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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면도날 ㅡ 서머싯 몸
그러던 어느 날 , 이런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 샤르트르에 갔다가 파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 그레이가 운전을 하고 래리는 조수석에 , 이사벨과 나는 뒷자석에 앉았다 . 긴 하루를 보낸 터라 모두들 지친 상태였다 . 래리는 조수석 등받이 위쪽으로 팔을 뻗어 걸쳐놓았는데 , 그 자세 때문에 셔츠 소매가 올라가면서 가늘지만 강인한 팔목과 팔뚝이 드러났다 . 팔뚝을 가볍게 뒤덮은 솜털 위로 햇살이 쏟아져 황금빛으로 빛났다 . 순간 나는 이사벨의 몸이 경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나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 그녀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 호흡이 빨라지면서 두 눈은 금빛 솜털로 뒤덮인 강인한 손목에 고정되었다 . 그의 손가락은 길고 섬세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강렬한 욕정을 본 적이 없었다 . 마치 색욕의 가면 같았다 .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토록 방자하고 음탕한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 음탕한 표정 때문에 섬뜩하고 무섭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 마치 교미 중인 암캐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 그녀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했다 .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래리의 손뿐이었다 . 무심하게 등받이를 감싼 그 손이 그녀를 광란의 욕정으로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 잠시 후 , 마치 경련이 인 듯 그녀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두 눈을 감고 구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말했다 .
" 담배 한 대만 주세요 ."
ㅡ본문 313 /314 쪽에서 ㅡ
책을 읽고도 나는 제목이 주려한 느낌이나 뉘앙스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조금 괴로웠던 상태였다 . 멍하니 오전이 지나가는 것을 두 눈만 뜬 채로 흘려보내다가 돌연하게 떠올린 것이 위의 문장이었다 . 순간 날카롭게 뭔가가 왔다갔는데 지금 다시 그 느낌을 잡으려하니 그 짧은 찰나가 신경성 위통처럼 고통스럽다 . 누군가 나를 보고있다면 나 역시나 이사벨이 느낀 꽁꽁 묶인 관능의 고통을 겪는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
래리는 글 속에서 거의 무성애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려진다 . 마치 성욕 같은 건 오로지 이 세상의 것이고 그 자신은 순수한 사랑 ( 박애) (에로스처럼) 그 이상도 이하도 꿈꾸지 않는 일종의 구도자처럼 느껴지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제목은 흐릿하지만 뚜렷하게 생각나는 명화 ㅡ 가 하나 있었다 .
발랄하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작은 활을 든채 화면을 작게 가로지르는 에로스와 그를 향한 나신의 여성(비너스?)이 좀 더 커다란 활을 들어 올리는 몸짓과 함께 둘 사이의 공기를 먼 데서 엿보는 듯하던 그 그림에 , 그 이상적인 모성 발현으로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 내겐 몹시도 애로틱해 보여서 어리둥절 했을 뿐이었던 기억 ㅡ 그러니 어쩌면 이 작품의 배경엔 서머싯 몸이 명화 속 비너스와 에로스의 한 장면을 보며 연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순전한 추측을 놓아본다 .
운전석의 남성이 아닌 조수석의 남성 , 그레이의 육중한 몸과 래리의 날렵하고 강인해보이는 육체 , 이사벨은 매일 밤 그레이와 나란히 눕는 평온한 밤을 가졌지만 진심으로 오래도록 사랑해 온 래리는 끝내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했다 . 어쩌면 그 지점이 래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모성 쯤으로 변환시켜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거라면 , 위의 순간엔 마침내 모성을 걷어내고 한 이성을 순순한 욕구만을 드러내고 본다 . 인간의 욕망이란게 어디 멀리 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겠냐고 하듯이 , 맨 얼굴을 보이는 비너스의 파괴적인 순간 . 그러니 인간과 인간이 가진 욕망은 , 그 틈은 면도날처럼 얇디 얇아서 스윽 베이고도 뒤늦게 맺힌 핏방울에 상처를 느끼고 비릿한 피 맛을 볼 뿐이란 이야기가 아닐까 .
이사벨은 그 날 그 순간이 몹시 고통스러웠을 게다 . 다 가졌는데 바로 눈 앞에 있는데도 결코 가질 수 없는 한 인간을 보며 , 들끓는 애욕으로 번다한 밤이 앞으로 내내 찾아오지 않을까 . 그레이의 얼굴을 몸을 끌어 안으면서도 그 뒤론 래리의 몸짓을 느끼고 싶어 갈망하는 밤 .
욕망을 숨기는 우리의 가면은 실상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일(?) 들에 무너진다 . 아, 아 , 그러니 저도 담배 한 대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