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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즘 내가 읽는 책들이 주로 문학에 편중되어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왜 문학을 읽느냐 라고 물었을 때 내가 문학은 말이야 어쩌고저쩌고 라고 그 사람에게 백날 설명해도 그는 수긍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000 작가책은 왜 읽느냐 라든가, 00 장르는 왜 읽느냐 라는 질문이 아닌 '문학' 자체를 언급한 사람이라면 분명 그는 책은 읽되 '문학'은 안 읽거나 '문학'이란 것이 효용 가치가 없다고 보는 부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게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 근황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의 대처법을 갖기로 했다. 그 사람에게 책을 추천할 것, 그 사람의 상황을 대변하거나 일깨울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것. 아니면 지금 그에게 필요로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것. 물론 문학으로서.  이렇게 말하면 내가 대단한 독서가인양 오인될 수 있는데, 일단 나는 평균적인 독서량을 하는 사람이고(그것도 얼마 안 되었으며),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지인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아무튼 <이런 사랑>은 여러 사람에게 두루두루 추천이 가능한 책이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풍부한 책이고 그만큼 '보편성'을 획득한 책이라는 거다. 흔히 말하는 명작이나 고전의 첫째 덕목은 '보편성'이라 본다. '인간' '삶' 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책들은 시대나 세대 혹은 국경이나 인종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철학 서적들은 몇 천 년이 지나건 몇 만 년이 지나건 보편적인 서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서 철학 서적들이란 반드시 학술적인 의미의 서적만을 칭하지 않는다. 소설에도 수두룩 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말이다. 철학의 시작은 삶의 문제에서 비롯된 거니까.  아무리 초초초관념적인 문제를 철학이 고민하고 있다고 해도 그 근원은 언제나 실체적인 삶에서 비롯된 거다. (암튼 번역 소설 중에 괜찮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죄다 한 철학 한다. 프랑스 소설이 그 중에 최고봉을 기록하는데, 상대적으로 프랑스나 독일 외 다른 외국 서적을 접하지 못한 내 탓도 크다. 어쨌건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 쉿쉿쉿)
 

2. 

 
  자아, 여기 날아가는 풍선 기구 안에 남자 아이가 타고 있다. 그대로 두면 아이가 추락해서 죽을 지도 모를 상황이다. 일찍이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4가지의 실마리로 찾았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이 발동한다고 본다. 우리의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은 풍선을 잡고자 기구에 매달린 로프를 붙잡았다. 그러나 풍선은 로프를 잡고 있는 이들을 모두 공중에 띄워버렸고 이에 주인공은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로프에 매달리는 건 나의 의무고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그러나 측은지심은 거기까지. 상황이 더욱 급박해지자 누군가 손을 놓았고, 결국 그들은 풍선을 놓치고 말았다. 문제는 끝까지 로프를 놓지 않았던 한 남자가 있었다는 것과 그가 결국 죽었다는 거다. 

 
   최근에(엥간하면 나는 특정 시기를 최근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찾아보면 죄다 최근에 본 거다!) 본 소설 중에 도입부 끝내주네 라고 생각이 든 게  <무중력 중후군>이나 <일요일 스키야끼 식당>이다. <이런 사랑>의 도입부도 만만치 않은 강도로 나를 사로 잡았다. 상황 좋고, 묘사 좋고, 주인공의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 좋고. 이언 매큐언 이라는 작가에 대한 사전적인 정보 (무슨 상 받았다는 둥, 대단한 작가라는 둥)가 없어도 충분히 '헉' 숨을 멈추게 할 작가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런 느낌은 중반에서 한 번 더 강렬하게 때렸다. (커튼 이야기 나올 때 말이다) 게다가 2장이 시작될 때 화자는 스스로 이야기 전개를 늦춰보자고 말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런 사랑>이 만만치 않은 강도로 독자를 내몰겠구나를 느꼈다. 별 거 아닌 장치(?)지만 '나'라는 인물이 그 사건에서 비롯될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암시해 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처법이 나 같이 듬성듬성 생각하며 사람에게는 진짜 골 때리는 일이긴 하지만, 읽는 재미로는 끝내준다고 본다. 기대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 만한 기대감을 들게 했을 경우지만.


3.

 암튼, 나는 반대로 간략하게 정리를 해야 할 입장이니 속도 좀 내려한다. 작중 화자인 '나'는 자신이 먼저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며 당시의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자기 위안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었고,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누군가의 죽임이 주는 충격으로부터 부인인 클라리사와 함께 잘 견뎌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래가 주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결국 예정대로 파국은 시작된다. <이런 사랑>이 단순히 이런 나의 고민만으로 끝났다면, 흔해 빠진 실존 소설류로 분류될 수 있었겠으나 그 문제를 둘러싸고 저마다의 가치와 문제를 든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거다.

 

 "당신이 옳다는 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p. 302  풍선 기구의 로프에 줄줄이 매달렸던 사람들의 이미지가 알레고리로 연결이 된다는 거다 즉, 그 이미지가 하나의 은유가 되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는 거다.  풍선 기구 사건이 하나의 '사실'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실에 반응할 수 있는지 조와 패리, 클라리사, 로건의 부인, 형사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4.

  "하지만 그 외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당신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그 일이 어떻게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는지, 그 일 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봤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야"  p. 304  

 
자아, 작중 조인 나는 300쪽이 넘게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고민했고 독자인 나도 그의 경험과 판단을 믿고 따라갔다. 결국 조가 확신했던 문제도 보기 좋게 들어 맞았다. 그러나 부인인 클라리사는 똥줄 타게 읽으며 달려왔던 나에게 되려 저렇게 말한다는 거다. 다시 말해 300쪽이 넘는 이 책을 다 읽고나도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무슨 핫바지냔 말이다. 표면적으로 예정된 특정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을 해결한 듯 하지만,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던 거다. 로프에 매달렸던 그 상황처럼. 가장 철학적인 답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답은 없다. 철학은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의문을 품는 학문이고 이에 칸트 아저씨는 일찍이 뽕빨나게 정리했다. 우리는 철학 그 자체를 배울 수 없는 것고, 다만 '철학하기'를 배울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답이 없다고 해서 '핫바지'나 진짜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끝으로 <이런 사랑>은 다양한 제목을 연상시킨다.  더 정확히 저런 사랑, 요런 사랑, 그런 사랑 등등의 관형사 붙은 제목들이 떠오른다는 말인데, <Enduring love> 원제를 보면 차라리 우리말 제목이 낫지 않나 싶다. 인내하는 사랑 내지 참는 사랑으로 달았다면 앞서 내가 말한 게 좀 헛소리 같이 다가온다. 그러니까 인내한다는 건 어떤 상황을 극복 내지 견디자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안 읽었지 않은가. <사랑을 견뎌내기>라는 영화 제목으로도 나와있던데 아렇게 안 본 거다. 견디긴 뭘 견뎌?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인내나 극복 후에 얻는 게 있다면 삶에 대한 통찰이라는 건데, (그래 그것 때문에 이게 철학적인 책이라 본 거다.) 나는 견뎌내기 라는 의미에 결론까지 함축해서 생각한 것 같다. 즉, 견디다가 해결된다로 직결되는. 그런데 기실 내 식으로 안 보면 계속 견뎌내는 상황이라는 건 맞는 말 아닌가. 뭐야 마무리가 안 이뤄질 것 같네. 오늘은 새벽부터 설쳐대느라 넘 피곤하네 그려. 이따가 다시 생각해 보련다. 우선 이런 독자도 있다는 것으로 마무리!

 

  * 흠, 새복에 다시 왔네그려.

간단한 거 아니었을까?  견디다 라는 말을 완결된 형태(완료 형태)로만 고집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구. 다시 말해 견디다 라는 의미를 결론까지 염두한, 고진감래 라든가 비온 뒤에 더 단단해진다 라든가 하는 식으로 긍정적인 의미라고 생각했던 거 아냐? <이런 사랑>의 견디기는 앞으로도 쭉 견디다 로 이해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이러면 넘 비관적인 거 아니냐구? 누가 글더라 인간은 고통에서도 행복을 느낀다고. 일종의 채념 내지 적응이 됐다는 말인데. 암튼 이런 독자가 읽은 <이런 사랑>의 핵심은 주인공이 뭔가를 이겨낸 듯 극복한 듯 해결한 듯 열심히 뭔가를 했지만 결국 변한 건 없다는 거야. 다시 기구로 돌아왔다는 거. 즉, 여전히 우리는  "하지만 그 외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당신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그 일이 어떻게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는지, 그 일 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봤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야"  를 고민한다는 거야. 사는 게 뭐 이래 해도 어쩔 수 없어. 우리는 끊임없이 돌을 지고 올라가야 하는 운명인가봐. 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이제 그의 다른 책을 보면 될 것 같아.  이언매큐언의 다른 책 좀 보자구. 과연 이런 식으로 골 때려주는 작가인지 확인해 보자구. 어쨌든 <이런 사랑> 원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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