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영국 - 노동자 계층 출신 잉글랜드인이 이야기하는 영국 지구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피터 빈트.홍성광 지음 / 틈새책방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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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도쿄에 갔던 것이 기억난다. 그 전에도 일본은 몇 번 갔지만 도쿄는 처음이었다. 워낙 공사가 다망한데다 귀차니즘 덕분에 여행이 취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눈에 비친 도쿄의 인상은 아시아의 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6년 전 방문했던 베이징이 끔찍할만큼 복잡한 인산인해에 시끌벅적하고 돈과 권력이 넘쳐나지만 밑바닥 시절의 티를 못 벗은 졸부의 도시라면 도쿄는 마치 30년 전 자신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추억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춘 듯한 늙은 여배우랄까. 그렇다고 유럽 도시들처럼 과거로 먹고 산다기에는 또 잿빛의 삭막한 느낌이다. 달리 말해서 도쿄는 현대적이지만 그 안에서 변화와 활력은 느껴지지 않는 도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같아라던 버블 시대의 도쿄. IMF가 터졌을 때 조중동에서 한다는 소리가 서민들의 과소비 타령을 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과소비는 개뿔, 진짜로 돈지랄한 쪽은 바로 저 동네였다는. 소위 '사토리 세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신화시대 얘기일 듯.


지하철 표를 끊으려면 아직도 동전을 써야 하고 노선은 복잡한데다 국철과 사철이 뒤섞인 덕분에 환승이 너무 헤깔렸던 것이나, 로봇 서빙이나 키오스크는 고사하고 카드 결재도 안되어 아직도 현금을 써야 하는 식당들이 태반이더라는 2000년대의 우리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아날로그 지향적인 모습은 둘째치고, 도쿄를 다니는 내내 우리의 서울역이나 광화문처럼 확성기를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먹사님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는 어르신들도, 살벌한 정치 구호가 적힌 현수막도 없었다. 아키하바라에서 메이드 코스프레 옷을 입고 알 수 없는 호객을 하는 아가씨들은 많이 본 듯. 사람들은 바쁘게 다니지만 영화 <매트릭스> 속 사람들처럼 루프를 도는 것마냥 반복되는 일상을 기계적으로 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요즘 옆동네 섬나라에서 유행한다는 '이세계행 트럭'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레파토리가 인기를 끄는 것은 그만큼 삶이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얘기. 한때 미국의 아성조차 위협하던 일본이 어쩌다가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나라가 되었는지. 극동의 나우루가 된 듯한.


솔직히 몇년 산 것도 아니고 고작 며칠 보고 온 주제에 다 아는 양 젠체하는 것도 우습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기서 그기일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도쿄의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은 아닐까. 오십줄인 내가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을 넘어서 아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급하게 달려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워낙 빨리 바뀌다보니 때로는 따라가는 것조차 힘겹다. 이게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일지도. 이만하면 잠시 한숨 돌린다고 큰 일 날리도 없을 것인데 여전히 부족하다며 더 달려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전 국민이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무한 질주의 경쟁이다. 흔히 말하는 '사교육 망국병'이라는 것도 그저 일부 학부모들의 비뚤어진 자식 사랑 탓이 아니라 남들이 죄다 달리는데 내 자식만 달리지 않으면 도태되어 설 자리조차 없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보니 잠깐을 참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불의를 보면 내 일인양 분노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내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드는 것도 우리의 또 다른 단면이다. 외국인들이 보면 세상에서 이토록 변화무쌍한 사람들이 다 있나 할지 모르겠다.

평소 <톡파원>이나 <걸어서 세계속으로>같은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여행 덕후라면 꼭 읽어볼만한 책이 나왔더라. 틈새책방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지극히 사적인 영국>이다. 시리즈인 모양인데 영국 말고도 러시아, 일본, 프랑스, 심지어 우리같은 일반인으로서는 평생 인연 없을 동네인 네팔도 있더라는. 저자는 피터 빈트. 생긴 걸 봐서는 백인 아닌 거 같은데(뭔가 피부 하얀 인도인같달지.) 아버지는 영국인, 어머니는 한국인이라고. 직업군인이었던 부친이 한국에 유엔군으로 복무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주한 영국군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주둔하다가 1993년에 모두 철수했다. 영화 <배트맨>에서 집사 양반(마이클 케인)이 주한 영국군 출신. 무려 6.25 때 중공군과 싸웠던 전쟁영웅이기도.


어린 시절 영국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영어 강사를 한다는데 <벌거벗은 세계사>를 비롯하여 여러 방송에도 출연했다고 한다. 언변과 쇼맨십이 있는 모양. 덕분에 "세계사에서 뭔 일이 있으면 그 뒤에는 대충 영국이 있더라"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담서.


<지극히 사적>이라는 제목따나 이 책은 저자가 지극히 사적으로 얘기하는 영국 이야기이다. 평범한 소시민A인 피터 빈트가 영국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했던 영국 역사, 문화, 정치, 가치관, 정서, 일상, 부랄 친구넘들 농담 따먹기까지 온갖 시시콜콜한 것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 사는 얘기. 그래서 재미있다.

아마 영국에서만 살았다면 '영국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해보지 않았을 것같다. 나는 영국인보다는 잉글랜드인으로 살아왔고 '영국인'이 무엇인지 굳이 따져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영국이라는 나라를 소개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마다 영국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가 조금씩 다르고 궁금해하는 지점도 제각각이다. - p.19

영국은 교육에서 전쟁을 비중있게 다루는 반면, 식민지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최근 들어서야 식민지 역사를 다루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생기고 있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세대의 영국인들은 식민지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거의 알지 못한다. 이런 인식 때문에 외국인들은 불편하고 거부담이 들 것이다. - p.47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층이라고 해서 자신의 계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노동자 계층인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겉으로라도 그렇다. 내 힘과 능력으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딱히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상류층의 품격이나 매너는 관심 밖이다. 노동자 계층은 자신들의 매너를 지키면서 영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p.108

어쩌면 영국인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항상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다. 자랑스러운 곳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면 안심하고 만족한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그것을 확인한다. 영연방도 그렇고 축구팀도 그렇다. 나름 자랑할 역사이고 남들이 인정해준다. 그래서 더욱 전통과 역사를 지키는 것같다. - p.129

영국에서는 축구를 보면서도 남자답게 봐야 한다. 주변에 애들이 있든 말든 욕을 하고 상스러운 응원가를 부르고 상대 팀을 깔아뭉개야 한다. 같이 욕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다가 밖에 나가면 표지판을 부수거나 물건을 집에 가져오기도 한다. - p.150

영국 남자들은 많은 걸 할 줄 알아야 한다. 마당 위에 차고를 만들거나 마루를 깔거나 페인트 칠은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 하수구를 손보고 전기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걸 할 줄 알아야 진정한 '가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못해서 다른 사람을 부르면 또 놀림을 받는다. 내 친구 중 한명은 이런 걸 너무 잘해서 다른 집 아내들이 탐을 낼 정도였다. - p.185

한국에 와서 의아했던 것 중 하나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사람들이 우산을 챙기고 약속이나 행사를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그 정도 비는 우산 없이 그냥 다닌다. 날씨에 대해 가끔 불평은 해도 일상을 바꿀 정도는 아니다. 날씨는 그냥 날씨이다. 비 때문에 약속이 취소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 p.248

한국의 아파트는 창문도 이중 새시로 되어 있어서 손을 댈 수 없다. 너무 독특하게 바꾸면 나중에 집값이 떨어질 수도 있고 돈도 많이 드니 그냥 살아야 한다. 다락방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영국의 주택들은 보통 2층이 있고 지붕밑에는 다락방을 만들어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똑같이 생긴 집에서 살아야 한다. - p.289

영국에서는 소재에 제한이 없다. 정치인들은 물론 왕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장애인들도 유머의 소재가 된다. 모든 것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다. 1984년부터 1996년까지 방영되었던 <닮은 꼴>이라는 정치 풍자 인형극이 좋은 예다. 왕실이나 정치인을 본뜬 우스꽝스러운 인형으로 조롱과 풍자, 패러디를 했는데 선이 없는 영국식 유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 p.343

영국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은 즐겁지만 그 시간을 보내는 건 힘든 일이 될 때가 있다. 친한 사이일수록 서로 놀리는 게 만나서 하는 일이다. 서로 칭찬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다. 친구끼리는 서로 비하하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사르카즘이 추가된다. 비꼬고 빈정거리고 풍자하는 것이다. 절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는 데 웃어서도 안 된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 나를 비하하면 스스로를 더 비하해 준다. - p.347

한국 문화에 빠진 외국인들에 한국은 판타지 같은 나라이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K-컬처 팬들에게 한국은 완벽한 나라처럼 인식되는 것 같다. 일단 K-컬처는 포장이 완벽하다. 예쁘고 멋있는 모습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말도 통하지 않기에 한국은 이국적이면서 환상적인 나라로 비쳐진다. - p.384

바로 옆동네 섬나라 일본을 가리켜 '가깝고도 먼 나라'라면서 본능적으로 바깥세상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을 느끼는 우리로서는 지구 반대편 나라인 영국은 그야말로 멀고도 먼 이세계이다. 기껏해야 두 세기 전에 중국을 조졌던 아편전쟁이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또는 <킹스맨> 정도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정작 영국인인 저자는 <킹스맨>을 미국넘들이 멋대로 가공한 창작물일 뿐, 진짜 영국이 아니라고 단언하지만 말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영국과 접점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구한말에 영국군이 러시아를 견제한다고 거문도를 잠시 점령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영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왔던 것 정도일까. 서로 다른 것이야 당연하지만 두 나라를 오가면서 살아본 저자의 얘기를 읽어보니 달라도 정말 많이 다른 것같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점에서는 우리가 영국보다 훨씬 편리하겠지만 그 대신 삶의 여유에서는 영국이 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서비스료가 워낙 비싼 탓에 차 수리부터 집안에서 어지간한 일은 스스로 고치는 것이 영국 가장의 기본이라고 하니 손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영국 가서 살 생각부터 접어야 할 듯하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요즘이야 워낙 풍요롭다보니 어릴 때부터 해외 여행은 기본이요, 어학연수, 유학 등으로 외국 물 먹을 기회가 많아지면서 환상이 별로 없겠지만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탈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가 있었다. 워낙 대한민국이 '헬'이다보니 적어도 바깥 세상은 여기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막연한 현실 도피랄까. 요즘 일본 젊은 세대들이 '이세계행 트럭'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봐야 사람 사는 동네가 죄다 그기서 그기이고 좋은 점이 있으면 불편함도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닐 것이다. 요근래 와서는 K-컬처 덕분에 도리어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그런 동경의 대상이라고 하니 이 또한 격세지감이다.

전 세계에 '달고나'라는 K-푸드를 알리는데 일조한 <오징어 게임> 세계 각지에서 달고나 만든다고 국자 태워먹고 마눌님한테 혼난 아재들 많을 듯.



읽다보니 밀덕으로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더라. 영국 해군과 공군은 '왕립(Royal)'인데 육군은 그냥 육군(British Army)이라고. 육군의 뿌리가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찰스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의회파 군대이기 때문. 자기네 손으로 왕 목아지를 잘랐으니 왕의 이름을 들먹일수야. 그럼에도 세계 최초의 기갑연대인 왕립 기갑연대라던가, 왕립 리버풀 연대처럼 '왕립'이 붙었으면 군주가 직접 편성에 관여하거나 충성을 맹세한 부대라는 것. 여태껏 전쟁사를 읽으면서 그냥 그런 갑다 했는데 이런 특수한 역사가 있었던 모양.

예전에 다산초당에서 나온 <30개 도시로 읽는 영국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주요 도시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영국이라는 나라를 알아가는 내용이라면, 이 책은 피터 빈트라는 사람을 통해서 알아가는 셈이다. 남 못지 않은 영국 사랑과 더불어 절반은 한국인이면서 한국에서도 오래 산 사람답게 왕실을 바라보는 영국인들의 시각이라던가 영국 음식도 사실은 맛있다는 둥 영국을 그저 인터넷 잡지식으로만 배우는 우리의 편견을 정면에서 깨뜨리고 영국에 품는 다양한 궁금증에도 대답한다. 물론 그가 영국인 전체를 대표할 수야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도 영국임에는 틀림없다. 오히려 같은 소시민으로서 훨씬 정답게 와닿는 느낌이다. 그러고보면 <지극히 사적인 한국>도 나올만하다. 물론 우리가 아니라 한국에 관심있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말이다. K-컬처로는 알 수 없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줄 기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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