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굶주림 - 우크라이나 대기근, 기획된 종말
앤 애플바움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의 여파 속에서 개막한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면서 막을 내린 지 불과 한 달여 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4시, 20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푸틴은 자신의 행위가 침략이 아니라 돈바스의 친러시아 주민들을 우크라이나의 위협에서 보호하기 위한 ‘특별군사작전’에 불과하다고 선언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개전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의 피해를 초래했을뿐더러, 돈바스 주변에서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내는 것을 넘어서 수도인 키이우를 노렸다. 그의 진짜 속셈은 이참에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자신에게 충실히 복종하는 괴뢰정권을 세워서 러시아의 속국으로 삼는 데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사흘이면 백기들고 항복할 거라고 여겼던 푸틴의 안이한 생각과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은 끝까지 버텨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망명을 거부하고 수도에 남아서 항전을 지휘한 덕분이었다. 특히 포화가 쏟아지는 수도 한복판에서 그가 SNS에 직접 올린 “나는 키이우에 남을 것입니다.”라는 영상은 전 세계에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때까지 코미디언 출신의 아마추어 지도자로만 여겼던 젤렌스키를 온 세상이 다시 보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사기가 올라간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을 막아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2014년 크름 반도를 무기력하게 빼앗겼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병참선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전쟁의 첫 번째 전환점이자 푸틴의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강 건너 불구경하던 미국과 서방은 그제야 우크라이나가 이길 수도 있다는 것에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개전 이틀 째인 2월 25일 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젤렌스키의 SNS 영상. 제 가족과 재산만 챙겨 해외로 달아난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나 아프간의 아슈라프 가니같은 쓰레기들과 달리, 그는 망명을 권유하는 미국을 향해 "내게 필요한 것은 피신차량이 아니라 무기입니다."라고 단칼에 거절했다. 이전의 부패하고 무능한 우크라이나 지도자라면 보여줄 수 없는 결단력이었다.


유엔이 러시아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전 세계가 공분하는 가운데, 여기에 앞장서야 할 서방의 일부 지식인들은 도리어 푸틴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두둔하고 나섰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지만(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따지고 보면 우크라이나도 잘한 것은 없다는 둥, 전쟁 책임은 푸틴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돈바스의 친러 분리주의자들을 탄압한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포위할 요량으로 우크라이나를 무책임하게 선동했던 미국, 공공연히 나토 가입을 떠들어 푸틴을 자극했던 젤렌스키의 분별없는 행태가 더 크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은 물론이고 러시아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어떤 제제조차 실효성이 없다는 핑계로 발목잡기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와 그리 좋은 인연이 없는 국내에서도 함부로 푸틴에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군 장성 출신의 어느 정치인은 "우크라이나는 6.25 때 우리의 적이었는데 왜 도와야 하느냐"고 질타하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말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 정치하는 양반들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무지하며 여전히 구한말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냉전 시절 우크라이나가 구소련의 일부였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 뿐, 우크라이나가 어쩌다가 소련에 편입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입장 바꾸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중국의 일방적인 선전만 듣고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카더라."라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지난 4번의 중동전쟁이나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두 나라가 지역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이 극심한 경제난과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을 외부로 돌릴 속셈에 의도적으로 영국을 도발했다가 여지없이 박살났던 포틀랜드 전쟁과도 다르고 인도-파키스탄의 영토 분쟁과도 다르다.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총을 쏘아서가 아니라 푸틴이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믿고 약자인 우크라이나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침략전쟁이다. 그런 점에서 1937년 일본의 군부 모험주의자들이 저지른 불장난에서 비롯된 중일전쟁과 1939년 스탈린의 핀란드 침공, 1940년 무솔리니의 충동적인 그리스 침공을 연상케 한다.

푸틴은 그동안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부득이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사실상 무장 해제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토가 러시아에 무슨 위협이 되었으며 유럽이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쏙 빼놓은 억지일 뿐이다. 그보다도 미국과 서방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쪽에 따질 일이지 만만한 우크라이나를 때리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평화를 깨뜨린 쪽은 서방이나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푸틴이지만 자신의 의심은 언제나 정당하며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합리적 의심을 들도록 만든 것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는 것이 그 양반 논리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푸틴은 우크라이나라는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왔다는 점이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였으며 1991년에 독립을 허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러시아의 품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전에 이혼한 옛 마누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마음을 돌리도록 애쓰기보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폭력을 서슴치 않는 러시아 남자 특유의 썩어빠진 마초 근성을 보여주는 게 푸틴이랄까. 정작 자신은 마누라를 몇번이나 갈아치웠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는 서방의 압제에서 해방할 동포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우크라이나의 자원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의 식민지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때부터 이어져 온 러시아인들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결같은 태도이다.

러시아군 철수 후 부차에서 발견된 시신 더미들. 부차만이 아니라 러시아군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 전쟁 범죄의 현장이었다. 푸틴으로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 의지를 철저히 짓밟고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멀고도 먼 나라이지만 우크라이나가 당하는 모습은 결단코 남의 집 불구경할 일이 아니다. 우리 이웃에는 푸틴 이상으로 탐욕스러운 독재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다. 실제로 시진핑은 예전에 트럼프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라고 발언하여 뒤늦게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트럼프 이후 제 잇속만 챙기는 행태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중국이 그 빈틈을 노리고 있다. 오늘의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우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침략으로 망국의 황제가 된 하일레 셀라시에가 국제연맹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이며 여러분의 내일이 될 것입니다.(It is us today. It will be you tomorrow.)"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쏠리면서 시중에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이 나왔지만, 글항아리 출판사의 신작도서인 <붉은 굶주림>은 그 중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눈물'을 다룬 책이다. 어째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그토록 러시아에 이를 박박 갈면서 푸틴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하는지 이유가 담겨 있다랄까. 저자인 앤 애플바움은 미국 언론인이자 여류 역사학자로서 대표적인 반러 반푸틴 학자이기도. 특히 2000년 푸틴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많은 서방 지식인들은 그가 비록 독재 성향은 있지만 친서방에 실용적이며 적어도 말은 통하는 상대일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착각인지 지적하여 논란을 일으켰다고.

이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저자인 앤 애플바움 교수.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에서는 기피인물이며 트럼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홀로도모르(Holodomor)'란 우크라이나어로 대기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책은 스탈린 시절인 1932년~33년 지구에서 가장 풍요로운 옥토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다루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500만명이 아사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600만명이라고 하니 여기에 비견될만한 참사였다. 기근의 원인은 경신대기근처럼 소빙하기나 천재지변이 닥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엉터리 농업 정책이 초래한 결과였다. 이들은 니콜라이 2세의 가장 무능한 관료들조차 감히 하지 않을 국가적 자살이나 다름없는 정책을 인민들에게 강요했다. 심지어 농업 총책임자였던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는 식물들도 마르크스 이념에 따라 계급투쟁을 한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비료와 살충제를 쓰지 못하게 하여 농사를 완전히 망치는 데 일조했다.

기근은 소련 전역에서 벌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우크라이나였다. 남편이 아내를 잡아먹고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카니발리즘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소위 강성대국의 꿈에 눈이 먼 스탈린은 외화 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식량까지 빼앗아 외국에 수출했다. 국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한 셈이었다. 그에게 인민은 구제가 아니라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경고를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인양 취급하면서 눈과 귀를 막고 고집스레 현실을 부정했던 스탈린은 체제 자체가 무너질 판국에 몰린 뒤에야 자신이 한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반성과 개혁이 아니라 한층 강력한 통제와 억압이었다. 나는 옳았지만 남들이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은 우주의 섭리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스탈린의 편협한 사고방식이었다. 게다가 불만 가득한 인민들의 분노를 억누르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나머지 더욱 편집광적인 공포와 광기에 사로잡혔다. 결과는 스탈린 치세 내내 광풍으로 불어닥칠 ‘대숙청(Great Purge)’이었다.

하르키우의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사자의 시신들. 피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할 요량으로 일부러 대기근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반면, 러시아 학자들은 소련 전체에서 광범위한 기근이 초래되었다는 점에서 스탈린이 의도했다기보다 잘못된 경제 정책의 결과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서 최악의 대기근이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막대한 식량을 강제 공출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가 제정 러시아의 일부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언젠가 퀴리 부인 전기에서 나라 잃은 민족으로 말과 글을 쓸 수 없는 설움을 겪었고 옛 조국인 폴란드를 기리기 위해 자신이 발견한 원소에 '폴로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일화를 읽었는데 그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갖은 구박에 시달렸던 것이 우크라이나. 원래 인간이란 내가 남에게 저지른 건 까먹어도 남한테 당한 건 두고두고 기억하는 법이라.

그런 우크라이나에게 가장 큰 실수는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었을 때 독립 국가를 세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잠시나마 그들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잠시 세웠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독일과 폴란드, 소련의 침략, 무엇보다도 독립의 의지가 아직은 부족했기에 4년 만에 멸망했다. 레닌은 제정 러시아의 유산, 특히 '러시아의 빵바구니'였던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나라는 둘로 쪼개져서 서부는 폴란드에, 동부는 소련에 흡수되었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민족들 역시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거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레닌의 약속만 믿고 독립을 포기했다. 이들이 볼셰비키의 거짓말에 속았음을 깨닫고 땅을 치고 후회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련 체제의 일원이 되는 것은 독립을 위해서 무수한 피를 흘리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악몽이었다.

짧은 존속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정부는 얼마나 외교적 성공(나중에는 대부분 잊힌)을 거두었다. 1918년 1월 20일 독립 선언을 한 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스물여덟살 난 외교장관 올렉산드르 슐힌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튀르키예, 심지어 소련을 포함한 모든 주요 유럽 국가들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얻어냈다. 12월에는 미국이 외교관을 보내 키이우에 영사관을 열었다. - p.58

레닌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보낸 전문 내용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기도 힘들었다. 그는 1918년 1월에 이렇게 썼다. "제발 부탁이오. 모든 힘과 혁명적 수단을 써서 곡문을 보내시오. 곡문을, 곡물을! 그러지 않으면 페트로그라드는 굶어 죽을 것이오." 3월 초 우크라이나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에 빠르게 빼앗기자 모스크바는 분통을 터뜨렸다. 성난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과 고집스러운 농민 지지자들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달아난 우크라이나 볼세비키도 욕했다. - p.74


1919년 레닌에게 곡물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집단 농업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 공화국의 문제가 의제로 떠오를 때마다 그는 곡물 문제부터 꺼냈다. 우크라이나만 언급되면 레닌은 매번 얼마나 많은 곡물이 그곳에 있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나 가져올 수 있느냐, 또는 이미 가져온 게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 p.91

10년 뒤에도 그랬듯, 농민들은 개, 쥐, 벌레를 먹기 시작했다. 잎사귀와 풀을 끓여 먹었다. 식인 행위도 간혹 일어났다. 가까스로 사라토프에서 리가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던 일단의 피난민들은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낡은 쓰레기차들이 매일 돌아다니며 시체를 모았다. 사람들이 보통 쓰레기를 뒤지다가 쓰러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페스트에 걸린 시체들을 숱하게 봤다. 이런 사실은 소련 언론에 전혀 나오지 않았다. 관리들은 전염병이 돌고 있음을 대중에 알리지 않았다." - p.143

한때 러시아 전역을 전란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던 적백내전은 1920년에 오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다. 핀란드와 발트 3국, 폴란드 동부를 제외하고 제정 러시아 영토 대부분은 소련으로 계승되었다. 우크라이나도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내전의 끝은 안정의 시작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고난이 닥쳤다. 새로운 적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레닌의 '신경제 정책'이 자초한 결과였다. 차르 체제를 가리켜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이상주의를 앞세운 무모한 실험으로 소련 인민의 번영은 커녕 경제적 파국을 초래하고 나라 전체를 아사에 내몰았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이제부터였다. 레닌 사후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가장 광기어린 절대 권력자였다. 그가 진시황이나 네로, 이반 대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한 광기를 넘어서 자신만의 비뚤어진 신념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인민의 일거수 일투족은 물론, 필요하다면 우주의 진리까지 내 방식으로 바꾸겠다고 굳게 결심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손에는 조금도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잘 되면 내 덕분이요, 안되면 남탓으로 돌려서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는 비범한 재주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공포와 폭력으로 인간의 저항 의지를 어떻게 해야 굴복시킬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불만을 떠넘길 희생양을 교묘하게 만들어내어 죽는 순간까지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권력을 유지했다. 그 방법은 약자 중 한쪽을 '쿨라크(반동)'라고 규정하고 인민의 적으로 만들어 서로 싸움 붙이는 것이었다. 30년이나 이어진 스탈린 체제는 소련 인민 전체에게 악몽이었지만 그 중 가장 큰 피해자는 우크라이나였다. 특히 '대기근' 시절 이 비옥한 땅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수많은 증언과 폭로는 충격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1927년이 되자 체제는 다시 불안정해졌다. 그해 국가는 540만 톤의 곡물을 확보했다. 그러나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관료들에게 엄격하게 규정된 양의 빵을 나눠주던 식량 배급 기관은 곡물 770만 톤을 기대하고 있었다. 전 연방 조사에서 OGPU는 소련 전역의 식량 배급 줄에서 '폭도 진압과 고성을 지르는 싸움'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 p.187

코펠레프와 나디아,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람들은 불만에 찬 시간을 보내왔다. 볼셰비키는 인민에게 부와 행복, 토지 소유권, 권력을 선물하겠다느 대담한 약속을 했다. 그러나 혁명과 내전은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혁명 후 10년이 지나자 많은 사람이 실망했다. 그들에게는 볼셰비키 승리가 왜 공허한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했다. 공산당은 그들에게 희생양을 제공해 왔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부추겼다. (중략) 어느 날 한 농부가 그에게 쿨라크를 너무 잔인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자 다비도프는 격렬하게 반박했다. "당신은 그들이 불쌍하군요. 동정심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우릴 불쌍히 여긴 적이 있습니까? 적들이 우리 아이들의 눈물을 보고 운 적이 있나요? 부모가 죽은 뒤 남겨진 고아를 보고 운 적이 있단 말입니까?" - p.245

때로는 몰수가 신속하게 폭력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체르니히우 주에서는 지역 단체들이 한겨울에 한 농민 가족을 집에서 내쫓았다. 길에서 온 가족의 옷을 벗겼고 난방도 되지 않는 건물로 끌고 가서 그곳을 새집으로 정해줬다. 베레즈네후바테 현에서는 열두 살 소녀가 셔츠 한벌만 빼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옷이 벗겨진 채 어머니와 함께 거리로 내쫓긴 아기도 있었다. 한 활동가 단체는 10대 소녀의 속옷을 빼앗은 다음 알몸으로 길거리에 방치하기도 했다. - p.263

비밀경찰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의 시위가 집단화를 늦췄지만 국가는 대량 체포, 대량 추방, 대량 탄압으로 반격했다. 공산당은 일단 기다린 후 밀어붙였다. 스탈린이 '도취할 만한 성공' 기고문에서 사용한 온건한 말은 결국 말에 불과했음이 입증되었다. 동일한 정책이 계속 적용되었고 심지어 더 가혹해졌다. 1930년 7월 격렬한 3월 열병 시위가 일어난 지 불과 몇달 후 정치국은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1931년 9월까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주요 곡물 재배 지역의 가구 중 최대 70퍼센트를 집단 농장에 가입시키는 것이었다. 1930년 12월 정치국 위원들은 자신의 열의를 증명하기 위해 목표를 전체 가구의 80퍼센트로 상향 조정했다. - p.324

스탈린의 바람대로 교육적인 언론 캠페인이 이어졌다. 법령 발표 후 2주가 지나자 프라우다는 붉은 건설자 집단 농장의 밭에서 곡물을 훔친 쿨라크 여성 그리바노바 사건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우크라이나 언론은 오데사에서 절도죄로 총살당한 부부의 이야기를 포함한 세 건의 재판을 자세히 보도했다. 보도된 다른 사건 중에는 열 살짜리 딸이 주운 소량의 밀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총살당한 농민의 사건도 있었다. - p.364

여러 젊은 집단 농부, 마을 소비에트와 코펠레프 자신으로 구성된 팀들이 오두막, 헛간, 마당을 수색하고 저장한 씨앗을 모조리 빼앗고 소와 말, 돼지를 가져갔다. 그들은 성상, 겨울 외투, 카펫, 돈을 비롯한 귀중품은 무엇이든 가져갔다. 여성들은 집안의 가보를 붙잡고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지만 수색은 멈추지 않았다. 코펠레프 자신도 이 일이 매우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혐오스러운 선전을 끊임없이 반복하면 당면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p.451

일부 매장 팀은 무관심을 넘어 잔인한 수준에 도달했다.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의 생존자들은 심하게 아픈 사람들이 생매장당했다고 반복해서 증언했다. "반쯤 살아 있는 사람을 묻기도 했습니다. '시체'들은 이렇게 외쳤어요. '선량하신 여러분, 절 내버려두세요. 전 죽지 않았습니다.' 대답은 이랬어요. '지옥에나 떨어져! 내일 또 오란 말이야?'" 또 다른 팀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데리고 갔는데 어차피 내일이면 다른 거리에 쓰러져 있을테니 지금 데리고 가서 '시체' 하나 당 더 많은 보수를 받아 음식을 챙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총을 쏘지도 않았습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밀어넣었죠." 심지어 가족들도 죽어가는 가족 구성원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 p.499

1932년부터 쿠반에 숨어 있는 젤렌키 주, 보후슬림스키 현 출신의 50세 쿨라크 여성이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옴. 그녀는 호로디센스카 역에서 코르순으로 가던 중 지나가던 열두 살 소년을 유인해 목을 그었음. 자익와 다른 신체 부위를 가방에 넣었음. 호리디세 마을에서 살던 시민 셰르스튜크가 하룻밤 재워줌. 그녀는 송아지 장기라고 속이고 노인에게 심장을 삶고 구워달라고 함. 노인의 온 가족이 그 심장을 먹었고 노인 자신도 먹었음. 밤이 되자 가방에 있는 고기 일부를 더 사용하려고 하던 노인이 잘게 잘린 신체 일부를 발견함. 범인들은 체포됨. - p.504

소비에트의 공식적인 세계에서 우크라이나 기근은 더 광범위한 소련 기근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신문에 나오지 않았고 대중 연설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와 지역 지도자 모두 기근을 언급하기는 커녕 앞으로도 언급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1921년에는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원조를 요청했다면 1933년의 대응은 소련 내외부 모두에서 심각한 식량 부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목표는 기근을 치우는 것, 기근을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 p.578

스탈린은 자신이 사실은 아주 무능한 인간이며 직접 관여했을 때 일이 잘되기보다 주로 망치는 쪽임을 인정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더 중요한 점은 그에게 감히 도전할 용기가 없었던 소련 인민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서방 세계 또한 침묵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지배는 '지옥의 식민지'라면서 악명 높았으며 국제 사회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특파원이었던 시어도어 화이트는 중국 허난성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폭로하여 장제스 정권을 궁지에 내몰기도 했지만 무능한 지도자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초래한 천재지변이었다. 정작 서방 기자들은 소련에서 평화로운 시절에 벌어진 대기근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했다.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 있게 폭로한 소수의 동료들을 비난하는데 앞장섰다. 서방 좌파 지식인들의 선별적인 분노와 이중 잣대가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서방 정부 역시 정치논리에 따라 소련의 치부를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이유로 방관했다. 이들은 엄연히 스탈린 체제의 공범자들이었다.

작가인 버나드 쇼는 1931년 하원의원 낸시 애스터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자신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현외에 참석했다. 연회는 그의 기호를 고려해 채식 요리로 전비했다. 쇼는 매우 들뜬 기분으로 소련 관료와 저명한 외국인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 그는 주최측에 감사를 표하면서 자신을 반소련 유언비어 유포자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여행 중에 먹으려고 음식 통주림을 주었다고 청중에게 말했다. "친구들은 러시아가 굶주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련 국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폴란드에서 모든 음식을 창밖으로 던져버렸죠." 한 기자는 청중이 숨을 맺을 듯 조용해졌다고 회상했다. "영국산 소고기 통조림 하나면 모임에 참석한 노동자와 지식인 가족은 기억에 남을 휴일을 즐겼을 것이다." 적어도 일부 소련 지식인들은 이 거만한 외부인에게서 냉소적인 피로감을 느꼈다. - p.597

월터 듀린티의 씁쓸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게임을 특히 잘 수행한 사람드에게는 추가적인 보상이 제공되었다. 듀런티는 1922년부터 1936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역할 덕분에 한동안 상당한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정권에 매우 유용한 존재로 여겨졌고 모스크바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를 받았다. 그는 큰 아파트에서 살았고 장도차와 애인이 있었으며 어떤 특파원보다도 접근 권한이 높았고 모두가 탐내는 스탈린과의 인터뷰를 두번이나 할 수 있었다. 그가 소련에 아첨하는 보도를 한 주 동기는 그러한 보도를 통해 누릴 관심이었을 것이다. - p.601

1933년 말 새로운 루스벨트 행정부는 소련을 둘러싼 나쁜 소식을 무시해야 할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았다. 대통령 참모진은 독일이 발전하고 있고 일본을 봉쇄해야 할 필요도 있기에 이제는 미국이 모스크바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루스벨트는 중앙 계획 경제와 자신이 생각했던 소련의 엄청난 경제적 성공에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상업적으로도 유익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 p.617

제정 러시아 시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농노였다면 스탈린 시절에는 아예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아야 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일제 36년 동안 우리의 경험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무리 일제의 지배가 억압적이었다고 해도 적어도 수백만명이 굶어죽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레닌의 말만 믿고 독립을 쉽사리 포기한 댓가를 뼈저리게 치른 셈이었다. 지금에 와서 제아무리 푸틴이 동포 운운하면서 서방 대신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오라"라고 회유한들, 우크라이나가 베알이 없지 않고서야 순순히 굴복할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푸틴은 과거사를 인정하기는 커녕 시계바늘을 그 시절로 되돌릴 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홀로도모르는 단순히 스탈린 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괴물을 만들어낸 공산주의 체제의 산물이었다. 설령 스탈린이 없었어도 똑같은 일은 벌어졌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외치던 19세기의 독일은 산업혁명 속에서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피를 무한 흡입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썩어빠진 세상을 때려 부수고 싶은 마음이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알았지만 정작 자신의 모순은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였다. 말로는 민주와 평등을 외치면서도 그 방법은 대화와 설득이 아니라 공포와 폭력이었다. 만약 그가 한 세기 뒤에 자신의 추종자들에 의해 벌어질 참사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나는 옳은데 무식한 놈들이 내 뜻을 함부로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이 저주받을 사상을 쓴 내 손목아지를 자르겠다고 했을까. 실로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디츠 - 나치 포로수용소를 뒤흔든 집요한 탈출과 생존의 기록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터넷에 병맛 이탈리아군 유머가 있다. 한 영국군 장교가 이탈리아군에게 포로가 된 뒤 아주 거한 대접을 받자 최후의 만찬인가 했는데 도리어 실수로 병사 식단을 줬다면서 사과하더라는 것. 그럼 이탈리아군 기준에서 장교다운 대접은 어느 정도라는 건지. 물론 일본 네티즌들이 지어낸 황당무계한 뇌내 망상일 뿐이다. 제아무리 물렁하기로 이름난 이탈리아라도 상대가 무슨 이용 가치가 있어서 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한낱 포로 따위에게 만찬을 베풀 이유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이탈리아는 그렇게 먹을 것이 넘쳐나지 않았다.


<걸즈앤판처>에서 이탈리아를 모티브로 한 안치오 고교의 먹방 소녀들. 간식비 아껴서 전차를 사는 동네인지라. 일본을 모티브로 한 치하탄 고교에서 반찬으로 단무지와 짠지만 나와도 진수성찬 타령하는 것과는 대조적. 일본인들의 이탈리아군 이미지를 보여주는 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 생활은 천차만별이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포로가 되는 것이 군인으로서 불명예스럽다고는 해도 전장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시달리기보다 차라리 전쟁 끝날 때까지 포로 수용소에 있는 쪽이 훨씬 안전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그런 선택을 한 병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우선 백기들고 항복한다고 해서 적군이 살려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퓨리>에서도 잔뜩 격앙된 미군 병사들이 살려달라는 독일군 포로를 즉결처형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통계에서는 한창 싸우다가 항복했을 때 그 자리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대략 절반 정도였다나.

게다가 무사히 포로가 되어서 포로 수용소로 끌려간다고 해도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1929년 7월 27일 제3차 제네바 협정은 인도주의에 따라 전쟁 포로에 대한 고문과 학대를 금지했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한쪽이 가맹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포로들을 고문, 학살했다는 증거가 빼박 드러나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푸틴은 그래서 어쩌라고 시전만 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나마 그런대로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려고 노력한 쪽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과 영국이었다. <미친 포로 원정대>라는 책에서는 동아프리카에서 영국군 포로가 된 몇몇 이탈리아 군인들은 수용소에서 어지간히 할 일이 없었는지 저 너머 보이는 뒷산에 오르기로 결심했고(무려 백두산 두 배의 높이였다!) 결국 등반에 성공한 뒤 달아나는 대신 제발로 돌아왔다는 얘기가 나온다. 독일 또한 서방측 포로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다. 최악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이 동부전선이나 일본군에게 붙잡힌 포로들이었을 것이다. 제네바 협정? 그거 먹는 거임? 우걱우걱.

브래드와 이혼 전의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을 맡은 영화 <언브로컨> 베를린 올림픽 출전 선수이자 B-24 폭격기 조종사였던 루이 잠페리니의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 그 시절 일본군 포로 수용소가 어떤 지옥인지 만천하에 보여준 덕분에 일본 극우들이 난리였다고.


어떤 사람들은 적과 싸워야 하는 군인으로서 그 적에게 붙들렸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 상하고 불명예스러우며 이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위도식하기보다 차라리 죽는 쪽이 더 낫다고 여기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뎅 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던 드골은 다섯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매번 그 터무니없는 키 때문에 붙잡혔고, 북아프리카 전역 초반 로멜의 포로가 되었던 영국군의 오코너 장군은 세번의 시도 끝에 결국 연합군에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영국 제8군단을 지휘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했고 마켓가든 작전을 지원했다. 우리같은 소심한 사람들은 밥만 잘 먹여주고 대우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면 굳이 탈출하겠답시고 개고생하느니 그냥 수용소 한쪽에서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낼텐데 말이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열린 책들에서 2차대전 덕후라면 주목할 신작 도서가 나왔다. <콜디츠>는 나치 시절 독일 국방군이 운영한 수많은 전쟁 포로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이었던 콜디츠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인 벤 메킨타이어(Ben Macintyre)는 영국 출신 논픽션 작가이자 더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책의 배경인 콜디츠 성(Colditz Castle)은 독일 라이프치히 남동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르네상스 시절의 성으로 11세기에 처음 건설되었고 보수와 재건이 반복되어 1694년 폴란드 군주이자 작센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투스 2세에 의해 대대적으로 증축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양반은 강인왕에 색슨족의 헤라클레스, 심지어 강철 주먹(Iron-Hand)이라는 중2병스러운 별명으로 불릴 만큼 힘이 장사였다고. 게다가 그쪽 힘도 장난 아니었는지 일설에는 자식이 380명에 달했다고 한다. 정력왕인가! 이렇게 많은 자식들에게 자기방 하나씩 준답시고 콜디츠 성에 방을 700개나 지었다고 하니 아주 뻥은 아닌 모양.

이렇게 보면 성이라기보다는 호그와트 기숙학교같은 느낌이랄지. 하긴 애들 수백명을 한 곳에 모아두려면 기강 빡시게 잡아야.


1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성이지만 20세기에 와서는 죽음의 공간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정신병자들을 감금하여 900여명 이상이 영양실조로 죽었으며 나치 집권 후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플라그(Oflag) IV-C라는 이름의 장교 전용 포로 수용소로 바뀌었다. 특히 반항적이고 탈출 가능성이 높거나 비중 있는 사람들을 모아두었다. 그 중에는 영국 공군의 전설적인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더글라스 베이더 대령을 비롯하여 폴란드 국내군 사령관으로 바르샤바 봉기를 지휘한 보르-코모로브스키(Tadeusz Bór-Komorowski) 장군, 영국 SAS 사령관 데이비드 스털링 중령 등 그야말로 쟁쟁한 거물들도 있었다. 나중에 영화 배우가 되는 데스먼드 루엘린은 콜디츠의 경험을 제임스 본드 영화에 써먹었다고. 지도자급을 모아둔 이터성 수용소에 비할 수는 없어도 나름 VIP용 수용소였던 셈. 언덕 위에 있어서 외부와 고립된데다 성벽이 높아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외부로 나가는 출입구는 두 개 뿐이며 독일군이 24시간 내내 철통같이 감시했다. 하지만 완벽한 감옥이란 없는 법이라고 전쟁 동안 36명이 이곳을 탈출하여 독일 포로수용소 중에서는 의외로 성공률이 꽤 높은 축에 속했다고 한다.

포로 수용소라고 해도 저렇게 일광욕과 스포츠까지 즐길 만큼 그런대로 자유로웠다고 한다. 이정도면 굳이 탈출 안해도 되는거 아님?


이 책은 탈출하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독일군의 두뇌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콜디츠에 수용된 포로들은 평범한 졸병이 아니라 전쟁에 이골이 난 베테랑 장교들이었고 대개 한가닥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하여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고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1천여 명이 넘는 수용자 중에 불과 36명만이 빠져나갔다고 하지만 거의 성공할 뻔한 사람들도 있었다. 독일군 또한 실수를 반복하는 대신 부지런히 빈틈을 막았다. 보안은 나날이 강화되고 빠져나가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들의 대결은 마치 실베스타 스텔론 주연의 탈출 영화인<이스케이프 플랜>을 연상케 한달까. 물론 대부분은 무모한 도박에 목숨을 걸기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지내는 쪽을 선택했지만 말이다.

1940년 11월 10일 오후 팻 리드 대위는 절벽 위의 성을 올려다 보면서 찬탄과 불안이 혼합된 감정을 느꼈다. 그 성을 지은 사람들의 의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감정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감옥이 될 곳이 머리 위로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름답고 고요하고 장엄하면서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위기. 아무리 용감한 사람도 주춤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 p.27

콜디츠 외곽의 경비가 워낙 엄중하기 때문에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는 가장 논리적인 길은 지하에 있었다. 굴을 파는 데에는 인내심, 계획, 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콜디츠에는 이 세가지가 아주 풍부했다. 1941년 봄 무렵, 영국인, 폴란드인, 프랑스인들은 각각 수용소의 서로 다른 구역에서 독자적으로 굴을 파고 있었다. 서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누가 공개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콜디츠 지하에서 비밀스러운 경쟁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 p.56

에거스는 독일군 장교 중에서 가장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포로들이 성을 빠져나갈 방법들을 시험하기 훨씬 전부터 그는 그들을 단속할 방법을 강구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이고 극도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영국 포로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불신했다. 특히 팻 리드는 그를 <여우같고 유능하고 좀 지나치게 유들유들>하다고 생각했다. - p.67

콜디츠에서는 장교 네명이 사라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다음날 밤에 극장을 통해서 장교 두 명이 더 탈출한 것이다. 에거스는 겉으로는 차분했지만 속으로는 분노했다. 점잔 빼는 영국인과 속을 알 수 없는 네덜란드인은 심지어 탈주자의 신원을 위장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실력과 그 신비로운 도피 구멍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에거스는 펄펄 뛰었다. - p.144

니브의 <홈런>으로부터 5개월 동안 콜디츠 포로들은 스물 두번의 탈출 시도를 했다. 개중에는 국제적인 협력이 이루어진 사례도 있었다. 그 중에 성공 사례는 한번 뿐이었다. 벨기에 장교가 군 병원으로 이송된 뒤 탈출하여 스페인 알헤시라스 앞바다에 정박한 영국 선박까지 헤엄쳐 가서 화물칸에 숨어 밀항한 사례. 다른 탈출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네덜란드인 두 명은 노동자로 변장하고 걸어 나가려다 붙잡혔고 프랑스인 장교 한 명은 다락방에서 굴을 파면서 나온 잔해를 운반하는 수레 속에서 반쯤 질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네덜란드인 한 명은 사냥터의 나뭇잎 더미 아래에 숨어 있다가 들켰다. - p.178

10월 18일 히틀러는 특공대 명령을 발표했다. 연합국의 모든 특공대 포로는 제복을 입었건 입지 않았건 설사 항복하더라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내용이었다. 이 명령에는 처형 명령을 실행하지 않는 독일군 장교도 처벌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포함되었다. 나치가 국제법을 존중하는 시늉을 하던 마지막 흔적이 증발해 사라졌다. - p.224

10월 18일 히틀러는 특공대 명령을 발표했다. 연합국의 모든 특공대 포로는 제복을 입었건 입지 않았건 설사 항복하더라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내용이었다. 이 명령에는 처형 명령을 실행하지 않는 독일군 장교도 처벌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포함되었다. 나치가 국제법을 존중하는 시늉을 하던 마지막 흔적이 증발해 사라졌다. - p.224

외벽까지 아직 3미터쯤 남았을 때 싱클레어가 휘청거리다가 무릎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철망 뒤에서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가 가을 낙엽을 향해 앞으로 무너졌다. 총알 하나가 그의 오른쪽 팔꿈치를 맞고 튀어나와 곧바로 심장에 박혔다. - p. 359

마을 호텔에 미군 임시 지휘 본부가 차려졌다. 콜디츠 성의 공식적인 항복은 호텔 살롱에서 이루어졌다. 프라비트가 앞으로 나서서 경례하고 칼집에 넣은 기병도와 권총을 제273보병연대의 레오 쇼너시 대령에게 넘겼다. 그러가 나서 코만단트와 그의 휘하 장교 열 여섯 명은 야유를 보내며 밀쳐 대는 미군들 사이를 통과해서 감옥으로 갔다. 프라비트의 한쪽 견장이 뜯어졌다. 독방 처분을 받은 수많은 포로가 갇혔던 간방에 감금된 에거스는 이제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혔다는 생각을 했다. - p.431

저자는 460여 페이지의 본문을 통해 1940년부터 5년 동안 콜디츠의 수용소에서 벌어진 온갖 탈출극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치밀한 계획과 준비는 물론이고 그야말로 로또급의 행운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성에서 빠져나간다고 전부가 아니라 독일을 벗어나서 중립국에 도착해야 비로소 기나긴 여정은 끝날 수 있었다. 변변한 먹을 것도 없이 감시와 추격을 피하여 수백km를 이동해야 한다는 점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은 첫번째 관문에서 실패했다. 어떤 사람은 골인점을 바로 눈앞에 두고 실패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성공한 극소수가 있다고 하니 인간의 의지와 인내심이란 실로 끝이 없는 모양이다.

영국 공군 파일럿으로 콜디츠에서 가장 독창적인 탈출 시도자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긴 도미닉 브루스 중위. 무려 17번을 시도했다고. 깨어 있는 동안 오로지 탈출만 생각했던 콜디츠 10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해방시킨 것은 탈출이 아니라 미군이었다.


이들의 무모한 도전은 그저 수용소의 무료함에서 벗어나거나 영웅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악명높은 아우슈비츠나 일본 수용소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수용소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게다가 언제 나치가 돌변하여 처형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떨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수년이나 좁은 공간에 감금당한 채 자유를 제약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 중에는 견디다 못해 정신이 무너진 사람도 있었다. 콜디츠에서 가장 화려한 탈출 이력을 가졌던 영국군의 마이클 싱클레어 중위는 마지막 탈출이 실패하자 사실상 자살을 선택했다. 포로들의 기나긴 역경은 나치 패망 보름 전인 1945년 4월 16일 미군이 콜디츠를 점령하면서 비로소 끝났다.

저자의 뛰어난 필력 덕분에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한번 책을 펼치니까 도저히 손을 뗄 수 없어서 주말 내내 단숨에 읽어버렸다. 올해 읽은 가장 흥미진진한 책 중의 하나라고 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화를 끝낸 전쟁 - 1914년으로 향한 길
마거릿 맥밀런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8년 10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병합을 선언한다. 그 때만 해도 이 결정이 역사를 바꾸어놓게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878년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뒤 지난 30여년 동안 이곳의 통치자는 오스트리아였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병자라고 불리던 오스만 제국은 잃어버린 고토를 찾으려고 와신상담은 커녕 여기저기서 균열을 일으키는 제국을 지탱하고 발칸의 꼬꼬마 국가들의 거센 도전에 맞서기에도 벅찬 판국이었다. 이 와중에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최대 걸림돌이었던 러시아와도 밀실 야합하여 동의를 얻어낸 것을 기회삼아 오스트리아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 병합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는 220만 리라의 보상금을 지급키로 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익숙했던 현지 주민들은 순응했고 열강들 역시 묵인했다. 꼭 30년 뒤 벌어질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병합과는 사정이 달랐다.

딴지를 건 쪽은 따로 있었다. 남쪽의 세르비아였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한 뒤 거의 5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이 소국은 마치 중세에서 타임머신 타고 미래로 슬립한 듯 마냥 국뽕 가득하면서 야심만만한 나라였고 주변국들을 상대로 영토를 확장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마땅히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럼으로서 大세르비아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훨씬 덩치 큰 대국에게도 겁없이 덤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발칸판이랄까. 그리고 6년 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부부가 백주대낮에 세르비아 극우파의 테러로 암살당했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세계대전이 폭발할 가능성은 없었다. 황태자의 죽음에 충격받은 오스트리아인들이 피의 보복을 외치면서 들고 일어나지도 않았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마냥 국제사회의 동정을 얻지도 못했다. 심지어 삼촌이자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조차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신분 낮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였다.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이없게도 제1차 세계대전의 첫 전투가 벌어진 쪽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프랑스와 독일 국경이었다. 그렇다고 프랑스와 독일이 흑막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1870년 보불전쟁 이후 40여년 동안 두 나라가 철천지 원수이기는 했지만 리벤지전의 제물로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죽이라고 뒤에서 선동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에 의해 유럽에 전운이 감돌던 1939년에 비하면 1914년은 훨씬 평화로웠다. 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들은 모든 전쟁의 책임을 패전 독일에게 떠넘겼지만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히틀러도, 알렉산더 대왕도, 칭기즈칸도, 하물며 푸틴도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를 꿈꾸기에는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전쟁 내내 군부에 휘둘리다가 전쟁 말기에는 성난 국민들을 피해서 네덜란드로 달아나야 했다.

물건너 애니 <종말의 이제타>에서 독일 제2제국을 모티브로 한 가상국가 게르메니아의 오토 황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아 독일 제국이 폭망하지 않았다는 설정이지만 이쪽은 빌헬름 2세보다는 히틀러가 미대 지망하는 대신 옥좌에 앉았다고 해야 할지.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단계가 있다. 국경에서 무력 충돌의 반복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협상과 중재가 실패로 끝나면 동원령이 선언된다. 최종적으로 병력 배치의 완료와 함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 그러했고 6.25가 그러했으며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러했다. 우발적인 싸움이 사생결단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일은 흔치 않다. 철저히 준비해도 이길까 말까한데 서로 준비도 없이 싸워봐야 에너지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도-파키스탄 분쟁을 보더라도 대부분은 첫번째 단계에서 적당히 봉합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기묘한 전쟁이었다.

어느 쪽도 원치 않았고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사라예보 사건부터 오스트리아가 최종적으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독일군이 저지대국가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기까지 5주 동안 각국 지도부는 서로의 의중을 살피고 동맹과 참전의 이해득실을 놓고 주판 두들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부는 별일 아닌 양 여름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빌헬름 2세만 해도 베를린을 비운 채 북해 항해에 나섰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불감증이 인류 최악의 전쟁을 초래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 중요한 점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무자비한 살육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협상도 중재의 노력도 없었다. 한 세대가 완전히 파멸하고 어느 한쪽이 굴복한 뒤에야 비로소 총성은 멈추었다. 패배자는 있었지만 승자는 없었다. 유럽 열강들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도대체 우리가 왜 그토록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것인지 그들 자신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인문 역사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역덕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다. <평화를 끝낸 전쟁>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과 바바라 터크만 여사의 <8월의 포성>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을 파헤친 또다른 대작이다. 저자인 마그릿 맥밀런 여사는 캐나다 출신의 여류 역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외할머니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딸이라고. 금수저일세.

마그릿 맥밀런 여사. 이 바닥에서는 보기 드문 여류 역사 학자. 예전에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접한 기억이 있다.

이 책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시작한다. 새로운 세기 첫해에 열린 이 만국박람회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말마따나 산업혁명이 한 세기 동안 이룩한 유럽 문명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한 귀퉁이에는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대한제국 코너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인들이 아니라 고종의 의뢰를 받은 프랑스인들의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영원하게 이어질 것 같았던 번영과 풍요의 시절이었다. 적어도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겠다고 전쟁이 한창이었던 1800년과는 대조적이었다. 그 평화가 불과 10년 뒤에 끝나고 한 세기 전체가 그토록 파란만장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국박람회는 혁명과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진보와 평화, 번영을 상징하는 한 세기의 종결을 기념하는 적절한 행사로 보였다. 유럽은 19세기에 전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오랜 투쟁이 이어진 18세기나 프랑스 혁명 전쟁과 이후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끌려 들어간 나폴레옹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세기에 벌어진 전쟁들은 일반적으로 아주 짧았고 아니면 유럽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식민지 전쟁이었다. - p.43

돌아보면 파리만국박람회는 유럽 문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긴장 국면을 경고하고 있었다. 식민지 전시와 민족적 전시의 과시는 강대국 사이의 경쟁을 암시했다. 독일의 유명한 예술 비평가는 유럽 문명을 선도하는 척 하는 프랑스를 조롱했다. 박람회를 방문한 그는 "프랑스는 다른 나라, 특히 늘 위험한 이웃 나라 영국과 독일에서 상업과 산업이 만들어낸 거대한 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p.65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지난 수백년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우면서 협력적이었다. 기근도 없었고 정복자도 없었으며 체제 싸움이나 이념 갈등도 없었다. 강대국들은 경쟁과 갈등을 벌이면서도 대화를 중단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독일조차 점진적으로 관계가 개선되었고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자 독일 기업들은 자신들의 발명품을 전시했다. 올림픽조차 보이콧했던 미소 냉전 시절에 비하면 훨씬 화기애애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결국 평화를 포기하고 세계대전이 벌어지기까지의 복잡한 여정을 저자는 서사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에는 아무도 원치 않던 전쟁을 초래한 수많은 필연과 우연의 사건들이 톱니바퀴처럼 엮어 있었다. 심지어 비만에 고혈압이었던 베오그라드 주재 러시아 대사가 오스트리아 측과의 회견을 우호적으로 끝내고 일어서려다 급성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그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를 중재하여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한 바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는 프로이센에서 아들을 낳았다. 자부심에 찬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손자가 장치 독일 빌헬름 2세가 되고 독일과 영국의 우호 관계가 실현되길 희망했다. 영국과 독일의 협력은 상식에 들어맞았다. 독일은 거대한 육상 강국이고 영국은 해상 강국이었다. 프랑스라는 공동의 적이 있고 프랑스의 야망을 함께 우려한 것도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었다. - p.111

프랑스인들은 영국이 1882년 큰 소요가 일어난 이집트를 차지한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이 단독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프랑스 정부의 무능과 주저 때문이었다. 영국의 잊비트 점령은 일시적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집트에 들어가는 것보다 빠져나오는 것이 더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연장되는 영국의 지배는 프랑스인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 p.225


빌헬름 2세는 니콜라이 2세를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끌어내려는 집요한 시도를 다시 했다. 두 통치자는 핀란드 비외르케 섬 앞에 정박한 요트에서 만났다. 빌헬름 2세는 곤경에 빠진 러시아에 대해 니콜라이 2세에게 동정을 보이고 프랑스와 영국의 배신을 같이 비난했다. 7월 23일 뷜로는 빌헬롬 2세로부터 러시아와 독일이 차르의 요트에서 조약을 체결했다는 기쁨에 가득한 전문을 받았다. - p.307

프란츠 요제프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데 주력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제국의 정치가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외교정책에 대한 접근에서 보수적이었고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다. 1860년대 전쟁에서 패배한 후 몇십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가장 큰 이웃 국가인 서쪽의 독일, 동쪽의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게를 유지했다. 세 제국 모두 프랑스혁명전쟁과 1815년 빈 회의, 1830년, 그리고 1848년에 다시 혁명을 반대한 보수적 군주정이라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 p.353

1911년 새로 불가리아 대사로 임명된 사람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차르는 러시아가 아무리 일러도 1917년까지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만일 러시아의 핵심 이익과 명예가 걸린 상황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1915년에도 도전을 받아들일 것이다." - p.377

산업혁명 덕분에 더 큰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유럽의 인구 증가는 인력풀을 확대시켰다. 프로이센이 인력풀을 최대한 이용한 첫번째 국가였다. 프로이센은 징병제를 실시해 민간 사회에서 병사를 충당하고 몇 년 간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런 다음 훈련된 병사들을 민간으로 돌려보냈지만 그들은 예비군으로 편성되어 주기적으로 훈련받으며 전투 기술을 유지했다. - p.465

1914년 위기 때 독일군은 단 하나의 계획만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독일군은 러시아의 동원에 위협받으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동쪽에서 시작된 전쟁은 결과에 상관없이 거의 불가피하게 서쪽으로 확대될 수 밖에 없었다. - p.499

총참모부의 군사작전국 책임자인 루이 드 그랑메종 대령은 프랑스를 구한다는 자신의 처방으로 젊은 장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방어전은 겁쟁이들의 전쟁이었다. 오직 공세만이 생명력 넘치는 민족에 걸맞았다. 전투는 가장 중요한 면에서 의지와 에너지가 핵심 요인이 되는 사기의 시험장이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애국심에 고무되어 조상들이 싸웠던 것처럼 싸워야 하고 적을 제압하기 위해 전장으로 밀려들어가야 했다. 1913년 프랑스군의 새로운 전술 교범을 작성한 장교들은 그랑메종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직 공세만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다른 강국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군부 역시 전쟁이 짧을 것으로 예상했다. - p.535

좋은 날씨와 많은 볼거리 때문에 찾아온 외국인들을 이탈리아를 바고 코웃음을 터뜨렸다. 이탈리아인들은 매력적이지만 혼란스러우며 어린애 같았고 진지하게 대우받을 국민으로 보이지 않았다. 국제 문제에서 다른 강국, 심지어 3국 동맹 파트너들도 이탈리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스니아 위기 때 이탈리아의 타협 요구는 무시되었고 강국들은 발칸 지역에서 이탈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보상할 생각이 없었다. - p.657

1914년 초 대부분의 유럽인은 10년 전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익숙한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은 해군력 경쟁을 계속 이어나갔고 프랑스와 독일 관계도 우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발칸 지역에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동맹 안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발칸전쟁 후 독일-오스트리아 관계는 악화되었다. - p.743

흔히 교과서에서는 소위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이 서로 대치하면서 1차대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냉전 시절 나토와 바르사뱌 조약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촉즉발의 긴장에 비하면 훨씬 느슨했다. 이들의 동맹은 이념이 아니라 국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럽 왕실들은 오랜 결혼 동맹으로 서로 엮여 있었고 설령 적대적이라고 해도 오늘날 남북한처럼 아예 대화의 문을 꽁꽁 걸어 닫고 불구대천의 원수마냥 배척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관계는 한시적이면서 조건부였으며 언제라도 편을 바뀔 수 있었다. 실제로 삼국동맹의 일원인 이탈리아는 전쟁이 터지자 연합군에 서서 어제의 우군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라고 했던 영국 총리 팔머스톤 경의 유명한 격언마냥 유럽 외교의 오랜 방식이기도 했다. 저자는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을 때 강대국들이 상대를 때려눕히고 유럽 패권을 차지할 호기로 여기기보다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음을 지적한다. 이들에게는 그런 일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오스트리아조차 세르비아를 상대로 무력 응징할 지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했을 정도였다.

7월 1일 그는 카이저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약소국 세르비아가 유죄라고 전 세계를 설득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썼다. 이중제국의 국제적 입지도 이미 약해져 있었다. 루마니아는 비밀조약에도 불구하고 방관하지 않을테고 불가리아의 지원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티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p.784

독일 지도부는 일단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하되 유럽의 여론이 아직 동정적일 때 동맹국이 빨리 움직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빈 당국을 서두르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소화불량에 걸린 거대한 해파리처럼 이중제국은 나름의 웅장하고 복잡한 속도로 움직였다. 군대는 많은 병사들을 추수 휴가에 내보냈고 그들은 7월 25일에야 복귀해 군복을 입을 수 있었다. 그 정책을 편 콘라트는 독일 무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업 국가다. 추수한 결과물로 1년을 살아야 한다." - p.797

푸앵카레같은 민족주의자들조차 알자스와 로렌의 상실을 받아들였고 그 지방을 되찾기 위해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다. 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독일이 포위되었다고 느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 관점에서 본다면 이 조약은 독일이 선제 공격할 때에만 작동될 방어적 조약이었다. - p.882

그러나 개전 며칠을 앞두고 상황은 급변한다. 며칠 전만 해도 태평스럽게 여름 휴가를 보냈던 지도자들은 어느 순간 전쟁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음을 깨달았다. 기세등등한 군부 강경파들, 전임자 시절부터 오직 전면전만을 상정한 전쟁 계획, 실타레마냥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맹관계가 속박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헛된 야심이 아니라 상황에 등을 떠밀렸고 이것이 생각지도 못한 전쟁에 나서야 했던 이유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더라도 1차대전은 폭발했을까. 1차대전은 단순히 어느 한 사건이 아니라 유럽 강대국들의 오랜 모순이 폭발한 결과이지만 그게 전쟁의 방아쇠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몇가지 우연한 사건들이 겹쳤고 그럼으로서 지난 수십년 동안 유럽의 평화를 보장하던 안전수단이 마비되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예보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으며 1차대전은 일어났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역사란 참 미묘하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1차대전이 일어난 원인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로 그런 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으로 치달을지 상상하지 못했고, 둘째로 전쟁 돌입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맞설 용기가 부족했다고. 그 시절 지도자들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사내다운 것이라고. 마초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 나약함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죄악이었을테니 말이다. 하긴 트럼프나 푸틴이 귀 틀어막고 허세 부리는 꼴을 보면 요즘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같다.

<몽유병자들>이 유럽의 화약고였던 발칸에 포커스를 맞추고 <8월의 포성>이 사라예보 사건부터 전쟁이 폭발하기까지 약 한달의 시간 동안 벌어진 긴박한 상황을 묘사했다면 이 책은 보다 거시적이면서 20세기 초 유럽의 정치와 외교, 군사, 사회, 문화 전반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의 식견과 필력이 놀랍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은 <8월의 포성>을 읽고 군부의 압박에 굴복하는 대신 소련과의 협상을 선택함으로서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신냉전'이라는 오늘날, 푸틴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고 태평양에서는 트럼프와 시진핑이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있으며 인도-파키스탄의 충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등 세계 곳곳이 화약고이다. 제2의 히틀러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불장난이 어느 순간 통제 불능의 큰 불로 번지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 때 트럼프나 푸틴, 시진핑이 케네디처럼 책임감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입만 열면 정쟁 벌이기에만 급급할 뿐 비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제발 이런 책 좀 읽으라고 충고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피 한 잔에 담긴 문화사, 끽다점에서 카페까지 - 이길상 교수가 내려주는 커피 이야기
이길상 지음 / 싱긋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커피가 좋다. 흔히 인간의 3대 욕구를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하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커피욕이다. 매일 1리터 두 병을 갖다놓고 물처럼 마시는 중. 그렇다고 직접 커피 갈고 로스팅해서 맛과 향을 음미하는 커피 덕후는 아니지만 어쨌든 커피 없이는 못 버티는 몸이 되었다. 조선 시대 틈만 나면 장죽대 물고 있던 우리 조상님들은 담배를 가리켜 '식후 제일미(食後第一味)'라고 했다던가. 담배 안 피는 나로서는 그딴 풀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보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이야말로 나른한 오후를 맨정신으로 버티게 하는 진정한 식후제일미요, 현대인들을 위해 신이 내린 선물이다. 이 천상의 음료를 맛보지 못하던 시절의 인류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살았을까 싶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옛날 마리 앙투아네트는 "커피 없으면 콜라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가 혁명으로 목이 몸과 분리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이유는 커피 대신 치커리 따위나 우려먹었기에 사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고 동독 사람들은 커피도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 이 따위 체제 타도하자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라고. 미국 독립전쟁의 서막이었던 보스턴 차 사건도 사실은 차가 아니라 커피였을지도. 어디 차 따위를 피같은 커피에.

커피는 사실 과일이람서.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과일이요, 땅에서 나면 야채라던가. 흔히 커피콩이라지만 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브라질 커피이니 자바 커피이니 세상에는 다양한 커피가 있지만 원래 커피의 발원지는 에티오피아라고 한다. 그런데 저 뻘건 열매를 볶고 물에 끓여서 우려먹는다는 발상을 어떻게 했을까. 에티오피아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시 전설에 따르면 옛날 옛적 칼디라는 이름의 한 목동이 염소를 풀어놓았는데 염소 한마리가 정체불명의 붉은 열매를 먹더니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밤에 잠도 안 자길래 자기도 시험삼아 먹어보니 온 몸에 에너지가 넘치더라, 그때부터 사람들이 커피의 효능을 알게 되었다는 것. 카페인은 어쨌든 생으로 먹을 만한 맛은 아닐 것인데 말이다. 칼디가 실존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되었건 그것을 맛볼 생각을 했던 놈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호기심은 실로 놀랍다. 하긴 복어를 요리하겠다고 덤빈 것에 비하기야 하겠냐만.

그것이 중동을 거쳐서 유럽으로 전파되고 '악마의 열매'라는 둥 온갖 음해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대항해 시대를 통해서 신대륙과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며 19세기 지식인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혁명을 논했다고. 그리고 그 마수는 어느듯 은둔의 나라 조선에까지 닿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에게 커피는 한낱 기호품이 아니라 생활 필수품이자 커피 덕분에 하루가 길어지고 수많은 혁신이 탄생할 수 있었으니 인류 문명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셈. 커피가 없었으면 어쩔 뻔. 특히 나부터. 그렇다고 사탕수수처럼 한때 귀하신 몸에서 이제와서 비만의 적으로 취급받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진화하신 기특한 존재인듯.

오늘도 커피 없이 못 버티는 커피당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다. 커피가 처음 조선 땅을 밟았던 구한말부터 치킨집보다도 더 많은 커피숍이 동네 구석구석마다 차지한 채 식후의 우리 직장인들을 유혹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커피 100년사이다. 굵직굵직한 정치사부터 소시민들의 애환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인 이길상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이면서 커피 작가이자 <커피 히스토리>라는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라고 한다. 실로 커피에 죽고 못 사는 이땅의 진정한 커피 덕후인 듯.

일명 대한민국 커피 인문학자라는 저자. 커피와는 별개로 한국학 교수로서 외국에서 잘못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기도.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커피가 처음 소개된 것은 구한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이던 1852년, 윤종의라는 사람이 쓴 <벽위신편>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의 목적은 정약용처럼 신문물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위정척사와 서양 세력을 배척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물며 그 시절 뇌 굳은 사대부가 직접 커피를 어디서 구해다가 맛 봤을 리도 없고 중국쪽 책 어느 대목에서 "양놈들은 커피라는 것을 마신다카더라."라는 것. 어쨌든 변방의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커피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에 커피라는 음료가 처음 기록된 시기는 1852년으로 인문지리서 <벽위신편>에 언급되어 있다. <벽위신편>은 1848년 윤종의가 서양의 위력과 종교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한 방책 제시 목적으로 쓴 책으로 4년 뒤 중국의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을 참고하여 개정하면서 커피를 소개했다. 이들 책에 "필리핀에서는 커피라고 하는 편두(까치콩)과 비슷하고 청흑색인 열매를 볶아 끓여 마시는데 맛은 쓰고 향은 차와 비슷하다"라고 기술된 커피 생두의 모양과 만드는 법, 맛에 대한 내용을 <벽위신편>에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 p.16

그리고 국내에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였던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신부가 선교를 하면서 조선인 신도들에게 커피를 맛보게 하면서 이 땅도 커피에 물들게 되었다. 한 마디로 커피로 사람을 낚은 셈. 실제로 베르뇌는 대량의 커피를 끊임없이 주문했을 만큼 효과 작렬이었다고. 군대 시절 초코파이 하나에 주말을 헌납했던 나같은 나이롱 신도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뽀록나는 바람에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흥선대원군부터 커피의 마수에 빠뜨렸어야. 정작 아들인 고종은 둘도 없는 커피 애호가가 되었지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집쟁이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의 발호였는지도.

조선인 소년이 미군 장교가 되어 금의환향한다는 판타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커피를 즐기는 고종. 겉은 개화되었으나 알맹이가 그대로다보니. 이 양반도 따지고 보면 불같은 아버지와 드센 마눌님 사이에 끼어서 눈치 보느라 어지간히 마음 고생했을 듯.


하지만 중세 시절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라면서 교황이 직접 커피 나무 화형식까지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커피는 온갖 박해와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것도 불과 십수년 전까지 말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외화 한푼이 아쉬운 판국에 주식도 아닌 커피를 수입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허비한다는 이유였다. 커피는 사치와 낭비의 대명사였고 퇴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내가 학창 시절에만 해도 동네 다방에는 레지라고 불리는 짧은 핫팬츠 입은 언니야들이 점심 때만 되면 스쿠터타고 커피 심부름을 했었던. 물론 요즘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어차피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것인데. 1997년 IMF가 터지자 애꿎은 커피가 외화낭비의 주범인양 여론의 몰매를 맞고 관공서에서는 커피 안마시기 운동이 벌어졌다고. 전문 커피숍인 스타벅스가 처음 생겨나자 점심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신다고 모 신문에서 질타하던 언제인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 나올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 책은 이런 얘기를 담고 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어떻게 찾아냈나 싶을 정도.

고종은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마신 첫번째 임금일 뿐만 아니라 커피를 꽤 즐겼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커피의 즐거움을 알려진 이는 아마도 초기의 의료 선교사, 서양 외교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타크나 파울 묄렌도르프같은 서울 거주 외국인이었다. 고종은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커피를 늘 가까이 했다. 힘든 시기를 살아야 했던 고종에게 커피는 위로의 음료였다. - p.38

일본식 카페 문화 유입으로 조선 카페에 등장한 흥미로운 서비스 중 하나는 광학적으로 성적 도발을 유도하는 것, 당시 용어로 '광학 서비스'였다. 홍등과 청등, 즉 현란한 불빛으로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서비스였다. 실내조명을 가능한 어둡게 하여 여급과 고객을 편리하게 해 주는 서비스였다. 단속 대상이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31년 10월 17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본정 경찰서는 연락정에 있는 카페 '미쓰와'에서의 흐릇하고 컴컴한 광선 사용을 문제 삼아 주인을 호출한 후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 p.112

1947년 2월 26일 <조선일보>는 "전 이왕가의 최근 소식, 동경서 다방 경영"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마이니치 신문> 보도를 인용한 이 기사에 따르면 이왕가 일족은 도쿄 시부야에 카페를 차렸다. 종래의 생명선이던 일본 국고의 보조금이 끊기자 선택한 길은 커피를 파는 일이었다. 상궁과 나인이 웨이트리스가 되었다. 먹고 살기 어려울 때 카페를 차리는 일, 그때나 지금이나, 왕후장성이나 서인이나 차이가 없음을 실감케 했다. 스스로 막지 못한 불행한 국망, 스스로 이루지 못한 불완전한 광복이 초래한 아픔이었다. - p.192

5.16군사 정변이 일어난지 2주일 후인 5월 29일 아침을 기해 다방에서 커피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방업자들이 자진하여 커피 판매를 중단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쿠데타 세력이 취한 강제 조치였다. 강제 조치가 아니었음을 강변했지만 믿는 사람은 없었다. 치안 국장은 "어제 28일 다방업자들을 불러서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는 커피를 되도록 팔지 말고 생강차나 기타를 대용하여 팔도록 함이 어떻겠는가라고 권장했다."라고 발표했다. 강제로 커피를 팔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 p.243

검찰에 따르면 장안다방 박군은 커피 1파운드에 보통 100잔 정도 나오는 양을 담배 가루와 소금을 넣어 250잔 내지 300잔을 만들어 하루 600여잔 씩, 유리다방 김씨는 하루 700여잔씩 팔아왔다는 것이다. 커피 가루 4파운드를 사면 2파운드에 담배 가루를 섞어 4파운드 분량의 커피를 만들고 나머지 커피 가루를 빼돌리는 수법을 쓴 것이다. 이들은 손님들이 피다 버린 담배꽁초를 연탄 화덕에 올려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 커피에 섞는 수법을 썼다. 니코틴 맛이 느끼지지 않도록 달걀 껍데기와 소금을 함께 타기도 했고 손님들이 맛에 둔감한 시각인 오후 늦은 시간에만 꽁초커피를 내놓은 주도면밀함도 보여주었다. - p.325

1980년대 중반에 퍼지기 시작한 가라오케 문화나 노래방 문화는 다방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식사 모임 후 가는 장소로 다방보다는 노래방이 선호되었다. 새로 등장한 아파트의 신식 주방시설 덕분에 집에서 손쉽게 커피를 끓여 마실 수 있게 된 것도 다방 증가 둔화의 한 요인이었다. 다방은 설 자리를 급속도로 잃어가고 있었다. 커피 암흑기 후반기에 닥친 다방의 침체였다. - p.358

우리나라에서는 1979년에 문을 연 롯데리아가 체인점 문화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는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버거킹, 맥도널드, KFC 등이 잇따라 등장했다. 커피전문점으로는 1979년 대학로에서 처음 문을 연 후 점차 매장을 늘려 한 때 전국적으로 60여개의 매장을 거느렸던 '난다랑'이 효시였다. 대학로의 1호 매장은 1986년에 '밀다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렇게 시작된 커피 체인점 문화는 급속히 성장하여 1993년 신문 광고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 p.404

외환 위기는 커피 대신 국산 차 마시기 운동을 소환했다. 늘 그랬듯 절약이 필요한 시대에 커피는 모두의 공적이었다. 커피는 광고로 시대에 어필하려고 노력했다. 맥스웰하우스는 캔커피 광고에서 취업 준비생의 면접 장면을 다루었다. 면접에서 당황하여 실수한 취업 준비생을 보여준 후 "나를 알아주는 커피, 맥스웰 캔커피"라는 메세지를 전달했다. - p.432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평생을 살면서 평균 62년 정도 커피를 마신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균 2만5110잔의 커피를 마시고 9만145달러(1억2500만원)을 지출하는 셈이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 커피 소비액이고 결코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 커피임을 말해준다. - p.446

450여 페이지에는 베르뇌 신부가 처음으로 커피를 가져오고 아관파천한 고종이 커피를 입에 대면서 커피 문화가 본격화된 지 약 한 세기 반의 시간 동안 커피로 보는 우리네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고보면 커피가 이땅에 정착하기에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기까지 잘도 살아남았다 싶을 정도. 세상이 어려울 때마다 높으신 분들은 커피 탓으로 돌리면서 우리 소시민들의 입에서 빼앗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니 말이다. 하긴 커피만의 얘기일까.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탄압에 맞선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마음껏 커피를 마시며 바쁜 일상 속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 여유가 영원하지는 않을 듯 하다. 지구 온난화로 가뭄과 폭염, 병충해가 만연하면서 커피 수확량이 나날이 줄어들기 때문. 실제로 원두 가격의 폭등으로 당장 울 사무실 근처의 커피값도 300원이나 올랐더라. 더는 값싼 아메리카를 즐기지 못할지도. 특히 트황제 몽니 덕분에 엄청난 관세로 미국인들은 모닝 커피 한잔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고.

책을 읽다가 문득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커피의 우리식 명칭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양탕국"이 사실은 아무런 근거없는 얘기란다. 양탕국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인 1968년 12월 26일 조선일보의 한 칼럼인데 그게 와전되어 마치 구한말부터 사용된 것마냥 여기저기서 언급되었다는 것. 주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실 때마다 아는 척하면서 양탕국 타령을 했는데 앞으로는 못 써먹을 것같다.

TV 교양 프로그램에도 버젓이 등장하는 '양탕국'. 누가 보면 그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여기에 밥 말아서 드신 줄 알 듯.

10월 1일이 한국커피협회에서 정한 커피의 날이라고 한다. 국군의 날과 겹치기에 아는 사람만 아는 날. 커피라는 주제로 이렇게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쓸 수 있나 싶다. 커피당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과 디자인 - 디자인의 선과 악, 다크 디자인 투어리즘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조지혜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네스북에서 인정한 세계 최초의 국기는 덴마크의 국기인 '다너브로(Dannebrog)'라고 한다. 유럽에서 교회의 위세가 절정이던 1219년 교황의 명령으로 발트해에서 십자군 원정에 나선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Valdemar II)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수도 틸린에서 벌어진 린데니세 전투(Battle of Lyndanisse)에서 이교도들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하늘에서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가 그려진 정체불명의 천이 떨어졌고 신의 선물이라고 여긴 덴마크군은 용기백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물론 믿거나 말거나한 도시 전설이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아서 무려 800년이 넘도록 쓰고 있다는 것이 덴마크인들의 주장이다. 물론 덴마크의 정식 국기로 공식 지정된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인 1625년 5월 8일이지만 말이다.

1809년 덴마크 화가 크리스틴 오거스트 로렌젠(Christian August Lorentzen)이 그린 다너브로 전설. 하늘에서 저런 식으로 낙하했다고. 신이 천쪼가리만이 아니라 추 역할을 하도록 묵직한 깃대에 매달아서 공기역학까지 고려하여 투하한 모양. 공학도 신인가.


따지고 보면 전쟁에서 깃발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수천, 수만명이 뒤엉킨 난장판 속에서 피아구분은 물론이고 병사들로서는 우리 쪽 깃발이 등 뒤에서 힘차게 펄럭이면 아군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며 꺾이고 찢겨진다면 싸움에 졌으니 도망쳐야 한다는 얘기이다. 아마도 원시시대에도 조잡한 뭔가를 만들어서 성물마냥 높이 쳐들고 싸우지 않았을까. 전쟁이란 서로의 깃발 뺏기 싸움이며 깃발은 아군에게는 결속과 용기를, 적군에게는 공포와 좌절을 주는 일종의 토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그저 아무거나 들고 다니는 대신 신이 부여한 색깔과 문양을 그려넣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어쨌든 싸움은 이겨야 하니까 말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찾아 성지로 향한 엘프 대장장이의 여정을 다룬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십자군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 문양을, 살라딘의 이슬람 군대는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과 방패를 들고 있다. 가문과 세력을 상징하던 깃발은 근대에 와서 국기의 원형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깃발은 승리를 상징한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 해병대가 성조기를 세우는 광경이나 베를린 전투에서 독일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소련군 병사가 소련 국기를 내거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2차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각인시켰다.

총격 직후 성조기를 등 뒤로 피를 흘리면서 주먹을 치켜 올리는 트럼프. 워낙 절묘한 구도였기에 짜고 친 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 어쨌든 AP통신 기자 에반 부치(Evan Vucci)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이 꼴통 영감이 대선에서 이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깃발이 인간의 심리에 얼마나 영향력이 큰 지 보여주는 셈. 광화문에서 태극기 휘두르는 양반들도 그런 이치 아닐런지.


교유서가에서 나온 신작도서 <전쟁과 디자인>은 전쟁을 통해 돌아보는 디자인 에세이이다. 저자인 마쓰다 유키마사(松田行正)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원래는 법학도였지만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 디자인을 맡게 되었고 디자인을 주제로 역사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한다. 국내에도 몇 권이 책이 나와 있는 유명 작가이기도.

저자인 마쓰다 유키마사 옹. 1948년생이니 내일 모레 팔순인데 젊게 사시는 듯. 무려 1년에 한권 출간이 목표라고. 노안 안 오시나.


제2차 세계대전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문양은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일 것이다. 서양인들이 한국이나 일본에 관광왔다가 불교 사찰에 달린 卍자를 보고 깜놀한다는 이 문양은 히틀러 대굴빡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원래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한다. 심지어 대서양 너머 북미 인디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기호가 발견될 정도. 사실은 외계인이 원조일지도. 그것을 1919년 나치의 수령이 된 히틀러가 자신들이 독일 민족의 구세주라는 이미지를 대중에 각인할 요량으로 나름 변형하여 자기네 당기로 쓴 것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하켄크로이츠의 모습이다. 덕분에 행운의 상징은 하루 아침에 악마의 상징으로 둔갑했고 유럽 전체에서 저주받은 기호 취급을 받고 있으니 억울하다고 할 듯.

하켄크로이츠는 나치가 정권을 손에 넣기 전부터 깃발과 완장에 사용되었다. 정권을 얻은 다음부터는 깃발과 배지, 종국에는 문구류 같은 소품에까지 등장해 독일 전역을 휩쓸었다. 반 나치 세력은 나치를 비난하기 위해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했으나 도리어 하켄크로이츠의 힘을 재인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 p.149

이 책은 군용기에 그려진 각국의 마크를 비롯하여 인류 전쟁사에서 디자인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해 왔는지를 얘기한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사용하는 국기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이 탄생시킨 것이기도 하다. 유럽 국가 중에는 덴마크처럼 십자군 시절의 영향으로 십자 문양을 쓰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혁명과 해방, 자유의 상징으로 삼색기를 쓰는 나라들도 많다.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선이라고 믿었던 공산주의 국가들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을 선호한다. 냉전 시절 소련군의 이름은 '붉은 군대'였다. 중국 마오쩌둥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홍위병이라고 불렀다. 그게 꽤 쓸만하다고 여긴 사람이 모방의 달인이었던 히틀러였다. 하켄크로이츠의 바탕이 하필이면 붉은 색인 것도 소련 적기를 베낀 것이며 나치의 거대한 대중집회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이다. 인사할 때 손을 치켜드는 것은 무솔리니를 흉내낸 것이지만. 극좌와 극우는 통하는 법이라나. 총성이 난무하는 전장만이 아니라 설전과 암투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정치인들 또한 색깔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우리만 해도 언제부터인가 한쪽 당이 빨간색을 쓰니까 다른 쪽에서 파란색을 들고 나오더라.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은 해리포터 20주년 기념판을 금지했다. 표지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이라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였다. 색깔을 가지고도 편을 가르고 싸우는 게 인간인 셈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기의 색으로 싸운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맞붙었던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트럼프 진영이 붉은 색, 바이든 진영이 파란 색으로 각자 국기 색상 중 하나를 휘감고 싸웠다. - p.17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색 대비가 두드러진 해리 포터의 파란색과 노란색 판본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었다는 뉴스도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우크라이나를 나타내는 색이기 때문이다. - p.37

히틀러는 붉은 색을 사회사상 운동, 흰색을 국가주의 사상, 검은 색은 아리아 민족의 승리를 위한 투쟁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붉은 색은 아리아 민족, 흰색은 아리아 민족의 순결, 검은색은 아리아 민족 이외의 절멸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다. 국가의 색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소 진부하지만 검은 색을 절멸의 색으로 보는 시각은 독특하면서도 공포스럽다. - p.62

사실 원래는 갈고리십자도 행운의 상징이었고 나치친위대의 해골 표식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최종적으로는 사악한 상징으로 전락했지만 원래는 자유와 독립을 염원한다는 의미였기에 조직의 표식이 된 것이리라. - p.137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뒤인 1873년에 정식으로 육군을 발족하면서 프랑스 육군과 미 육군을 참고하여 군복 수칙을 정했다. 이때 별 모양을 군모와 계급장에 채택했다. 군모에도 계급장과 똑같은 개수의 별을 붙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문화가 들어와 '★'이 별이라는 의미가 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별은 '●' 모양이었다. ★은 헤이안 시대 아베노 세이메이의 '세이메이 인'처럼 주술적인 기호였다. - p.171

키치너는 정면을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국은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심리적인 압박은 크지 않지만 개인에게 직접 호소하는 디자인에 가슴이 뜨금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결국 키치너 포스터는 많은 지원자를 모아서 크게 성공했다. 고무된 영국 육군은 협박이 더 두드러지는 포스터를 만들었다. 영국을 의인화한 존 불이 정면을 가리키며 '아직도 전쟁에 불참한 건 당신인가'라고 묻는다. - p.211

크메르 루즈는 검은 인민복에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끄러마'를 착용했다. 끄러마는 스카프 겸 수건이면서 머리에 두르는 터번이 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붉은 색 깅엄체크 무늬의 끄러마를 둘렀다. 참고로 남베트남해방전선(베트콩)은 푸른색 깅엄체크 끄러마를 착용했다. - p.292

300여 페이지의 본문에는 십자군의 십자 기호,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가 내건 Z깃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병 포스터, 히틀러의 프로파간다가 써먹었던 게르만의 룬문자, 여성들에게 검은색 히잡을 강요하는 아프간 탈레반의 여혐, 푸틴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칼라풀한 사진과 함께 다양한 디자인이 등장한다. 인간 심리에서 색깔과 기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고 저자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각각 독립된 얘기인 것으로 보아서 저자가 어디에서 연재한 짧은 칼럼을 모아서 엮은 모양. 부담 없는 분량에 흥미로운 주제, 분잡한 명절에 방 한켠에서 편안하게 읽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