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금요일 기사에 문요한씨의< 나! 리모델링>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살기로 합의한 결혼 7년차 주부의 상담 내용이 실려있었다.
의사는 선을 그으놓고 살지 말라고 조언을 했다.
그 기사를 읽으니 19년 전 첫 아이를 낳을 때가 생각이 났다.
분만실에서 아기를 처음 받아 안아 온몸으로 그 따뜻한 체온을 느낄 때,
'내가 한 우주를 낳았구나'하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세상에 없던 한 생명을 내 몸을 빌어 낳은 것에 대해, 태어나 내가 가장 장한 일을 한 것 같은 기쁨과 이 생명을 지키고 온전히 키워내는 것이 나와 남편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비장한 슬픔까지도 느껴졌다.
한 생명을 만들고 키워내는 일, 그것은 부부가 함께 하지만
생명을 잉태해서 세상 밖으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어릴 때 막연히, 결혼해서도 명절이나 시댁 대소사에 시종 노릇을 하기 위해 내가 결혼을 했나 싶은 회의가 들어서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나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기의 출산으로 그 생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렇게 황홀한 체험이 아이를 키우면서도 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예쁘던 아이는 커 가면서 요구가 늘고 자기 고집이 생기면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엄마>라는 이름을 갖게 해준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첫 삼천 배 그 힘든 고비를 넘길 때도, 두 아이의 엄마가 이 정도 고통도 참고 넘기지 못해서야 어떻게 아이들에게 인생의 힘든 고비에서 힘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싶어 <엄마>라는 이름으로 해 낼수 있었다.
이번 아비라 기도에도 내가 굳이 저녁까지 하겠다면 반대할 사람도 없고 내 의사를 존중해 주지만, 고3인 아들이 늘 저녁을 학교에서 먹고 오다가 단기방학때 집에서 저녁을 먹는 데, 된장이라도 보글보글 끓여서 먹이는 것이 기도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저녁 기도를 접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엔 경험해보지 않은 기쁨이 너무도 많은 데, 내겐 세상 최고의 경험이었던 출산의 기쁨을 아예 처음부터 차단하기로 마음 먹은 부부가 안타까웠다.
그 부부의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각자의 업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선택하니, 다만 자기의 선택에 대해 행복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기가 어렸을 땐, 한 번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해서, 얼른 아이가 커서 밤에 한 번도 안깨고 잘 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얼른 아이가 크기를 바라던 것은 힘들 때마다 나를 지탱해 주던 소망이었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그렇게 바라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느새 엄마보다 더 자라 시간이 마치 전력질주로 달려가 버린 느낌을 준다.
지금은 이 순간, 아이들이 내 옆에 있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얼른 다른 시간이 오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어느 새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고 우리 부부만 남게 되는 시간이 왔을 때, 그때 좀 더 잘 할 걸 하는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루 하루가 내 선택의 몫임을 알 뿐이다.
아기를 낳지 않기로 했든, 낳기로 했든, 혹은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해서 없든
오늘 하루는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다.
현재의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보고 사랑하는 것.
그 마음을 주고 싶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