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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와 배신자 -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중 스파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7월
평점 :
어릴 적에 <레드 히트>라는 고전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무려 아놀드 슈왈제너거. 러시아 마피아 두목이 미국에 마약을 팔자 그를 잡기 위해서 모스크바 경찰국에서 파견된 소련 경찰이 미국 시카고 수사관과 공조 수사를 벌이는 액션 코미디 영화이다. 물론 소련 경찰을 맡은 쪽은 당시 터미네이터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젊은 시절의 아놀드. 이 영화에서 그는 두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고릴라같은 거구에 근육질 몸매, 두꺼운 사각턱, 임무를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살인머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수룩하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촌놈같은 느낌이다. 그 시절 서방 사람들이 생각하던 러시아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아놀드의 파트너를 맡은 미국 경찰관은 반대로 위트 가득한 전형적인 남부 카우보이 스타일이다. 물과 기름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처음에는 상대를 탐탁찮게 여기면서도 공동의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신뢰와 우정을 쌓아간다는 내용이다. B급 액션물이라고 하지만 꽤 재미있게 본 영화이다.
젊은 시절 우리 주지사님. 진짜 KGB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듯. 소련인 터미네이터 경찰과 그와는 정반대로 능청스러운 미국인 경찰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콤비는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을 대표하는 것이자 그 시절 두 체제의 화해를 향한 기대이기도 했다.
이 영화가 나온 것은 냉전 끄트머리였던 1988년으로 아직까지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라 소련이 조금씩 문호를 열기는 했지만 그곳은 서방 사람들에게는 같은 지구이면서 여전히 함부로 들어갈 수 없고 함부로 나올 수도 없는 미지의 공간인 '철의 장막' 속 세계였다. 철저한 억압과 통제,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무조건적인 헌신의 강요, 전체는 하나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개인을 말살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소련 체제는 국가 차원의 거대한 교도소이자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 세상의 현실판이었다. 생각만 해도 숨막히는 그런 공간에서 그 동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견뎠나 싶지만 한편으로 그럼에도 어찌어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이기도 하다. 자유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독재와 가난, 범죄가 판을 치는 콜롬비아, 소말리아조차 사람 사는 동네이니 말이다.
하긴 우리만 하더라도 현실의 부조리함 속에서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했던 서슬 퍼런 시절이 불과 30~40년 전에 있지 않았던가. 원래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인지라 대부분은 어지간히 부당한 꼴을 당하더라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쪽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현실에 순응하는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맞서 싸우는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부조리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 아닐까. 그것은 그저 얻어낸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련 역시 그렇게 무너졌다. 정작 그 수혜는 대중이 아니라 푸틴이라는 탐욕스러운 독재자 한 놈이 독차지하여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렸지만 말이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열린 책들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 나왔다. 악명높은 소련 KGB의 고위 간부로서 부와 권력, 명예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했던 한 스파이의 파란만장하면서 영화보다 더 스릴 넘치는 실화를 다룬 내용이다. 주인공은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자 KGB 런던지부장이었던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대령.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재작년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첩보 영화 <더 스파이>에 나오는 소련 총참모부 산하 GRU(정찰총국) 소속 올레크 펜코브스키 대령과 더불어 냉전 시절 가장 유명한 소련 이중 첩자 중 한 사람이자 서방에 소련 체제의 약점을 알림으로서 냉전이 서방의 승리와 소련 붕괴로 이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KGB 시절의 고르디옙스키 대령. 매서운 눈빛과 탄탄한 체격은 영화 <레드 히트>에 나오는 주지사님 못지 않게 강렬한 포스 작렬이다. 아직도 살아 있다.
미-소 군대가 직접 맞붙지 않았다는 이유로 냉전(Cold war)라고 하지만, 음지에서는 양측 스파이들간의 총성 없는 열전(Hot war)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영화 <007>이나 <킹스맨>, <미션 임파셔블>처럼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현실 세계에서 스파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악으로부터 은밀하게 세상을 지키는 영웅 노릇을 하지 않는다. 과연 그런 일을 하는 조직이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의 임무는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정보를 캐는 일이다. 때때로 영화 <뮌헨>에 나오는 이스라엘 모사드나 최근 푸틴이 자신의 반대파에게 방사능 홍차를 보내는 것처럼 누군가를 납치, 고문, 암살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조직의 배신자들을 응징할 때에만 해당한다. 만약 상대 정치인이나 고위 장성, 기업가같은 거물을 함부로 노렸다가 들통나면 엄청난 보복은 물론이고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첩보 조직에 있어서 최대의 승리는 상대측 첩보 조직 내부에 트로이 목마, 즉 이중 첩자를 심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가만히 앉아서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셈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냉전 시절 첩보 전쟁의 실체를 다루고 있다.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매번 몸을 아끼지 않는 활약을 보여주는 톰 형. 영화에 나오는 IMF(미션 임파셔블 포스)는 설정상 CIA 산하 첩보 조직이지만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슈퍼 빌런 때려잡는 대테러 비밀부대이자 먼치킨 히어로 조직이랄지.
<레드 히트>의 아놀드 못지 않은 탄탄한 근육질의 몸짱이면서 <미션 임파셔블>의 에단 호크만큼이나 명석한 기억력과 몇 개 국어에 능통한 이 책의 주인공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대학 졸업과 함께 형의 추천을 받아 KGB 해외 지부에 들어가면서 인생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아버지는 스탈린 시절 NKVD(KGB의 전신)에서 고문과 처형을 맡았던 공안이었고 형과 아내 역시 KGB 요원이었다. 심지어 장인은 KGB 장군, 장모도 KGB 출신이었다. 뼛속까지 KGB이자 KGB가 수호하는 체제의 특권층으로서 수혜를 누리면서도 그 체제의 모순과 함께 특권이 사막의 신기루마냥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 또한 가장 잘 알고 있는 셈이었다.
올레크는 아버지의 태도에서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스탈린 정권의 억압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올레크는 이제 퇴직할 나이가 가까워진 아버지가 당시 KGB가 저지른 모든 범죄와 만행이 부끄러워 KGB의 일에 대해 아들과 이야기하기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면 안톤 고르디옙스키는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아들에게 그런 세계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해 주지도 못하는 이중적인 삶을 유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p.37 |
배경 좋고 혈기왕성한 엘리트 청년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 역시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야심만만하면서 출세욕과 모험심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이상과 장래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지만 장미빛 환상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그에게 소비에트 체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세계였고 KGB는 위선과 가식 덩어리였다. 반면, 서방은 소련보다 훨씬 부유하면서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웠다. 소련이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이 서방의 물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문고리를 꽁꽁 걸어잠구고 국민들이 혹시라도 딴 생각을 할까 편집광적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체제 선전에 열을 올리는 것 또한 그런 현실에서 나온 열등감의 표출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공산주의 체제가 단숨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는 쪽은 올레크처럼 소련의 바깥 세계가 어떤지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체감한 젊은이들이었다. 현실은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달랐다.
그가 1970년 1월에 돌아간 소련은 3년 전 그가 떠날 때보다도 훨씬 더 억압적이고 편집증적이며 음침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정통 공산주의 통치가 모든 색채과 상상력을 빨아내고 있는 것같았다. 올레크는 고국의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모든 것이 얼마나 추레해 보였는지> 줄을 선 사람들, 더러운 건물들, 숨이 막힐 것같은 관료주의, 공포, 부정부패가 얼마 전 그가 떠나온 덴마크의 밝고 풍요로운 세상과 우울한 대조를 이뤘다. 어디서나 선전을 볼 수 있고 관리들은 비굴하거나 무례했으며 모든 국민이 다른 사람들을 염탐했다. 누구도 웃지 않았다. - p.65 |
KGB에 들어온 지 13년 째인 1973년 덴마크로 부임한 올레크는 영국 해외첩보부인 MI6와 처음 접촉했고 이중 스파이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사자 입장에서 그것은 스릴 넘치는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는 것은 물론이고 배신자로 체포되어 잔혹하게 처형될 수 있었다. 이중 스파이는 어디에나 있었고 올레크처럼 KGB 내에서 소련을 배신하고 서방을 위해 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서방측 첩보 조직 내에서도 서방을 배신하고 소련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있었다. 한발짝만 잘 못 내딛거나 운이 없으면 정체가 발각되어 파멸이었다. 어지간히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중요한 기밀을 MI6에 넘겼다. 그 중에는 KGB에 매수되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련을 위하여 일하는 영국의 저명한 인사들에 대한 명단도 있었고 소련 체제와 지도부의 사고 방식이 서방의 막연한 편견과 어떻게 다른지, 그들이 얼마나 편집광적으로 서방의 침공을 두려워 하고 있는지 알게 해 주는 것도 있었다. 냉전은 서로에 대한 어이없는 오해와 의심이 초래한 것이기도 했다.
첩자 풋은 저명한 작가 겸 웅변가, 베테랑 좌파 의원, 영국 노동당 지도자이며 만약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다면 영국의 총리가 될 마이클 풋이었다. 이 나라 영국에서 여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야당 지도자가 KGB에 매수된 첩자였다는 뜻이었다. 마이클 풋은 정치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20년 동안 영국 노동당 좌파에서 우뚝 솟은 인물이었다. 1974년에는 처음 각료로 임명되어 헤럴드 윌슨 내각의 고용부 장관이 되었다. 1984년 5월로 예정된 차기 총선에서 마이클 풋이 승리해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 P.186 |
KGB 요원들은 <핵 관련 핵심 결정권자>를 면밀히 감시해야 했는데 어이없게도 이 결정권자 중에는 교회 지도자와 최고위 은행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밤에 핵심 관청 건물에 불이 몇 개나 켜져 있는지 세어 보라는 지시도 있었다. 관리들이 공격을 준비한다면 밤새 불이 꺼지지 않을 터였다. 정부 주차장에 주차된 자동차 대수도 헤아려야 했다. 펜타곤에 주차된 차들이 갑자기 늘어난다면 미국이 공격을 준비한다는 신호일 수 있었다. 병원도 감시 대상이었다. 적이 선제 공격에 대한 상대의 보복을 예상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비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도살장도 비슷한 수준의 감시 대상이었다. 도살되는 가축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서방이 아마겟돈에 앞서서 햄버거를 비축하고 있다는 징후일 수 있었다. <구입하는 혈액의 양이 증가하고 가격이 올라간다면 전쟁에 대한 대비가 시작되고 있다는 중요한 징후일 수 있었다.> 크렘린은 자본주의가 서구인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었을 테니 <혈액은행>이 정말로 혈액을 사고 파는 은행이라고 믿었다. KGB 지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감히 이 기초적인 오해조차 바로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비겁한 조직에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보다 더 위험한 것은 상사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일이었다. - p.229 |
미국의 대외 정책 분석가들은 소련이 선전을 위해서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쓰는 것이며, 그들의 경고성 표현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허세 대결의 하나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미국이 핵전쟁을 시작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소련 최고 지도자 안드로포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영국은 소련에서 온 스파이 덕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크렘린의 걱정이 비록 무지와 의심증에서 싹튼 것이라고 해도 진심이라는 사실을 미국에도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 p.233 |
KGB는 1983년 선거에서 대처가 반드시 패배하게 하려고 열심히 움직였다. 좌파 성향의 언론인들에게 부정적인 기사를 공급해 주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였다. 소련은 더러운 술수와 비밀스러운 훼방을 이용하여 민주적인 선거를 휘젖고 자신들이 선택한 후보에게 이로운 결과를 만들어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약 노동당이 선거에서 이겼다면, 고르디옙스키의 처지는 참으로 기상천외하게 변했을 것이다. KGB의 현금을 기꺼이 받던 자가 총리로 앉아 있는 정부에 KGB의 기밀을 넘기는 꼴이 되었을테니까. - p.277 |
올레크는 10여년 동안 MI6를 위해서 일했고 그가 넘긴 정보는 서방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쿠바 미사일 사건을 해결하는데 일조한 올레크 펜코브스키 대령만큼이나 인류를 위해 기여한 셈이었다. 그는 KGB 런던 지부장까지 올라가면서 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지만 어이없는 일로 정체가 발각될 위기에 처했다. 그것은 KGB가 이중 스파이를 찾아냈다거나 MI6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CIA가 내부를 단속하는데에는 게을리한 탓이었다. 올레크는 CIA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MI6가 엄청난 정보를 연일 물어오자 CIA는 대번에 질투심을 드러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레크의 정체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MI6에게 뒤질 수 없다는 자존심에 눈이 멀어서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정보를 알아내겠답시고 힘을 빼면서도 정작 등잔밑이 어둡다고 자기 발밑은 무관심했던 것이 세계 최고의 첩보 조직을 자처하는 CIA였다.
CIA 간부였던 올드리치 에임스는 무능하고 게으르면서 조직에서는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돈을 물쓰듯 낭비하는 애인 때문에 언제나 돈에 찌들렸다. 배신자를 조심해야 하는 첩보 조직에서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가명인 '코바'를 자처하면서 제 발로 KGB의 문을 두들겼고 돈 몇푼에 자신의 영혼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치는 쪽을 선택했다. 에임스는 CIA가 확보한 소련과 서방의 이중 스파이 명단을 넘겼고 KGB는 즉각 배신자 색출에 나섰다.
1985년 6월 13일 올드리치 에임스는 첩보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축에 속하는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무려 스물 다섯명이나 되는 서방 정보기관 첩자들의 이름을 소련에 알려준 것이었다. KGB에서 처음 돈을 받은 뒤 한달 동안 에임스는 잔인할 정도로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소련 정보기관 내에서 활약하는 CIA의 수많은 첩자 중에서 누가 그의 꿍꿍이를 알게 되면 그의 정체를 폭로할 거라는 결론이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밀고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첩자의 신원을 KGB에 한발 먼저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소련이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할 것이었다. 에임스는 자신이 이름을 알려준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렸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안전해지고 부자가 되는 길은 그것 뿐이었다. "만약 그들 중 한명이라도 내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나는 CIA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힐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냥 그 바닥이 원래 그런 곳이었다." - p.377 |
당장 올레크의 정체가 들통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시간 문제였다. KGB는 런던 지부의 고위급 중에서 배신자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 내렸고 올레크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올레크는 탈출을 결심했고 대처 여사는 MI6에 영국을 위해 목숨을 건 소련인의 구출을 명령한다. 이 점이 단물 쓴물 다 빼먹고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토사구팽하는 소련 KGB와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3부에서는 그의 탈출 작전이 시작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미리 얘기하면 마치 영화의 스포가 될 것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스릴 넘치고 흥미진진하다.
냉전 막바지인 1987년 레이건을 만난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오른쪽). 고르디옙스키는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이 소련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조언했고 레이건은 그의 말을 충실하게 실천했다. 레이건은 그에게 "우리는 당신이 한 일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결론만 얘기한다면 올레크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서방의 영웅이 되었고 대처는 물론이고, 레이건조차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면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세상을 구한 대가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소련에 남은 가족들은 KGB의 집요한 심문에 시달려야 했고 모든 친구와 동료들을 잃었다. 대처는 가족들의 송환을 위해서 고르바초프에게 거래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고르바초프에게 올레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두 세계에 다리를 놓아준 영웅이기보다 그저 조국에 창피를 준 인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레크는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에야 비로소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한 때 남편을 열렬하게 지지했던 아내는 재회의 기쁨 대신 남편이 자신과 가족을 버렸다면서 분노했고 결국 이혼했다.
게다가 소련의 붕괴는 러시아의 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무능한 개혁가였던 옐친의 뒤를 이은 쪽은 전직 KGB 출신인 푸틴이었다.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내건 푸틴은 더 이상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국가를 배신한 자라면 어디에 있건 KGB의 오랜 방식에 따라 사정 없이 응징한다. 85살이 된 올레크는 여전히 러시아의 배신자로서 조국에 발을 디딜 수 없고 혹시 모를 러시아의 암살 위협 때문에 MI6의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은신처에서 살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소련을 배신한 올레크와 서방을 배신한 올드리치 에임스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소련을 배신한 것은 선이고 서방을 배신한 것은 악인가, 어차피 조국을 배신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라고.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두 사람은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에임스는 전적으로 사리사욕을 위해서 나라와 동료들을 적에게 팔아먹었지만, 올레크는 소련 체제의 모순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했으며 그에 따른 불이익을 마땅히 감내했다. 이 책에서는 두 사람 말고도 두 진영에서 다양한 배신자들이 등장한다. 소련의 배신자들이 죄다 올레크처럼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 것도 아니며 탐욕을 이기지 못하거나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서 서방으로의 망명을 선택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느 쪽이건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설령 배신이 들키더라도 서방에서는 적어도 정당한 재판을 받고 그에 합당한 죗값을 치룰 수 있었다. 소련처럼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뒷통수에 총알이 박힐 위험은 없었다. 반면, 소련에서는 설사 잘못이 없어도 단지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서방의 악선전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서방이 절대선은 아니라도 최소한 소련보다는 선이었고 소련은 절대악에 가까웠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쪽은 산전수전을 겪었고 양쪽 체제를 모두 경험해 본 자들이었다. 그 시절 막연한 이상주의에 빠져서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가의 햇병아리들이나 공산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보다 더 나은 세상일거라고 믿었을 뿐이었다.
에임스는 돈을 위해 첩자가 되었고 고르디옙스키는 이념적인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에임스의 희생자들은 KGB의 손에 대부분 목숨을 잃었지만 고르디옙스키가 폭로한 베터니나 트레홀트같은 사람들은 감시 끝에 채포되어 정당한 재판을 받고 복역한 뒤 석방되어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르디옙시키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지만 에임스는 더 큰 차를 원했다. 그는 전혀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잔혹한 전체주의 정권, 단 한번도 직접 가서 살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고르디옙스키는 민주주의 체제를 맛본 뒤 그런 생활 방식과 문화를 보호하고 지지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결국 개인적인 희생을 치르고 서방에 정착했다. 고르디옙스키는 선을 좇았고 에임스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했다. - p.535 |
600여 페이지의 만만찮은 분량임에도 읽는 내내 뒤가 궁금하여 손을 뗄 수 없어 무려 이틀 만에 완독했다. 마침 휴가철에 책을 받아서 다행이랄까. 저자의 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로 만든다면 <더 스파이>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같다. 애플TV에서 방영한 <스파이들의 전쟁> 4화가 이 양반을 다룬 내용이라고 하는데 다큐멘타리인지라. 어차피 나는 애플TV를 구독하지 않으니까 볼 방법도 없지만 말이다.
빌 게이츠가 추천했다고 하는데, 내가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감히 최고라고 꼽는다. 일독을 강력하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