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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굶주림 - 우크라이나 대기근, 기획된 종말
앤 애플바움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9월
평점 :
코로나의 여파 속에서 개막한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면서 막을 내린 지 불과 한 달여 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4시, 20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푸틴은 자신의 행위가 침략이 아니라 돈바스의 친러시아 주민들을 우크라이나의 위협에서 보호하기 위한 ‘특별군사작전’에 불과하다고 선언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개전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의 피해를 초래했을뿐더러, 돈바스 주변에서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내는 것을 넘어서 수도인 키이우를 노렸다. 그의 진짜 속셈은 이참에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자신에게 충실히 복종하는 괴뢰정권을 세워서 러시아의 속국으로 삼는 데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사흘이면 백기들고 항복할 거라고 여겼던 푸틴의 안이한 생각과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은 끝까지 버텨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망명을 거부하고 수도에 남아서 항전을 지휘한 덕분이었다. 특히 포화가 쏟아지는 수도 한복판에서 그가 SNS에 직접 올린 “나는 키이우에 남을 것입니다.”라는 영상은 전 세계에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때까지 코미디언 출신의 아마추어 지도자로만 여겼던 젤렌스키를 온 세상이 다시 보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사기가 올라간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을 막아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2014년 크름 반도를 무기력하게 빼앗겼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병참선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전쟁의 첫 번째 전환점이자 푸틴의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강 건너 불구경하던 미국과 서방은 그제야 우크라이나가 이길 수도 있다는 것에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개전 이틀 째인 2월 25일 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젤렌스키의 SNS 영상. 제 가족과 재산만 챙겨 해외로 달아난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나 아프간의 아슈라프 가니같은 쓰레기들과 달리, 그는 망명을 권유하는 미국을 향해 "내게 필요한 것은 피신차량이 아니라 무기입니다."라고 단칼에 거절했다. 이전의 부패하고 무능한 우크라이나 지도자라면 보여줄 수 없는 결단력이었다.
유엔이 러시아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전 세계가 공분하는 가운데, 여기에 앞장서야 할 서방의 일부 지식인들은 도리어 푸틴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두둔하고 나섰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지만(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따지고 보면 우크라이나도 잘한 것은 없다는 둥, 전쟁 책임은 푸틴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돈바스의 친러 분리주의자들을 탄압한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포위할 요량으로 우크라이나를 무책임하게 선동했던 미국, 공공연히 나토 가입을 떠들어 푸틴을 자극했던 젤렌스키의 분별없는 행태가 더 크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은 물론이고 러시아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어떤 제제조차 실효성이 없다는 핑계로 발목잡기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와 그리 좋은 인연이 없는 국내에서도 함부로 푸틴에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군 장성 출신의 어느 정치인은 "우크라이나는 6.25 때 우리의 적이었는데 왜 도와야 하느냐"고 질타하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말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 정치하는 양반들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무지하며 여전히 구한말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냉전 시절 우크라이나가 구소련의 일부였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 뿐, 우크라이나가 어쩌다가 소련에 편입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입장 바꾸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중국의 일방적인 선전만 듣고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카더라."라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지난 4번의 중동전쟁이나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두 나라가 지역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이 극심한 경제난과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을 외부로 돌릴 속셈에 의도적으로 영국을 도발했다가 여지없이 박살났던 포틀랜드 전쟁과도 다르고 인도-파키스탄의 영토 분쟁과도 다르다.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총을 쏘아서가 아니라 푸틴이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믿고 약자인 우크라이나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침략전쟁이다. 그런 점에서 1937년 일본의 군부 모험주의자들이 저지른 불장난에서 비롯된 중일전쟁과 1939년 스탈린의 핀란드 침공, 1940년 무솔리니의 충동적인 그리스 침공을 연상케 한다.
푸틴은 그동안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부득이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사실상 무장 해제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토가 러시아에 무슨 위협이 되었으며 유럽이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쏙 빼놓은 억지일 뿐이다. 그보다도 미국과 서방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쪽에 따질 일이지 만만한 우크라이나를 때리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평화를 깨뜨린 쪽은 서방이나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푸틴이지만 자신의 의심은 언제나 정당하며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합리적 의심을 들도록 만든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는 것이 그 양반 논리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푸틴은 우크라이나라는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왔다는 점이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였으며 1991년에 독립을 허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러시아의 품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전에 이혼한 옛 마누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마음을 돌리도록 애쓰기보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폭력을 서슴치 않는 러시아 남자 특유의 썩어빠진 마초 근성을 보여주는 게 푸틴이랄까. 정작 자신은 마누라를 몇번이나 갈아치웠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는 서방의 압제에서 해방할 동포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우크라이나의 자원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의 식민지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때부터 이어져 온 러시아인들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결같은 태도이다.

러시아군 철수 후 부차에서 발견된 시신 더미들. 부차만이 아니라 러시아군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 전쟁 범죄의 현장이었다. 푸틴으로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 의지를 철저히 짓밟고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멀고도 먼 나라이지만 우크라이나가 당하는 모습은 결단코 남의 집 불구경할 일이 아니다. 우리 이웃에는 푸틴 이상으로 탐욕스러운 독재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다. 실제로 시진핑은 예전에 트럼프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라고 발언하여 뒤늦게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트럼프 이후 제 잇속만 챙기는 행태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중국이 그 빈틈을 노리고 있다. 오늘의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우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망국의 황제가 된 하일레 셀라시에가 국제연맹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이며 여러분의 내일이 될 것입니다.(It is us today. It will be you tomorrow.)"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쏠리면서 시중에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이 나왔지만, 글항아리 출판사의 신작도서인 <붉은 굶주림>은 그 중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눈물'을 다룬 책이다. 어째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그토록 러시아에 이를 박박 갈면서 푸틴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하는지 이유가 담겨 있다랄까. 저자인 앤 애플바움은 미국 언론인이자 여류 역사학자로서 대표적인 반러 반푸틴 학자이기도. 특히 2000년 푸틴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많은 서방 지식인들은 그가 비록 독재 성향은 있지만 친서방에 실용적이며 적어도 말은 통하는 상대일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착각인지 지적하여 논란을 일으켰다고.

이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저자인 앤 애플바움 교수.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에서는 기피인물이며 트럼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홀로도모르(Holodomor)'란 우크라이나어로 대기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책은 스탈린 시절인 1932년~33년 지구에서 가장 풍요로운 옥토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다루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500만명이 아사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600만명이라고 하니 여기에 비견될만한 참사였다. 기근의 원인은 경신대기근처럼 소빙하기나 천재지변이 닥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엉터리 농업 정책이 초래한 결과였다. 이들은 니콜라이 2세의 가장 무능한 관료들조차 감히 하지 않을 국가적 자살이나 다름없는 정책을 인민들에게 강요했다. 심지어 농업 총책임자였던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는 식물들도 마르크스 이념에 따라 계급투쟁을 한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비료와 살충제를 쓰지 못하게 하여 농사를 완전히 망치는 데 일조했다.
기근은 소련 전역에서 벌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우크라이나였다. 남편이 아내를 잡아먹고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카니발리즘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소위 강성대국의 꿈에 눈이 먼 스탈린은 외화 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식량까지 빼앗아 외국에 수출했다. 국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한 셈이었다. 그에게 인민은 구제가 아니라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경고를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인양 취급하면서 눈과 귀를 막고 고집스레 현실을 부정했던 스탈린은 체제 자체가 무너질 판국에 몰린 뒤에야 자신이 한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반성과 개혁이 아니라 한층 강력한 통제와 억압이었다. 나는 옳았지만 남들이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은 우주의 섭리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스탈린의 편협한 사고방식이었다. 게다가 불만 가득한 인민들의 분노를 억누르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나머지 더욱 편집광적인 공포와 광기에 사로잡혔다. 결과는 스탈린 치세 내내 광풍으로 불어닥칠 ‘대숙청(Great Purge)’이었다.

하르키우의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사자의 시신들. 피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할 요량으로 일부러 대기근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반면, 러시아 학자들은 소련 전체에서 광범위한 기근이 초래되었다는 점에서 스탈린이 의도했다기보다 잘못된 경제 정책의 결과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서 최악의 대기근이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막대한 식량을 강제 공출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가 제정 러시아의 일부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언젠가 퀴리 부인 전기에서 나라 잃은 민족으로 말과 글을 쓸 수 없는 설움을 겪었고 옛 조국인 폴란드를 기리기 위해 자신이 발견한 원소에 '폴로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일화를 읽었는데 그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갖은 구박에 시달렸던 것이 우크라이나. 원래 인간이란 내가 남에게 저지른 건 까먹어도 남한테 당한 건 두고두고 기억하는 법이라.
그런 우크라이나에게 가장 큰 실수는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었을 때 독립 국가를 세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잠시나마 그들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잠시 세웠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독일과 폴란드, 소련의 침략, 무엇보다도 독립의 의지가 아직은 부족했기에 4년 만에 멸망했다. 레닌은 제정 러시아의 유산, 특히 '러시아의 빵바구니'였던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나라는 둘로 쪼개져서 서부는 폴란드에, 동부는 소련에 흡수되었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민족들 역시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거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레닌의 약속만 믿고 독립을 포기했다. 이들이 볼셰비키의 거짓말에 속았음을 깨닫고 땅을 치고 후회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련 체제의 일원이 되는 것은 독립을 위해서 무수한 피를 흘리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악몽이었다.
짧은 존속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정부는 얼마나 외교적 성공(나중에는 대부분 잊힌)을 거두었다. 1918년 1월 20일 독립 선언을 한 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스물여덟살 난 외교장관 올렉산드르 슐힌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튀르키예, 심지어 소련을 포함한 모든 주요 유럽 국가들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얻어냈다. 12월에는 미국이 외교관을 보내 키이우에 영사관을 열었다. - p.58 |
레닌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보낸 전문 내용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기도 힘들었다. 그는 1918년 1월에 이렇게 썼다. "제발 부탁이오. 모든 힘과 혁명적 수단을 써서 곡문을 보내시오. 곡문을, 곡물을! 그러지 않으면 페트로그라드는 굶어 죽을 것이오." 3월 초 우크라이나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에 빠르게 빼앗기자 모스크바는 분통을 터뜨렸다. 성난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과 고집스러운 농민 지지자들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달아난 우크라이나 볼세비키도 욕했다. - p.74 |
1919년 레닌에게 곡물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집단 농업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 공화국의 문제가 의제로 떠오를 때마다 그는 곡물 문제부터 꺼냈다. 우크라이나만 언급되면 레닌은 매번 얼마나 많은 곡물이 그곳에 있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나 가져올 수 있느냐, 또는 이미 가져온 게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 p.91 |
10년 뒤에도 그랬듯, 농민들은 개, 쥐, 벌레를 먹기 시작했다. 잎사귀와 풀을 끓여 먹었다. 식인 행위도 간혹 일어났다. 가까스로 사라토프에서 리가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던 일단의 피난민들은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낡은 쓰레기차들이 매일 돌아다니며 시체를 모았다. 사람들이 보통 쓰레기를 뒤지다가 쓰러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페스트에 걸린 시체들을 숱하게 봤다. 이런 사실은 소련 언론에 전혀 나오지 않았다. 관리들은 전염병이 돌고 있음을 대중에 알리지 않았다." - p.143 |
한때 러시아 전역을 전란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던 적백내전은 1920년에 오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다. 핀란드와 발트 3국, 폴란드 동부를 제외하고 제정 러시아 영토 대부분은 소련으로 계승되었다. 우크라이나도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내전의 끝은 안정의 시작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고난이 닥쳤다. 새로운 적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레닌의 '신경제 정책'이 자초한 결과였다. 차르 체제를 가리켜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이상주의를 앞세운 무모한 실험으로 소련 인민의 번영은 커녕 경제적 파국을 초래하고 나라 전체를 아사에 내몰았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이제부터였다. 레닌 사후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가장 광기어린 절대 권력자였다. 그가 진시황이나 네로, 이반 대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한 광기를 넘어서 자신만의 비뚤어진 신념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인민의 일거수 일투족은 물론, 필요하다면 우주의 진리까지 내 방식으로 바꾸겠다고 굳게 결심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손에는 조금도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잘 되면 내 덕분이요, 안되면 남탓으로 돌려서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는 비범한 재주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공포와 폭력으로 인간의 저항 의지를 어떻게 해야 굴복시킬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불만을 떠넘길 희생양을 교묘하게 만들어내어 죽는 순간까지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권력을 유지했다. 그 방법은 약자 중 한쪽을 '쿨라크(반동)'라고 규정하고 인민의 적으로 만들어 서로 싸움 붙이는 것이었다. 30년이나 이어진 스탈린 체제는 소련 인민 전체에게 악몽이었지만 그 중 가장 큰 피해자는 우크라이나였다. 특히 '대기근' 시절 이 비옥한 땅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수많은 증언과 폭로는 충격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1927년이 되자 체제는 다시 불안정해졌다. 그해 국가는 540만 톤의 곡물을 확보했다. 그러나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관료들에게 엄격하게 규정된 양의 빵을 나눠주던 식량 배급 기관은 곡물 770만 톤을 기대하고 있었다. 전 연방 조사에서 OGPU는 소련 전역의 식량 배급 줄에서 '폭도 진압과 고성을 지르는 싸움'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 p.187 |
코펠레프와 나디아,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람들은 불만에 찬 시간을 보내왔다. 볼셰비키는 인민에게 부와 행복, 토지 소유권, 권력을 선물하겠다느 대담한 약속을 했다. 그러나 혁명과 내전은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혁명 후 10년이 지나자 많은 사람이 실망했다. 그들에게는 볼셰비키 승리가 왜 공허한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했다. 공산당은 그들에게 희생양을 제공해 왔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부추겼다. (중략) 어느 날 한 농부가 그에게 쿨라크를 너무 잔인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자 다비도프는 격렬하게 반박했다. "당신은 그들이 불쌍하군요. 동정심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우릴 불쌍히 여긴 적이 있습니까? 적들이 우리 아이들의 눈물을 보고 운 적이 있나요? 부모가 죽은 뒤 남겨진 고아를 보고 운 적이 있단 말입니까?" - p.245 |
때로는 몰수가 신속하게 폭력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체르니히우 주에서는 지역 단체들이 한겨울에 한 농민 가족을 집에서 내쫓았다. 길에서 온 가족의 옷을 벗겼고 난방도 되지 않는 건물로 끌고 가서 그곳을 새집으로 정해줬다. 베레즈네후바테 현에서는 열두 살 소녀가 셔츠 한벌만 빼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옷이 벗겨진 채 어머니와 함께 거리로 내쫓긴 아기도 있었다. 한 활동가 단체는 10대 소녀의 속옷을 빼앗은 다음 알몸으로 길거리에 방치하기도 했다. - p.263 |
비밀경찰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의 시위가 집단화를 늦췄지만 국가는 대량 체포, 대량 추방, 대량 탄압으로 반격했다. 공산당은 일단 기다린 후 밀어붙였다. 스탈린이 '도취할 만한 성공' 기고문에서 사용한 온건한 말은 결국 말에 불과했음이 입증되었다. 동일한 정책이 계속 적용되었고 심지어 더 가혹해졌다. 1930년 7월 격렬한 3월 열병 시위가 일어난 지 불과 몇달 후 정치국은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1931년 9월까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주요 곡물 재배 지역의 가구 중 최대 70퍼센트를 집단 농장에 가입시키는 것이었다. 1930년 12월 정치국 위원들은 자신의 열의를 증명하기 위해 목표를 전체 가구의 80퍼센트로 상향 조정했다. - p.324 |
스탈린의 바람대로 교육적인 언론 캠페인이 이어졌다. 법령 발표 후 2주가 지나자 프라우다는 붉은 건설자 집단 농장의 밭에서 곡물을 훔친 쿨라크 여성 그리바노바 사건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우크라이나 언론은 오데사에서 절도죄로 총살당한 부부의 이야기를 포함한 세 건의 재판을 자세히 보도했다. 보도된 다른 사건 중에는 열 살짜리 딸이 주운 소량의 밀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총살당한 농민의 사건도 있었다. - p.364 |
여러 젊은 집단 농부, 마을 소비에트와 코펠레프 자신으로 구성된 팀들이 오두막, 헛간, 마당을 수색하고 저장한 씨앗을 모조리 빼앗고 소와 말, 돼지를 가져갔다. 그들은 성상, 겨울 외투, 카펫, 돈을 비롯한 귀중품은 무엇이든 가져갔다. 여성들은 집안의 가보를 붙잡고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지만 수색은 멈추지 않았다. 코펠레프 자신도 이 일이 매우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혐오스러운 선전을 끊임없이 반복하면 당면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p.451 |
일부 매장 팀은 무관심을 넘어 잔인한 수준에 도달했다.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의 생존자들은 심하게 아픈 사람들이 생매장당했다고 반복해서 증언했다. "반쯤 살아 있는 사람을 묻기도 했습니다. '시체'들은 이렇게 외쳤어요. '선량하신 여러분, 절 내버려두세요. 전 죽지 않았습니다.' 대답은 이랬어요. '지옥에나 떨어져! 내일 또 오란 말이야?'" 또 다른 팀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데리고 갔는데 어차피 내일이면 다른 거리에 쓰러져 있을테니 지금 데리고 가서 '시체' 하나 당 더 많은 보수를 받아 음식을 챙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총을 쏘지도 않았습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밀어넣었죠." 심지어 가족들도 죽어가는 가족 구성원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 p.499 |
1932년부터 쿠반에 숨어 있는 젤렌키 주, 보후슬림스키 현 출신의 50세 쿨라크 여성이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옴. 그녀는 호로디센스카 역에서 코르순으로 가던 중 지나가던 열두 살 소년을 유인해 목을 그었음. 자익와 다른 신체 부위를 가방에 넣었음. 호리디세 마을에서 살던 시민 셰르스튜크가 하룻밤 재워줌. 그녀는 송아지 장기라고 속이고 노인에게 심장을 삶고 구워달라고 함. 노인의 온 가족이 그 심장을 먹었고 노인 자신도 먹었음. 밤이 되자 가방에 있는 고기 일부를 더 사용하려고 하던 노인이 잘게 잘린 신체 일부를 발견함. 범인들은 체포됨. - p.504 |
소비에트의 공식적인 세계에서 우크라이나 기근은 더 광범위한 소련 기근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신문에 나오지 않았고 대중 연설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와 지역 지도자 모두 기근을 언급하기는 커녕 앞으로도 언급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1921년에는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원조를 요청했다면 1933년의 대응은 소련 내외부 모두에서 심각한 식량 부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목표는 기근을 치우는 것, 기근을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 p.578 |
스탈린은 자신이 사실은 아주 무능한 인간이며 직접 관여했을 때 일이 잘되기보다 주로 망치는 쪽임을 인정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더 중요한 점은 그에게 감히 도전할 용기가 없었던 소련 인민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서방 세계 또한 침묵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지배는 '지옥의 식민지'라면서 악명 높았으며 국제 사회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특파원이었던 시어도어 화이트는 중국 허난성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폭로하여 장제스 정권을 궁지에 내몰기도 했지만 무능한 지도자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초래한 천재지변이었다. 정작 서방 기자들은 소련에서 평화로운 시절에 벌어진 대기근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했다.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 있게 폭로한 소수의 동료들을 비난하는데 앞장섰다. 서방 좌파 지식인들의 선별적인 분노와 이중 잣대가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서방 정부 역시 정치논리에 따라 소련의 치부를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이유로 방관했다. 이들은 엄연히 스탈린 체제의 공범자들이었다.
작가인 버나드 쇼는 1931년 하원의원 낸시 애스터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자신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현외에 참석했다. 연회는 그의 기호를 고려해 채식 요리로 전비했다. 쇼는 매우 들뜬 기분으로 소련 관료와 저명한 외국인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 그는 주최측에 감사를 표하면서 자신을 반소련 유언비어 유포자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여행 중에 먹으려고 음식 통주림을 주었다고 청중에게 말했다. "친구들은 러시아가 굶주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련 국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폴란드에서 모든 음식을 창밖으로 던져버렸죠." 한 기자는 청중이 숨을 맺을 듯 조용해졌다고 회상했다. "영국산 소고기 통조림 하나면 모임에 참석한 노동자와 지식인 가족은 기억에 남을 휴일을 즐겼을 것이다." 적어도 일부 소련 지식인들은 이 거만한 외부인에게서 냉소적인 피로감을 느꼈다. - p.597 |
월터 듀린티의 씁쓸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게임을 특히 잘 수행한 사람드에게는 추가적인 보상이 제공되었다. 듀런티는 1922년부터 1936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역할 덕분에 한동안 상당한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정권에 매우 유용한 존재로 여겨졌고 모스크바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를 받았다. 그는 큰 아파트에서 살았고 장도차와 애인이 있었으며 어떤 특파원보다도 접근 권한이 높았고 모두가 탐내는 스탈린과의 인터뷰를 두번이나 할 수 있었다. 그가 소련에 아첨하는 보도를 한 주 동기는 그러한 보도를 통해 누릴 관심이었을 것이다. - p.601 |
1933년 말 새로운 루스벨트 행정부는 소련을 둘러싼 나쁜 소식을 무시해야 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았다. 대통령 참모진은 독일이 발전하고 있고 일본을 봉쇄해야 할 필요도 있기에 이제는 미국이 모스크바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루스벨트는 중앙 계획 경제와 자신이 생각했던 소련의 엄청난 경제적 성공에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상업적으로도 유익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 p.617 |
제정 러시아 시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농노였다면 스탈린 시절에는 아예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아야 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일제 36년 동안 우리의 경험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무리 일제의 지배가 억압적이었다고 해도 적어도 수백만명이 굶어죽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레닌의 말만 믿고 독립을 쉽사리 포기한 댓가를 뼈저리게 치른 셈이었다. 지금에 와서 제아무리 푸틴이 동포 운운하면서 서방 대신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오라"라고 회유한들, 우크라이나가 베알이 없지 않고서야 순순히 굴복할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푸틴은 과거사를 인정하기는 커녕 시계바늘을 그 시절로 되돌릴 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홀로도모르는 단순히 스탈린 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괴물을 만들어낸 공산주의 체제의 산물이었다. 설령 스탈린이 없었어도 똑같은 일은 벌어졌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외치던 19세기의 독일은 산업혁명 속에서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피를 무한 흡입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썩어빠진 세상을 때려 부수고 싶은 마음이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알았지만 정작 자신의 모순은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였다. 말로는 민주와 평등을 외치면서도 그 방법은 대화와 설득이 아니라 공포와 폭력이었다. 만약 그가 한 세기 뒤에 자신의 추종자들에 의해 벌어질 참사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나는 옳은데 무식한 놈들이 내 뜻을 함부로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이 저주받을 사상을 쓴 내 손목아지를 자르겠다고 했을까. 실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