기기 위한 보호막이었다. 나는 탁월한 수학 두뇌를 가졌지만 최고의 수학자가 될 수 있는 통찰력의 재능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주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발전을 해낼 능력은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해 겨울 앤디와 짐의 스위트룸에서 어울리던 중 그들도 갈피를 못 잡고 모종의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 p.326

우리가 작성한 베이직 프로그램은 다른 수천명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그런 변혁의 소용돌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10대 아이들도 컴퓨터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흔한 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컴퓨팅 비용은 매우 빠르게 떨어져 곧 무료나 다름없게 되었다. - p.383

우리 부스 앞에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확장형 베이직에 대해 설명하던 중 내 눈길 한쪽으로 긴 검은 머리와 짧게 다듬은 수염에 스리피스 정장을 입은 내 또래의 잘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몇 부스 떨어진 곳에서 자신만의 무리를 형성하며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날 난 그렇게 스티브 잡스를 만났다. - p.459

하버드로 떠날 때 부모님에게 다시는 시애틀에서 살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더 큰 세상에서 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 머리속의 더 큰 세상은 금융과 정치, 명문대, 그리고 당시에는 컴퓨터 산업의 중심지였던 둥부 연안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종의 후퇴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 홀로 귀향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창업한 회사, 다양한 직원들, 그리고 성장세에 오른 수익성 있는사업체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었다. 내 길은 정해져 있었다. 160km/h로 5번 주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앞으로 이 길이 얼마나 더 멀리 나를 데려갈까. -. p.477

작년 이맘때에 21세기 북스에서 나온, 요즘 트럼프 덕분에 미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 된 일론 머스크의 전기를 다룬 <일론 머스크>를 재미있게 읽은 것이 기억난다. 남아공 출신의 이민자인 일론 머스크가 미국에서 최고 갑부 중 한 사람으로 성공하기까지 그야말로 전투적인 삶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것에 비하면 이 책은 다소 밋밋한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일론 머스크 전기는 월터 아이작슨이라는 그 방면 최고의 작가가 썼고 이 책은 글보다는 코딩 쪽이 더 익숙한 공대 출신의 빌 게이츠가 가감없이 쓴 회고록이라는 차이도 있겠지만, 그보다 빌 게이츠가 일론 머스크에 비하면 훨씬 평탄한 성장과정을 보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도 똘기를 보이면서 아들의 골칫거리로 남아 있는 일론 머스크 아버지와 달리,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변호사에 어머니 또한 고학력의 신여성으로서 지역의 유명인사였으며 그럼에도 자식들에게는 일을 핑계로 가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모범적인 부모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엄친아라는 얘기. 물론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회고록이 흔히 그러하듯, 빌 게이츠 또한 어릴 때의 자신은 성적도 별로 좋지 않고 반항기 가득했던 금쪽이였다고 평범함을 강조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학 신동이었다면서 남들과 다른 비범함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분명한 사실은 빌 게이츠에게 성장기는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이며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반드시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야만 훗날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인생에 있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4장의 부제마냥 그는 "운 좋은 아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가령 내가 어떤 기회로 회고록을 쓰겠답시고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들 남들 앞에서 떠들만큼 썩 유쾌한 추억은 없는 것같다. 그렇다고 인생의 터닝포인터가 될 만한 긍정적인 시너지를 준 사람을 만난 기억도 없다. 가정과 학교를 통틀어서 말이다. 나만이 아니라 소수의 행운아를 제외하고 군부 독재 시절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와 가방 끈 짧고 가부장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우리 세대 대부분이 마찬가지일듯. 장미빛 추억은 고사하고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하다고 말할 사람이 태반은 아닐지.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500여 페이지의 많지 않은 분량의 책은 빌 게이츠가 어떤 자기만의 비법으로 세계 최고 갑부로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빌 게이츠라는 한 인간을 알 수 있게 하는 기회였다랄까. 적어도 선거 때만 되면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대필 작가를 써서 자기 인생을 진실반 거짓반으로 포장하는 우리네 정치인들의 불쏘시개 책들보다는 훨씬 가치 있다고 엄지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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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스탈린 - 독소전쟁 4년의 증언들
로런스 리스 지음, 허승철 옮김 / 페이퍼로드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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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스탈린이 죽었다!(The Death of Stalin)>라는 블랙 코메디 영화를 재미있게 본 것이 기억난다. 프랑스 출신의 만화가인 파비앵 뉘리과 티에리 로뱅가 그린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3월 5일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전날 한 여성이 보낸 저주의 편지를 읽고 분노한 나머지 급성 뇌출혈로 쓰러지자 후계자 자리를 놓고 흐루쇼프를 비롯한 측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웃픈 해프닝을 코믹하면서 신랄하게 조롱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영화 초반에 이런 장면이 있다. 스탈린이 죽기 전날 그의 다챠에 모인 측근들이 수령 앞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면서 적어도 겉으로는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흐루쇼프가 예전 동료의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화기애애한 저녁 만찬이었지만 말렌코프가 무심코 "그 녀석 지금은 어떻게 되었지?"라고 묻자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스탈린이 똥씹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나?" 여기에 비밀경찰 수장 베리야 또한 "그기에 가고 싶은 모양이지."라고 이죽거린다.

눈치 없는 한마디에 스탈린과 주변 동료들의 눈총을 잔뜩 받고 데꿀멍하는 말렌코프. 등골이 서늘하고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을 듯.


이 공산주의식 유머가 담긴 짧은 장면은 보는 이에게 웃음을 주면서도 스탈린 체제라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셈이다.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적백내전 시절부터 평생 스탈린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심복 중의 심복이며 각료 평회의 부의장으로서 스탈린 다음의 2인자였다. 실제로 스탈린이 죽자 서기장이자 각료 평의회 의장이 되어서 새로운 철권 독재자가 될 뻔했을 정도이다. 물론 스탈린에 비하면 훨씬 유약하고 물렁했기에 금새 흐루쇼프에게 권력을 빼앗긴 채 몰락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거물조차 스탈린의 변덕 앞에서는 한칼에 나가떨어질 수 있는 파리 목숨으로 눈치 보면서 숨 죽이고 사는 처지였다는 얘기이다. 스탈린은 파라오조차 누리지 못한 절대신이자 그의 말은 법이고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감히 말대꾸조차 신성모독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영화가 있다.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의 관점에서 바라본 나치 최후의 14일을 다룬 <몰락(The Downfall)>이다. 히틀러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펠릭스 슈타이너의 무장친위대가 반격에 실패했다는 말을 듣자 그때까지 쌓아두었던 분노가 한방에 폭발한다. 4분에 걸쳐 장군들을 향해 터뜨리는 광기어린 모습은 진정한 맨탈 붕괴가 어떤 것인지 보여줌으로서 인터넷의 수많은 패러디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영혼이 붕괴된 채 장군들을 미친 듯이 비난하는 총통 앞에서 말이 심하다며 따박따박 말대꾸를 늘어놓는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대장.


하지만 히틀러의 분노는 스탈린의 그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는 심복들을 위협한다기보다 자포자기한 사람의 넋두리에 가깝다. 듣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말렌코프처럼 겁에 질리거나 오금이 저리기는 커녕 총통의 히스테리가 또 발동했다는 식이다. 심지어 부르크도르프는 총통을 향해 "군대를 비난하지 마시죠"면서 맞받아치지만 그런다고 히틀러가 등 뒤에 있는 괴벨스더러 저 놈을 당장 끌고 나가서 게슈타포의 손에 처리하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그저 무력하게 울먹거릴 뿐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부르크도프르만이 아니라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을 비롯하여 히틀러와 끝짱 토론을 벌였던 장군들 역시 그 때문에 목이 달아났을지는 몰라도 히틀러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제로 계급장 떼이고 다하우 정치범 수용소에서 혹독한 경험을 보내거나 처형당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보직을 잃었을 뿐, 여전히 군부의 원로로서 우대받았고 월급과 두둑한 상여금도 꼬박꼬박 나왔으며 때로는 히틀러와의 만찬 자리에 참여하여 마음에 담아 둔 말을 털어내기도 했다. 일부 장교들의 히틀러 암살 작전이었던 발키리 작전으로 죽다 살아난 뒤에도 히틀러는 관련된 사람들만 무자비하게 처벌했고 군부 전체와는 여전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물며 평화로운 시기에 독일 장군들은 소련 장군들마냥 루반카로 끌려가서 굴욕적인 처우와 고문을 받을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장군들에게 있어서 스탈린이 이름만 들어도 울음이 뚝 거치는 공포의 마왕이라면, 히틀러는 벼락 출세한 보헤미아의 상병이자 베알은 좀 꼬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랄까.

20세기 최악의 철권 독재자로서 불후의 이름을 남긴 히틀러와 스탈린은 닮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 모두 여색을 밝히지 않고 음주향락과 사치를 즐기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치부에 쌓는데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인민들에게는 당에 충성하기를 요구했을 뿐, 북쪽 김씨 왕조마냥 베를린과 모스크바 한가운데에 황금으로 된 거대한 동상을 세우고 자기 우상화에 열을 올리지도 않았다. 수십명의 후궁들 속에서 온갖 주지육림을 즐기며 공식석상에서는 화려하게 장식한 제복을 입고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남미와 아프리카 독재자들의 행태에 비하면 훨씬 소박한 셈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살육했음에도 막상 자기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일은 없었다는 점도 같았다. 그 역할은 부하들의 몫으로 떠넘겼다.

구소련의 일원이었던 투르크메니스탄 수도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6m짜리 삐까번쩍한 황금동상. 히틀러와 스탈린은 정복과 살육에 대한 욕심은 징기스칸조차 능가했지만 의외로 이런 치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서구 지도자들이 혼란스러웠던 것도 이 때문.


이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부드럽고 소탈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이디 아민처럼 마체테를 들고 마음에 안 드는 장관 거시기를 손수 자르는 따위의 기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직접 만났던 서방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존재감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심지어 뮌헨 회담에서 영국 총리였던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호텔 보이로 착각했다고. 흔히 독재자라고 하면 비만 체구에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수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며 거드름 부리면서 주변을 위압하는 조폭 두목같은 존재를 떠올리는 사람들로서는 히틀러와 스탈린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이었음이 틀림없다. 독재도 시대에 맞추어 끊임없이 진화하는지도.

하지만 두 사람이 닮은 꼴이라기에는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성장과정도 달랐고 성격도 달랐으며 권력을 잡는 과정도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의 특징은 끝없는 의심이었다. 타고난 성격도 있었겠지만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묻어버려야 했을 것이며 한발짝만 잘못 내딛어도 자신 또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학습 효과가 그를 역사상 보기 드문 괴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소련 인민 전체를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잠재적인 위험분자로 여겼던 그는 공포와 위협으로 맹목적인 복종만을 강요했다. 희대의 괴물이라는 점에서는 히틀러 또한 스탈린 못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독일 국민들이 숨도 못 쉴 만큼 사정없이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총칼이 아니라 선거로 권력을 잡은 그는 유태인과 전쟁의 패배자들에게는 가혹했지만 적어도 독일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 패전 직전까지도 대부분의 독일 국민은 총통에게 충성했고 적어도 바르바로사 작전 초반 독일군을 만난 소련 인민들처럼 점령군을 '해방자'라며 반기는 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련군은 물론, 서방연합군에게도 말이다. 실제로 스탈린 때문에 죽은 수백만명의 대부분은 소련인이지만 히틀러 때문에 죽은 수백만명은 대부분 소위 '아리아인'은 아니었다. 만약 스탈린 치하의 소련인과 히틀러 치하의 독일인(유태인을 제외하고) 중 양자택일하라면 답은 뻔하지 않을까.

1939년 10월 9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 스타(The Washington Star)에 실린 만평. 저자는 퓰리처상 수상자이기도 한 클리포드 베리만(Clifford K. Berryman)이라는 저명한 만화가라는데 요즘같으면 'PC 논란'이 벌어졌을지도. 언제부터 동성애가 대세가 된 듯한.


이것만은 분명했다. 두 사람 모두 권력에 대한 집착과 끝없는 정복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사실이다. 남에게 그것을 내줄 바에는 차라리 온 세상을 없애겠다는 쪽이었다.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었고 5천만명을 죽게 만들었다. 하필이면 두 괴물이 동 시대에 등장하여 라이벌이 된 것은 악마의 장난은 아니었을까 싶다.

페이퍼로드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히틀러와 스탈린 - 독소전쟁 4년의 증언들>은 두 괴물이 보여준 강점과 결점, 그리고 독소전쟁에서 스탈린이 초반의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꺾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들을 직접 보고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영어판 부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폭군들(the tyrants and the second world war)'이라는.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본문이 독소전쟁만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간 핀트가 맞지 않는 느낌. 저자인 로런스 리스(Laurence Rees)는 영국 옥스퍼드 출신 역사학자이자 BBC 다큐멘타리 제작자이기도. 제2차 세계대전이 전문인 듯.

저자인 로런스 리스 영감님. 연출이겠지만 뒤에 있는 국기와 사진만 보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덕후스러운 삘이 와닿는 느낌이랄지.


이 책은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으로 히틀러와 스탈린이 처음 손을 잡는 순간부터 스탈린의 사망까지 14년의 시간 동안 루스벨트와 처칠같은 서방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최측근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동 시대를 함께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거나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의 1,248개에 달하는 증언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두 악마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들은 닮은 꼴이면서 달랐고 다르면서 닮은 꼴이었다. 한때 든든한 맹우를 약속하면서 손을 잡았으면서 결국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도 단순히 이념이나 정복욕 때문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본능적인 동족 혐오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독일-소련군이 폴란드를 양면 침공하고 1945년 4월 소련군의 베를린 점령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시작하여 끝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들 덕분에 겪지 않아도 될 소동에 휘말린 셈.

스탈린이 리벨트로프와 협상을 진행한 모습과 히틀러가 그 전날 독일 장군들을 상대로 연설을 빙자한 허풍을 떠는 모습은 명확히 대조적이었다. 히틀러는 허영심이 가득한 고성을 반복했지만 스탈린은 조용하고 신중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중요성을 떠벌리기 급급했으나 스탈린은 회담에 몰로토프를 참여시켜 소련 지도부의 집단적 결정이라는 거짓된 인상을 심어주었다. 히틀러는 이념적 버전을 설교한데 반하여 스탈린은 실용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자신을 희화화할 줄도 알았지만 히틀러에게는 이런 면이 전혀 없었다. - p.83

양국은 각각 차지한 폴란드 지역을 자국에 복속시키는데 집중했다. 양측이 이 과제를 수행한 방법을 살펴보면 두 정권의 성격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두 정권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일례로 양측 모두 고문을 마음껏 자행했다. 바르샤바의 한 공장에서 독일인들은 노동자를 집단으로 나누고 서로 싸우도록 부추겼다. 소련 당국 특히 악명높은 비밀경찰인 NKVD는 대규모로 고문을 자행했다. 루브프의 지하 학생 조직 일원인 올가 포파딘은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주먹으로 그녀를 가격했고 다음으로 고무 몽둥이로 때렸다. - p.99

소련군의 능력을 향한 스탈린의 믿음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으로 크게 약화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다시는 그런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보로실로프 원수가 국방인민위원에서 해임되고 문화적 업무를 다루는, 즉 소련군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자리로 좌천되었다. 그 대신 수천명의 소련군 장교들이 석방되었다. 장교들의 석방과 함께 '승진 사태'가 일어났다. 무더기 승진의 혜택을 본 장교 중 한 사람은 게오르기 주코프였다. 그는 훗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소련군 지휘관이 되었다. - p.183

히틀러는 스탈린처럼 모든 정보를 보고 받고 검토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보고서를 읽더라도 스탈린처럼 서류에 상스러운 말을 적지 않았다. 자신의 특별한 지위에 관한 자의식이 투철했기에 그는 천박한 말투를 쓰지 않았다. 크램린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스탈린을 둘러싼 야심 찬 아첨꾼들이 그에게 듣기 좋은 소식만 보고한 모습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이런 면에서 독보적인 인물이 라브렌티 베리야였다. 그는 보스의 의심병에 영합하는 방식으로 출세한 인물이었다. - p.235

영국 정치인들은 1938년 뮌헨 회담을 포함하여 히틀러를 상대한 경험이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스탈린과 다르게 회의 중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지 못했고 외국 정치인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히틀러와 달리 스탈린은 꾸밈없이 굴었다. 1941년 12월 회의에서 스탈린의 꾸밈없는 태도는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낳는데 일조했다. 외국 외무장관 이든은 스탈린이 전후 소련의 국경 문제가 "양국 사이의 진정성을 쌓은 시금석"이 될 거라고 확신한 채 모스크바를 떠났다. - p.368

1942년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위기의 순간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히틀러는 석탄 협회 의장 플라이거에게 호소 내지는 간청을 하여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다그쳤다. 그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고 대꾸한 플라이거가 히틀러 본인의 요구대로 시도하겠다고 입장을 바꿀 때까지 감정적으로 압박했다. 이와 달리 스탈린은 '감정 게임'을 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위협의 힘을 믿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애국주의에 호소하기는 했으나 그의 호소에는 인간 생애를 바라보는 스탈린의 냉철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다름 아닌 인간은 폭력적 위협에 가장 잘 반응한다는 적나라한 진실이 스탈린의 호소 아래에 놓여 있었다. - p.466

1943년 7월 온갖 재난이 히틀러에게 찾아왔으나 그는 재난이 겹친 달의 말미까지 아무런 흔들림 없이 권좌를 지켰다. 그의 운명은 왜 무솔리니와 달랐던가? 한가지 이유는 독일 국민이 동쪽으로부터의 위기를 자국의 존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이 점령한 독일과 서방 연합군이 점령한 이탈리아를 똑같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스탈린과의 전쟁에서 쉽사리 빠져 나갈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히틀러가 권력을 유지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는 나치 정권의 권력 구조에서 도움을 받았다. 무솔리니와 달리 히틀러는 국가원수였기에 그를 비판하거나 해임한 군주가 없었다. 이탈리아 파시즘 대평의회와 같은 히틀러에게 책임을 물을 정치적 기구도 없었다. - p.591

스탈린은 중간중간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풀었으나 공포를 유발하는 그의 분노도 순간순간 드러나곤 했다. 스탈린은 총참모부의 알렉세이 안토노프 장군에게 "왜 특정 독일 정유공장이 아직도 폭격받지 않았는가?"라고 물으며 이유를 확인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안토노프 장군이 다리를 떨면서 대답했다. 나는 스탈린이 체제를 통치하는데 활용하는 공포의 단면을 인상적으로 엿보았다. - p.717

히틀러가 타인을 비난하는 문화를 구축하긴 했어도, 스탈린이 저지른 개인적 응징에 버금가지는 못했다. 병사와 민간인을 막론해 수많은 독일인이 처형당하기는 했어도, 히틀러는 측근과 동료들에게 죽음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군 지휘관을 제거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은퇴, 병가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구데리안은 3월 말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6주 동안 요양 휴가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해 2월 두 사람이 격렬한 논쟁을 벌인 이후의 조치였다. 소련군 총사령관이 스탈린을 화나게 했다고 상상해 보라. 요양 휴가를 보내는 것은 스탈린 식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 p.753

스탈린이 주코프를 즉시 파괴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주코프가 안전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희생자가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도록 명성을 천천히 훼손한 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니콜라이 부하린을 파괴한 과정을 보면 스탈린의 수법을 알 수 있다. 이 유명한 볼셰비키 혁명가는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이후 결국에는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청원했다. 스탈린은 그 청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니콜라이 부하린은 1938년 3월 처형되었다. 부하린처럼 주코프도 몇 년에 걸쳐 스탈린의 핍박에 시달렸다. - p.784

두 사람 사이의 많은 차이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들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수백만명의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동일하다. 두 사람은 이념이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성실하게 순종하는 사람조차 기꺼이 죽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당신이 그 시절에 있었다면 소련군에 입대해 용감하게 싸운 군인도 특정 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죽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동료가 당신 눈앞에서 학대 당하고 죽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당신이 나치독일에서 건실하게 생활했더라도 유대인으로 태어났거나 유대인으로 분류된다면 반드시 죽음의 수용소로 가야 한다. - p.800

히틀러와 스탈린이 얼마나 닮았건 또는 달랐건 간에 결과적으로 전쟁의 승자가 스탈린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과연 히틀러보다 스탈린이 더 합리적인 지도자였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물론 히틀러는 많은 부분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스탈린에 비하여 지나치리만큼 방만하게 국가를 운영하여 독일의 힘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했고 본문 내내 언급되는 것처럼 말이 너무 많았다. 또한 아리아 민족만이 최고라는 독선적인 사고는 스탈린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소련 인민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어떤 타협도 거부함으로서 결국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린 쪽은 히틀러이지 스탈린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수라는 측면에서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41년 6월의 재앙은 명백히 스탈린이 자초한 것이었다. 비록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아슬아슬한 역전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1942년 여름에도 장군들의 조언을 무시하여 또 한번 재앙을 초래했다. 소련의 승리는 단순히 스탈린과 히틀러의 인간적인 차이보다도 소련이 훨씬 더 많은 인구와 자원을 가졌고 전시 동원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더 유리했다는 점, 독일이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서방의 든든한 지원, 여기에 여러 행운까지 복합적으로 결합한 결과였다. 또한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이겼다고 해서 그가 역사의 승자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를 가졌음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었던 그는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먼 나머지 히틀러에게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고 뒤이어 서방이 모처럼 내민 손길 또한 폴란드 문제를 이유로 스스로 걷어차 버림으로서 소련의 고립을 자초했다. 스탈린이 건설한 크고 알흠다운 제국이 자신의 정복욕을 채워주었을지는 몰라도 후계자들에게는 도리어 짐짝이 되었고 엄청난 재정적 부담은 결국 반 세기 뒤 소련의 붕괴에 일조했다.

두 사람에게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면 한때나마 서방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들을 자기 손바닥 위에 놓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도, 냉전도 없었을 것이다.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는 산전수전 겪은 체임벌린을 농락했으며 스탈린은 테헤란과 얄타에서 처칠, 루스벨트를 농락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서방 지도자들이 부당한 위협에 비굴하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었고 뒤늦게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는 점이다. 하물며 트럼프와 같은 3류 협잡꾼이 아니라 서방 진영에서는 최고의 정치인들이었고 머리가 꽃밭이 아니라 속이 검기로는 누구 못지 않은 능구렁이들이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진흙탕 정치라고 해도 민주주의는 서로 지켜야 할 선이 있기 마련이며, 목숨이 판돈인 데스 게임을 통해 그 자리까지 올라온 독재자의 상대가 되기는 역부족인지도 모르겠다.

처칠과 클라크-커(모스크바 주재 영국대사)는 모두 대단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타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거기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자만했다. 그들은 '초라한 배경'에서 성장한 스탈린을 상대적으로 경멸했고 그들의 비대한 자의식은 스탈린을 향한 경멸을 증폭시켰다. 처칠이 보기에 스탈린은 "보잘 것 없는 농민"이었고 클라크-커가 보기에 "아주 좋아하는 주머니쥐이지만 나를 눈여거보다가 내가 나쁜 짓을 할 때는 나의 엉덩이를 물 수 있는" 존재였다. - p.475

괴벨스는 나치 엘리트 중 가장 지적이고 가장 냉소적이며 감정에 쉽게 휘말리지 않았다. 1926년 바이에른 북부의 밤베르크 지역에서 열린 나치당대회에서 괴벨스는 히틀러의 정책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일기에 "낙담해서 히틀러를 더는 신뢰할 수 없다."라고 썼다. 그러나 두 달 후 히틀러가 괴벨스에게 베를린으로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뜻을 전한 뒤 괴벨스는 히틀러를 향한 신뢰를 회복했다. "아돌프 히틀러 당신은 위대하면서 동시에 단순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 p.538

스탈린은 루스벨트, 처칠과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데 신경쓰지 않았다. 앞서 보았듯이 스탈린의 이런 성격은 처칠처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의 눈에는 스탈린을 수수께끼같은 존재처럼 보이게 했다. 처칠은 "두 명의 스탈린이 있다"라고 생각했다. "첫번째 편지는 나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간절히 원하는 스탈린이 보냈고 두번째 편지는 주변의 영향을 받은 스탈린이 보낸 것이다. 스탈린은 권력이 막강한 '조언자들'이 그의 뒤에서 행사하는 어두운 영향력을 감내하는 중이다." 처칠의 판단은 대단히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실수를 범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처칠은 스탈린과 다르게 유혈이 낭자한 숙청을 주도하지도,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 기아 또는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를 시행한 적도 없었다. 스탈린의 배후에서 '어두운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따위는 없었다. 바로 스탈린이 그 주범이었다. - p.556

본인의 매력을 과신한 루스벨트의 오만은 스탈린의 뛰어난 협상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에서 본인이 원했던 것을 거의 다 얻어내며 소련으로 돌아갔다. 루스벨트는 테헤란 회담 초반부터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루스벨트와 미국 대표단은 테헤란의 소련 대사관으로 찾아와 체류하라는 스탈린의 제안을 선뜻 수용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으로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미국 대표단은 소련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소련 측은 루스벨트의 사적인 대화 전부를 도청했다. - p.614

자신의 외양은 물론, 내면 깊숙한 영혼마저 위장하며 평생을 살아온 스탈린은 모든 사람에게서 장애와 위협을 발견하고자 감상, 연민, 진정성을 모두 없앴다. 그는 전략, 의심, 고집의 대가였다. 원수로 위장한 공산주의자인 그는 간교한 속임수를 좋아하는 독재자이고 순진한 미소를 드러내는 정복자이며, 기만의 명수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이 너무도 강렬한 나머지 그의 속셈은 사악한 매력과 함께 가끔씩 그의 갑옷을 뚫고 나왔다. - p.720

스탈린의 어투는 흥분한 아이를 달래는 부모의 말투와 같았다. 또한 이 편지로 인해 스탈린,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 사이의 차이가 확인히 부각되었다. 루스벨스와 처칠은 스탈린과의 관계에서 위험한 패턴을 답습했다. 두 사람은 스탈린이 자신들을 인간적으로 좋아하면 거래가 쉬워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스탈린은 두 지도자와의 감정적 교류는 신경쓰지 않았다. 관계의 '비대칭성' 덕분에 스탈린을 처칠을 질책할 수 있었다. 스탈린의 위엄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그는 교신할 때마다 감정에 치우친 적이 거의 없었으며 자신의 불쾌함을 철저한 계산에 따라 표현하여 자신의 약점은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 p.750

훗날 드골은 스탈린에게서 느낀 인상을 회고록에 남겼다. 그는 "스탈린은 권력욕에 사로잡혔다."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외양은 물론, 내면 깊숙한 영혼맞저 위장하며 평생을 살아온 스탈린은 모든 사람에게서 장애와 위협을 발견하고자 감상, 연민, 진정성을 모두 없앴다. 그는 전략, 의심, 고집의 대가였다. 대원수로 위장한 공산주의자인 그는 간교한 속임수를 좋아하는 독재자이고 순진한 미소를 드러내는 정복자이며, 기만의 명수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이 너무도 강렬한 나머지 그의 속셈은 사악한 매력과 함께 가끔씩 그의 갑옷을 뚫고 나왔다." - p.720

예전에 소설 대망이 한창 유행할 때 유명한 문구가 있었다. 센코쿠 3영걸인 오다 노부나가를 가리켜 "울지 않는 새는 죽인다"라고 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지 않더라도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던가. 물론 이들이 살았던 시대에서 200여년 뒤인 19세기의 어느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 당사자들이 정말로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사람들에게 세 사람의 캐릭터성을 각인시키는데 일조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어떨까. 스탈린은 오다 노부나가만큼이나 냉혹하고 무자비한 인물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울지 않아도 물론 죽이지만 너무 울어도 인민의 적"이라는 식. 아랫사람들로서는 변화무쌍한 그의 심기를 끊임없이 살피면서 비위를 조금만 거슬리거나 편집광적인 의심을 자극해도 본인 목숨은 물론, 가족과 친척들까지 시베리아로 갈 판이니 노부나가의 변덕 따위는 기껏해야 어린 아이 칭얼거림이랄까. 하물며 아케치 미쓰히데가 소련판 혼노지 변을 일으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반면, 타고난 자뻑 기질에 스스로를 불세출의 천재로 여겼던 히틀러는 "새가 울건 말건 신경끄고 내가 울면 된다"라고 할 듯.

그러고보니 올해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이더라. 시중에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들이 줄줄이 나오지 않을까 밀덕으로서 벌써부터 기대가 앞선다. 나도 하반기에 신작 도서를 준비 중이지만 말이다. 시중에는 이안 커셔의 저서를 비롯하여 히틀러와 스탈린 평전이 나와 있지만 이 책은 동시대를 살면서 닮은 꼴이자 최강의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을 흥미롭게 비교하고 있다. 한 사람은 한 때 놀라운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패배하여 비참하게 자살했고 또 한 사람은 승리자가 되어 천수를 누렸지만 대다수 인민들 입장에서는 그가 숨쉬는 내내 지옥같은 삶을 보내야 했다. 그게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저자의 뛰어난 필력 덕분에 80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읽는 내내 손을 뗄 수 없었다. 올해 최고의 서적 중 하나라고 감히 손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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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대륙 -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유럽 잔혹사 걸작 논픽션 30
키스 로 지음, 노만수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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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중에서 최고의 명작은 <쉰들러 리스트>라고 꼽고 싶다. 호주 출신 작가인 토머스 케닐리(Thomas Keneally)의 소설을 원작으로 원래 나치당원이자 악명 높은 군납업자였지만 인간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나치의 광기어린 홀로코스트에 저항하여 1천여 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보내지는 것을 막음으로서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이름을 남긴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나온지 30년이 지난 지금 보더라도 감동적이다. 특히 영화 말미에 나치가 패망하고 쉰들러가 도피에 나설 때 그가 구해준 유태인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금니를 녹여 만든 반지를 넘겨주자 자신이 좀 더 노력했더라면 더 많은 생명을 구했을 거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장면이다. 쉰들러가 보여준 휴머니즘과 젊은 시절 니암 니슨의 영혼을 갈아넣은 연기가 결합한 결과랄까.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 전부를 구하는 것이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라는 탈무드의 구절이 적힌 반지를 받고 울먹거리는 쉰들러.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어떤 보답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여겼을 그로서는 그 순간에야 자신이 얼마나 숭고한 일을 했는지 비로소 절감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영화가 극적 재미를 위해서 미화되었으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유태인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폄하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름 민주화되었다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소수의 편에 서서 불의에 맞서기란 쉽지 않지만, 하물며 서슬 퍼른 분위기와 집단 광기 속에서 불이익은 물론이고 여차하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모르는 척 침묵하거나 오히려 분위기에 편승하여 개인적인 이득을 보려는 기회주의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바뀌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카멜레온마냥 변신하고 자기 행위가 정당한 선택이었다며 항변하는 비겁자들이 훨씬 많은 것이 우리네 세상이다. 쉰들러는 분명 용기 있는 사람이다.

한편으로 영화가 끝나기 직전 또 다른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온다. 쉰들러가 떠난 다음날 공장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 앞에 한 소련 장교가 말을 타고 등장한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면 되느냐는 질문에 그는 동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같으면 서쪽으로도 가지 않겠소." 전쟁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했다고 해서 이들을 위한 세상이 열린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여전히 유럽에서는 반유태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스필버그가 영화를 폴란드에서 촬영하고 있을 때에도 유태인을 미화하는 영화라면서 항의와 방해가 많았다고 한다. 영화는 유태인 생존자들이 다같이 손을 맞잡고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장면에서 막을 내리지만 현실은 동화 속 이야기마냥 "다같이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식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끝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감동과 여운을 즐길 뿐, 이들이 그 후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찾기까지 어떤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뒷 얘기는 관심없다.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인지도.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1945년에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후 적어도 10년 이상 시끄럽게 이어졌다." - 아마존 도서 소개 중에서.

역사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글항아리에서 나온 신작 도서인 <야만대륙(Savage Continent)>은 바로 그와 같은 얘기, 즉 나치 패망 이후 승리의 환희 뒤에 가리어졌던 야만과 무질서의 유럽을 다룬 책이다. 2012년에 나온 이 책은 다음해 제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최고의 논픽션 역사서에 수여되는 펜 헤셀-틸먼 상(PEN Hessell-Tiltman Prize)을 수상했으며 무려 22개국에서 출판된 베스트셀러. 저자 키스 로우(Keith Lowe)는 영국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작가. 주로 제2차 세계대전사를 전문으로 글을 쓰는 모양.

저자인 키스 로우. 1970년 생으로 12년 전 사진이라고 하니 아직 40대 중반였을 때인데 일찌감치 벗겨지신 듯. 하긴 제이슨 스타뎀은 30대 초반에 탈모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우리가 함부로 대하는 머리카락 한 올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자원이라는.


이 책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린다. 독일군과 소련군, 서방 연합군이 서로를 어떻게 파괴했으며 수천년 동안 인류가 이룩한 문화유산과 유서깊은 도시들이 불과 몇년만에 폐허로 바뀔 수 있었는지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이전의 전쟁들과 비교하여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화력이나 기술이 아니라 광기라는 점이다. 그 점에서는 원래 사람 목숨을 파리 이하로 보는 독일, 소련만이 아니라 소위 문명국을 자처하던 서방 연합군도 다를 바 없었다. 원자폭탄으로 수십만명이 사는 도시를 한방에 날려버린 것은 미국이었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건간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의 마지막 선이 무너지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지구상에서 문자 그대로 절멸시키려고 애썼다. 심지어 히틀러는 패전이 코앞에 닥치자 '네로 작전'을 하달하여 자기네 손으로 독일의 모든 것을 파괴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자신이 그토록 우월하다고 추켜세웠던 아리아인종은 러시아인들보다 하등하다고 판명되었기에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이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파멸의 규모를 묘사할 수 있는 유의미한 어휘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바르샤바는 파괴된 도시의 하나일뿐, 폴란드에서만 10여개의 도시가 파괴되었고 유럽 전체에서는 100여개의 도시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촬영된 사진들을 보면 개별 도시들의 파괴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을 유럽 대륙 전체로 확장한다면 인간의 머리로는 결코 그 참상을 이해할 수 없다. - p.35

책은 네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제1부인 '전쟁의 유산'은 종전 후의 혼란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파괴된 도시, 전시 희생자들, 약탈과 폭력, 추방, 강제 이주 등 전쟁이 남긴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이 담겨 있다.

핵전쟁 이후의 세상을 묘사한 영화 <매드맥스>는 정부 붕괴로 공권력이 사라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보여준다. 그나마 나치 몰락 후 유럽에서는 수백만명의 연합군이 주둔하면서 질서를 유지했지만 그럼에도 일탈과 범죄를 완전히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2부의 '복수'는 나치의 가해자들만이 아니라 가장 만만한 약자들을 향해 어떤 식으로 분풀이가 자행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며, 제3부 '인종청소'는 자민족 이외 소수민족들의 강제 추방과 학살이 나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을 고발한다. 여기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풀려난 유태인 난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쉰들러가 어렵게 해방한 유태인들이 화기애애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을 거라는 얘기이다. 제4부는 독일군이 물러난 뒤 유럽 곳곳에서 벌어진 내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 전에만 해도 탄압의 대상이자 궁지에 몰려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세상을 엎고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이기도 했다. 실제로 중국과 유고,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했다. 만약 전쟁으로 기성 정권이 약화되거나 무너지지 않았다면 이들이 승리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공산주의자들이 이긴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스에서는 서방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가 승리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다. 나치와 싸웠을 때 이상으로 말이다.

전쟁 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는 유대인 인구 비중이 큰 수십 개의 대도시가 있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로 알려진 빌노는 전쟁 전만 해도 6~7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나 1945년 중반에는 그 중 10%만 살아남았다. 바르샤바에서는 유대인이 인구의 약 3분1을 차지했지만 1945년 1월 붉은 군대가 비스툴라강을 건넜을 때 이 도시에서 발견한 유대인은 겨우 200명이었다. 1945년 말까지 소수의 생존자가 이 도시로 돌아왔지만 5천명이 넘지 않았다. - p.52

기아의 원인이 무엇이었던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아테네와 테살로니키에서는 사망률이 3배 증가하고 미코노스 등 일부 섬의 사망률은 평소보다 9배나 치솟았다. 전쟁 동안 사망한 41만명의 그리스인 중 적어도 25만명은 기아와 관련된 죽음일 것이다.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자 영국군은 1942년 가을 이례적으로 식량 운송선이 자국을 지나 그리스로 입항할 수 있도록 봉쇄를 풀었다. 남은 전쟁 기간 동안에도 독일과 영국의 합의 아래 구호물자는 그리스로 유입되었고 1944년 말 해방 이후 혼란기에도 반입이 계속되었다. - p.79

남자와 여자 심지어 아이들도 복수에 동참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가 해방된 후, 벤 헬프고트는 두 명의 유대인 소녀가 라이프니츠로 가는 길에 한 독일 여성을 손수레로 공격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소녀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했지만 뛰어들어 뜯어말릴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에는 수용소 안에서 군중이 나치친위대 한명을 때려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그는 말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난 아무도 미워하지 않지만 폭도는 증오한다. 사람들이 폭도로 변질되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62

미군 관할 수용소의 포로 사망률은 소련군 관할 수용소만큼 높지는 않았지만 영국군이 운영한 전쟁포로수용소 사망률의 4배 이상이었다. 더 심한 곳은 프랑스군이 운영하는 수용소로, 포로의 숫자가 영국군 수용소의 1/3도 되지 않았음에도 사망자 수는 거의 20배에 달했다. 더욱이 우리는 이 통계들이 보수적인 수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공식 역사가들조차 수천명의 사망자가 기록에서 누락되었을거라고 인정했다. - p.213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피에트로 바돌리오의 부패한 지휘 아래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파시스트 잔당들이 권력을 누렸다. 연합군은 파시스트 당원을 축출하라고 압박했지만 해방된 지역의 통제권이 이탈리아 당국에 반환되자마자 그들은 본래의 지위를 회복했다. 경찰은 공산주의자들을 괴롭히고 좌익 동조자들을 공공연히 습격했으며 파시스트당 송가를 불렀다. - p.257

유럽 여성들이 독일인과 사귄 까닭은 강요당했기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남편이나 애인이 부재했기 때문도 아니고 돈이나 음식이 필요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독일 군인의 '기사같은' 강한 이미지, 특히 자국 남자들의 나약한 인상에 비해 강렬하고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덴마크의 전시 여론조사원들은 덴마크 여성의 51%가 자국 동포 남성보다 독일 남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인정한 통계치를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p.279

수년간 이어온 나치 선전은 고작 몇주나 몇달만에 뒤집히지 않았다. 여전히 곳곳에 노골적인 반유대주의가 존재했으며 때로는 꽤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가령 1945년 그리스 도시 테살로니키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아 살아 있었어?"라거나 "유감이야. 너희가 비누가 되지 않았다니!" 따위의 인사를 받기도 했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유대인 송환자들은 등록을 담당하는 관리로부터 "독일 놈들이 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것을 까먹었나봐."라는 조롱을 받았다. 가르미슈와 메밍겐 같은 독일 도시에서는 극장에서 600만 유대인의 죽음을 언급하는 뉴스릴 영화를 보면서 "그들을 충분히 죽이지 못했어!"라는 외침과 함께 귀청을 찢을 듯한 박수가 이어졌다. - p.320

헝가리인들이 루마니아에서 추방당했듯, 루마니아인들도 헝가리에서 쫓겨났다. 알바니아계 참족은 그리스에서 추방되었고 루마니아인은 우크라이나에서 추방당했으며 이탈리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추방되었다. 핀란드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서부 카렐리야 지방을 소련에게 넘겨주면서 핀란드인 25만명이 이주해야 했다. - p.406

스탈린은 붉은 군대가 동유럽에 진입한 순간부터 자국의 시스템을 거울처럼 고스란히 반영하는 정치체제를 확실히 심어놓기로 결심했다. 스탈린은 티토의 대리인인 밀로반 질라스와 대화하면서 "누구든 영토를 점령하는 자는 그 땅 위에 자신의 사회체제도 강요한다. 모두들 자신의 군대가 도달하는 범주 안에서 자신의 시스템을 이식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이전 전쟁들과 다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 정치체제를 논리적으로 성립시킨 쪽은 공산주의자 정치인들 그리고 소련 및 기타 동맹자들의 무자비함이었다. 동유럽 공산당들은 소련과 서방 사이의 전략적 완충지대와 함께 소련 체제 복제품을 창출했다. - p.538

전쟁 중에는 침략자에게 저항하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였다면 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쓰러뜨릴 적이 사라지면서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그동안 감추어졌던 민낯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것이 7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나오는 내용이다. 흔히 알려진 것마냥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히 단죄했다는 신화와 달리(물론 친일파가 대놓고 역사의 승자 노릇을 하는 우리 사회에 비할 수는 없지만) 비시 정권의 권력자와 기업가들은 몇몇 지도자급을 제외하고 대부분 면죄부를 받았다. 비싼 변호사를 써서 법적 허점을 파고 들거나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과거사 청산 자체가 뒷전으로 밀려난 덕분이었다. 그 대신 확실하게 처벌한 대상은 있었다. 독일군과 사귀었던 여성들이었다. 프랑스 사회가 보기에 여자들의 자궁은 그녀들이 아니라 국가 소유였고 그것을 사사로이 내줌으로서 남자들의 체면을 떨어뜨린 것은 매국노보다 더 나쁜 죄라는 이유였다. 많은 여성이 남자들에 의해 삭발당하고 속옷으로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함으로서 과거사 청산의 본보기가 되었다.

독일군과 잤다는 이유로 강제 삭발당하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프랑스 여성들. 프랑스만이 아니라 독일 치하에 있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자행된 모습이기도 했다. 더욱이 여기에 앞장선 쪽은 정식 사법체계나 연합군에서 싸운 병사들이 아니라 독일군 앞에서 침묵했던 다수의 남자들이었다. 그들로서는 전시에 느꼈던 자신들의 무력함을 전쟁이 끝난 뒤 약자들에게 갚아줌으로서 스스로를 위안했다.


예전에 글항아리에서 나온 이안 부루마 교수의 <0년> 또한 1945년의 전후 유럽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보다 신랄하고 적나라하면서 충격적이다. 더욱이 그 시절 누구나 겪었지만 기억해봐야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같이 잊기로 한 역사이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당장 우리만 해도 국민들에게 모든 역사를 다 알 필요는 없으며 기억할 것만 기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역사는 학문의 영역임에도 정치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면 히틀러의 세계정복 야욕에 맞서 연합군이 어떻게 이겼는지 전투와 승리의 역사에만 포커스를 두는 것이 시중에 수없이 늘려있는 책이다. 그런 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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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 이스라엘의 탄생과 팔레스타인의 눈물 교유서가 어제의책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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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모든 시선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프리고진의 반란에 쏠려 있었던 2023년 10월 7일 새벽 이번에는 남쪽으로 1,500km 떨어진 영원한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에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일대에 수천발의 로켓 공격과 함께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중 하나인 하마스 소속 게릴라 수천여명이 가자 지구의 장벽을 돌파하고 이스라엘 세력권으로 진입하면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간의 충돌이야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수발에서 수십발 정도 간헐적으로 로켓을 발사하고 이스라엘이 맞대응했던 것이 이번에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전면전 수준의 기습 공격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을 정말로 충격에 빠뜨린 것은 가자 지구 인근의 레임 키부츠(유태인 정착촌)에서 열린 음악 축제에서 패러 글라이더를 타고 내려온 기습자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는 모습이었다. 서방 미디어들은 하마스의 광기어린 폭력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서 이들의 '악의 축'이며 미국과 이스라엘이 왜 이들의 탄압에 나서는지 정당성을 부여했다.

패러 글라이더를 타고 행사장 머리 위에서 강하하는 하마스 대원들. 국적과 성별을 따지지 않고 비무장한 민간인을 상대로 조준 사격과 무차별 난사를 하고 심지어 일부 포로들을 참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제사회의 여론을 극도로 불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이스라엘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들 세상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이 사건은 푸틴이라는 독재자가 장기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만만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벌인 침략전쟁과 달랐고, 80년 전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의 패권을 차지할 요량으로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 것과도 달랐으며, 영웅심리에 눈이 먼 사우디 출신 부자집 도련님이 막연한 반미 감정에 편승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 요량으로 애꿎은 민간인들이 탄 비행기들을 납치한 뒤 미국 한복판에 닥돌시킨 911테러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지배자 노릇을 하면서 저지른 폭력과 만행은 하마스의 이번 테러를 무색하게 할 정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 격이었다. 미국 서부 개척 시절 백인들이 원주민들의 터전을 난폭하게 빼앗고 학살을 저질러 원주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처음 선언되었을 때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양쪽 모두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서로 다 가지겠다면서 힘으로 승부를 겨루기로 했다. 유리한 쪽은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유대인들이 일치단결한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분열되어 주변 아랍국들에게 이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끼어든 아랍 연합군은 자기들 몫만 챙기고 냉큼 물러났다.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 지역의 60%는 이스라엘이 점령했고 나머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아랍국들이 전리품마냥 나누어 가졌다. 유엔은 자신들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한 이스라엘과 아랍국을 혼내는 대신 그냥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을 쫓아내기는커녕, 자신들의 고향도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이스라엘만큼이나 아랍국들의 통치 역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독립 움직임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났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이번 사태를 보듯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과연 이 동네에 폭력의 악순환이 끝나는 날이 올까 싶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남아공의 악명높은 아파르트 헤이트조차 무색할 만큼 잔혹하다. 팔레스타인 극우 지도자들 역시 청년들을 부추겨 자살 특공에 내몰면서 양측의 희생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물론 평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3년 미국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팔레스타인 지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고 부분적이나마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함으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비록 칼자루를 쥔 이스라엘에 훨씬 유리한 내용이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일방적인 복종만 강요했던 이전에 비해 한발짝 나아간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몇몇 지도자들의 밀실 야합으로 증오를 내려놓기에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이었다. 이 점이 남아공과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양측은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이상 어중간한 타협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라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교 근본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모처럼 열린 평화의 길 또한 양측 강경파들에 의해 흐지부지되었다. 애초에 대를 이어가면서 죽기 살기로 싸운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모두 다 없었던 일인양 잊고 화해하고 살자는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당장 우리만 해도 역대 정권의 대화 노력이 매번 실패로 돌아가고 북한을 도저히 공존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하마스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초토화된 가자지구. 함무라비 법전의 유명한 '눈에는 눈'으로 갚아주는 것이 이 동네 방식이라.

남들이야 지금이라도 이스라엘이 폭력을 멈추고 팔레스타인 땅에서 냉큼 물러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거 아니냐고 쉽게 말할지 몰라도 애초에 왜 싸우게 되었으며 서로의 증오가 얼마나 깊숙이 박혀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는 과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배나 일본이 우리를 병합했던 것과는 성격이 다르며, 탐욕에 눈이 먼 이스라엘이 평화로운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는 식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제 와서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이며, '굴러온 돌'인 유대인들이 그곳을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점유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이치를 따져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 점은 1948년에 팔레스타인은 졌고 이스라엘이 이겼다는 사실이다. 냉엄한 우리네 현실에서 나머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만약 그 때 팔레스타인이 승리했다면 오늘날 양쪽의 처지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남의 힘을 빌리는 대신 하나로 뭉쳐서 자신들의 힘으로 싸웠더라면 적어도 지금처럼 나라 없는 신세가 되어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잃은 적이 있는 우리가 진정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지난 11월에 교유서가에서 나온 신작도서인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 이스라엘의 탄생과 팔레스타인의 눈물>은 이 끝없는 싸움이 처음 시작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며 그 증오의 뿌리가 전적으로 유대인들의 탐욕에 있었음을 고발하는 책이다. 저자인 일란 파페(pdfIlan Pappe)교수는 놀랍게도 팔레스타인 사람이나 미국인, 또는 제3국 사람이 아니라 가해자들과 똑같은 이스라엘 유대인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부모님은 1930년대 나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넘어온 독일계 유대인이라고. 파페 교수는 차할(Tzahal, 이스라엘 방위군)에서 복무했고 제4차 중동전쟁 당시 골란 고원에서 싸웠다고 한다. 이스라엘 하이파 정치대학 교수로 지냈지만 팔레스타인을 편들고 자국의 만행을 비난하자 극우 세력들의 살해 위협을 받아 영국으로 망명했다. 어느 사회이건 입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저자인 일란 파페 교수. 그는 이스라엘에서 보기 드물게 유대인이 피해자가 아니며 나치 못지 않게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고발하여 조국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스라엘이 아파르트 헤이트 시절의 남아공 못지 않게 폐쇄적이며 과거사 반성이 없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알려진 이스라엘 건국 신화란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수적 열세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전투기와 탱크를 앞세운 압도적인 아랍 연합군을 격파하고 2천년 만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마치 6.25 당시 북한군의 T-34 전차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우리 국군처럼 말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두뇌와 교육 열기로 사막을 옥토로 바꾸고 가난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이다. 시중에는 소위 '하브루타'라고 부르는 유대인식 자녀 교육이 아이 가진 부모들의 필독서로 통한다. 저자는 이 모든 신화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어떤 전쟁범죄를 저질렀는지 폭로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네 신세계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병균을 뿌리 뽑는 셈이었다. 집단 학살과 약탈, 강간.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비교한다면 대규모 가스 처형실이 없었다는 것만 달랐다.

1936년 일어난 봉기는 결연한 대중 반란의 형태로 터져나왔고 결국 영국 정부는 인도보다도 더 많은 군대를 팔레스타인에 주둔시킬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망명길에 올랐고 위임 통치 군대에 맞서 게릴라전을 계속하던 준군수 부대들은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반란에 관여한 많은 마을 사람이 체포되거나 부상을 입거나 살해되었다. 팔레스타인 지도부와 생존력 있는 전투 조직이 대부분 자취를 감추자 1947년 유대 군대가 팔레스타인 농촌 지역에 수월하게 진출했다. - p.52

1917년 11월 유엔에 제안된 최종 지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팔레스타인은 세 부분으로 분할될 예정이었다. 전체 면적의 42퍼센트에서는 팔레스타인 81만8천명이 유대인 1만명을 포함하는 국가를 갖는 반면,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는 전체 면적의 56퍼센트에 육박했다. 이 국가는 49만9천명의 유대인과 43만 8천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공유하기로 되어 있었다. 세번째 부분은 예루살렘 시 주변의 작은 고립지인데 국제 사회가 관리하고 20만명의 인구는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이 동수로 구성할 예정이었다. - p.83

기관총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이 커피하우스에 총을 난사하는 동안 스턴갱 대원들은 근처를 지나던 버스를 세우고 닥치는대로 총을 쏘았다. 스턴갱이 팔레스타인 농촌에서 처음 벌인 작전이었다. 공격에 앞서 스턴갱은 활동가들에게 팸플릿을 배포했다. "아랍인 동네를 파괴하고 아랍 마을을 응징하라." - p.134

다시 말해 1948년 3월 몇주를 전쟁 전체에서 가장 힘든 시기로 묘사하는 이가엘 야딘의 설명을 듣다보면 우리는 오히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가 전혀 절멸당할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종족 청소 계획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장애물에 부딪쳤을 뿐이었다. 상대적인 무기 부족과 아랍 국가로 지정된 지역에 고립된 유대인 이주 식민지 등이 이런 난관이었다. - p.161

장티푸스 전염병과 집중 포격으로 사기가 약해진 주민들은 확성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항복하든지 자살하라.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일 테니까." 프랑스의 유엔 옵서버인 프티트 중위는 도시가 유대인의 손에 넘어간 뒤 군대가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약탈을 자행했다고 보고했다. 가구, 옷가기, 기타 유대인 신규 이민자들이 쓸만한 물건이나 없애버리면 난민들이 돌아올 생각을 포기할 물건을 모조리 약탈했다. - p. 186

아랍 지도자들 가운데 초기 단계인 1948년 초에 팔레스타인 사람들 앞에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가피한 군사 개입을 최대한 질질 끌면서 연기했고 일찌감치 개입을 마무리하게 되자 무척 흡족해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패배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국의 군대가 우월한 유대 군대에 맞서 승산이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아랍 각국은 거의 또는 전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전쟁에 군대를 파견했다. - p.212

2주일이 채 안 되는 시기 동안 팔레스타인인 수십만명이 마을과 소읍과 도시에서 쫓겨났다. 유엔이 평화안을 내놓았지만 사람들은 심리전과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포격, 추방 등을 겪은데다 친척이 처형당하고 부인과 딸들이 욕을 보고 물건을 빼앗기고 어떤 경우에는 강간까지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협당하고 겁에 질렸다. 7월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집은 대부분 이스라엘 공병대의 다이너마이트에 날아가고 없었다. - p.270

아랍 회원국들은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 보고서에 대해 유엔 안보 보장 이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려고 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거의 30년 동안 유엔은 이스라엘의 유엔 대사 아바 에반의 모호한 언어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난민의 존재는 누구에게도 책임이나 해명을 물을 수 없는 '인도적 문제'라는 것이었다. 유엔 옵서버들은 또한 계속되는 약탈의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1948년 10월까지 팔레스타인의 모든 마을과 도시가 약탈에 휩쓸렸다. 거의 1년 전 분할 결의안을 압도적으로 승인한 유엔은 종족 청소를 비난하는 또 다른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 p.322

학살에 가담한 유대군인들 또한 끔찍한 광경을 전했다. 두개골이 깨져서 골수가 비어져나온 갓난아이들과 강간당하거나 집안에서 산채로 불탄 여자들, 칼에 찔려 죽은 남자들에 관해. 몇 년 뒤에 전해진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고 며칠 뒤 최고 사령부에 전달된 목격담이었다. 이 사건은 제8여단 89대대장이 참모총장 이가엘 야딘에게서 받은 명령의 최종 결과였다. "귀 부대의 준비 태세에는 작전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심리전과 시민들에 대한 '처리'도 포함되어야 함." 다웨이메흐 학살은 1956년 요르단과의 휴전 협정으로 이스라엘에 양도된 크파르카심 마을 사람 49명을 도살하기 전까지 이스라엘군이 마지막으로 저지른 대규모 학살이었다. - p.331

1949년 8월 12일 네게브에서 지금의 가자지구 북쪽 끝에 있는 베이트하눈에서 멀지 않은 니림 키부츠에 주둔한 한 소대가 열 두 살 짜리 팔레스타인 소녀를 사로잡아서 키부츠 근처에 있는 군사기지에 밤새도록 가두었다. 이후 며칠 동안 소녀는 소대원들의 성노예가 되었다. 군인들은 소녀의 머리를 밀어버리고 집단 강간을 하고는 결국 죽여버렸다. 벤구리온은 이 강간도 일기에 적어두었지만 일기 편집자들이 검열해서 삭제했다. 가해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법원의 최고형은 실제로 살인을 한 군인에게 내린 2년 징역형이 전부였다. - p.352

이스라엘인들이 보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이 벌인 행동의 피해자로 인정하는 것은 적어도 두가지 면에서 굉장히 괴로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인정하면 이스라엘이 1948년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를 통해 비난을 받는 역사적 불의를 직시해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밑바탕을 이루는 신화 자체에 의문이 던져지며 국가의 미래에 관한 피할 수 없는 함의가 담긴 일군의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 p.406

읽는 내내 여태껏 읽었던 그 어느 팔레스타인 분쟁사보다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스라엘인의 고발이기에 더 그럴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제사회조차 유독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점이다. 만약 중국이나 러시아, 북한, 이란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인권을 유린한다면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을 것인데도 말이다. 당장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들다보니 굳이 미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남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랄까. 어떤 사람은 나치의 만행을 겪은 유대인들이 나치와 똑같은 짓을 할 수 있냐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스라엘 건국 당시 유대 사회의 주류 세력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아니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포그롬(Pogroms)'을 피하여 넘어온 동유럽과 러시아 출신들이었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자 이 책에서 내내 언급되는 다비드 벤구리온, 6일전쟁의 영웅 모세 다얀, 철의 여인 골다 메이어, 1993년 오슬로 평화 협정을 이끌었던 라빈 대통령 등 하나같이 그 시절에 넘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장기를 거칠고 척박하고 적대적인 환경에서 보냈으며 자신과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이들에게 그래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를 제공했을 뿐이다. 나중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넘어 온 사람들도 이스라엘 건국전쟁에 합류했겠지만 집단 광기 속에서 이들이 이성적인 목소리를 낼 기회는 없었으리라. 그 결과가 이 책에 나온 내용이다.

한편으로,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은 어째서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고 주변 아랍국들로부터 무기를 들여올 수 있었으며 홈그라운드라는 이점도 있었다.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릴 이유는 없었을 것인데 말이다. 저자는 유대인들이 마치 나치의 전격전을 연상케 할 만큼 속전속결로 밀어붙였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기에 부족한 느낌이다. 이 책은 전쟁사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가 몰랐고 알더라도 침묵했던 사실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짚어준다. 이스라엘과 딱히 혈맹관계나 무슨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님에도 가재는 게편이라는 격언마냥 단지 같은 친미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을 막연히 동경하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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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시대 - 로맨스 판타지에는 없는 유럽의 실제 역사
임승휘 지음 / 타인의사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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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14세기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주인공(맷 데이먼)이 귀족의 길을 향한 눈물겨운 사투를 다루고 있다. 소지주의 아들인 그는 자신의 땅을 얻기 위해서 최전선에서 죽으라 싸웠지만 싸움에 패배했고 다른 지주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으로부터 받은 지참금조로 받은 영토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귀족이 되었지만 막상 알짜배기 땅은 자신이 속한 영주의 장난질로 친구에게 빼앗기고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그 친구와 목숨 건 결투를 벌인 끝에 최후의 승자가 되고 땅도 되찾게 된다.

땅 앞에서는 생명의 은인도, 죽마고우도 필요없다는 것이 중세 귀족들의 숙명. 귀족에게 땅이 곧 지위이자 재산이다보니.


영화 분위기는 굉장히 암울하고 초반의 잠깐 나오는 짧은 전투신과 막판의 결투 장면 말고는 <킹덤 오브 헤븐>처럼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멀지만 중세 귀족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맷 데이먼은 명색이 귀족이지만 아내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는 난폭한 모습은 우리가 아는 기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영화 내내 땅에 대한 극도의 집착은 중세 귀족에게 영지란 생명이자 모든 것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는 한몫을 벌기 위해서 전쟁터에 목숨 걸고 나가지만 이 또한 싸움에서 이겨서 전리품을 챙기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겉으로는 지배계층의 일원으로 웅장한 성에서 눌러앉아 농민들을 수탈하여 남 부럽지 않은 삶을 누린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름 개빡시게 살아야 했다는 얘기이다.

요즘 전생이 유행하는 일본 판타지 만화에서는 약소 귀족으로 태어나서 영지를 개발하고 인재를 모아서 강대국으로 거듭난다 어쩌구하는 뻔한 스토리가 난무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림없는 소리일 뿐. 비유하자면 동네 편의점을 몇년 만에 대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꼴.


물론 제아무리 불평을 늘어놓은들 왕후 귀족의 사치를 위해서 끝없이 고혈을 짜내야 했던 대다수 민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배부른 소리겠지만 말이다. "불공평이다. 부조리다. 혁명이다. 지배 계급은 공포에 떨어야 한다. 노동 계급이 잃을 것은 상전이요, 얻는 것은 세상일지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중."

타인의 사유 출판사에서 나온 <귀족 시대>는 중2병 가득한 일본 판타지 만화와는 다른 현실 속 중세 귀족들의 참된 모습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국내 대표적인 서양사 전문가로서 <벌거벗은 세계사>에도 나왔다고.


흔히 귀족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베르사유 장미>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고 한손에는 부채를 들고 철 없는 왕비의 주변을 매돌면서 어딘가 있을 돈 많은 도련님을 기다리는 허영심 가득하고 골은 빈 상류층 부인들이 생각난다. 그러다가 성난 민중에게 붙들려서 기요틴행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어보니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듯 하다. 어차피 졸부라는 게 어느 시대이건 다를 바 있겠냐만. 이 책은 유럽 사회에서 지배계층으로서 귀족들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그들이 자신들을 우리같은 평범한 소시민들과 구분짓고 자기들만의 신분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들여다 본다.


나는 한 여성이 옆에 있던 부인에게 괴상한 질문을 하는 것을 듣고는 박장대소했다. '그녀는 푸른 피를 갖고 있나요?' 이는 그녀가 진짜 귀족인지 묻는 질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귀족에게는 푸른 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푸른 피의 신회는 꽤 오랜 기간 그리고 많은 곳에서 보편화되었다. - p.16

흔히 결투를 1:1대결이라고 상상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결투에는 나름의 규범이 존재해서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무력으로 이를 보상할 것을 요구하면서 결투가 성사된다. 이 때 결투 당사자는 증인을 대동하는데, 증인들은 정해진 규범이 준수되는지를 감시하거나 사상자를 수습하려고 온 게 아니라 같이 싸우러 왔다. 17세기의 결투는 말이 결투이지 작은 전투를 방불케 했다. - p.30

결혼 적령기에 이른 귀족 자제들에게 사교 시즌은 사교계에 데뷔하는 무대였다.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귀족의 딸들, 즉 데비당트는 왕실 접견 행사나 왕비의 무도회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일주일에 두 개 이상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무도회는 춤을 추는 곳이라기보다 결혼 시장에 가까웠다. 상류 사회는 일종의 족내혼을 기대했기에 엄선된 초대 명단이 작성되었다. - p.59

귀족의 그랜드 투어에 지나친 환상을 품을 필요는 없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그랜드 투어가 늘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18~19세기 프랑스를 여행한 영국인들은 프랑스 숙소의 위상 상태에 기겁했다. 벽에는 새까만 더께가 앉아 있고 부엌에서는 개가 동물의 내장을 뜯어 먹고 있었다. 여관방에서 하룻밤에 이 48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부드러운 빵을 기대하는 건 사치일 경우가 많았다. 툴루즈 지방에서는 일주일치 빵을 한번에 구웠고 알프스 산지에서는 1년치, 심지어 2~3년치를 한번에 굽고 훈제하거나 햇볕에 말렸다. 그것을 먹으려면 망치로 깨서 5번은 삶아야 했다. - p.77

귀족 가문의 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대동소이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바느질과 자수를 배웠다. 여건이 된다면 수녀원에 보내져 기본 교육을 받았지만, 이 모든 교육의 목적은 훌륭한 신붓감이 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딸의 혼인에는 한 가지 추가적인 아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결혼 지참금이다. 지참금의 형태는 사정에 따라 규모도 달랐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귀족 집안에서 딸의 존재는 큰 부담이었다. 지참금 없이는 결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p.114

귀족의 식탁은 평민의 식탁과 재료부터 달랐다. 중세에는 하늘과의 거리에 따라 식재료 위계가 결정되었다. 땅에서 자라는 채소는 등급이 낮은 식재료로 여겨져 가난한 농민의 몫이 되었다. 반대로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과일과 하늘을 나는 새는 귀족의 몫이었다. 농민의 주식은 곡물로 만든 빵이나 죽이었지만 귀족은 흰 빵, 사냥으로 잡은 다양한 고기, 생선, 과일, 치즈를 주식으로 삼았다. 특히 향신료는 매우 중요한 식재료였다. 젤리나 파이, 튀김과 스튜 요리와 더불어 고기 요리는 단연 귀족 식단의 메인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고기가 활용되었다. - p.142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다. 스스로를 왕후이니 귀족이니 하면서 남들과 자신을 차별화함으로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남들로부터 우월한 존재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중2병 걸린 미친 놈 취급을 받을 테니 말이다. 귀족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누릴 수 없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좋은 옷과 값비싼 음식을 먹었으며 비천한 육체 노동 대신 군인이나 법률가와 같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했다. 문제는 돈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수입에 맞추어 생활 수준을 낮춘다면 귀족이기를 포기하는 셈이다. 아무리 지체 높아도 돈 없으면 귀족들 사이에서 귀족답게 살기도 쉽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이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는 조선 후기 이름만 번드레한 가난한 몰락 양반이 양반 노릇을 하는 허식적인 모습을 조롱한다. 21세기인 지금도 눈에 보이는 신분제는 없지만 현대판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극소수 상류층의 리그에 입성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게 인간의 끝없는 허영심이며 시대가 달라진다고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귀족 사회의 허영심을 통해 보는 유럽 역사의 한 단면을 다룬 대중 교양 서적이다. 3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다보니 깊이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지만 꽤 재미있다. 유튜브를 책으로 옮긴 느낌이랄까. 시간날 때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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