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디자인 - 디자인의 선과 악, 다크 디자인 투어리즘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조지혜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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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서 인정한 세계 최초의 국기는 덴마크의 국기인 '다너브로(Dannebrog)'라고 한다. 유럽에서 교회의 위세가 절정이던 1219년 교황의 명령으로 발트해에서 십자군 원정에 나선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Valdemar II)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수도 틸린에서 벌어진 린데니세 전투(Battle of Lyndanisse)에서 이교도들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하늘에서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가 그려진 정체불명의 천이 떨어졌고 신의 선물이라고 여긴 덴마크군은 용기백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물론 믿거나 말거나한 도시 전설이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아서 무려 800년이 넘도록 쓰고 있다는 것이 덴마크인들의 주장이다. 물론 덴마크의 정식 국기로 공식 지정된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인 1625년 5월 8일이지만 말이다.

1809년 덴마크 화가 크리스틴 오거스트 로렌젠(Christian August Lorentzen)이 그린 다너브로 전설. 하늘에서 저런 식으로 낙하했다고. 신이 천쪼가리만이 아니라 추 역할을 하도록 묵직한 깃대에 매달아서 공기역학까지 고려하여 투하한 모양. 공학도 신인가.


따지고 보면 전쟁에서 깃발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수천, 수만명이 뒤엉킨 난장판 속에서 피아구분은 물론이고 병사들로서는 우리 쪽 깃발이 등 뒤에서 힘차게 펄럭이면 아군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며 꺾이고 찢겨진다면 싸움에 졌으니 도망쳐야 한다는 얘기이다. 아마도 원시시대에도 조잡한 뭔가를 만들어서 성물마냥 높이 쳐들고 싸우지 않았을까. 전쟁이란 서로의 깃발 뺏기 싸움이며 깃발은 아군에게는 결속과 용기를, 적군에게는 공포와 좌절을 주는 일종의 토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그저 아무거나 들고 다니는 대신 신이 부여한 색깔과 문양을 그려넣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어쨌든 싸움은 이겨야 하니까 말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찾아 성지로 향한 엘프 대장장이의 여정을 다룬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십자군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 문양을, 살라딘의 이슬람 군대는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과 방패를 들고 있다. 가문과 세력을 상징하던 깃발은 근대에 와서 국기의 원형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깃발은 승리를 상징한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 해병대가 성조기를 세우는 광경이나 베를린 전투에서 독일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소련군 병사가 소련 국기를 내거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2차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각인시켰다.

총격 직후 성조기를 등 뒤로 피를 흘리면서 주먹을 치켜 올리는 트럼프. 워낙 절묘한 구도였기에 짜고 친 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 어쨌든 AP통신 기자 에반 부치(Evan Vucci)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이 꼴통 영감이 대선에서 이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깃발이 인간의 심리에 얼마나 영향력이 큰 지 보여주는 셈. 광화문에서 태극기 휘두르는 양반들도 그런 이치 아닐런지.


교유서가에서 나온 신작도서 <전쟁과 디자인>은 전쟁을 통해 돌아보는 디자인 에세이이다. 저자인 마쓰다 유키마사(松田行正)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원래는 법학도였지만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 디자인을 맡게 되었고 디자인을 주제로 역사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한다. 국내에도 몇 권이 책이 나와 있는 유명 작가이기도.

저자인 마쓰다 유키마사 옹. 1948년생이니 내일 모레 팔순인데 젊게 사시는 듯. 무려 1년에 한권 출간이 목표라고. 노안 안 오시나.


제2차 세계대전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문양은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일 것이다. 서양인들이 한국이나 일본에 관광왔다가 불교 사찰에 달린 卍자를 보고 깜놀한다는 이 문양은 히틀러 대굴빡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원래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한다. 심지어 대서양 너머 북미 인디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기호가 발견될 정도. 사실은 외계인이 원조일지도. 그것을 1919년 나치의 수령이 된 히틀러가 자신들이 독일 민족의 구세주라는 이미지를 대중에 각인할 요량으로 나름 변형하여 자기네 당기로 쓴 것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하켄크로이츠의 모습이다. 덕분에 행운의 상징은 하루 아침에 악마의 상징으로 둔갑했고 유럽 전체에서 저주받은 기호 취급을 받고 있으니 억울하다고 할 듯.

하켄크로이츠는 나치가 정권을 손에 넣기 전부터 깃발과 완장에 사용되었다. 정권을 얻은 다음부터는 깃발과 배지, 종국에는 문구류 같은 소품에까지 등장해 독일 전역을 휩쓸었다. 반 나치 세력은 나치를 비난하기 위해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했으나 도리어 하켄크로이츠의 힘을 재인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 p.149

이 책은 군용기에 그려진 각국의 마크를 비롯하여 인류 전쟁사에서 디자인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해 왔는지를 얘기한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사용하는 국기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이 탄생시킨 것이기도 하다. 유럽 국가 중에는 덴마크처럼 십자군 시절의 영향으로 십자 문양을 쓰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혁명과 해방, 자유의 상징으로 삼색기를 쓰는 나라들도 많다.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선이라고 믿었던 공산주의 국가들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을 선호한다. 냉전 시절 소련군의 이름은 '붉은 군대'였다. 중국 마오쩌둥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홍위병이라고 불렀다. 그게 꽤 쓸만하다고 여긴 사람이 모방의 달인이었던 히틀러였다. 하켄크로이츠의 바탕이 하필이면 붉은 색인 것도 소련 적기를 베낀 것이며 나치의 거대한 대중집회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이다. 인사할 때 손을 치켜드는 것은 무솔리니를 흉내낸 것이지만. 극좌와 극우는 통하는 법이라나. 총성이 난무하는 전장만이 아니라 설전과 암투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정치인들 또한 색깔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우리만 해도 언제부터인가 한쪽 당이 빨간색을 쓰니까 다른 쪽에서 파란색을 들고 나오더라.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은 해리포터 20주년 기념판을 금지했다. 표지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이라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였다. 색깔을 가지고도 편을 가르고 싸우는 게 인간인 셈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기의 색으로 싸운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맞붙었던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트럼프 진영이 붉은 색, 바이든 진영이 파란 색으로 각자 국기 색상 중 하나를 휘감고 싸웠다. - p.17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색 대비가 두드러진 해리 포터의 파란색과 노란색 판본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었다는 뉴스도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우크라이나를 나타내는 색이기 때문이다. - p.37

히틀러는 붉은 색을 사회사상 운동, 흰색을 국가주의 사상, 검은 색은 아리아 민족의 승리를 위한 투쟁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붉은 색은 아리아 민족, 흰색은 아리아 민족의 순결, 검은색은 아리아 민족 이외의 절멸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다. 국가의 색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소 진부하지만 검은 색을 절멸의 색으로 보는 시각은 독특하면서도 공포스럽다. - p.62

사실 원래는 갈고리십자도 행운의 상징이었고 나치친위대의 해골 표식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최종적으로는 사악한 상징으로 전락했지만 원래는 자유와 독립을 염원한다는 의미였기에 조직의 표식이 된 것이리라. - p.137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뒤인 1873년에 정식으로 육군을 발족하면서 프랑스 육군과 미 육군을 참고하여 군복 수칙을 정했다. 이때 별 모양을 군모와 계급장에 채택했다. 군모에도 계급장과 똑같은 개수의 별을 붙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문화가 들어와 '★'이 별이라는 의미가 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별은 '●' 모양이었다. ★은 헤이안 시대 아베노 세이메이의 '세이메이 인'처럼 주술적인 기호였다. - p.171

키치너는 정면을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국은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심리적인 압박은 크지 않지만 개인에게 직접 호소하는 디자인에 가슴이 뜨금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결국 키치너 포스터는 많은 지원자를 모아서 크게 성공했다. 고무된 영국 육군은 협박이 더 두드러지는 포스터를 만들었다. 영국을 의인화한 존 불이 정면을 가리키며 '아직도 전쟁에 불참한 건 당신인가'라고 묻는다. - p.211

크메르 루즈는 검은 인민복에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끄러마'를 착용했다. 끄러마는 스카프 겸 수건이면서 머리에 두르는 터번이 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붉은 색 깅엄체크 무늬의 끄러마를 둘렀다. 참고로 남베트남해방전선(베트콩)은 푸른색 깅엄체크 끄러마를 착용했다. - p.292

300여 페이지의 본문에는 십자군의 십자 기호,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가 내건 Z깃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병 포스터, 히틀러의 프로파간다가 써먹었던 게르만의 룬문자, 여성들에게 검은색 히잡을 강요하는 아프간 탈레반의 여혐, 푸틴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칼라풀한 사진과 함께 다양한 디자인이 등장한다. 인간 심리에서 색깔과 기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고 저자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각각 독립된 얘기인 것으로 보아서 저자가 어디에서 연재한 짧은 칼럼을 모아서 엮은 모양. 부담 없는 분량에 흥미로운 주제, 분잡한 명절에 방 한켠에서 편안하게 읽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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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쟁사 - 남북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마이클 오핸런 지음, 임지연 옮김 / 상상스퀘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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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단련된 이라크군을 상대로 베트남전쟁 이후 또 다시 수렁에 빠질 지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와 달리 싸움은 그야말로 일방적이었다. F-117 스텔스 전투기가 세계에서 가장 조밀하다던 이라크 방공망을 분쇄하고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들이 이라크의 눈과 귀를 파괴했다. 이라크 공군은 레이저로 유도되는 미군의 스마트 폭탄에 의해 변변히 떠보지도 못한 채 대부분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지상전 또한 다국적군대의 압승이었다. 소련제 전차로 무장한 이라크군 기갑부대들은 서방제 전차의 압도적인 성능 앞에서 줄줄이 격파되었다. 2월 28일 작전이 종결될 때까지 40일 동안 미군이 보여준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20년 전 베트남전은 물론, 불과 2년 전 아프간에서 무력하게 철수한 소련군과도 대조적이었다. 그것은 그저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새로운 전쟁이자, 천조국 미국이 단순 물량빨이 아닌 진정한 세계 최강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채 버려진 이라크 기갑차량들. 아랍 군대가 머리수만 많지 실속없다는 점은 이스라엘과 벌어진 4번의 중동전쟁에서도 이미 입증된 바 있었지만 미군이 보여준 경이로운 전투력은 이전의 중동전과도 차원이 달랐다. 베트남전쟁에서 물량빨이 전부일 뿐, 약에 쩐 약골 군대라는 이미지는 걸프전을 통해서 단숨에 날아가고 미군은 명실공히 넘사벽의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했다.


베트남전쟁 때의 오합지졸과 달리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고도로 훈련된 미군의 환골탈태한 모습은 아버지 부시보다 전임자였던 레이건 시절 군사개혁의 결과였다. 하지만 루스벨트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어줍잖게 일을 벌이다가 망쳤던 것과 달리 미군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한 것은 아버지 부시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현명한 선택은 따로 있었다. 그는 당초 목적대로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쫓아내자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전쟁을 재빨리 중단했다. 미국의 능력에 환상을 품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사막의 폭풍 작전은 미국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전쟁으로 끝났다. 속전속결로 끝냄으로서 장기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후세인을 끝장내지는 못했지만 그건 미국 알 바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로부터 12년 뒤, 미국은 이라크와 또 한번 맞붙었다. 이번에는 아들 부시가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다는 오랜 격언마냥 임펙트는 덜했다. 물론 미군은 걸프전쟁 때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무기로 이라크군을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두들기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미 눈높이가 한껏 높아진 관객들로서는 식상해진 내용에 CG만 좀 더 화려해졌다랄까. 아버지 부시와 결정적인 차이는 싸움에 이긴 뒤의 후속 처리였다.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졸속으로 전쟁을 밀어붙인 아들 부시는 미국을 또 한번 수렁에 빠뜨림으로써 베트남전쟁의 악몽을 되풀이했고 뒷처리는 후임자들의 몫으로 떠넘겨 놓았다. 게다가 아프간에서는 20년 동안 그토록 공을 들인 친미 정권이 하루아침에 붕괴되는 망신을 겪어야 했다.

그가 독선과 아집으로 벌여놓은 무모한 전쟁은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힘만 빼놓았다. 천조국 미국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였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무력하게 물러난지 반년 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중국 또한 공공연히 태평양에서 미국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는 만만한 동맹국들에는 한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안달이면서 막상 나서야 할 때는 뒷짐지고 물러서서 최소의 비용으로 숟가락 얹으려는 궁리만 한다. 미국의 처지가 그만큼 궁색해졌음을 드러내는 셈이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기습하여 궁지에 내몰자 트럼프는 이란에게 2주 동안 생각을 할 시간을 준다면서 자기가 선심을 쓰는 척 하다가 오늘 새벽 느닷없이 뒷통수를 날렸다. 이런 연막 전술은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그랬어야지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이란이 멍청하게 당했을지 의문일 뿐더러, 상대의 불신과 분노를 사는 것은 물론, 미국은 역시 못 믿을 나라라는 이미지만 각인시켜 장기적으로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트럼프야 오늘이 중요하지 나중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양반이라.


지난 한 세기 동안 패권 국가로서 미국이 보여준 위세는 다른 열강들은 물론이고 역사상 어떤 제국조차 비할 수 없다. 제아무리 예전같지 않다고 한들 여전히 미국은 독보적인 초강대국이며 그 힘은 지구 전역에 구석구석 미치고 있다. 세계 2/3가 미국의 동맹국이거나 그 영향력 아래에 있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탐욕과 절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치적거리 하나 남겨보겠다고 무리한 전쟁을 벌였다가 발목이 잡혀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정작 미국의 도움을 필요할 때에는 우리도 사정이 안 좋다는 핑계로 매몰차게 나몰라라 한다. 그나마 예전 지도자들은 유무능을 떠나서 민주주의 진영의 수장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도 있었다면 이제는 트럼프라는 협잡꾼이 국민들을 갈라치고 동맹국들이 등 돌릴 짓만 골라하는 판국이다.

과연 미국은 다시 위대해 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평범해 질 것인가. 어차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 아닐지. 좋건 싫건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마냥 국제 질서의 상당부분을 떠받치며 안정을 지탱하는게 미국이니 말이다. 미국이 사라졌을 때 우리네 세상은 지금보다 더 평화롭지는 않을 듯 하다.

상상스퀘어 출판사의 신작 도서 <미국전쟁사>는 1861년 남북전쟁부터 최근의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이 주도한 160년의 전쟁사를 다룬 책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전성시대. 저자인 마이클 오헨런은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수석 연구원으로 주로 미국의 해외 전략과 국방 분야 쪽의 연구를 맡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브루킹스 연구소는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싱크탱크 단체 중 하나.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외교 등 온갖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보수니, 진보니 따위의 특정 정파에 쏠리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다양한 시각을 대표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그런 점에서는 정권 눈치 보기와 진영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쪽 연구 단체들에 비하면야 역시 미국이랄지.

올초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서울 모 호텔서 브루킹스 연구소 주최로 열린 한미동맹 관련 포럼. 대략 이런 일을 하는 단체람서.


이 책은 남북전쟁에서 시작한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노예를 해방해서가 아니라 피터지는 내전이 그때까지 느슨한 연합체였던 미국의 결속력을 한층 강화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고가는 주먹 속에서 피어난 형제애랄까. 무엇보다도 남북전쟁은 미국을 신생 독립국에서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내전이 대개는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상처만 남긴다는 점에서 남북전쟁은 이례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사람이 링컨이었다. 북부의 승리는 단순히 경제력이 압도해서가 아니라 왜 우리가 굳이 저 검둥이들을 해방하겠답시고 죽기로 싸울 이유가 있느냐고 여기는 북부인들에게 전쟁의 대의를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낸 덕분이었다. 그 점에서는 남부도 마찬가지였다. 교과서에서는 남부가 링컨에 반발한 이유가 노예제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소수 대농장주들 얘기이고 절대 다수의 가난한 남부 소작농들로서는 노예가 해방되건 말건 솔직히 알 바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꺼이 전쟁에 나선 것은 북부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들에게는 얄미운 북부로부터의 독립전쟁이었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설사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어도 시기의 문제일 뿐 남북전쟁은 폭발했을 것이다. 하물며 트럼프였다면 상처에 소금만 뿌리는 격이었을 듯.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 과정에서 시몬 볼리바르를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것처럼 미국 또한 그리 될 수 있었다. 그걸 막은 것은 전적으로 링컨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남부연합에게 굴복하는 대신 끝까지 때려눕히는 쪽을 선택함으로서 내전을 장기화시켰지만 무자비한 복수 대신 포용을 통해 미국이 거듭날 기회로 삼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수 또한 저질렀지만 말이다. 저자는 전쟁 배경과 주요 전투, 양측이 어떤 전략을 구사하고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어떤 교훈을 주는지 설명한다. 남북전쟁은 매우 중요한 전쟁임에도 막상 시중에 제대로 다룬 책조차 없다는 점에서 좋은 읽을거리이다.

남부와 북부 지도자 모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신속한 성공을 거둘 것으로 과신하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앞으로 자세히 다루게 될 이 단순한 생각은 현대 정책 입안자와 전략가들에게 남북전쟁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일반적으로 실제 결과보다 전쟁을 훨씬 잘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비극적 성향을 보여주며, 전쟁의 예측 불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 p.25

매클렐런은 남군을 공격하거나 리치먼드를 점령하겠다는 야심을 포기하면서 북군의 전술적 성공조차 전략적 패배로 묻혔다. 매클렐런은 리 휘하에 실제의 몇 배인 20만 명의 병력이 집결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아무런 즉각적인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만약 매클렐런이 이 전역에서 리치먼드를 점령하여 남북전쟁과 분리 독립을 둘러싼 갈등이 비교적 초창기에 봉합되었다면 노예제는 보존되었을 것이고 남부연합의 11개 주는 수년 혹은 수십년 동안 자신들의 특별한 제도를 유지했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북부의 전쟁 목표는 남부연합 영토 내 노예제 폐지까지 고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 p.63

만약 북군이 더 빨리 움직였다면 더 빨리 승리했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리가 베트콩이나 조지 워싱턴처럼 행동했다면 전장에서 더 오래, 북군의 인내심과 의지가 바닥날 때까지 버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북부가 채터누가 전략을 채택했거나 아나콘다 전략이 효과를 거둘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버지니아 전선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격전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여러 선택지가 있었고 그 중 어떤 것은 어마어마했던 인명 피해를 좀 더 줄일 수도 있었다. - p.92

이 책에서는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의 시대를 연 양차대전과 미국이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한 한국전쟁, 더욱 큰 댓가로 끝나야 했던 베트남전쟁, 모처럼의 성공인 사막의 폭풍작전, 그리고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불명예스러운 철수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경험한 굵직굵직한 전쟁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성공도 있고 쓰라린 실패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왜 실패했는가일 것이다. 저자는 지도자들이 과거의 교훈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힘을 과신하고 손쉽게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되려 지레 겁을 먹고 자신감을 잃어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가령 한국전쟁에서 트루먼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우유부단하기보다 세게 밀어붙이는 쪽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저자는 중간중간 다양한 질문을 던지면서 "만약 이랬더라면"에 대한 가정을 흥미롭고 짚어본다.

당시 미군은 소규모였고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은 강력했다. 그러나 미 육군은 빠르게 성장했다. 1917년에 약 10만명의 병력과 1만 5천명 정도의 해병대로 시작하여 1918년에는 400만 명이 넘어섰다. 1918년 3월 무렵 미군 30만명이, 8월에는 130만명, 종전 직전에는 200만 명이 유럽에 배치되었다. 전쟁 끝날 무렵 미국의 GDP 대비 군사비는 1915년 이후 4회계년도 동안 1%에서 14%로 늘어났다. - p.176

일본을 무찌를 더 간단한 방법은 없었을까. 거대한 단일 함대를 조직하고 막대한 군수물자 수송선단으로 이를 지원하면서 북쪽 해로를 통해 일본의 큰 섬 훗카이도를 향해 직진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를 고려하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악천후나 일본이 건재한 공군력으로 효과적으로 본토를 방어하는 등 단 하나의 실패 요인으로도 쉽게 타격받을 수 있었다. 미국은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걸기보다는 다단계 접근을 통해 전투 경험과 전문성을 쌓았다. - p.306

맥아더는 매튜 리지웨이 장군을 워커의 후임으로 요청했다. 이는 행운의 선택이자 맥아더가 인천 상륙 후 몇달을 통틀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리지웨이는 강인하고 자신만만했다. 전술적으로는 부대가 도로에서 벗어나 고지를 차지한 뒤 적당한 때 적진을 파고드는 식의 기본 보병술과 훈련을 강조했다. 그리고 맡은 지역을 제대로 정찰하지 않거나 전술 과제를 해내지 못하는 지휘관들을 해임했다. 그는 신병들에게는 큰소리치지 않았지만 고위 장교들에게는 냉혹했다. 부임 첫 3개월 동안 군단장 1명, 사단장 6명 중 5명, 연대장 19명 중 14명을 쫓아냈다. - p.337

리지웨이는 한국에서 돌아온 뒤 육군 참모총장 재임 시절 1954년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해서 안 된다고 경고했고 중국이 한국에서처럼 베트남에 직접 관여한다면 미군은 7개에서 12개 사단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추정했다. 당시 그와 합참의 군인들은 "인도차이나에는 결정적인 군사적 목표가 없다"라고 밝혔다. - p.344

이라크군은 전반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예상보다 잘 싸우지 못했다. 참호 진지 앞에 전위부대를 배치하지 못했고 참호에 들어간 부대의 위치를 감추기 위해 부근에 쌓아올린 흙을 제거하지 않았다. 작전 옵션도 부족했으며 융통성 있는 전술 능력도 제한적이었다. 이란-이라크전쟁 말에 어떤 발전을 이루었든 간에 사담 후세인이 유능한 장군들을 숙청하고 군 지도부를 정치화하여 성과가 쓸모없게 된 탓이었다. - p.413

트럼프는 임무 종료 직전까지 자주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였다. 짐 매티스 국방장관과 불편한 관계로 끝난 것은 2018년 12월 트럼프가 즉흥적으로 그 다음해까지 미군 임무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한 것과 밀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맹국과 동맹 관계에 대한 허풍과 경멸로 유명한 것은 트럼프임에도 실제로 충분한 협의와 경고 없이 성급하게 임무를 끝낸 쪿은 노련한 바이든이었다. - p.477

보통 빠른 승리를 기대하면서 전쟁에 뛰어드는 정치가들과 군 지도자들은 이를 뒷받침할 논리와 개연성을 갖춘 승리론을 가지고 있다. 물론 상황이 뜻대로 흘러갈 때의 얘기이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그들의 뒤이은 결정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성공 계획이 실제 전쟁에서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p.498

미국은 수많은 실패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적어도 북미 지역 밖으로는 미국이 팽창주의적 강대국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으며 많은 경우 미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집단적으로 전 세계 GDP 3분의 2, 전 세계 국방비 3분의 2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 및 산업력 우위를 누리는 서방 동맹 체계는 그 영속성과 신뢰성이 입증되었다. - p.506

예전에 비하여 오늘날 미국이 한물갔으며 트럼프가 부유한 동맹국들을 자기 쌈짓돈마냥 삥뜯을 궁리를 하고 멕시코에 장벽을 쌓거나 덴마크더러 그린란드를 내놓으라는 둥 어거지를 부려도 여전히 많은 나라들은 미국에 기대고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든든한 후원자로 삼기에는 이보다 더 나은 나라가 없으니 말이다. 만약 러시아,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신한다면 훨씬 끔찍할 것이다. 한때 미국과 철천지원수였던 베트남조차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접근하는 판국이다.

하물며 우리는 정치, 안보, 경제 어느 면에서도 미국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럼에도 막상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시중에는 트럼프라던가 미중 갈등같은 최근 이슈에 대한 책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미국의 역사나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성공과 실패를 다룬 책은 의외로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다소나마 미국을 이해하는데 도움되지 않을까 싶다. 아쉬운 점은 <미국전쟁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미국의 전쟁사가 아니라 미국이 참전한 주요전쟁사라는 점이다. 독립 이후 첫 위기였던 1812년 영미전쟁이나 소위 먼로주의를 고집하던 미국이 우물안 개구리에서 처음으로 바깥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 1898년 미서전쟁, 그리고 멕시코 전쟁까지 다루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또한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여 가독성이 떨어지고 앞뒤 맥락상 오역이다 싶은 부분도 종종 눈에 띄는게 옥의 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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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를 떠나는 마지막 보트
헬렌 지아 지음, 박민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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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한 지 4년 차인 1949년 초, 전황은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에게 기울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전쟁의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지난 3개월 동안 동북과 화북, 화중에서 벌어진 이른바 3대 전역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군 정예부대를 일거에 결딴내고 전쟁의 승패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과 반대파들의 압박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장제스는 베이징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는 그 날 하야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를 끌어내린 자들조차 이 공전의 위기를 헤쳐나갈 방안은 없었다. 국민당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중국의 2/3와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지도자들의 좌중지란과 패배주의로 스스로 무너지는 판국이었다. 권력투쟁의 달인이었던 장제스는 궁지에 내몰릴 때마다 하야와 정치적 거래를 통해서 불사조처럼 부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른바 남북평화협상이 결렬되고 1949년 4월 21일 마오쩌둥과 공산군 총사령관 주더는 전군에 총진군령을 하달했다. 국공내전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 순간이었다. 창장(양쯔강)에는 그동안 국민정부군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대규모 방어선이 있었고 해공군력에서도 월등히 우세했지만 급조한 뗏목을 타고 벌떼처럼 내려오는 기세등등한 100만명의 공산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창장 방어선은 단숨에 돌파되고 24일 새벽공산군 제3야전군 제8병단 제35군 제104사단 선봉 부대가 난징에 입성하여 총통부에 홍기를 내걸었다.

총통부 옥상에 홍기를 내거는 공산군 병사들과 그 아래에 찢겨진 청천백일기. 1937년 12월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이후로 또 한번 적군에게 짓밟히는 순간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던 12년 전과 달리 싸움다운 싸움조차 없이 무혈함락되었다.


그러나 12년 전 일본군에 의해 잔혹하게 짓밟혔을 때나 26년 뒤 사이공이 함락되었을 때와는 달랐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수도였으며 인구 260만명의 대도시 난징은 순순히 새로운 지배자를 받아들였다. 1937년처럼 무자비한 대량 학살도 없었고 대혼란 속에서의 탈출극도 없었다. 선전 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마오쩌둥은 전 세계의 시선에 몰려있는 도시에서 홍군의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강조했다. 관용을 베풀어 의구심 가득한 적들에게 제발로 투항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본색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봉건 지주와 자본가,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는 일은 나중에 때가 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의 최대 무기는 기만과 선동, 자신의 속내를 숨길 줄 아는 인내였다. 속았음을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중국판 사이공의 최후가 벌어진 쪽은 난징이 아니라 국제 도시 상하이였다. 5월 12일 상하이 전역이 시작되었다. 중일전쟁 초반 일본군을 상대로 3개월에 걸쳐 베르뎅 전투 이후 최대의 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유명해진 이 도시는 적어도 난징보다는 오래 버텼다. 하지만 5월 23일 공산군이 총공세에 나서고 지하에 암약하던 '제5열'이 일부 부대를 선동하여 반란이 일어나면서 27일 함락되었다. 20만 명의 수비대 중 타이완으로 철수한 부대는 5만명에 불과했다. 그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들의 엑소더스가 벌어졌다. 아편전쟁으로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개항된 도시 중 하나인 상하이는 지난 100년 동안 '동양의 파리'로서 중국의 모든 부가 모이는 사치와 환락, 암흑가의 장소였다. 600만명의 인구 중 상당수는 공산당의 지배를 두려워 할 명확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일부는 자신들이 형편없는 어촌마을이라고 멸시했던 타이완으로, 일부는 홍콩과 동남아로 향했다.

국공내전 말기 상하이에서 타이완으로 향하던 2천톤급 여객선의 해상침몰사고를 다룬 영화 <태평륜>. 1949년 1월 27일에 있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상하이 엑소더스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실화가 모티브라지만 오우삼 감독 작품답게 영화 내내 고증 개 무시인지라.


이들의 탈출과 함께 화려했던 상하이의 황금 시대는 막을 내렸다. 모든 외국인들은 추방되었고 많은 기업가들이 박해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사치는 금지되었다. 타이완으로 철수한 국민정부군은 한때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자금줄이었던 상하이를 되찾기 위해 때때로 폭격기를 보냈지만 1950년 3월 소련이 원조한 최신 제트 전투기인 미그-15와 다수의 대공포가 배치되자 더 이상 얼씬거릴 수 없었다. 기나긴 어둠은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선택하면서 비로소 끝났다. 오랜 공백 덕분에 동아시아 글로벌 무역과 금융허브로서의 지위는 홍콩과 싱가포르에 빼앗겼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급성장과 함께 과거의 명성을 되찾아 가는 중. 공산당이 발목만 잡지 않는다면야. 시진핑 집권 이후 상하이방 힘이 다 빠졌다고.

중국 근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이 나왔다. 마르코폴로 출판사에서 나온 <상하이로 향하는 마지막 보트>는 국공내전 말기 공산군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상하이를 탈출해야 했던 4명의 젊은 남녀 이야기를 다룬 논픽션 드라마이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로 실제로 본인 부모님이 그렇게 탈출한 당사자였다고 한다. 자전적 소설인 셈. 덧붙여, 미국 사회는 타이완과의 동맹관계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남북전쟁 이후 해방 노예 대체품으로 중국인들을 대거 영입하여 값싸게 부려먹었던 미국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하고 이민을 금지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백인들의 공격에 시달렸고 심지어 살해되기도 했다. 1943년 장제스 정권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중국인 배척법은 명목상 폐지되었지만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황인종 포비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 MIT 출신으로 맨해턴 프로젝트에 참여한 미사일 전문가인 첸쉐썬(钱学森)이 추방되어 마오쩌둥에게 핵과 탄도 미사일을 선물한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인종차별주의가 자초한 결과. 암튼 낯선 미국 땅에서 온갖 차별을 당하면서 개고생한 것은 그 시절 우리 이민 1세대들도 마찬가지.

저자인 헬렌 지아. 독특한 헤어 스타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국 최초의 동성 커플 중 한 사람이라고. 물론 이 책 내용과는 상관없다.


이 책에서 나오는 4명의 주인공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만나는 일도 없다. 처지 또한 제각각이다. 부유한 지주의 아들, 항일군인의 딸, 외국인에게 입양한 소녀, 악명높은 한간(친일파)의 자식도 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전쟁이 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는 사실만은 같았다. 같은 시간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중일전쟁부터 국공내전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겪어야 했던 격동의 역사를 서술한다. 여기에는 전쟁의 혼란 이외에도 전통적인 중국사회의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문화, 나라를 버리고 탈출해야 했던 중국 난민들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던 바깥 세계의 모습까지 담고 있다. 도입부에서 어린아이의 순수했던 시각은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잔혹한 현실 속에서 비정해진다. 인생이란 이런 것일까.


마지막에 가는 길도 달랐다. 누군가는 홍콩으로, 누군가는 미국으로, 타이완으로, 상하이를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남아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십수년 뒤 문화대혁명에서 또 한번 혹독한 경험을 겪지 않았을까.

중국 조종사들은 일본 제국 해군의 주력 함선인 이즈모 호를 폭격하여 번드를 끼고 황푸강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함대를 놀라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중국 조종사들은 계산을 심각하게 잘못하는 바람에 일본 함대를 빗맞히고 대신 국제 정착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야" 어머니가 큰 소리로 말했다. 거리에는 전날 전투로 안전한 곳을 찾아 조계지로 들어온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떼 지어 모여 있었다. - p.43

시작부터 여행은 악몽 같았다. 바로 전날, 호는 창수에서 어머니와 열다섯 살인 형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한번도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던 그는 어머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자 자신도 엉엉 울고 싶어졌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누구라도 살아남을 수 있게 가족이 흩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형은 서쪽으로 더 먼 내륙, 쑤저우 시 근처 외딴 마을로 향했고 그와 누나 완위는 할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러나 선착장으로 가는 시골길은 믿기 힘들 정도로 막혔다. - p.63

이제 두 살이 된 안누오는 또다시 달아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번에는 구이저우의 국민당 소속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일본군에 점령된 상하이에서 도망쳐야 했다. 아버지는 안누오가 태어난 직후에 떠난 터라 아이에게는 낯선 사람과 다름없었다. 인도차이나와 중국 최남단의 구경을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노래하고 춤을 추던 안누오는 마침내 아버지를 대면하게 됐다. 아이는 당당한 체격에 카키색 국민당 군복을 입은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를 응시했다. - p.118

베니에게 76번지는 개인 공원과 같았다. 판 서장은 아들이 건물 주변의 넓은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도록 허락해주었다. 경비가 삼엄한 장소로 들어가는 일 자체가 소련에게는 짜릿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안뜰로 들어가기 전 삼중으로 된 문을 지키는 무뚝뚝한 경비들을 지나칠 때마다 소리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반 친구 중 누구도 거기에서 함께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베니는 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상하이에서 가장 운 좋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또 다른 소련 한명이 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는데 일본 지휘부의 뜻에 따라 괴뢰첩보부를 운영했고 76번지 주요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리스취안의 아들이었다. 베니는 소년의 아버지를 전혀 몰랐지만 이곳에 드나드는 영광을 나누는데 이의가 없었다. - p.143

1943년 빙의 삶에 또다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언니가 다른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그러지 않아도 식구로 북적이는 집으로 데려왔다. 아메이는 열세살로, 빙처럼 버려진 아이였다. 버려진 소녀들이 중국 전역에 넘쳤지만 빙은 전에는 한번도 자신과 같은 아이를 알고 지낸 적이 없었다. 아메이는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어렸을 때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소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상하이에서 태어났다는 것 뿐이었다. - p.205

8월 15일 그들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직접 질문의 답을 얻었다. 적이 항복하고 있었다! 호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왔다. "끝났어요. 끝났어요! 일본이 패하고 중국이 승리했어요!" 기쁨에 찬 호는 전혀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췄다. 그러나 호의 캠퍼스에서는 항복 선언 후에도 8년 동안 잔혹하게 도시를 점령했던 일본 군인들이 계속해서 거리를 순찰하자 곧 사람들의 분노가 뒤따랐다. 분노에 찬 학생들이 모여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군이 중국인들과 북동부에서 충돌하면서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게시판의 뉴스를 읽었다. 이는 국민당과 미국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 p.254

1947년 9월 8일 이른 아침, 호는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왔다. 그의 마음속에는 열정이 넘치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모든 것이 새로울테지.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전에는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될 것이다." 고향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호와 동료 학생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이 곧 뒤따를 집단 탈출의 최선봉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p.288

화물 수송기는 동중국해를 끼고 본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400마일을 비행한 후 대만 섬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안누오는 비행기가 하강하는 동안 프로펠러가 회전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마음을 가다듬었다. 안누오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들도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다급하게 도망치다가 충돌후 추락한 과적 비행기의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 p.328

가족들은 가방을 내려놓고 씻고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신문 가판대를 지나던 그들은 이틀 전에 공산당이 귿르이 살던 도시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상하이가 함락된 것이다! 언니는 계속해서 "세상에 맙소사!"라는 말을 되풀이했고 크리스티안은 기사를 자세히 읽으면서 덴마크어로 계속 중얼거렸다. 그들은 점령 당시 상황이 대체로 평화로웠다는 것을 알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빙은 도시가 일본과의 전쟁 때 당한 것같은 대량 살상을 면했다는 것에 고마웠다. - p.350

상하이 해방 후 중국 내에서 국민당의 시대가 끝나고 공산당이 곧 나라를 장악할 거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어지자 미국 내부에서는 중국 공산당 잠입자들에 대한 공포가 빠르게 커졌다. FBI는 중국인 학생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정보원 역할을 해줄 "호의적인" 학생들을 찾아냈다. 연방 요원들이 중국 학생단체와 그 지도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호가 가입한 <중국학생기독교총연합회>는 FBI의 집중적인 조사를 받게 되었다. 폴린에게는 "광적인 친공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 P.402

영국인들은 원래 그 지역 출신인 사람들만 입국을 허가하고 상하이처럼 먼 지역에서 오는 난민들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광둥어로 대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돌려보내졌다. 이러한 새로운 요구 조건이 생기기 전까지는 중국인들이 식민지를 출입하는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이제 난민과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로우에 들어서면서 도린은 상하이에서도 고향 말투를 잃지 않았던 광둥성 출신 조상들에게 감사의 말을 속삭였다. - P.476

미국과 대만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 본토의 정부도 국가 안보의 명목으로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누가 우리의 적인가?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이 질문은 혁명의 첫번째 질문이다"라고 쓴 바 있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내부의 적을 상대로 '반혁명 진압'운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대중 운동에 착수했다. 그 대상에는 반혁명적이고 우익으로 여겨지는 더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중국 사회에서 존경받았던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의 토지개혁운동은 상하이나 난징같은 도시 자본가와 중산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미 제국주의자들과의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번 운동은 상하이의 도시 엘리트들에 대한 고삐를 더욱 바투 쥐게 했다. - p.540

도린 역시 상하이로, 그녀의 가족이 4대에 걸쳐서 살았던 항구 도시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코 홍콩에 머물 생각이 없었지만 어쩌면 이곳에 어떤 마법이 깃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앤드루 덕분에 홍콩은 그녀에게 더 고향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린은 그에게서 결혼 상대를, 어쩌면 미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삶을 꾸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에게는 상투적인 문구만 적힌 오빠의 짤막한 편지밖에 없었다. 적어도 베니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지나면서 편지는 점점 뜸해졌다. 도린은 오빠가 자신이 보낸 돈이나 꾸러미를 받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편지도 오지 않게 되었다. - p.561

베니는 더 많은 심문을 겪어야 했다. 그가 흑색 제국주의자들을 훈련하는 학교에 다닐 때 알던 외국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들은 스파이였나? 그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나? 수업에서 왜 그는 영어로 "태양이 구름에 의해 가려진다. 태양은 구름에 의해 가려졌다. 태양이 구름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라는 문장을 가르쳤나? 태양인 마오 주석이 가려질 것이라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구름은 누구인가? 그들이 태양을 어떻게 가린다는 말인가? - p.576

혁명의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도망쳤는지 아는 이는 없지만 중국 전역에서 수백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넓게 펼쳐진 허술한 국경을 넘은 것은 확실하다. 오늘날까지도 중국 공산당은 두 가지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첫째 이 대규모 탈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둘째 상하이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지적 자본이 유출되면서 중국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는 점이다. - p.589

예전에 읽은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이 아편전쟁 이후 서양세력을 등에 업고 상하이에 눌러앉아 엄청난 부를 누렸던 유대인들을 다룬다면 이 책은 격동의 시대를 자신의 힘으로 힘겹게 헤쳐나가야 했던 지극히 평범한 중국인들의 얘기이다. 영화 <국제시장>이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경험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켠을 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며 그 중 한 사람인 빙이라는 소녀는 저자의 어머니라고.

1949년 5월 상하이 엑소더스 한 장면. 저자의 어머니 또한 공산군을 피하여 상하이를 필사적으로 탈출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고향을 잃은 이들이 겨우 만난 바깥 세상 또한 구원의 땅은 아니었다. 온갖 박해와 차별을 당해야 했다. 집나가면 개고생인 법이라.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이런 생각이 든다. 20세기 어느 시대를 고르라고 해도 중국인으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청나라가 망한 뒤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이 벌어지고 그보다 훨씬 참혹했던 중일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그 뒤에는 마오 치하에서 한국전쟁과 3천만명이 굶어죽은 3년 대기근, 문화대혁명의 동란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양안 너머 소위 '자유 중국'이라는 가식적인 타이틀이 붙은 타이완에서의 삶이 더 나을 것도 없었다. 대륙에서 적색 테러가 벌어지는 동안 타이완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서슬퍼런 세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우리보다 한술 더 뜨는 저임금, 고물가에서 청년들이 고달프게 살기는 양쪽이 판박이이다. 게다가 요즘 시진핑핑이 때문에 말로만 듣던 전쟁 위기까지 고조되는 판국이라.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다.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단편적인 에피소드일 뿐이다. 저자는 전문적인 역사 학자가 아니라 작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실에서는 걸려 읽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저자 특유의 드라마틱하고 사실적인 묘사는 읽는 내내 마치 내가 그 때 그 장소에 있는 느낌마저 준다. 저자의 필력이 놀랍다. 중국 근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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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분 -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애니 제이콥슨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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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0여년이나 되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때에는 핵전쟁이 주제인 영상물이 많았던 것같다. 그때만 해도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소련이 건재했고 미국과 상호 공멸식 핵군비 경쟁에 여념이 없었으니 말이다. 대표적인 영화가 우리가 잘 아는 주지사 형님의 터미네이터 시리즈. 미국이 정신줄을 놓고 AI한테 핵무기 통제권을 넘겼다가 핵전쟁이 일어나면서 인간들은 멸망직전까지 내몰린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스럽게 미국인(그것도 백인 남자)이 세상을 구하지만. 그리고 그 놈을 지키기 위해 미래에서 터미네이터가 호위 무사로 넘어 온다는 뻔한 설정. 시리즈마다 존 코너도 바뀌고 빌런도 바뀌지만 주지사 형님은 고정 출연이람서.

터미네이터 도입부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위 "심판의 날" 스카이넷이 인구 밀도 따지지 않고 일정 거리마다 한방씩 먹이는 느낌.


물론 터미네이터야 핵전쟁과 인류 멸망은 곁가지에 불과하고 현실 세계에서 구형과 신형이 치고박고 싸우는 액션신이 주된 내용이지만, 핵전쟁으로 인한 대재앙을 다룬 영화로는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1959년작 <그날이 오면>과 1983년 미국 ABC방송국에서 만든 <그날 이후>이 있다. 토요일 저녁에 하는 주말의 명화같은데서 했던 것같은. 지금 본다면 조잡한 고전 영화이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고.

하지만 두 영화는 어디서 핵전쟁이 시작되었고 방사능 낙진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묘사하는지라 핵무기에 대한 경각심을 알려주는 교육용이라면 몰라도 영화로서의 재미는 그다지.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퓨쳐워 198X>라는 일본 애니가 기억난다. 국내명은 <가공스런 미래전쟁>. 그 시절 작명센스 보소. 미소 냉전이 절정이던 1980년대 소련 파일럿이 최신 전투기를 타고 서독으로 탈출하고 소련 스페스나츠가 출동하여 나토군과 교전이 벌어지면서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는 내용. 스케일이 전 세계 규모일 뿐더러, 유럽 평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기갑전과 공중전은 박진감 뿜뿜이다. 또한 소련의 ICBM을 우주 공간에서 레이저로 격추하는 것은 레이건 시절의 스타워즈 계획이 성공했다는 설정. 엄연히 반전 애니임에도 너무 리얼하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시민 단체들이 상영반대 운동을 벌였다는 뒷얘기도.

그림체는 완전 양키풍이지만 엄연히 일본인이 그린 일본 작품이람서. 버블 시절의 일본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명작임에도 반일 감정이 한창이던 시절 작품이라서 그런지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괴작 취급.

이제 미소 냉전이 끝난지도 30여년이 넘었다. 소련도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는 여전히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냉전 종식에도 불구하고 핵 보유국들은 그 때보다 더 늘어났다. 심지어 파키스탄, 북한처럼 가진 게 쥐뿔도 없는 나라들까지도 온 국민들이 풀을 뜯더라도 핵무기만큼은 있어야 한다며 핵군비 경쟁에 뛰어든 판국이다. 지난 1월 28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운명의 날 시계가 자정 89초 전으로 당겨졌다. 미소 군비 경쟁이 절정이었던 1980년대보다도 지금이 더 지구 종말의 위기에 가까워진 셈이다. 뭐 사람들 관심을 끌 궁리에 여념없는 과학자들의 약팔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언제라도 영화 속의 핵전쟁 아포칼립스가 어느 순간에라도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단지 우리가 관심이 없을 뿐. 하긴 요즘은 핵무기나 외계인의 침공보다 좀비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 듯한.

문학동네에서 주목할 신작이 나왔다. 핵전쟁 가상 시나리오를 다룬 <24분>이다. 여기서 24분이란 북한이 발사한 ICBM이 워싱턴 상공에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저자인 애니 제이콥슨(Annie Jacobsen)은 밀리터리 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작가로 언론 기자이자 TV 프로그램 제작자. 아마존 스튜디오에서는 붉은 10월의 저자이자 밀리터리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시리즈의 TV판 제작을 맡았다. 2016년에는 <펜타곤의 두뇌>라는 책으로 퓰리처상 역사 분야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고. 수상은 못한 모양.

저자 아주매. 주로 전쟁과 무기, 첩보 등을 다룬다고. 이런 건 여자가 가까이 할 것이 못된다며 거부감부터 앞세우는 울 집사람과는.


이 책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핵공포의 시대가 처음으로 시작된 지 80여년이 지난 현재,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한다. <퓨쳐워 198X>에 나오는 것마냥 양측 군대가 대치한 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순간과는 거리가 멀다는게 오히려 긴장감을 자아낸다랄까. 그리고 평양 근교에서 갑자기 한발의 ICBM이 발사된다. 사거리 15,000km를 자랑하는 북한의 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화성-17였다. 실제로 북한은 몇번의 실패 뒤 2022년 11월 18일 시험 발사에 성공함으로서 미국은 물론 전세계 어디이건 핵무기로 때릴 수 있는 공격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 그 놈의 이밥에 고깃국은 못 먹어도 말이다.

딸래미 손잡고 신형 미사일 구경하는 김씨 아저씨. 세계적인 여류 밀덕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조기 특훈이랄지. 울 딸래미도 이랬으면.

ICBM이 향하는 곳은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심장부였다. 왜 북한이 미국을 향해 자멸이나 다름없는 핵공격을 감행하는지 이유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뜻밖에도 미국에게는 북한의 공격을 막을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한해 국방비가 북한 전체 GDP의 50배가 넘고 동맹국들에게는 MD 체제에 협조하라며 윽박지르던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 의외로 취약하다는 얘기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북한 미사일을 미국 대통령은 손가락 빨면서 지켜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몇 안 되는 방공 미사일이 발사되지만 죄다 빗나간다. 미국은 언제나 공격하는 쪽이지 공격받는 쪽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발사 24분 뒤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가에 300kt의 핵폭탄이 직격한다. 나가사키 이후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순간이었다. 그것도 맨하탄 계획으로 인류에게 핵공포의 시대를 열었던 미국 자신에게 말이다.

핵 전쟁은 레이더 화면의 깜빡이는 신호로 시작된다. 북한 시간으로 오전 4시 3분, 해 뜨기 전 어두운 시각이다. 수도 평양에서 32km 떨어진 황량하게만 보이는 들판 지면에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높이에서 거대한 불의 구름이 피어오른다. 북한의 강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즉 ICBM의 꼬리에서 뜨거운 로켓 배기가스가 뿜어나온다. 이 미사일은 이곳 흙바닥에 주차된 바퀴 22개 짜리 차량에서 발사된다. 분석가들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화성-17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 p.59(발사 후 0.4초)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말한다. "북한이 미국을 향해 공격용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진술처럼 들린다.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말한다. "NORAD와 STRATCOM 지휘관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알래스카 주 지상 레이더 기지에서 2차 확인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자문위원에게 훈련상황이냐고 묻는다. "이런 훈련이 아닙니다." - p.97(발사 후 3분 15초)

페어뱅크스 남동쪽 160km 떨어진 알래스카주 황야에서 조개껍데기 모양의 지하 저장고 문 여러 개가 활짝 열린다. 무게 2만2600kg, 높이 16미터에 달하는 요격 미사일이 프트그릴리의 미 육군 우주미사일방어사령부에서 공중으로 폭음을 울리며 날아간다. 요격 시스템의 목적은 미 본토를 핵 공격에서 제한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제한적'이라는 단어인데 이유는 요격 미사일이 도합 44발 뿐이기 때문이다. 2024년 초 기준으로 러시아는 1674발의 핵무기를 배치했고 그 중 대다수는 발사 대기 상태이다. 또한 중국은 500발 이상, 파키스탄과 인도가 각각 165발, 북한이 50발을 비축했다. 요격 미사일의 전체 보유량이 44발에 불과한 미국 요격 프로그램은 사실상 보여주기용이다. - p.117(발사 후 7분)

그는 버섯구름을 본다. 목장주의 증조부가 1900년대 초반에 이 땅을 샀다. 포드의 자동차가 발명되기도 전이다. 버섯구름이 땅 위로 솟아오르는 걸 보면서 그는 자기 눈을 믿지 못한다. 몽장주의 소들은 열복사에 의해 털이 그을린 채 언덕으로 달려간다. 그는 홀로 서 있다. 늙고 벌거벗은 남자. 그는 1945년 7월에 태어났다. 맨하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이 암호명 트리니티인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고 실험한 때와 같은 해, 같은 달이었다. - p.198(발사 후 24분)

뒤이어 워싱턴 교외 남쪽에 있는 미국의 중추부인 펜타곤에 두번째 ICBM이 떨어져서 펜타곤에 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워싱턴 전체가 잿더미가 된다. 미국은 북한의 핵공격을 막지 못했지만 그 대신 북한에 당한 것의 몇 배로 되갚아줄 능력은 있다. 20분 뒤 미 잠수함에서 발사된 트라이던트 핵미사일이 평양을 비롯하여 북한의 주요도시와 군사시설을 강타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북한 주민 수백만명이 먼지가 된다. 정작 그들 중에는 김씨 일가와 북한 지도부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이들은 평양에 멍청하게 앉아서 미국의 분노어린 공격을 기다리는 대신 이럴 때를 대비하여 건설한 핵벙커 속에 일찌감치 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벙커는 길게는 수십년 동안 자급자족하면서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먼 훗날에 땅 위로 기어나와서 자신들의 불장난으로 세상이 파멸한 모습을 감상할지도 모른다.

김정은은 마음만 먹으면 안전한 곳에 숨은 채 핵전쟁으로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놈들과 황야를 내달릴지도.

게다가 핵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북한은 최후의 발악으로 미국 상공에 EMP 폭탄을 터뜨려 미국 전체를 마비시킨다. 여기에 러시아와 중국 또한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으로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핵버튼을 누른다. 인류 멸망의 아마겟돈이 개막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어수선한 시대에 흔히 보는 작가의 뇌피셜 가득한 가상 군사 소설이 아니다. 여기에는 저자가 독점적으로 인터뷰한 전직 미 국방부 장관, 핵잠수함 사령관, 대통령 자문 등 그 방면의 권위자들의 증언이 등장한다. 물론 북한에게 어느 정도의 핵능력이 있는지, 이 책에 나오는 것마냥 정말로 그럴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대상이 러시아이건 중국이건 미국이 정말로 핵공격을 받았을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942년 8월 13일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맨하튼 프로젝트가 처음 발동했을 때 미국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만들지 않아도 히틀러가 만들 것이고 적어도 나치보다는 먼저 만들어야 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작 단 한발의 폭탄이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3년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고 공격을 당한 쪽보다 공격한 쪽이 오히려 겁을 먹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했다. 맨하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우리는 모두 개자식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며칠 뒤 일본의 항복으로 핵무기의 존재 가치는 사라졌다. 폐허가 된 일본 도시들의 참상은 인류가 가지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순간이 핵무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기왕 손바닥에 들어온 전지전능한 무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치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골룸처럼 말이다. 열강들은 너도나도 더 강력한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냉전이 끝난 뒤에도 정치인들의 탐욕은 핵공포 시대를 끝내지 못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자신을 비난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에게 핵공갈을 서슴치 않는다. 오늘날 인류는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누군가의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라도 한순간에 끝장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한편의 다큐멘타리를 책으로 감상한 느낌이다. 충격을 받기에는 충분하다. 과연 우리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이라도 우리가 아는 세상이 사라지고 폴아웃같은 아포칼립스가 열릴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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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만든 세계 - 500년간 지속된 서구의 군사혁명과 전쟁으로 가는 어두운 길
윌리엄슨 머리 지음, 고현석 옮김 / 미래의창 / 202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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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TV를 통해서 걸프전 뉴스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바그다드 상공을 무수히 수놓는 대공포 사격을 뚫고 주요 시설들을 정확하게 때리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과 스텔스 전투기들, 사막을 가로지르며 내달리는 미군 M1 전차 행렬,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이라크군 전차들을 사냥하는 A-64 아파치 편대,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에서 파괴하는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의 활약. 미군의 모습은 PTSD에 시달리고 약에 쩔었던 베트남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최첨단 무기의 향연이자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세계 4위의 군사대국이라고 자처하던 이라크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이전의 제2차 세계대전식 물량전이었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만만찮은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호된 맛을 보고 베트남전쟁에서는 게릴라들에게 쩔쩔 매던 미국은 걸프전에서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비로소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진정한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등극했다.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 당시 바그다드의 상황을 실시간 보도하는 CNN. 눈먼 폭탄을 쏟아붓던 과거 전쟁과 달리 스텔스 폭격기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위성과 GPS로 정밀 유도되는 스마트 폭탄의 등장은 이전과 다른 첨단 하이테크 전쟁의 개막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런 싸움은 오직 돈 많은 미국만이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와칸다는 23세기 무기로 무장한 중세 군대랄지.


걸프전이 전 세계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것에 비하여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은 12년 전의 재탕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전편을 능가하는 후속편은 없다는 할리우드 특유의 불문율이랄까. 미군은 여전히 압도적이었고 약체화된 이라크군을 토끼몰이하듯 분쇄했다. 승리는 거두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등장한 무기들도 좀 더 성능이 개선되었다는 것 이외에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아들 부시와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무계획성은 후세인 사후의 이라크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하이테크 만능론에 빠져 있던 미군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다. 미군의 값비싼 첨단 무기는 눈에 보이는 적은 몰라도 대중 속에 숨어서 암약하는 게릴라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 부시가 대히트를 친 작품을 아들 부시가 말아먹은 격이었다.

이라크 전쟁이 걸프전의 실패한 후속편이라면 제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쪽은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모습은 미군의 첨단 무기 앞에서 구닥다리 무기로 맞서는 이라크군과도 다르고 민간인을 고기 방패삼아 상대가 알아서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무한 소모전을 벌이는 탈레반이나 하마스와도 다른, 전혀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최전선에서는 우크라이나 로봇이 뛰어다니면서 러시아 전차와 보병을 사냥하고 드론이 상대편 후방 시설을 때리며 인터넷에서는 러시아의 딥페이크와 가짜 뉴스가 판을 치면서 여론을 왜곡한다. 만약 드론과 로봇이 아니었다면 우크라이나는 제아무리 서방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들 3년씩이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세계 각국 언론들은 이것이 진짜 미래전쟁이라며 어서 대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특징은 드론과 로봇이 더 이상 보조병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광선검 들고 제다이처럼 무쌍찍는 거대 로봇은 아니라도 로봇 개에서 한층 진화하여 중화기로 무장하고 고기동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저런 다족 병기를 만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듯.


돌이켜보면 우리네 세상은 정말 급변하는 느낌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상상 속의 무기들이 현실화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빨리 변화하는 순간이 있었을까. 만약 을지문덕 장군이 타임머신 타고 1천년 뒤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에 뚝 떨어져서 조선군의 지휘를 맡는다고 해도 그리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이 화기가 등장했다고 하지만 주력 무기는 여전히 냉병기이며 싸움 방식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물렁한 조선군이 대륙을 누비던 고구려의 개마무사 조상님들을 이길 수 있을지가 더 의문이. 알렉산더 대왕이 카이사르 시절에 와도 여전히 그는 위대한 왕이며 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로마 군대에게도 무서운 적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21세기 전쟁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규모는 커지고 입체적이며 군대는 전문화되었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한다. 무기의 발전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재앙적인 살육전은 늙고 고루한 장군들이 산업혁명이 불러온 변화를 무시하고 젊은 시절의 방식을 고집한 결과였다. 푸틴의 잠 못 드는 밤을 선사한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러시아군은 2년 동안 죽을 쑤고 푸틴이 무능한 똥별들 여럿 목을 날리고야 비로소 승기를 굳힐 수 있었다. 그것도 극동의 가난뱅이 동생 북한에까지 손을 벌이고 소울 친구 트럼프가 물심양면 편들어 준 뒤에 말이다.

앞으로 30년 뒤의 전쟁은 또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지금보다 훨씬 무인화, 첨단화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을 듯하다. 훈련소 입소 후에 제일 먼저 받는 제식 훈련은 수백년 전 전열 보병 시절의 유물이지만 군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절도와 복종심, 동질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우주세기의 군인들도 제식 훈련만큼은 우리와 똑같지 않을까.

미래의 창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 도서 <전쟁이 만든 세계>는 15세기 화약 무기가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500여년의 시간 동안 전쟁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오하이오 주립 대학 명예 교수이며 육군대학과 항공전 대학, 해군전쟁대학, 사관학교 등에서 역사와 외교를 강의한 전쟁사 전문 교수이다. 2023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수십편의 저서 중에서 이번 책은 최신작으로 저자의 유작이기도.

이 푸짐한 몸매의 영감님이 저자인 윌리엄슨 머리 교수. 보기에는 이래도 젊은 시절에는 미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C-130를 몰았다고.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주된 내용 또한 여느 책들마냥 몇몇 전쟁에 대한 단편적이고 뻔히 아는 사실을 단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전쟁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으며 그럼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이다. 전쟁사 교수로서 어째서 전쟁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당위성을 짚어준 셈이다. 저자는 근세 이후 총 다섯번의 군사 혁명이 있었다고 규정한다. 그 중 첫번째가 화약 무기의 등장이었다. 백년전쟁에서 처음 사용한 대포는 원시적이고 거의 쓸모가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일회성 무기로 끝나는 대신 유럽 각국들이 그 가능성에 주목하여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성능을 개량했으며 전술 또한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수천년 동안 창, 칼, 활로 육탄전을 벌이던 인간들의 싸움을 바꾸어 놓았다. 제아무리 항우의 용력, 장비의 용맹함, 관우의 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총알 한발이면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정작 화약을 더 빨리 발명한 중국이나 한 때 유럽 전체를 위협했을 만큼 강성했던 오스만 제국이 어째서 군사 혁명을 주도하지 못했는가이다. 이들의 화약 기술은 16세기에서 사실상 정지해 버렸다. 적어도 인력과 자원이 유럽보다 부족했던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들 국가들이 혁신과 적응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중국과 오스만 제국은 주변에 강력한 경쟁 상대가 없었다. 무사안일에 젖은 권력자들은 외부의 적보다 궁중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 채 반란 진압과 권력투쟁에 급급했고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네들 보기에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 더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 반면,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는 유럽국가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투닥거리며 싸웠다. 화약무기를 이용한 전쟁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가 전쟁에서 이겼고 그러기 위해서 금은보화를 찾아 신대륙 개척에 나서면서 우리가 아는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만약 중국이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춘추전국시대가 지금까지 내려왔다면,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이후의 역사는 또 달랐을까. 알 수 없다. 어쨌거나 큰 나라 세우는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석기시대부터 중세시대까지 전술 구성은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평화시에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고 전장에서의 응용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14세기 스위스 전투 대형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팔랑크스와 유사했다. 또한 서기 3세기의 파르티아의 중갑 기병대도 중세의 중갑 기사들의 방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주요 그리스 전함은 트리레미스였다. 이 형태의 전함은 16세기까지도 지중해 해군의 중추로 남아 있었다. 지중해에서 함선 설계와 해전 방식이 바뀐 것은 갤리선에 대포가 도입된 이후였다. - p.28

1543년 영국인들은 주철 대포를 만드는 법을 발견했다. 주철대포는 청동대포에 비하여 효과는 떨어지고 폭발할 가능성이 있어서 더 위험했지만 만들기 쉽고 제조 비용이 2/3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저렴한 철제 대포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포 가격이 낮아지고 사용 가능한 대포 수가 많아지면서 범선에 충분한 무기를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범선은 갤리선보다 더 효과적인 전쟁 무기가 되었다. - p.55

유럽 국가들 간의 끊임없는 충돌은 무기와 전술, 전쟁을 뒷받침하는 병참과 재정의 기본 구조에 변화와 적응을 가져왔다. 이런 변화는 육지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바다와 해양에서도 일어났다. 유럽인들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적응한 반면,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할 능력이 없는 국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15세기의 새로운 선박 설계 및 건조 방법같은 기술 변화는 군사 분야로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 p.78

더 중요한 사실은 화약 혁명이 돈키호테같은 기사들을 몰락시킨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커졌으며 산업혁명을 촉진하고 사회를 변화시켰다.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서 관료조직은 전문화되고 근대적인 조세제도와 통치 기반이 등장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오면 승리를 위해서 국가 전체가 총동원되는 총력전 시대가 열렸다. 물론 이런 발전은 유럽에만 국한된 얘기였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국가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수백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서양을 재빨리 모방한 일본이었다.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던 중국은 일본보다 한발 늦게 서구화에 나섰지만 신해혁명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변화는 매우 느렸고 최초의 총력전이었던 중일전쟁에서 일본에 시종일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수천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인류 문명이 갑자기 상승곡선을 타게 되었는지, 그런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세상을 어떻게 바꾸게 되었는지를 두루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두 번의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 그리고 가장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른바 '군사 혁명'이라고 할 만한 전쟁의 변천사가 담겨 있다.

나폴레옹 전쟁의 사상자 수는 그 후에 일어날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황폐화시킨 15년 동안 양측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는 200~300만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30년 전쟁의 사망자 수치와 비슷하다. 나폴레옹 전쟁은 30년 전쟁의 반 밖에 안 되는 기간 동안 같은 수의 사망자를 냈던 것이다. 2세기 동안 유럽의 전쟁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었다. - p.171

근대국가들이 전쟁에 엄청난 인구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영향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4차 군사-사회 혁명은 근대국가가 유럽의 대규모 전쟁의 경제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우려를 종식시켰다. 농업의 발전으로 전장의 군대와 본국의 노동력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식량과 사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근대 국가는 전례없는 막대한 자금과 자워을 동원해 탄약과 무기를 생산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전쟁터로 보낼 수 있었다. - p.229

나폴레옹 전쟁의 사상자 수는 그 후에 일어날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황폐화시킨 15년 동안 양측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는 200~300만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30년 전쟁의 사망자 수치와 비슷하다. 나폴레옹 전쟁은 30년 전쟁의 반 밖에 안 되는 기간 도안 같은 수의 사망자를 냈던 것이다. 2세기 동안 유럽의 전쟁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었다. - p.171

제1차 세계대전이 끔찍하게 오래 지속되고 엄청난 희생을 초래한 이유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의해 촉발된 광기와 산업혁명의 결합으로 일어난 제4차 군사-사회 혁명의 결과였다. 프랑스 혁명은 근대 국가가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 및 관료 구조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즉, 프랑스 혁명은 이 전쟁에 동기와 수단을 모두 부여했다. - p.295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인 전간기에 기술과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1930년대 중반 등장한 레이더가 몇 안 되는 예외적인 경우로 보일 만큼 놀라운 기술적 전진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제1차 세계대전의 무기들은 전장에서 효율성이 크게 개선되었고 군사 교리와 전술 개념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군사조직이 전투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는 무기 시스템의 숫자가 아니라 전술 및 작전 시스템의 문제였다. 따라서 평시 훈련과 연습을 얼마나 많이 제대로 수행했는지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향을 미쳤다. - p.307

또 다른 대전쟁의 발발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군사적 사회적 교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의 결합은 다시 전장을 흔들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독일의 일시적인 승리는 전쟁 수행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은 "변화가 거듭될수록 본질은 더욱 한결같아진다."라는 격언을 증명했다. 나치즘과 소련 공산주의의 본질적인 특성은 전쟁을 전례없이 격렬하게 만들었다. 이 전쟁은 나치 독일과 소련 둘 다 거대한 산업국가였음에도, 그 어떤 기술적 또는 군사적 발전도 두 교전국을 소모전이라는 불변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p.391

1970년대 초부터 이루어진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소련은 점점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989년 소련 붕괴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전임자들과 같은 무자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고르바초프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의 전임자였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소련은 몇 년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경제는 더 이상 괴물같은 국방 체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 p.579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금의 시대를 제5차 군사혁명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핵무기의 등장이 아니라 IT 기술의 발전이다. 무기는 더욱 정교해졌고 훨씬 파괴적이다. 사이버 전쟁은 전후방 구분이 없다. 여차하면 인류 문명을 끝장내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다. 동시에 인류 문명을 끌어올리는데도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 휴대폰, GPS, 인터넷 등 수많은 이기들은 원래 전쟁 무기에서 비롯되었다.

나같은 길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GPS 네비게이션. 원래는 이동식 핵미사일 유도를 위한 기술이었지만 민간에 개방한 사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명장이었던 윌리엄 셔먼 장군은 남부를 행진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해서 "전쟁은 잔인한 것이오. 그걸 바꾸려고 할 필요는 없소. 그래야 빨리 끝나는 법이오."라고 일축했다. 전쟁은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고 또 누군가는 PTSD를 얻기도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전쟁이 인류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전쟁은 파괴를 낳고 파괴는 창조로 이어진다는 점이 아이러니이다. 만약 인간에게 투쟁심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에서 머물렀을지도.

출판사에서는 <전쟁이 만든 세계>라고 의역했지만 원제는 <어둠으로 가는 길(The Dark Path)>이다. 기술 발전으로 전쟁은 나날이 참혹해지고 있음에도 정작 전쟁을 결정하는 정치인들은 오히려 갈수록 역사에 무지몽매한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서 과거의 교훈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걸프전 이후 미국이 실패를 거듭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얘기. 그 중 최악은 말할 것도 없이 트럼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역사책은 커녕, 그 어떤 책도 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촌철살인같은 평가랄지.


저 코믹한 얼굴을 보면 막연한 편견보다는 의외로 재미있는 사람일지도. 특유의 고집과 괴팍한 성질머리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중간중간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올해 들어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전쟁사 최고 전문가다운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필력으로 마치 5편짜리 전쟁 다큐멘타리를 보는 느낌이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상을 뭉떵그려서 제5차 군사혁명이라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이미 제6차 군사혁명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싶다. 인간 대신 로봇이 전장을 지배하는 시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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