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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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 네트가 사랑했던 꽃은 장미가 아니라 감자꽃이었다?"

우리 전통 음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치이다. 온갖 양념과 함께 고추장으로 시뻘겋게 갓 담근 햇김치 하나만 있어도 다른 반찬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다 아는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붉은 김치가 우리 식단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고추는 토종 작물이 아니라 외래종이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된 것은 학자들마다 약간의 이견은 있지만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을 통해 전달되었다. 하지만 고추의 매운 맛에 더 익숙해진 쪽은 일본인보다 우리가 아닐까 싶다. 일식에서 고추냉이를 제외하고 딱히 고추가 들어가는 음식을 찾기 어려운 반면,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 한식은 상상할 수 없으니 말이다.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이다. 그곳에서 처음 고추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우리도 잘 아는 스페인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인도의 향신료를 찾겠다고 떠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발견한 것은 고추였고 그는 엉뚱하게도 고추를 후추라고 우기면서 '붉은 후추(red pepper)'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의 고추가 돌고 돌아서 한 세기만에 지구 정반대편의 존재감 없는 나라 조선에까지 전해진 셈이다. 그가 신대륙에 가지 않았거나 고추에 관심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먹음직스런 붉은 김치도 없지 않았을까. "브라질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텍사스에서는 허리케인이 일어난다."라는 이른바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는데 콜럼버스와 김치의 관계 또한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나비효과의 사례라고 하겠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적 특이점 중 하나이자 근세 시대의 시작이었다. 또한 그 전까지 인류 문명에서 변방 취급을 받았던 유럽이 처음으로 아시아를 능가하여 나중에는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해서 어째서 유럽인이 아니라 비 유럽인들, 아시아인들이나 다른 대륙 사람들은 대항해에 나서지 않았던가. 왜 하필이면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던가. 이들이 거친 파도를 뚫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머나먼 바다로 나아가게 된 가장 큰 동기는 향신료(spice)였다. 후추, 육두구, 정향, 계피 등 유럽인들은 이것을 손에 넣으려고 목숨을 걸었다. 후추의 가격은 한 때 금과 맞먹을 정도였다.

                                

수많은 바다 사나이들이 세계의 보물 "원피스" 아니 "육두구"를 찾아서 떠나는 대항해 시대.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조미료 따위에 그 정도의 가치를 매긴다는 말인가 싶지만 먹거리가 다른 탓도 있다. 아시아인들은 쌀을 주식으로 한다. 쌀은 탄수화물 외에도 단백질과 지방이 함유되어 있어 별다른 부식 없이도 그럭저럭 영양분을 확보할 수 있다. 불교에서 육식을 금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반면, 밀은 아미노산이 부족하기에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고기는 상하기 쉽상이고 그 전까지 유럽인들은 기껏해야 거친 소금으로 짠 맛나는 간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무슨 맛이 있겠는가. 아시아에서 향신료가 들어오자 한번 여기에 중독된 유럽인들은 전쟁도 불사할 정도였다. 향신료가 듬뿍 섞인 고기를 먹는 것이 곧 지위와 권력을 상징했다. 만약 아시아인들이 밀을 먹고 유럽인들이 쌀을 먹었다면 대항해 시대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향신료의 천국인 동남아에서 더 많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 훗날 식민지 건설의 첨병이 된다. 향신료 경쟁은 그야말로 살벌했고 여기에 끼지 못한 사람들은 보다 저렴하면서 대체 가능한 다른 향신료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 와중에 발견한 새로운 먹거리가 옥수수와 감자였다. 밀과 쌀에 비해서 훨씬 강인한 생명력과 수확 능력을 가진 두 먹거리는 기근 해결에 크게 일조했다. 하지만 설탕의 재료인 사탕수수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재앙이 다름없는 노예 무역 시대를 열었다. 사탕수수 재배는 다른 작물과 달리 가축의 힘을 빌릴 수 없고 사람 손이 엄청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럽인들의 향신료 경쟁이 만든 세상인 셈이다.

사람과 나무사이 출판사의 신작 도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은 현대 인류 사회를 이룩하는데 일조했던 13가지 식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일본의 권위 있는 식물학자이자 시즈오카 대학 교수이며 자신의 전공인 식물을 통해서 본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쓰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이 양반의 저서 중 하나인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글항아리>도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프랑스 혁명을 그린 만화이다. 이 만화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궁전에 핀 고고한 장미 한 송이에 비유했다. 하지만 왕비가 실제로 사랑한 꽃은 만화 제목에 있는 장미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사랑한 꽃은 감자꽃이었다. 고귀한 왕비 신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장비나 백합같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감자꽃을 사랑했을까?" - p.26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식물 1위는 옥수수이다. 그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곡물이 밀이고 3위가 벼이다. 그 다음 4위는 감자, 5위는 대두이다. 토마토는 이 세계 5대 주요 작물 바로 뒤인 여섯번째로 생산량이 많은 작물이다." - p.68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즐긴 귀족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귀족이나 상류층에서 후추의 인기가 치솟은 것은 실용적인 목적보다 자신의 높은 지위와 부를 과시하기 위한 상정성이 컸다. 이것은 설탕이 귀하던 시절 사람들이 설탕을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 p.90

"고추는 유럽인들에게는 외면당했지만 장기간 항해해야 하는 뱃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했다. 당시 뱃사람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괴혈병이었다. 비타민C를 다량 함유한 고추는 괴혈병 예방과 치료에 특효가 있었다. 뱃사람들은 항해를 떠날 때 소중한 식량이자 의약품으로 고추를 챙겼다." - p.105

"논 시스템과 벼라는 작물은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서 16세기 섬나라 일본은 같은 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해서 6배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 밀을 재배할 수 있었지만 아시아에서는 1년 동안 쌀과 밀을 모두 수확할 수 있었다." - p.240

이 책에서는 도합 13가지의 식물이 나온다. 저자가 붙인 별명도 거창하다.

1. 초강대국 미국을 세운 악마의 식물 감자

2. 인류의 식탁을 바꾼 붉은 열매 토마토

3. 다항해시대를 연 검은 욕망 후추

4. 콜럼버스의 고뇌와 아시아의 열광 고추

5. 거대한 피라미드를 떠받힌 약효 양파

6. 세계사를 바꾼 두 전쟁의 촉매 차

7. 인류의 재앙 노예무역을 불러온 사탕수수

8. 산업혁명을 일으킨 목화

9. 한 톨의 씨앗이 문명을 탄생시킨 밀

10. 고대 국가의 탄생 기반이 된 벼

11.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한 콩

12.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작물 옥수수

13. 인류 최초 거품 경제를 불러온 욕망의 알뿌리 튤립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친숙하면서도 이들이 인류 역사에 남긴 발자취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위의 13가지 식물 중에서 하나라도 없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누가 알겠는가. 대항해 시대를 연 후추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가령 우리가 주식으로 쓰는 쌀이 없었다면 아시아 문명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감자와 옥수수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인류가 70억에 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산업혁명은 영국 면직물 산업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면직물의 원료인 목화가 없었다면 산업혁명도 없었으리라. 하물며 고추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백김치, 물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별로다.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트라도 뽕뽕 날려주고 싶다.

고추는 일본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는데 왜 정작 일본인들은 고추를 즐기지 않을까. 반대로 우리는 고추 없이는 살 수 없을까. 고추가루를 넣어서 부글부글 끓인 매운탕은 상상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고추장을 바른 불고기를 밥과 함께 쌈에 싸서 입에 넣고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이보다 맛있는 별미가 없다. 저자는 종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즐기지 않는 반면, 고려 시대 이후 우리는 불교의 영향이 약화되면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육식에는 향신료가 빠질 수 없다.

이 책에서 나오는 13가지 식물의 역사 이야기는 다채로우면서 흥미진진하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식물들에게 알고 보니 이런 역사가 담겨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다. 또한 누구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직 여름 휴가를 가지 않은 분, 갈 곳이 마땅찮은 '동남아(동네에 남아 있는 아저씨)'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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