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완벽한 스파이 1~2 - 전2권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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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카레의 책에는 이유가 있다. 스파이보다 더 스파이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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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완벽한 스파이 1~2 - 전2권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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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둘인 남자는 영혼을 잃고,

집이 둘인 남자는 머리를 잃는다."

_속담

-세찬 바람이 부는 10월 어느 날의 깊은 새벽, 주민들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데번주 남부의 바닷가 마을에서 매그너스 핌은 낡은 시골 택시를 내렸다.

-"세상에, 컨터베리 씨 아니우?" 뒤에서 문이 열리며 어느 노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못 살아. 또 야간 침대차를 타고 왔구먼. 미리 전화라도 좀 하지."

-"안녕하세요, 미스 더버." 핌이 말했다. "잘 지내셨어요?"

-"켄터베리. 제 이름은 켄터베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핌은 책상으로 다가가 상판을 꺼낸 뒤, 모조 가죽 상고나 위에 주머니의 물건들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의 신분을 바꾸기 위해 수중의 물건들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었다. 매그너스 리처피 핌의 이름으로 된 여권 하나. 눈은 초록색, 머리는 연갈색, 여왕 페하의 외무부 소속, 생년월일은 아주 오래전. 상징과 암호명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전혀 위장되지 않은 채 여권에 보란 듯이 그대로 인쇄된 자기 이름은 언제나 좀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평생 동안 그가 완전히 이기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지 싶었다. 지금 앉아 있는 이 방을 고상한 예외로 친다면, 그가 <해야 한다>라는 말 대신 <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끔은 말이다, 톰,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어. 가끔은 우리의 행동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 되는 거지.

-"알았니, 매그너스? 정보가 없으면 우린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정보가 있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어. 우린 거북이와 같아. 집을 항상 등에 지고 다니지.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면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조각가, 음악가, 화가에게 허가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 머리만 있으면 되지. 우리는 반드시 머릿속에 세상을 집어넣고 다녀야 돼. 안전한 길은 그것뿐이야. 이제 나한테 멋진 노래를 한 곡 연주해 줄래?"

-내 귀여운 매그너스,

항상 착하게 살아야 한다. 음악을 연주하고, 아버지한테 남자답고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해.

사랑한다.

립시.

 

스파이보다 더 스파이 같은 소설, <완벽한 스파이>.

그 이유가 있다. <완벽한 스파이>의 작가 '존 르카레'는 실제로 스파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요원으로 생활하며 겪은 자전적 요소가 담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스파이 요원이 인생 이야기이다.

나는 존 르카레 작가를 <완벽한 스파이> 책으로 알게 되었는데,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스파이의 유산>, 스마일리의 사람들> 등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도 꽤 많아서 하나씩 읽어봐야겠다는 행복감도 느낀다. 워낙 스파이 문학의 대가이고 수많은 추천사와 수상경력은 말할 것도 없다.

책의 표지와 소개를 읽어봐도 금방 눈치챘겠지만, <완벽한 스파이>의 주인공 '매그너스 핌'은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자취를 감춘다.

'매그너스 핌'을 주축으로 그가 사라진 사실과 어린시절,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 주변 인물들의 상황, 그리고 그런 '매그너스 핌'을 조국을 배신했다는 확신으로 주인공을 찾으러 다니는 영국 정보국 요원의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던 주인공 '매그너스 핌'.

언제나처럼 연회를 열고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를 하고 사랑하는 아내 '메리'와 함께 일상의 나날을 보낸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부고와 함께 그는 사라진다. 스파이답게 표를 사고 찢어 버리고 행적을 여기저기 감추며 동선에 혼란을 주는 치밀함까지 한번 스파이는 영원한 스파이인 것 같았다.

켄터베리라는 이름으로 사라진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어쩌면 아예 사라지는 삶일 수도.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부터 시작한 궁금증이, 어쩌다 죽었는지, 돈은 어디로 갔고 서류는 어디로 갔고 그래서 주인공을 쫒는 요원들은 주인공을 잡아아채내는건지 궁금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의 아내 '메리'도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아마 눈치챘을 것이고, 이름만큼이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브러더후드'라는 인물이 주인공을 쫒으며 수색하는 장면들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스파이 관련 소설과 영화를 읽을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심리전, 그리고 과연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계속 보고싶게 만든다.

주인공 '매그너스 핌'의 어린시절을 보며 (어린 스파이라고 해야할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그리고 평밤치못한 생활 등이 눈에 그려지면서 위로해주고 싶어졌다. 그런 그가 '영혼이 박탈당한 채' 스파이로 살아왔다니 어른이 된 핌도 위로해주고 싶어지고.

스파이라는 것 자체가 드러내지 않고 사라져야하는 연기같은 존재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삶은 핌을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이 매개체였지만 '핌' 내면에 담겨있는 인간답게 살 욕구와 가장 행복하지만 어려운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이 쌓이고 쌓여 우리에게 <완벽한 스파이>의 삶을 들려준다.

갑자기 사라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아니, <완벽한 스파이>에 나오는 짤막한 이야기 하나에도 이유와 단서가 있다.

종적을 감춘 '매그너스 핌'의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심리 게임처럼 찾아내게 되는 <완벽한 스파이>를 읽으며.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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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특별판 리커버 에디션, 양장) - 복잡한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심리법칙 75
장원청 지음, 김혜림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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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 사람은 본래 이성적이지 않고,

수많은 감정 요인이 사람의 인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보는 세상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심리가 투영된 것이다."

생각을 멈출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_브루잉 효과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이 극적인 과정을 두고 훗날 심리학자들은 '브루잉 효과'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창조적인 사고가 필요할 때, 아무리 많은 힘을 쏟아도 정확한 생각의 갈피를 찾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오히려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색하던 것을 멈출 때 결정적인 영감이 떠오를 수 있는데, 이를 브루잉 효과라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브루잉' 과정은 사고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전반적인 사고 과정을 잠재의식 영역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잠재의식을 통해 기억 속에 저장해 둔 관련 정보를 조합하고 '영감' 같은 사고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태를 만드는 것은 중간 휴식이다. 책상 앞에서 머리를 쥐어 짤 때보다 잠시 산책을 하다가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어려운 문제를 내려놓으면 우리의 뇌는 이전에 느낀 심리적 긴장감을 없애고 부정확한 부분을 잊어 버리며 사고가 일시 정지된다. 잠재의식 면에서 독창적인 사고 과정을 형성하는 데 유리해진다.

성공할 수 없는 사람들의 심리_요나 콤플렉스

-요나 콤플렉스는 일종의 '성공했을 때의 두려움' 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며 성장을 회피하는 심리현상이다.

-요나 콤플렉스는 우리의 내면에 있는 스트레스를 균형 있게 표현한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성공의 기회가 있다. 그러나 그 기회 앞에서,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스트레스를 대담하게 돌파하고 자신의 요나 콤플렉스를 인식하여 벗어던지며 결국 기회를 잡아 성공을 얻는다.

선택 전에는 망설이지 말고, 선택 후에는 후회하지 마라_뷔리당의 당나귀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이해득실을 계속해서 저울질하며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는 현상을 '뷔리당의 당나귀 효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만약 인생을 둘로 나눌 수 있다면 전반부 인생은 '망설이지 말고' 후반부 인생은 '후회하지 말아라'.

불행은 '별난 행복'일 수도 있다_슈와르츠의 논단

-"모든 나쁜 일은 우리가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만 진짜 나쁜 일이 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슈와르츠의 논단'으로 미국의 경영 심리학자인 슈와르츠가 제시한 개념이다.

-슈와르츠가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 싶은 바는 행복은 흔히 그렇듯이 항상 '불행한 외투'를 걸치고 우리의 삶에 걸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불행 속에서 행복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슈와르츠의 논단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삶의 모든 행운과 불행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큰 불행이라도 우리가 평정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또한 그것을 인생에 필요한 경험으로 생각해 그 안에 담긴 행복의 요소를 찾아낸다면 그것 또한 우리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생각보다 사람의 뇌는 그리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공정하다고 생각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리학적 요인이 작용해서 나의 선택을 이끈다는 것. 많

지 않지만 적지도 않은 심리학, 뇌과학, 인문학 책을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들이다.

그리고 뇌는 꽤나 게으르다. 생각해온 것, 그 앞전에 일어난 것, 그리고 그동안 겪은 것들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니까.

행동심리학이나 넛지, FBI 바디랭기지 같은 숨겨진 행동작용에 대한 것들을 좋아하는데 이번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를 읽으면서 제목처럼 재밌고 행복해졌다.

모르고 당하면 깜박 속고, 알면서도 당하고, 알고 겪고 통달하면서 피해갈 수 있는 다양한 심리학 기법들이 일상 속에 숨어 있다.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는 우리들의 '행복'에 방점이 찍혀있다.

기존의 심리학 책들이 이론과 실험과 어원에 근거해 우리의 행동원리를 밝혀냈다면,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는 그런 원리들이 어떻게 숨어있고 앞으로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을지 고민과 조언들도 가득 담아 해준다.

고민상담이나 카운셀링을 해주며 힐링받는 기분이 드는 책이다.

남녀노소 독자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이해하기도 쉽다. 흔히 알고 있는 '미러링 효과', '머피의 법칙', '학습된 무기력', '플라시보 효과', '고정관념' 등에 대한 심리학도 있고, 그동안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앵커링 효과', '브루잉 효과', '걷어차인 고양이 효과', '요나 콤플렉스' 등도 숨겨져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면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속 원하는 목차만 펴서 읽어도 좋다.

다른 사람의 농간이나 심리전에서 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고 내 마음과 선택이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심리학이 필요하다. 특히 일상과 밀접하고 세상 이야기가 가득한 심리학 책이.

무려 75개의 심리법칙을 담고 있지만 한 챕터당 분량도 길지 않아서 시간될 때마다 금방 읽을 수도 있으니 나를 알고 너를 알기 위해 좋은 책.

심리학을 알던 모르던, 알게 모르게 우리가 써먹고 겪어온 심리법칙들이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에 담겨 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심리학을 만나서 삶이 더 윤택하고 현명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심리학의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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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에프 클래식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율희 옮김 / F(에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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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여성과 소설에 대한 강연을 부탁했는데 대체 자기만의 방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요, 라고. 이제 설명해보도록 하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소한 한 가지 주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뿐이었으니, 그 주장이란 바로 여성이 소설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까닭에 여성의 진정한 본질과 소설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미해결로 남게 됩니다.

-이 모든 여성들이 몇 년 동안 일한 뒤에도 이천 파운드를 모으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삼만 파운드를 모으기 위해 그 이상의 노력을 쏟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 여성이 겪는, 비난받아 마땅한 가난에 냉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쓸데없는 일이에요. 당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뿐만 아니라 시터 부인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막대한 부를 축적해 대학과 도서관의 토대를 다지는 데 썼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질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첫째, 그들이 돈을 버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고, 둘째, 가능했더라도 법률상 그들이 번 돈을 소유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턴 부인이 동저 한 닢이라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사십팔 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이전 수백 년 동안 돈은 남편의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고전 중의 고전, 그리고 에세이와 소설과 페미니즘을 넘나드는 울프만의 힘이 실린 글인 것 같다.

결코 쉽지 않은 주제로 의식의 흐름으로 따라가다 보면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었다. 2018년, <자기만의 방>을 처음 읽은 충격을 잊지 못하는데 2021년 f(에프)로 다시 읽은 <자기만의 방>은 울프가 주장하는 그 글이 몇 십년, 어쩌면 몇 백년이 지나도 영원히 유효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1928년, 뉴넘 대학과 거턴 대학에서 발표한 두 강연문으로 시작한 <자기만의 방>은 제목이 주는 무게만큼이나 강하고 또 강한 주장이 실려있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그 주장도 아주 명료하고 적확하고 빠르게, 바로 첫장부터 우리에게 들려준다.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이치인 것 같지만 사실 21세기에 들어도 전혀 무색하지 않을 법한 주장과 논리들이 아주 꽉 차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젠더 문제, 그리고 불쾌함을 넘어서 매일 살아남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할 정도로 최소한의 기본도 보장되지 않는 죽음의 문제까지.

사실 그전까진 막연하게 불편하게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버지니아 울프를 알게 되면서, <자기만의 방>을 읽으면서, 그리고 세상을 공부하면서 더 불편하고 깨름직하고 화내고 맞서 싸우고 싶게 만들어준다.

아주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돈'과 '자기만의 방', 하지만 이 둘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는 뒷전으로 두고서라도 이 둘을 가질 수 있느냐의 존재여부 조차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또 화가난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똑똑한 글처럼, 화를 화로 끝내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겪고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바꿀 수 있게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여성이 가난하고 비주류이고 성공의 사다리에 뒷전이었던 이유를 버지니아 울프의 시선으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우리에게 '돈'과 '자기만의 방' 필요하다고 말해주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돈'과 '자기만의 방',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책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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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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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 파리의 아침은 얼마나 맑고 싱그러웠는지. 당신은 인생의 첫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당신이 거머쥔 영광은, 이후로도 줄곧 당신 곁에 머물렀지요.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50년 뒤에 우리가 이곳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작별을 고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겠지요. 곧 당신의 뼛가루는 마라케시 정원에 마련된 묘지에 안장될 테니까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

-이제 곧 서로 헤어져야 하는데, 나로서는 그 방법을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우리는 서로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죠). 비록 더는 아그달 정원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함께 바라볼 수 없을지라도, 한 폭의 그림, 한 점의 조형물 앞엣허 함께 감상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해도 말입니다.

-당신에게 빚진 것들을 내가 결코 잊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언젠가 모로코의 종려나무 밑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리라는 것도 말입니다. 당신을 보내며, 이브, 당신을 향한 찬탄과 깊은 존경과 나의 사랑을 전합니다.

-세기의 경매건 뭐건,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모든 작품들이 이제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될테니까. 내 나이쯤 되면 이제 가벼워질 줄 알아야겠지. 너는 천재였고, 나는 너와 함께하는 방법을 알았어.

-50년 동안 나는 경계하고 주의를 기울이면서 네 곁에 있었어. 만약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의 삶과 작품도 지금 같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재능, 누구에게서도 부여받지 않은, 오직 너만의 재능이야.

-컬렉션을 준비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넌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 쇼에 참석한 이들이 동시에 일어나 갈채를 보낼 때 느꼈던 행복만 기억했으면 해. 애석하게도 그때의 그쁨, 그 한순간의 기쁨은 빠르게 사그라지고 이내 슬픔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

-어느 날, 신을 만난 것처럼, 낯선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바로 그때 너를 만났고 말이야. 나는 늘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너는 내 말을 들었고, 모든 방면에서 나를 맹목적으로 신뢰했어. 또한 내 시각을 더 날카롭게 벼리고, 내 취향을 예리하게 다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해줬지. 오브제들, 특히 그림들 사이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으니까. ;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 잊어버려야 해. 그게 내가 끝없이 행한 일이었어.

-근본적으로, 이 편지에는 단 한 가지 목표가 있었지. 우리의 삶을 결산하는 것. 네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 요컨대 네게도 수없이 이야기했던 나의 추억에 불을 밝히는 것. 너와 함께해서, 그리고 네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보여주는 것. 그리고 바라건대, 이 글이 너의 재능, 너의 취향, 너의 명민함, 너의 단정함, 너의 부드러움, 너의 힘, 너의 용기, 너의 순수함, 너의 아름다움, 너의 시선, 너의 청렴함, 너의 정직성, 너의 고집과 욕구를 보여주기를. 너를 걸을 수 없게 했던 그 '거인의 날개'를.

-이것이 마지막 편지이지만 결별의 편지는 아니야. 어느 날 다시 너에게 글을 쓰게 될지 누가 알겠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아. 50년 동안 너는 나를 매혹적인 모험으로 데려갔지. 가장 광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뒤섞이고, 현실으 거의 자리하지 않는 꿈속으로. 오늘, 나는 꿈에서 깨어났어. 생의 한 장이 끝났음을 너의 죽음이 알려준거야. 살아 있는 동안, 너는 마법으로 나를 사로잡았지.

-나는 나의 모든 추억과 함께 홀로 남았지. 어둠이 내리고, 먼 곳에서 음악이 들려와. 그러나 나는 그곳에 갈 힘이 없네.

 

 

이브 생 로랑.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에 기존의 스타일을 탈피한 여성복 컬렉션, 그리고 날카로운 얼굴에 어울리는 뿔테와 수트까지.

이브 생 로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함께 그의 영화, 인터뷰, 다큐멘터리 등이 생각난다.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책은 그와 50년을 함께하 연인, '피에르 베르제'가 쓴 아름다운 편지다.

이브 생 로랑이 직접 쓴 글이 아니라고 아쉽거나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브 생 로랑의 파트너이자 재단의 대표, 책의 저자이자 회화에도 능한 '피에르 베르제'의 편지를 읽다보면 시보다 더 시같고, 편지보다 더 편지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그와 그의 연인의 이야기가 애틋하고 아름다우니까.

한 손에 들어오는 책의 사이즈와 함께 마치 옷을 만지는 듯한 표지의 재질, 그리고 "YSL"을 필기하고 있는 이브 생 로랑의 멋진 사진까지.

완벽한 그의 성격만큼이나 완벽하고 예쁜 표지를 책 읽기 전부터 한참 바라봤다.

표지도 예뻐서 그런지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에, 품절 대란도 겪어서 그 인기를 실감했다.

그리고 '피에르 베르제'의 문학적인 편지를 그대로 느끼게 해준 번역도 정말 좋았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

5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긴 세월동안 함께 겪고 이겨내고 아파하고 사랑한 일들이 많았다.

처음 회사를 설립하고 컬렉션을 열고 소장품을 모으고 각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운명처럼 이 둘은 함께한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순간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피에르 베르제는 차마 보내지 못한 편지들을 이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에 담았다.

사실 이 책은 이브 생 로랑 장례식장에서 낭독한 추도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은 이브 생 로랑 1주기에 낭독한 추도문으로 끝이 나고.

절제된 감정에 덤덤한 문체,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체념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그의 편지에는 이별보다 더 깊은 사랑이 묻어난다.

아침, 저녁으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를 들고 다니며 시를 읽듯이 아끼듯 한 줄씩 읽어나갔는데 어느 새 하루가 다 지났다.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 슬픈 글이 아닌데 마음이 먹먹하고 한동안 쉬었다가 읽기를 반복했다.

이브 생 로랑을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도 이 둘의 만남과 이별과 죽음은 커다란 감정으로 다가왔다.

이젠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이름, 이브 생 로랑. 그리고 이 한 권의 책으로 피에르 베르제도 더 많이 알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만나면서 인생의 우여곡절이 많았겠지만 서로를 채우고 완성시켜주는 둘의 존재만으로도 많은 영감을 주고 이 편지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P.S. 너의 1주기에 생로슈에서 낭독한 글이야.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이곳에 남겨."

이 글은 이브 생 로랑 1주기에 낭독한 추도문으로 곧 끝이 나지만 둘의 인생과 만남과 이름은 영원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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